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책의 시대는 이제 시작이다
![]() | ||
누가 종말을 말하는가
'종이책의 종말'을 예언하는 글은 예나 지금이나 꾸준히 생산되고 있다. 특히 2000년이 그랬다. 빌 게이츠가 주도하는 마이크로소프트가 독서단말기 'MS리더'를 론칭하자 세상은 한순간에 종이책의 종말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종이책과 전자책을 대척점에 놓고 하나는 살고 하나는 죽는다는 '죽기 살기' 논쟁이 온갖 지면을 달궜다. 그로부터 12년이 지났다. 아직도 국내에서 종이책과 전자책이 동시에 출간되었을 때 전자책의 판매 부수는 종이책의 1% 수준에서 맴돌고 있다.
'킨들'이 있는 미국은 다르다고? 맞다. 미국은 전자책의 점유율이 20%에 육박한다. 그 정도인데도 한쪽에서는 전자책의 매출이 종이책의 매출을 넘어섰다고 호들갑을 떨고 있다. 전자책의 매출에는 킨들의 판매 금액도 포함되었다는 사실은 감춘 채.
어쨌든 좋다. 전자책의 매출은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전자책을 주로 휴대전화로 읽고 있다. 아이패드가 등장하고서는 스마트 기기로 읽고 있다는 말로 대체되고 있다. 이제 인간은 스마트폰, 스마트패드, 스마트TV로 책을 읽는다. 이미 국내에서 스마트폰 보유자는 3천만 명을 넘어섰다. 이렇게 스마트 기기로 책을 읽는 사람을 우리는 '호모스마트쿠스'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모든 책을 휴대전화로 볼 것인가? 아니다. 지금까지 증명된 바에 의하면 휴대전화로 읽는 책은 주로 휴대전화와 친화성이 높은 만화, 휴대전화 소설, 사진 등 세 가지다. 일본의 '전자서적 비즈니스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2008년 일본 전자책 시장의 규모는 464억 엔으로 그중 402억 엔(86.6%)이 휴대전화를 통한 매출이었다. 402억 엔 중에서 만화가 330억 엔으로 82.1%의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했다.
이렇게 만화가 인기를 끄는 것은 단지 가격 때문만은 아니다. 남성의 동성애를 소재로 한 여성향 만화인 BL(Boy's Love)이나 10대의 연애를 다룬 만화인 TL(Teen's Love)이 인기를 끌었는데 모두 과격한 성 묘사가 이뤄진 만화였다. 이런 만화를 서점에서 구입하려면 남의 눈을 의식해야 하지만 휴대전화로 구입할 때는 전혀 그럴 필요가 없다.
휴대전화를 통한 책 판매는 국경을 넘어선다. 동일한 콘텐츠를 여러 언어로 곧바로 전환할 수 있는 자동번역 시스템이 도입되고 있어 언어가 전혀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일본의 업계 1위로 올라선 쇼가쿠칸은 이미 편집 프로덕션 회사와 공동 작업으로 마쓰모토 다이요의 <넘버 파이브> 앱을 미국, 유럽, 인도, 중국 등 29개국에서 동시에 판매한다는 사실을 발표해 세상이 달라졌다는 것을 증명한 바 있다. 이런 일에 발 벗고 나서는 업체는 주로 전화회사다. 이렇게 세상은 휴대전화로 연결되고 있다.
일본에서는 휴대전화 소설이 2010년 10월에 이미 120만 종을 넘어섰다. 서점에서 쉽게 살 수 있는 책이 약 60만 종이니 이를 두 배나 넘어선 수치다.
우리는 활자를 통로로 모든 감각, 모든 지식에 접근할 수 있었다. 그것이 '구텐베르크의 은하계'였다. 그러나 웹과 앱이 등장하고 나서는 책과 함께 3각 동맹을 이루기 시작했다. 따라서 이미 책에 있던 많은 정보가 웹이나 앱으로 급격하게 옮겨가고 있다. 사전과 같은 잘게 쪼개진 정보가 거의 모두 웹으로 옮겨간 지는 오래됐다. 다시 수많은 정보가 앱으로 옮겨갈 것이다. 그렇게 수없이 옮겨가더라도 종이책은 여전히 건재할 수밖에 없다.
본-디지털, 책의 혁명
책은 이렇게 스스로 변하는 '재매개화'(remediation)의 과정을 걸어왔다. 뉴미디어인 전자책은 올드미디어인 종이책의 자양분을 먹고 자라고, 종이책은 전자책의 등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자신만의 장점 찾아내기에 돌입했다. 전자책이 종이책의 장점을 무수히 도입하는 것은 그래서다. 두 미디어는 서로 대체되는 것이 아니라 공존하며 새로운 책의 세계를 향해 맹렬하게 달려가고 있다.
