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승학의 시네마 크리티크] 이야기를 넘어서는 존재: 영화<파과>
시간의 응축된 진실. (2025년 4월 30일 개봉)
영화 <파과>는 어딘가 이질적이다. 단지 여성 암살자가 독약과 칼을 들고 강한 남성들을 상대하는 이야기라서가 아니다. 그건 오히려 신체를 향한 정서적 이질감에 가깝다. 그러나 그 이질감은 오래 가지 않는다. 이혜영이라는 배우가 ‘조각’이라는 캐릭터로 등장하는 순간, 모든 이질감은 눈 녹듯 사라지다가 급기야 그녀에게 빠져들고 말기 때문이다. 70에 가까운 나이의 육체적 노쇠함에도 액션은 이 영화의 약점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혜영의 존재감은 시간을 응축한 듯한 표정과 액션으로 화면을 압도하며, 노년의 신체를 의지의 신체로 빛나게 만든다. 이때 <파과>는 단순한 액션을 넘어 ‘늙음’의 또 다른 의미를 발견하게 한다.
<파과>의 이야기는 꽤 심리적이다. 고된 시간을 뚫고 ‘살아남은 자’로서의 젊은 시절의 교차 편집 그리고 자신의 방식으로 감정을 정리하고자 하는 자식뻘 되는 인물과의 치열한 사투 장면을 보면 그럴 수 있겠다 싶다. 그러나 이야기의 심리적 구조나 사건 전개는 이 영화의 핵심이 아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어떻게 존재하는가’이다. 이혜영은 무기처럼 정제된 표정, 굽은 것 같으면서도 팽팽히 긴장된 자세로, 자신의 존재를 서사 너머로 밀어 올린다. 관객은 이혜영의 액션 장면에서 극렬한 완성도를 따지기보다, 그 순간 그녀가 발산하는 고유한 힘과 카리스마에 사로잡힌다.
여기서 이혜영은 상처 입은 신체를 의지로 밀어붙이며 ‘존재의 지속’을 증명한다. 그 과정에서 종류가 다른 힘은 전에 없던 차원의 에너지를 불러온다. 전통적인 액션의 “압도”에서 벗어나 노쇠한 시간의 상흔을 “단호한 존재성”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그것은 살아남기 위한 폭력이 아니라, 끝끝내 존재 가치를 증명하기 위한 의지의 발현이다. 그래서 칼에 베이고, 몸이 찢기는 상처를 입지만, 이 모든 액션은 이야기의 논리 장식을 위해서가 아니라, 조각(이혜영)의 존재를 드러내는 퍼포먼스로 이해된다. 조각의 이혜영은 자신의 신체적 한계를 가리기보다 그 한계 지점에서 내뿜는 무게감으로써 서사에서는 결단코 전할 수 없는 울림을 선사한다.
<파과>는 노년의 신체를 단순한 약화나 죽음의 이미지로 소비하는 대신, 오히려 존엄과 의지를 통해 새로운 종류의 힘을 함축할 수 있는 대상으로 재탄생할 수 있는 것임을 보여준다. 이는 서사를 통해 존재를 증명하는 방식이 아니라, 존재의 충만함이 서사를 넘어서는 순간을 담아낸 것이라고 해석해야 마땅하다.
이로써 <파과>는 조용하지만 강력한 의문을 던진다. 우리는 영화를 통해 무엇을 보려 하는가? 갑자기 이혜영이 답한다. “이야기를 넘어서는 존재”를 보게 될꺼라고. 그렇게 그녀의 신체는 기억과 상처, 그리고 기어이 존재하려는 의지로 채워진다. 파과(破果), 상처 입은 과일. 그러나 과일로서의 품격은 잃지 않은 존재. 그 존재는 유려한 서사보다 훨씬 더 오래 스크린 위에 머문다. 그것이 투우(김성철)의 내면 깊숙히 자리잡은 조각(이혜영)을 향한 모종의 애증 서사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영화 <파과>는 그렇게 '늙음'이란 끝까지 현존을 직시하려는 의지 안에서만 진정으로 존재할 수 있는 '시간의 응축된 진실'임을 보여준다.
이 영화 <파과>는 2025년 4월 30일 개봉한다.
글·지승학
영화평론가. 문학박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홍보이사, 201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 부문으로 등단. 현재 고려대 응용문화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