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을 벤처 캐피털로 보는 ‘테크 엘리트들’
국가 밖의 국가를 꿈꾸는 자들
최근 몇 년간 미국 ‘테크 엘리트’(디지털 기술을 통해 사회, 정치, 경제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신흥 지배층—역주)들로부터 쏟아지는 아이디어의 홍수는 흥미롭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어지럽기도 하다. 그 아이디어들은 대담하고, 종종 놀랍고, 때로는 무섭기까지 하다. 발라지 스리니바산과 피터 틸 같은 이들은 디지털 귀족들을 위한 탈출 계획—즉, 국가와 규제를 벗어나 자신들만의 세계를 구축하려는 시나리오—을 구상하고 있다. 스리니바산은 블록체인으로 운영되는 ‘네트워크 국가’를 구상하며, 기술 기업에 대한 충성이 시민권과 경찰 보호의 조건이 되는 체계를 제안한다. 틸은 국제 수역 위에 떠 있는 호화 요트 같은 ‘마이크로네이션’(micronation, 국제법상 국가는 아니지만, 스스로를 독립 국가로 주장하는 극소형 자칭 국가 또는 정치 실험체—역주)에서 부자들이 정부의 간섭 없이 리버테리언(libertarian, 개인의 자유, 최소 국가 개입, 자유시장, 사유재산의 절대적 보호를 강조하는 자유지상주의자—역주)적 환상을 실현할 수 있기를 꿈꾼다.
테크노톱, 외교와 국방 등 현실정치까지 해법 모색
실리콘밸리 전체는 해결 중심주의에 중독되어, 마치 주식 옵션보다 더 빠르게 가치가 상승하는 유토피아를 꿈꾸듯 아이디어를 부풀리고 있다. 오픈AI의 최고경영자 샘 알트먼은 인공지능에 대한 (비)규제 구상뿐 아니라, 인공지능이 운영하는 복지 국가—‘모두를 위한 자본주의’—까지도 계획하고 있다. 암호화폐의 사도들, 우주 식민지 개척자들, 원자력 부흥주의자들까지, 그들은 설명할 수 없는 문제들에 대해 기이한 해법을 내놓는다.
이들은 점점 더 외교나 국방 같은 현실 정치 문제에까지 관심을 넓히고 있다. 구글 최고경영자를 역임한 에릭 슈미트는 헨리 키신저와 책을 공동 집필했고, <포린 어페어즈> 같은 매체에 종말론적이고 교조적인 글을 기고하고 있다. 그는 전문가들이 점심 식사 자리에서 진지하게 동조할 만한, 중대한 주제들을 다룬다. “우크라이나는 드론 전쟁에서 지고 있다”고 그는 2024년 1월 기사에서 주장했다. 그런데 몇 달 전, 자살 드론을 개발하는 비밀 회사를 세운 인물이 바로 에릭 슈미트라는 건 단지 우연의 일치일까? 물론, 순전한 우연이겠지만…. 이제 테크 엘리트들이 전면에 나서면서, 전쟁의 미래에 대한 전망과 논의는 더 이상 RAND 연구소에서 수염을 쓸어내리며 혼잣말하듯 말하던 ‘국방 지식인’들만의 영역이 아니다. 이제 누구나 목소리를 낸다. 팔란티어의 CEO 알렉스 카프와 앤두릴 창립자 팔머 럭키—두 사람의 자산만 110억 달러가 넘는다—는 국방부라는 낭비벽 심한 거인 골리앗 앞에 마치 자신들이 용감한 다윗이라도 되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 그리고 당연히, 테크노 자본주의의 대표적인 ‘제릭’(Zelig, 1983년 우디 앨런이 감독하고 주연한 영화 제목이자 주인공 이름. 제릭은 자신이 처한 환경이나 주변 인물에 따라 자유자재로 변신하는 인물—역주)이라 할 수 있는 일론 머스크도 이 주제에 대해 뚜렷한 견해를 갖고 있다. 그는 최근 미국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 연설에서, “미래의 전쟁은 인프라를 우선적으로 겨냥하게 될 것이며, 지상 기반의 모든 통신 시스템—광섬유 케이블, 이동통신 기지국—은 파괴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신종 ‘지식인-올리가르히’, 재편되는 영웅들의 전당
철학자 미셸 푸코가 말했던 ‘특수한 지식인’—즉, 한정된 전문 영역에서 권위를 얻는 존재—은 이제 팔머 럭키 앞에서 구시대의 유물처럼 보인다. 가상현실의 천재 소년에서 군사 계약업자로 변신한 럭키는, 그 전형을 완전히 뒤엎는다.
