동아시아 주변국의 정권 교체와 한반도 정세

2012-12-11     강태호

역사적으로 새 정부 출범의 시기는 한반도 정세를 위기로 반전시키는 전환점이 됐다. 정권 교체에 따라 정책의 연속성이 단절되면서 기존 합의가 부정됐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역사의 시계는 거꾸로 돌아갔다.

그 대표적인 게 2001년 1월 조지 부시 대통령의 미 공화당 정부 등장과 2008년 2월 이명박 정부의 출범일 것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1993년 김영삼 정부 출범도 마찬가지다. 당시 남한 정부 출범이 불과 한 달도 채 안 된 3월 12일,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했다. 1차 북핵 위기의 발발은 1992년 남북기본합의서와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무력화시켰다. 2001년, 이번엔 부시 행정부 출범이 한-미 공조를 위태롭게 하며 새로운 위기의 출발점이 됐다. 2001년 3월 김대중-부시 정상회담은 2000년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공동커뮤니케, 클린턴 당시 미 대통령의 방북 등 북-미 관계 정상화의 가능성을 결정적으로 후퇴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미사일 등 북미 협상의 합의 이행은 최대 쟁점이었으나 부시는 ABM(탄도탄 요격미사일) 제한 조약의 폐기를 목표로 클린턴 행정부의 정책을 거부(Anything But Clinton)했다. 이는 결국 2차 핵 위기로 치닫는 원인이 됐다. 결국 노무현 정부 출범 직후인 2003년 3월 한반도는 또다시 결정적 위기 국면으로 치달았다. 이 시기 북-미는 북폭론과 전쟁 불사의 핵무장력 강화로 정면 충돌했다.

마찬가지로 이명박(2008)-오바마 정부(2009)의 정권 출범 역시 정권 교체와 한반도 위기의 밀접한 상관관계를 보여줬다. 노무현 정부의 10·4 정상선언 합의는 이 정부가 출범한 3월부터 흔들리기 시작했으며, 2009년 오바마 행정부의 출범 직후 북한의 미사일 발사와 2차 핵실험 등 또 다른 위기로 반전됐다.

김일성·김정일의 죽음과 반전

한국과 미국의 정권 교체 못지않게 한반도 정세에 극적인 변화 내지 반전을 가져온 것은 두 북한 지도자의 죽음이었다. 물론 이는 정권 교체라기보다는 권력 승계 내지 세습으로 볼 수 있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또 다른 형태의 정권 교체라 할 수 있다.

북한의 절대 권력자였던 두 사람의 죽음에는 공통점이 있다. 똑같이 중증 급성 심근경색에 의한 심장마비가 직접적 사인이었다. 과로가 죽음으로 몰아간 것도 비슷하다. 김일성 주석은 당시 서울 불바다 발언 등으로 촉발된 군사적 대치 국면을 넘어 남북 정상회담을 불과 2주일여 앞두고 있었다. 이를 위해 현지 지도에 나서는 등 강행군을 하고 있었다. 김정일 위원장은 2012년 강성대국 원년을 2주일도 채 안 남기고 있었다. 그 역시 5월과 8월 중국과 러시아를 20일 이상 방문하는 등 두 번의 장거리 열차 여행을 포함한 강행군을 했다.

무엇보다 두 북한 지도자의 죽음은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시점에서 너무나 극적인 방식으로 찾아왔다. 절대 유일의 수령과 그 절대 권력을 이어받은 또 다른 최고 지도자의 죽음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격적인 것이었지만, 그 파장이 북 내부에 국한된 건 아니었다. 대화와 협상의 한반도 정세를 대결과 위기로 반전시키는 결과를 낳았기 때문이다. 1994년 7월 8일 김일성 주석의 죽음은 남북 정상회담을 불과 2주일 앞둔 시점이었다. 사상 첫 남북 정상회담 합의는 김 주석 사망에 대한 조문 문제를 둘러싼 남쪽 내부의 갈등으로 무산됐을 뿐만 아니라 이른바 공안 정국이 조성되면서 남북대화는 부정됐다. 이후 남북대화 부재 상태는 김영삼 정부 내내 지속됐고 1994년 북-미 제네바 합의는 절름발이가 됐다.