그렇다. 이제 진정한 책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그것은 '새로운 책'의 시대이다. 우리는 과거에 책이라면 무조건 믿는 미디어 맹목 시대를 거쳐왔다. 하지만 디지털 복제와 전송이 매우 자유로워진 지금은 '책은 과연 무엇인가'라는 존재론적 사유, 즉 미디어에 대한 새로운 자각이 필요하다. 따라서 새로운 책의 시대는 책에 대한 '자각 시대'이다.
이런 시대에 책은 달라져야 한다. 인류 역사상 책의 혁명은 세 차례 있었다. 책자본의 등장이라는 1차 혁명, 인쇄술의 발견이라는 2차 혁명, 그리고 3차 혁명인 디지털 혁명이다. 디지털 혁명은 달리 말해 정보기술(IT) 혁명이다. 마쓰오카 세이고는 <편집회의>에 발표한 '편집담의'(編集談義)라는 연재 글에서 "IT 혁명, IT 사회라고 말들 하는데, 그것은 쉽게 말해 정보의 '전후 순서' 배치법이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화되어 정보를 온디맨드로 얻기 쉽게 된 것이 IT 혁명인데,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간다는 것은 손끝으로 정보를 검색했던 것에 대해 버튼으로 검색하게 되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간단히 말해 유저가 원하는 순서대로 정보를 컴퓨터나 휴대전화로 읽어낼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정보기술 혁명이다.
디지털 혁명은 읽기의 혁명, 쓰기의 혁명, 텍스트(물질성)의 혁명이라는 세 가지 주요 변화를 수반했다. 읽기 혁명은 인간의 처리 능력을 넘어설 만큼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대량의 텍스트를 검색이라는 수단을 동원해 단 한 번의 클릭으로 읽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2002년부터 "인간의 검색 습관은 책의 세계에서 '분할'과 '통합'이 동시에 진행되도록 만들었다. 분할이란 한 권의 책이 다루고 있는 범위가 갈수록 잘게 쪼개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잘게 쪼개진 키워드를 설명하는 방식은 통합적이다"라고 주장했다. 이제 하나의 잘게 쪼개진 주제에 대해 다양하고 구체적인 팩트를 동원해 처음부터 끝까지 스토리텔링이 강하게 쓰인 책이 아니면 독자의 선택을 받기 어렵게 되었다.
이미 거의 모든 텍스트는 '본-디지털'(born-digital)로 생산된다. 손으로 쓰던 행위와 자판을 두드리는 행위, 그리고 엄지손가락으로 누르며 쓰는 행위가 공존하고 있지만 앞으로 누르는 행위가 대세가 될 것이다. 일본의 출판기획자인 우에무라 야시오는 "흔히 '본-디지털' 하면 멀티미디어를 연상하지만 지금까지 '본-디지털'로 생산해 가장 성공한 사례가 휴대전화 소설"이라고 말했다. 그는 "휴대전화 소설은 '뺄셈'이다. 표현도 줄이고, 그림도 빼고, 글자 수도 줄여서 멋지게 '본-디지털'로 성공했다"고 보았다. 엄지손가락으로 액정화면을 누르며 글을 쓰다 보면 되도록 생략하고, 임팩트가 강한 단어를 선택하기 마련이다.
전자책은 단순히 종이책을 그대로 전자공간에 옮겨놓고 디지털 디바이스로 읽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전자책에는 음성이나 동영상을 가미할 수 있다. 스마트 기기에서는 화면을 손으로 확대해 자신이 보고 싶은 것을 제대로 볼 수 있다. 이런 기능은 점차 진화할 것이다. 종이책에서는 구현할 수 없는 이런 전자기기가 갖는 특별한 특수효과는 매우 중요하다. '검색'이라는 읽기, 엄지손가락으로 '누르는' 쓰기가 텍스트의 질적 변화를 불러오듯이 스마트폰이나 스마트패드 등의 재생장치가 가진 다양한 기능이야말로 독자와 콘텐츠 제공자의 새로운 관계성을 만드는 결정적인 열쇠다.
스님들을 비롯해 소셜미디어와 친화성이 강한 지식인들이 펴낸 에세이가 압도한 올해 출판시장이 바로 그 증거다. 작가(저자)가 사유를 파격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가장 정직한 장르인 에세이야말로 트위터나 페이스북과 같은 소셜미디어에 매우 적합한 장르가 아닌가?