트위드 재킷(tweed jacket, 교수나 연구자, 전통적 지식인, 냉전 시대의 분석가, 정중하고 내성적인 전문가를 연상시키는 이미지 상징—역주)은 이제 설 자리가 없다. 럭키는 카고 반바지에 슬리퍼, 하와이안 셔츠 차림의 ‘서퍼 복장’으로 언론 앞에 당당히 등장한다. 그는 스스로를 “선전가”라 부르며, “진실을 왜곡하는 데 주저하지 않겠다”라고 선언했다.
이렇게 재편된 영웅들의 전당에서, 신중한 냉전 시대의 전쟁 분석가는 밀려난 지 오래다.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엄청난 부를 가진 채 이미지 관리에 능하고, 이념적으로도 전혀 거리낌 없는 새로운 인물 유형이다. 실리콘밸리의 기업가들을 단순한 대중 오락꾼쯤으로 치부하는 것은 경솔한 일이다. 무엇보다 이들은 산업적 속도, 즉 공장처럼 찍어내듯 의견을 쉴 새 없이 대량 생산해내는 존재들이다. 그들의 블로그 글, 팟캐스트, 서브스택(미국의 뉴스레터 기반 독립 출판 플랫폼) 게시물은 화물열차처럼 거칠고 무뚝뚝한 논조를 갖는다. 하지만 이들의 ‘즉흥 반응’은 얼핏 보면 술자리 잡담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뚜렷한 철학적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경우가 많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가 흔히 패스트푸드식 사고라고 치부하는—즉, 초가공되어 벤처 자본으로 튀겨낸 ‘아이디어 너겟’들—속에는, 미식가들조차 외면하지 못할 고급 재료가 깃들어 있는 셈이다.
프랑크푸르트학파에 나스닥 양념을 치고, 그 위에 CIA를 살짝 뿌린 버전
그러니 이 억만장자들의 최신 유행이 자신의 독서 목록을 자랑하는 것이라는 사실도 놀랍지 않다. 이제 서재는 지위와 안목을 드러내는 가장 세련된 상징이 되었다. 그들의 책장은 뜻밖의 책들로 가득하다. 예를 들어, 정치경제학자 앨버트 오토 허쉬만이라면, 자신의 저서 『이탈, 목소리와 충성(Exit, Voice and Loyalty)』에서 전개한 날카로운 이론이 네트워크 국가, 사유화된 도시, 떠다니는 자율 공동체의 정당화를 위해 사용된다는 말을 들으면 어떻게 반응했을까?(참고: 브누아 브레빌, 「그리고 ‘테크’는 카놋사로 갔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2025년 3월)
이 지식계의 가계도에서, 한 계보는 오픈AI 공동설립자인 피터 틸을 철학자 레오 스트라우스와 문학평론가 르네 지라르에게 연결시키는데, 이는 해설자들이 빠뜨리지 않고 반복하는 계보다. 하지만 그보다 더 견고한 또 다른 계보가 존재한다. 프랑크푸르트학파 출신 철학자 테오도어 아도르노와 사회학자 탤컷 파슨스로부터 팔란티어 테크놀로지 CEO인 알렉스 카프에게 이르는 흐름이다. 알렉스 카프는 이 두 사상가를 주제로 박사 논문을 썼고, 이 논문은 지금 팔란티어가 구축한 감시 제국의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 게다가 그는 주주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에도 종종 학술적 인용을 흩뿌린다. 최근에는 저명한 정치학자 새뮤얼 헌팅턴이 등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봐도, 헌팅턴이 내세우는 ‘낙관주의자를 위한 현실정치’에서는 폭력과 이성의 관계를 꿰뚫어 보려 했던 아도르노의 사유는 전혀 깃들어 있지 않다.