2011년 12월 17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급작스러운 죽음 역시 정세 반전의 분수령이 됐다. 이 부분은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앞으로 2013년 이후 전개될 정세와 연관돼 있기 때문이다. 2010년 3월 천안함 사건과 뒤이은 5·24 조처, 그리고 11월 북의 연평도 포격 도발 사건으로 남북의 대결과 충돌은 한마디로 '이보다 더 나쁠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달았다. 반면 2010년 5월부터 2011년 5월까지 1년 새 세 번에 걸쳐 이뤄진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방중은 북-중 관계를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상황으로 바꿔놓았다. 굳건한 한-미 동맹관계와 북-중 협력관계의 극적인 대비 속에서 남북의 갈등과 대결은 서해에서의 군사훈련에 미 항모가 참여하는 문제를 둘러싼 미-중의 갈등과 중첩되면서 2010년 말 한반도를 한국전쟁 이래 가장 심각한 위기로 몰아넣었다.

이를 반전시킨 것은 2011년 1월 19일의 워싱턴 미-중 정상회담이었다. 남과 북의 편에 서서 갈등해왔던 미-중은 이 워싱턴 정상회담을 통해 '동맹의 덫'에서 벗어나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이라는 공동의 이익에 입각해 한반도 문제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오바마-후진타오 두 정상은 남북대화를 통한 6자회담 재개에 대한 상호 이해, 북한의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에 대한 공동의 우려를 바탕으로 대화 국면을 열어가는 데 합의했다. 그 뒤 5월 12일 미-중 전략경제 대화에서 확인된 것이지만, 이는 미국이 중국의 국익을 존중하고 봉쇄하지 않기로 하고, 중국은 미국의 국익에 도전하지 않겠다고 함으로써 가능한 것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2011년 4월 17일 힐러리 클린턴 미국 국무장관은 한국을 방문해 남북대화→북-미 대화→6자회담으로 이어지는 3단계 6자회담 재개 프로세스를 공식화했다.

그 결과가 2011년 7월 인도네시아 발리 아세안지역안보포럼에서의 남북 비핵화 회담으로부터 시작된 북-미 고위급 대화였다. 5·24 조처를 취한 지 1년 2개월 만에 한반도는 다시 6자회담 재개의 대화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류우익 통일부 장관은 '유효한 접근으로 대화 통로를 마련'하겠다고 변화된 자세를 보였다. 그러나 5·24 조처에 발이 묶인 남은 북과의 대화를 풀어나갈 수 없었고 결과적으로 대화는 북미 중심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북-미는 탐색전 성격인 뉴욕의 1차 대화를 거쳐 10월 말 제네바 대화에서 실질적인 협상을 거쳐 3차 대화에서 합의를 내놓는다는 암묵적 합의에 따라 움직였다. 미-중의 합의에 근거해 클린턴 국무장관이 4월에 밝힌 프로세스와 일치한다.

2차 제네바 대화에서 북은 우라늄 농축 중단 문제를 협의할 용의를 보임으로써 돌파구를 열었다. 이를 바탕으로 12월 8~15일 글린 데이비스 대북정책 특별대표가 한·일·중 세 나라를 방문해 의견을 교환한 뒤 12월 15~16일 미국의 로버트 킹 인권특사와 북한의 리근 미국국장이 베이징에서 식량 지원 모니터링 등 인도적 지원 문제를 매듭지었다. 3차 북-미 대화는 택일만 남았고, 12월 19일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은 그날을 12월 22일로 발표할 방침이었다. 6자회담의 재개를 위한 협상이 마무리된 시점인 12월 17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돌연 사망했다. 2011년 12월 30일 국방위원회 성명은 이명박 정부가 장례 기간 중 취한 조처들을 '반민족적 대역죄'로 규정하고 상종하지 않는 것은 물론 끝까지 복수하겠다고 다짐했다. 모든 게 중단되고 다시 모든 게 불확실해졌다.

유보된 2·29 합의와 북한의 선택

2012년 미-중은 물론이고 러시아 그리고 일본을 포함해 직접 당사자인 남한까지 한반도 문제에 관여하는 모든 나라의 정권 교체가 동시에 이뤄진다. 이런 동시적 정권 교체는 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다.

북은 어떤가. 2012년 2월 23~24일 중국 베이징에서의 3차 북-미 고위급 회담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망으로 2개월 연기됐던 걸 재개한 것이다. 이 회담에서 알려진 대로 미국은 북한에 대해 식량(영양식)을 지원하고 북한은 핵실험, 장거리 미사일의 발사 및 우라늄 농축을 포함한 영변에서의 핵 활동을 일시 정지하고 영변의 핵 활동을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감시하에 놓을 것을 약속했다. 이른바 2·29 합의(deal)이다. 그러나 북한은 이에 연연하지 않고 4·12 인공위성(미사일) 발사를 선택했다. 미국의 식량 지원을 배경으로 합의한 장거리 미사일 발사 잠정 중단과 모순되는 것이다. 북에는 지난 1년 김정일 위원장의 부재에 따른 권력 공백의 불안을 안정화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동안 문을 닫아걸고 내부의 문제를 정리한 것으로 본다면 북도 출발점에 서 있는 셈이다. 그런 점에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재선과, 중국의 시진핑 체제에 이어 2013년 남쪽의 새로운 정부 출범은 앞서 오바마-후진타오의 미-중 정상회담이 만들어낸 한반도 정세 변화를 더욱 가속화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전망을 가능케 한다.

