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성희의 시네마 크리티크] 괴물이 된 검사 – 영화 <야당>과 권력의 괴물성
누가 괴물이 되었는가
영화 <야당>은 마약 브로커, 수사관, 그리고 검사의 얽히고설킨 거래와 배신, 출세와 몰락을 따라가며, 지금 이 사회가 어떤 괴물을 만들어 내고 있는지 액션 장르에 실어 묻고 있다. 특히 유해진이 연기한 ‘구관희 검사’는 이 영화의 핵심 인물이자, 한국 사회에서 ‘괴물’이 어떻게 탄생하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존재다.
우리에게 괴물은 늘 멀리 있다고 여겨져 왔다. ‘괴물’은 규범을 벗어난 존재, 타자화된 위험한 타인, 우리와는 다른 속성의 존재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괴물은 외부의 것이 아니다. 괴물은 제도 안에서 자라며, 우리 속에서 탄생한다. 특히 권력과 시스템, 그리고 출세와 같은 정당화된 욕망 속에서 괴물은 점점 더 평범한 얼굴로 모습을 드러낸다. 이제 괴물은 ‘그들’이 아니라 ‘우리’이며, 종종 ‘나’ 자신일 수도 있다.
영화 <야당>이 흥미로운 이유는, 괴물이 단순한 흉측한 폭력의 상징이 아니라, 시스템이 길러낸 존재, 혹은 시스템 그 자체가 만든 일그러진 산물로 제시된다는 점이다. 구관희 검사는 법을 집행하는 정의의 수호자여야 하지만, 오히려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제도를 이용하고 타인을 조종하는 인물이다. 그는 법을 휘두르면서도 법을 비웃고, 정의를 말하면서도 정의를 유린한다. 영화 <야당>은 이렇게 묻는다.
“이 괴물은 누가 만들었는가?”
이 글은 영화 <야당>의 인물과 서사를 통해, 괴물이라는 존재가 어떻게 권력의 구조 속에서 길러지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푸코의 규율사회 개념, 지젝의 욕망 이론, 그리고 괴물의 내면화를 통해, 우리는 괴물이 어떻게 탄생하고, 또 어떻게 우리 사회의 거울이 되는지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검사, 권력, 괴물 – 규율의 얼굴
<야당>에서 구관희 검사는 단순히 부패한 공직자가 아니다. 그는 ‘법’을 말하지만, 그 법은 이미 권력의 도구로 전락한 상태다. 구관희는 정의 실현보다는 실적과 승진, 곧 출세를 꿈꾼다. 그의 정의감은 강수(강하늘)라는 브로커를 ‘야당’이라는 비공식 수사 도구로 활용하는 순간부터 뒤틀리기 시작한다. 정의는 ‘성과’라는 이름으로 환산되고, 법은 ‘이용’의 대상이 된다. 그 순간 그는 괴물의 얼굴을 갖는다. 하지만 이 괴물은 단지 그 개인의 타락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제도가 길러낸 결과물, 푸코가 말한 ‘규율 권력의 산물’이다.
푸코에 따르면 현대 사회는 억압적인 권력보다는 규율과 감시를 통해 신체와 행동을 조율하고 통제하는 사회다. 학교, 병원, 군대, 감옥, 그리고 검찰 같은 제도는 인간을 ‘정상적’으로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관찰하고 길들인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정상에서 벗어난 존재, 즉 괴물은 필연적으로 만들어진다. 괴물은 단지 타락한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규율적 시스템의 틈에서 배양된 결과다. 구관희는 그 시스템에서 누구보다도 ‘유능한’ 검사였고, 시스템의 규율을 잘 따랐기에 승진 가도를 달릴 수 있었다. 결국 괴물은 체제의 실패가 아니라 성공의 결과인 것이다.
더 나아가 <야당>에서 그 괴물은 외부의 적이 아니다. 구관희는 겉으로는 세련되고 능력 있는 엘리트 검사지만, 그의 말과 행동은 법의 권위를 무기 삼아 타인을 통제하고 조종하려는 욕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는 법의 이름으로 폭력을 정당화하고, 정의의 외피를 입은 채 타인을 협박한다. 다시 말해 그는 ‘규범의 얼굴을 한 괴물’이다. 이 괴물은 폭력적이지만 일상적이고 합리적인 외피를 두른다. 그는 우리 사회의 시스템, 특히 공권력의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괴물이다.
결국 <야당>은 구관희를 통해 법과 권력이 어떻게 괴물의 얼굴을 갖게 되는지를, 그리고 그 괴물이 왜 그렇게 설득력 있고, 익숙하며, 심지어 유능해 보이는지를 보여준다. 그 괴물은 멀리 있는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제도 속에서 길러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괴물은 남이 아닌 우리일 수 있다는 사실이 이 영화가 주는 가장 씁쓸한 통찰이다.
괴물의 탄생 – 시스템과 욕망의 교차점
영화 <야당>이 보여주는 괴물이 더욱 무서운 이유는, 그들이 단순한 시스템의 실패나 예외가 아니라 오히려 규범적 질서의 심연에서 자라난다는 데 있다. 괴물은 규율의 틀 안에서 태어나고, 체제의 욕망과 결합할 때 더욱 강력하게 되살아난다. <야당> 속 구관희는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검사라는 체제의 중심에 서 있지만, 동시에 그 체제의 욕망을 실현하는 도구로 스스로를 내맡긴다. 구관희는 마약 중개인 강수를 ‘야당’이라는 비공식 수단으로 활용해 불법적인 방식으로 실적을 쌓고, 그 성과를 개인적 출세라는 욕망으로 전환시킨다. 괴물은 바로 이 지점, 제도와 욕망이 교차하는 틈에서 태어난다.