그는 지난 3월 극우 <폭스 비즈니스> 채널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난 70~80년 동안 세상이 더 나아졌다면, 그것은 오직 하나의 이유—미국이 폭력을 조직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이것은 프랑크푸르트학파에 나스닥 양념을 치고, 그 위에 CIA를 살짝 뿌린 버전이다. 프랑크푸르트학파였던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계몽주의 이성 속에서 폭력을 은폐하는 가면을 베일을 보았다면, 카프는 조직된 폭력 그 자체를 미국 헤게모니의 유익함을 보여주는 증거로 내세운다.
테크노 자본주의를 이끄는 실리콘밸리 독재자들
덧붙이자면, 이런 조직된 폭력을 알고리즘과 드론, 인공지능으로 더욱 정밀하게 설계하려는 사람들에게는 꽤나 짭짤한 수익이 보장된다. 이처럼 전투적인 수사가 상기시켜주듯, 실리콘밸리를 가장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행동과 분리된 사유다. 마르크스였다면 실리콘밸리의 이런 ‘프락시스(praxis, 고대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말로, 사유와 실천이 하나로 결합된 행동 태도를 뜻한다—)’ 지향성에 아마 박수를 보냈을 것이다.
세계를 단지 논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제 이 엘리트들은 그것을 바꿀 의지와 수단, 그리고 어쩌면 ‘간’(배짱과 결단)까지도 갖추고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도널트 트럼프의 권력 복귀는 이들에게 연방 정부 시스템에 직접 접근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실리콘밸리의 저명한 투자자 출신인 마크 안드리센은 인사 코치 역할을 하고, 피터 틸은 자신의 측근들을 모든 계층에 배치하고, 일론 머스크와 그의 추종자들은 정부 효율성 부서(DOGE)에서 파괴적 광기를 마음껏 발휘하고 있다. 어디서나 전략은 똑같다. 이미 과거 산업들을 무너뜨릴 때 사용했던 방식—먼저 교란, 나중에 복구—이 그것이다.
나는 이 새로운 종(種)을 ‘지식인-올리가르히(intellectuels-oligarques)’라 부른다. 이들은 우리가 익숙하게 여겨온 잘 정돈된 분류체계를 완전히 무너뜨린다. 산업 시대의 거물들은 자신의 세계관을 반영한 재단을 설립하거나, 비영리 단체에 자금을 지원하곤 했다. 반면 실리콘밸리의 철인 군주들은 훨씬 더 강력한 하이브리드들을 고안해냈다. 철학적 주장에 버금가는 투자 포트폴리오, 신념을 실현하는 시장 내 포지션, 투자 기금이자 동시에 이데올로기 요새인 벤처 캐피털—그들이 만든 건 이런 것들이다. 이것이 바로 헤겔식 진화다.
헤겔 변증법의 정(正)-반(反)-합(合) 논리로 보면, 자본주의(정)는 필란트로-자본주의(philanthro-capitalism-투자, 시장 논리 등 자본주의적 수단을 통해 사회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접근 방식—역주)(반)로, 그리고 마침내 수익의 중심이 된 문화 전쟁(합)으로 나아간다.