시진핑 체제의 출범보다 더 중요한 건 오마바 2기 집권의 성공이다. 2008년 대선 당시 오바마가 내세웠던 대북정책 기조는 '단호한 대응과 직접적인 대화'였다. 그러나 집권 뒤 오바마 행정부의 정책은 이른바 '대화와 압박'의 투트랙으로 변했고 다시 대화는 실종되고 제재만 남았다. 오바마 2기에도 대화와 압박의 투트랙은 유지할지 모르지만, '직접 대화'의 과감함은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이명박 정부 아래서의 남북관계 단절이라는 장애물이 완화될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본격적인 외교가 시작되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6자회담은 물론이고 남북대화는 재개될 것이다. 그러나 대화와 협상의 문이 열린다는 것과 합의가 가능하다는 것은 다르다.

우선 외교를 국내 정치의 연장이라는 근본적 관점에서 본다면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이 지적한 것처럼 "미-중이 먼저 나서서 울타리 밖 주변(한반도)을 고칠 겨를은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미-중 새 지도부의 출범에 즈음한 11월 13일 <한겨레> 특별기고) 오바마는 '재정절벽'에 직면해 있고 대선 과정에서도 경제와 국내 정치에 당장 영향을 주지 않는 대외 문제에는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중국 새 지도부도 빈부와 도농 그리고 지역별 격차, 성장의 둔화, 부패, 당내 정치개혁 등 숱한 난제들을 안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후진타오 시대에도, 오바마 1기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변수라기보다는 상수인 셈이다. 거꾸로 외교에서의 성공이 국내 정치에서 지지 기반을 확대하는 데 기여할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2013년 한반도 정세를 가늠하는 데는 시진핑의 새 중국 지도부가 미-중 관계를 어떻게 다뤄나갈 것인가, 오바마가 2011년 11월 아시아로 외교정책의 중심축 이동(Pivot to Asia)을 선언하면서 전개될 미-중의 협력과 갈등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가운데 북한이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가 가장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물론 12월 19일 남쪽에 어떤 새 정부가 들어설지는 중요하다. 그러나 현재의 흐름으로 본다면 그 결과는 정세 변화의 방향을 바꾸기보다는 정세 변화의 폭과 속도를 좌우하게 될 것이다.

오바마는 2기 행정부가 출범하기도 전에 아시아로 향하는 외교정책의 서막을 버마 방문으로 삼았으며 북한에도 버마의 길을 따르라고 요구하고 있다. 봉쇄에서 적극적 개입으로의 전환을 상징하는 미국의 대버마 정책은 중국의 영향력을 견제하기 위한 것임에 틀림없다. 이를 버마의 선택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민간 정부로의 권력 이양과 개혁·개방에 나선 상황에서 중국에 대한 의존만으로는 대외 협력이 불가능하며 미국과의 관계 개선은 불가피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후견자로서 중국의 위치가 크게 평가절하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중국은 그럴수록 버마와 전략적 동반자 이상의 관계를 유지하려 할 것이다. 버마의 지배권력은 미-중의 상호 견제와 경쟁을 활용한다면 미국의 개입 내지 지나친 정치개혁(민주화) 요구를 차단하고 권력 유지를 위한 생존의 길이 가능하다는 판단을 했을 수 있다.

북한에도 고립을 탈피하기 위한 전략으로서 버마의 선택은 하나의 모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버마와 북한은 다르다. 북한이 버마와 같은 정치개혁 내지 민주화 조처를 수용할 수는 없을 것이다. 반면에 핵 폐기와 미사일 문제를 북-미관계 정상화의 지렛대로 삼을 가능성은 크다. 아웅산 수치가 버마의 카드였다면 북한은 핵과 미사일이 카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버마와 달리 미국이 이를 민주화와 인권 문제 등 북한 내 정치개혁에 대한 요구보다 우선시하는 접근을 취할 것인지가 중요하다. 6자회담 틀에서 진행된 그동안의 협상에서 본다면 그 길은 일단 열려 있다고 볼 수 있다.

 

/ 강태호 서울대 경제학과 졸. <한겨레>에서 통일외교부를 출입하며 한반도 정세와 남북관계 문제 등을 다뤄왔다. 저서로 <천안함을 묻는다>, 편역 및 공역으로 <미국의 세계전략> <코리안 엔드게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