지젝은 "괴물은 억압된 욕망의 반영”이라고 말한다. 시스템이 억압하고 통제하는 그 ‘금지된 욕망’은, 아이러니하게도 제도 속에 잠복한 채 더 강력한 힘으로 되돌아온다. 구관희는 표면적으로는 ‘정상적인’ 공무원이지만, 실제로는 체제가 억눌러 온 성공, 지배, 통제의 욕망을 대리 수행하는 존재다. 그는 제도의 균열을 활용해 그 욕망을 실현한다. 강수를 통제하면서 자신은 통제자로 군림하고, 수사의 성과를 조작하면서 ‘영웅 검사의 이미지’를 생산해 낸다. 그 욕망은 단지 개인적 성공에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제도의 ‘이상적 결과물’처럼 보이기 때문에 더욱 위험한 괴물이 된다.
괴물이 무서운 이유는 그것이 더 이상 ‘타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구관희는 우리와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언어를 쓰며, 심지어 ‘정의’를 말한다. 하지만 그 말은 권력을 정당화하는 껍데기에 불과하다. 그 안에는 사회가 금기시해 온 욕망, 즉 지배에 대한 욕망이 고스란히 살아 있다. <야당>에서 이 괴물이 더 이상 괴이한 외형이나 파괴적인 폭력으로 묘사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현대 사회의 괴물성을 날카롭게 조명한다. 그는 법의 얼굴을 한 채, 바로 우리 곁에서 살아간다.
괴물의 재생산 – 시스템 속에서 길러진 괴물
괴물은 우연히 태어나지 않는다. 사회는 정상을 만들기 위해 ‘비정상’을 구성하고, 그것을 규제하고 통제하는 과정에서 괴물을 끊임없이 만들어 낸다. 괴물은 사회의 이면이자, 그 이면을 숨기기 위한 장치이기도 하다. <야당>은 바로 이 지점을 날카롭게 포착한다. 구관희 검사는 ‘괴물’이 된 것이 아니라, 이미 괴물이 되도록 구조화된 길을 충실히 따라갔다. 마약 브로커 강수를 통제하며 실적을 쌓고, 이를 통해 검사장이라는 자리를 향해 나아가는 그의 경로는 개인적 일탈이라기보다는 제도화된 성공 전략이다.
이 괴물은 단순히 비리와 부패의 문제가 아니다. 괴물은 체제가 요구하는 욕망을 정확히 수행하며 재생산된다. 대통령 후보자인 아버지와 마약사범인 아들의 권력을 활용해 상승하는 구관희의 모습은, 부패한 권력의 맥락에서 보자면 오히려 모범적인 플레이어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는 불법을 저지르면서도 법의 얼굴을 쓰고 있으며, 권력을 탐하면서도 정당성을 부여받는다. 그가 괴물인 이유는, 그가 우리와 전혀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구조 안에서 너무도 ‘정상적’이기 때문이다.
<야당>은 괴물이 어떻게 반복되고 재생산되는지를 보여준다. 괴물은 ‘시스템의 실패’로서가 아니라, 시스템의 ‘성과’로서 존재한다. 구관희는 단독 범죄자가 아니다. 그는 검사 조직과 권력 집단의 이해관계 속에서 태어난 존재이며, 그 괴물성은 한 개인의 타락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이 괴물은 체제의 가장 효율적인 산물이며, ‘정상’으로 포장된 괴물일수록 더욱 강력하고 위험하다. <야당>은 이러한 괴물의 탄생과 재생산의 메커니즘을 가감 없이 드러내며, 우리 사회의 권력 구조를 정면으로 비판한다.
나가며 – 괴물과 함께 살아남기
괴물은 언제나 ‘타자’의 얼굴로 등장해 우리를 위협하는 존재로 여겨졌지만, 영화 <야당>은 괴물이 결코 우리 밖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날카롭게 드러낸다. 검사 구관희는 괴물처럼 행동하지만, 그는 법을 대표하는 존재이며, 동시에 제도와 시스템이 길러낸 결과물이다. 그가 악한 이유는 ‘괴물 같은’ 짓을 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정상적인’ 출세를 위해 너무도 열심히 움직였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불편해진다. 괴물을 ‘타자’로 밀어내던 기존의 틀 안에서는 더 이상 이 상황을 해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괴물은 더 이상 단순한 공포의 대상이나, 제거되어야 할 타락한 존재가 아니다. 괴물은 우리 사회의 감춰진 욕망이 투사된 결과물이며, 따라서 그를 외면하거나 추방하는 것으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괴물과 마주 보는 일, 나아가 괴물을 길러낸 구조를 성찰하는 일은 불편하고 고통스럽지만, 그 자체가 윤리적 실천의 출발점이다. 괴물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괴물의 존재를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괴물이 만들어지는 방식을 끊임없이 묻고, 그 조건을 바꾸기 위해 고민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야당>은 괴물이 더 이상 먼 어둠 속 존재가 아님을 이야기한다. 괴물은 제도 속에서, 욕망 속에서, 그리고 때로는 우리 자신의 선택 속에서 자란다. 그 현실을 직시할 때 비로소, 우리는 단순한 선악 이분법을 넘어선 정치적·윤리적 사고를 시작할 수 있다. 괴물을 바라보는 시선은, 결국 우리 자신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괴물과 함께 살아남는다는 것은, 그 질문을 멈추지 않는 일이다.
* 사진 출처 : 네이버 영화 <야당> 포토
글·서성희
영화평론가ㆍ영화학박사. 대구경북영화영상사회적협동조합 전 이사장으로, 독립영화전용관 오오극장 대표와 대구영상미디어센터 센터장을 역임했다. 현재 영화에 관한 글쓰기와 강연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며, 영화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