그 문화 전쟁의 뜨거운 전장 중 하나만 살펴보아도 충분하다. 바로 윤리적 투자, 즉 환경, 사회, 지배구조 원칙을 뜻하는 ESG다. 초심자들을 위해 짚고 넘어가자면, ESG는 월스트리트가 강을 오염시키고, 노동자를 착취하고, 이사진을 골프 친구로만 채우다 보면 언젠가는 수익성에 타격이 온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으면서 등장한 개념이다. 이에 따라 금융권은 기업의 도덕성을 분기별 실적 보고서처럼 측정하려는 (다소 논란 많은) 시도를 시작했다. 그 결과 기업들은 ‘ESG 점수’—자연을 더 이상 파괴하지 않고 인간의 존엄도 침해하지 않는다는 걸 입증해줄 도덕적 신용등급 같은 지표—를 부여받게 되었다.
하버마스가 언급한 ‘알고리즘에 의한 조정’, 테크 엘리트들이 바로 그 배후 세력?
테크 엘리트들이 겉보기엔 자신들의 디지털 제국과는 거리가 먼 전장에 자신들의 화력을 집중하는 방식을 지켜보는 것은, 어딘가 병적일 정도로 매혹적이다. 불과 몇 년 사이, 냉혹한 비난의 기계장치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ESG는 이제 “사기”(일론 머스크), “완전한 사기극”(차마트 팔리하피티야), “좀비 아이디어”(마크 안드리센) 등으로 불리고 있다.
그리고 이 남자들은 말만 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프락시스의 호출이 울려 퍼지면, 그들은 투자로 응답한다. 피터 틸은 ESG를 중국식 공산주의에 비유한 직후, 스트라이브 자산운용사(Strive Asset Management) 펀드에 자금을 넣었다. 이 펀드는 투자 결정에서 윤리적 고려를 배제하겠다고 선언한 곳으로, 당시 운영자는 한때 DOGE(정부 효율성 부서)를 이끌며 일론 머스크의 오른팔로 활약했던 비벡 라마스와미였다.
그는 짧은 대선 출마 기간 동안, ‘깨어있는 자본주의’(woke capitalism, 기업들이 이윤 추구와 이미지 제고를 위해 진보적 가치를 표방하고, 사회 정의 담론—환경·다양성·인권 등—을 마케팅 전략으로 활용하는 행위—역주)를 무너뜨리는 것 하나만을 유일한 주제로 내세운 바 있다.
마크 안드리센 역시 가만 있지 않았다. 그는 친-MAGA(“Make America Great Again”) 성향의 기독교 펀드인 New Founding에 자금을 댔을 뿐 아니라, 현재는 도널드 트럼프 주니어의 지지를 받는 반-ESG 방어선, ‘1789 Capital’의 탄생에도 도움을 줬다. 이것이 바로 이들의 ‘천재성’이다. 지적 입장을 시장 포지션으로 바꾸고, 자신들이 소유한 디지털 확성기들을 이용해 현실을 자신들의 자본 투자에 유리한 방향으로 재편하는 능력 말이다.
실리콘밸리의 이데올로기적 흔적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깊이 파고든 것은 아닐까? 마크 안드리센과 그와 비슷한 이들이 스스로를 “리틀 테크”라고 부르며 겸손으로 포장하지만, 그 과장된 연극 뒤에는 훨씬 더 거대한 권력과 의도가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마주한 이 불편한 가설은 바로 이것이다. 다중 작업을 해내는 테크 엘리트들—교활하고, 강력하며, 때때로 광기에 가까운 이 존재들이야말로—위르겐 하버마스가 초기 저작에서 언급했던 ‘공론방의 구조적 변동’(근대 초기의 이성적이고 비판적인 공론장이 자본주의의 발달, 미디어의 상업화, 국가 권력의 개입으로 인해 점차 형식적이고 조작된 소비 공간으로 타락하는 현상을 뜻한다—역주)의 배후 세력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수다의 폭군들, 공적 담론을 식민화하는 기술 권력
‘시스템 이론’(사회는 서로 구분된 기능 체계들로 이루어진 복합적 구조이며, 각 체계는 고유한 기능, 언어, 합리성을 바탕으로 자율적으로 작동한다는 이론—역주)이 그의 문체를 팽창시키기 전, 그리고 ‘미묘함’이라는 균형 감각이 그의 분노를 식히기 전, 젊은 하버마스는 주저하지 않고 책임자를 지목했다. 그에 따르면, 비판적이고 투명한 토론이 침식된 원인은 권력 집중이 초래하는 부패한 영향력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는 정확히 핵심을 찔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2023년에 출간된 그의 1962년 저서의 개정판에서, 이 ‘학문 귀족’은 그런 급진적 분석 대신 “알고리즘에 의한 조정” 같은 주제를 길게 논하는 데 집중했다. 마치 무너지고 있는 집 안에서 벽에 걸린 액자만 정리하는 사람처럼 말이다.