휴대전화가 '정보 송수신의 제왕'이 된 시대에 소셜미디어가 전달하는 짧은 글들은 문자언어가 아니라 임팩트가 강한 영상 이미지다. 이제 세상은 자신이 말하려는 바를 가능한 한 짧은 글로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사람, 즉 공감의 한 줄 어록을 내놓을 수 있는 이가 주도하고 있다. 유장한 산문의 시대가 지고 경박단소(輕薄短小)한 단문(短文)의 시대가 온 것이다.
종이책은 이제 새롭게 거듭나야 한다. 전자책은 종이책과 확실히 다른 매체라는 인식을 보다 확고히 한 다음 그에 합당한 상품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 종이책은 디지털을 활용하여 아날로그만이 지닐 수 있는 장점, 즉 차이를 보여주는 '새로운 책'이 되어야 한다.
퍼블리킹과 블룩의 도래
전자책은 어떻게 변해야 할까? 먼저 시간성. 인간이 액정화면을 통해 정보를 제대로 소화해내려면 시간적 제약이 따른다. 따라서 전자텍스트는 10분 이내, 적어도 30분 이내의 짧은 시간에 소화할 수 있어야 한다. 압축한 정보로 완결성을 갖는 작은 이야기를 연결해 전체적으로는 큰 이야기가 되는 책이어야 할 것이다. <개그콘서트>의 구성을 닮은 책이되 하나의 실로 꿸 수 있는 이야기면 좋을 것이다.
둘째, 장소성. 종이책에서는 '글맛'이 좋아야 한다. 그러나 전자공간에서는 이미지가 더욱 중요하다. 따라서 문주화종(文主畵從)이 아니라 화주문종(畵主文從)이 되어야 한다. 형식이 좋아야 내용도 힘을 발한다. 준비된 이미지가 없다면 디지털 기술을 이용한 다큐멘터리 일러스트레이션으로 이미지를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한다.
셋째, 신체성. 전자공간에서 통하는 콘텐츠는 인간의 머리(뇌)를 움직이는 이성적인 글보다 몸과 마음을 움직이는 감성적인 글이어야 할 것이다. 종이책은 수없이 반복해서 읽어도 그때마다 새로운 의미를 깨칠 수 있는 책이 시공을 뛰어넘어 살아남았지만, 전자공간의 콘텐츠는 임팩트가 강한 이미지가 선도하고 부담 없이 '바라볼 수 있는' 글쓰기가 따라온, 하지만 한순간에 '바로 이것'이라는 '느낌'이 오도록 디자인된 것이어야 할 것이다.
3대 혁명으로 말미암아 책의 세계는 완전히 달라지고 있다. 디지털 기술은 모든 것을 하나로 통합하고 있다. 정보의 영역에서는 숙련된 노동자를 기술로 대체하는 바람에 '고용 없는 성장'을 낳고 있다. 이런 시대에 책의 생산자는 통합적 안목으로 과거와 질적으로 완전히 달라진 '새로운 책'을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한다.
이제 누구나 쓰고, 검색하고, 엮고, 형태를 갖추고, 나눠주고, 받고, 읽는 행위를 웹이나 휴대전화를 통해 일상화하고 있다. 그런 과정에서 글이 웹에 오르는 것은 그 자체로 출판이라는 행위가 이뤄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출판편집자 출신이면서 미디어학자인 하세가와 하지메는 이런 형태의 출판을 기존의 '출판'(Publishing)과 구별하기 위해 '퍼블리킹'(PUBLICing)으로 부르자고 제안한 바 있다. 퍼블리싱과 퍼블리킹은 '선 여과 후 출판'이던 출판 시스템이 '선 출판 후 여과'로 완전히 달라진 것을 구별하자는 것이다. 발행인이나 편집자가 책으로 탄생할 가치가 있는 원고를 먼저 여과한 다음 책으로 펴내던 시대에서, 웹에 먼저 오른(출판된) 것을 편집자가 여과해서 책으로 펴내는 시대로 바뀌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블룩'(Blook=Blog+Book)이다.
이제 누구나 직접 책을 만들어 글로벌 플랫폼에 자신의 책을 탑재하면 세계 독자와 만날 수 있는 세상이다. 이미 생산자와 소비자가 하나로 바뀌지 않았는가? 따라서 미래를 주도할 사람이라면 누구나 책이라는 포트폴리오를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새로운 책의 시대'다. '새로운 책의 시대'는 이제 겨우 시작되었다. 우리에게 익숙한 정보기술 혁명이 완성된 것이 아니라 이제 겨우 출발점에 선 것처럼.
글 / 한기호 출판비평가.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 격주간 출판전문지 <기획회의>와 월간 <학교도서관저널> 발행인. 저서로 <출판마케팅입문> <디지털과 종이책의 행복한 만남> <책은 진화한다> <새로운 책의 시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