그러나 점점 더 분명해지는 것은, 우리를 위협하는 진짜 위험이 알고리즘이 관리하는 플랫폼 자체가 아니라, 그 플랫폼을 소유한 과두 권력자들(올리가르히)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왜 그런가? 그들은 세 가지 강력한 무기를 쥐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 ‘금권 중력’—현실의 물리적 조건까지 뒤틀어버릴 정도로 막대한 부. 둘째, ‘예언자적 권위’—기술적 비전을 피할 수 없는 미래 예언처럼 제시하는 능력. 셋째, ‘플랫폼에 대한 주권’—공적 담론이 이루어지는 포럼을 통제할 수 있는 권력. 트위터(현 X)를 장악한 머스크, 서브스택(Substack)에 투자한 안드리센, 보수적 유튜브 대안 플랫폼 럼블(Rumble)을 구애한 틸—이들은 모두 미디어와 메시지, 시스템과 하버마스가 말한 ‘생활세계’를 동시에 식민화한 셈이다. 과거의 공적 지식인이란, 문화적 유물을 발굴하고 그것을 틈새 학술지에 차분히 기술하던 고고학자에 비유할 수 있다면, 오늘날의 지식인-올리가르히들은 오히려 철거 전문가에 가깝다. 이들은 사회의 넓은 영역에 이데올로기적 폭약을 심고, 조세회피처에서 안전하게 그 기폭장치를 작동시킨다. 그들은 미래에 대해 글을 쓰기보다, 미래를 직접 만들어낸다. 그것도 동의받지 않은 대중을 대상으로 자신들의 이론을 ‘베타 테스트’(Beta-test. 제품을 출시하기 전에 실제 사용자들이 사용해보며 오류나 문제점을 확인하는 과정—역주)하며, 역사상 가장 거대한 통제되지 않은 실험을 연출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이들이 이전 세대의 보석으로 치장한 엘리트들과 구별되는 점은 탐욕이 아니라 그들의 수다다. 그들의 말은, ‘문장 노동자’, ‘서사의 폭군’이라 불리던 발자크조차 지쳐 나가떨어질 만큼 폭발적으로 쏟아진다. 산업 자본가들이 자신의 사적 이익을 전략적 사유처럼 포장하기 위해 싱크탱크를 만들었다면, 오늘날의 지식인-올리가르히들은 그런 중간 단계를 생략한다. 이들이 조정하는 것은 알고리즘이 아니라 대화 그 자체다. 그들은 철학적 밈(meme)을 수류탄처럼 한밤중에 X(전 트위터)에 투척하고, 그 밈은 다음 날 아침 세계 주요 일간지 1면을 터뜨리는 것이다.
글·에브게니 모로조프 Evgeny Morozov
벨라루스 출신의 언론인. 디지털 세계에 대한 비판적 평론을 주로 하고 있다. 최근 출간된 『Net Delusion 네트 딜루전』에서 그는 디지털미디어가 가진 잠재력이 폭발한 것으로 기대됐던 2009년 이란 ‘녹색혁명’의 실패를 예로 들며, ‘사이버 유토피아’의 환상을 깨뜨렸다. 그는 뉴미디어의 민주주의적 잠재력에 열광하는 행동가들에게 독재자들도 인터넷을 맘껏 활용한다고 경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