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제리 군부, ‘민주화의 봄’ 히라크를 질식시켜
대규모 평화 시위 6년 후
독립 이후 줄곧 국가 제도와 권력을 장악해온 알제리 국민군(ANP)은 2019년 ‘히라크(Hirak)’ 대규모 민중 시위에도 불구하고 현 체제를 지켜내는 데 성공했다. 잠시나마 민주적 전환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던 봄은 덧없이 지나갔고, 지금은 표적 탄압과 반대 세력의 입막음이 이어지고 있다. 더욱이 경제를 비롯한 구조적 문제들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2019년 2월, 알제리는 진정한 민중 봉기를 경험했다. 이후 1년 넘게 매주 평화적인 시위 행진이 이어졌으며(1), 이 움직임은 곧 ‘히라크(Hirak)’, 즉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시위가 시작된 지 불과 몇 주 만에, 시민들의 거센 요구는 군부를 한발 물러서게 만들었다. 그 결과, 5선에 도전하려 했던 당시 대통령 압델아지즈 부테플리카는 군의 압박 속에 결국 사퇴해야만 했다.
알제리군 지도부는 이처럼 거대한 규모의 항쟁이 벌어질 것을 예상하지 못했으며, 시위가 계속될수록 구호들은 점차 더 급진적으로 변해갔다. 몇 달간의 혼란과 군 수뇌부 내부의 분열에도 불구하고, 군부는 재결집에 성공했다. 이어 1962년 독립 이후 유지되어온 체제를 수호하기 위해 내부 결속을 강화하며, 마침내 기존 체제를 지켜냈다.
위기 느낀 군부, “축복받은 히라크” 표어로 성난 민심 달래기
국가 위에 군림해온 군부의 지배가 히라크로 인해 흔들리자, 군은 내부 결속을 다지며 체제 방어에 나섰다. 시위대는 거리에서 외쳤다.
“우리는 군사 국가가 아닌 민간 국가를 원한다!”, “장군들을 쓰레기통으로!”
이처럼 군부에 대한 노골적인 불신과 분노가 표출되는 상황에서, 군의 단결은 필수 조건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고, 민심을 달래기 위한 ‘희생양’도 필요했다. 그 결과, 부패 사건에 연루된 고위 장교 약 서른 명이 시위 초기에 구속되었다.
참모총장 아흐메드 가이드 살라 장군은 “군은 국민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라고 선언하며 부테플리카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했고, ‘이싸바’(‘갱단’이라는 뜻의 은유적 표현)를 국가 재정을 착복한 범죄 집단으로 규정하고, 제거하라고 명령했다.
이 ‘이싸바’에는 대통령의 동생이자 핵심 측근이었던 사이드 부테플리카를 비롯해 전직 총리 두 명, 장관 18명, 다수의 국회의원들과 유력 사업가들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이들은 자금 횡령과 부패 혐의로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히라크는 공식 담론에서 단 한 번도 공격받은 적이 없다. 오히려, 정권은 히라크가 이슬람주의자들과 베르베르주의자들에게 침투당했을 가능성이 있다며, 자신들이 그것을 보호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베르베르: 알제리, 모로코, 튀니지 등 북아프리카의 토착 민족. 베르베르주의자란 이들의 언어·문화·정체성을 보존하고 정치적 권리를 주장하는 이들을 뜻한다—역주)
이러한 담론은 ‘축복받은 히라크’ 덕분에 정권이 정화되고 있다는 이미지를 조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축복받은 히라크’라는 표현은 군과 민간 지도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단골 표어다.
‘정치적 지진’ 히라크, 군부 지배 종식에는 실패
2020년 2월 19일, 알제리 정부는 대통령령을 통해 2월 22일을 ‘민주주의를 위한 국민과 군대 간 형제애의 날’로 지정했다. 제1조는 다음과 같이 명시했다.
“2019년 2월 22, 이날은 새로운 알제리를 건설하고자 하는 국민의 염원과 이에 연대한 군대의 뜻이 함께하는 역사적 계기를 기념하는 날이다.” 이는 히라크의 본래 취지를 군과 정권에 대한 지지로 재해석하려는 정치적 전략의 일환이었다.
히라크는 알제리 독립 이후의 전체 정치사를 통틀어, 하나의 ‘정치적 지진’으로 평가될 만한 사건이었다. 이 운동은 정권의 민간적 외피를 걷어내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국가를 군부의 지배로부터 해방시키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군은 여전히 유권자인 시민이 아닌 자신들이 권력의 주체라고 주장하며, 권력을 놓지 않으려 한다.
군 내부에는 이처럼 고유 권한이 도전을 받는 상황에 대해 불안감이 존재했다. 특히, 1990년대 이슬람 반군과의 내전 당시 보안군이 자행한 대규모 인권 침해에 대해 언젠가 책임을 져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었다.(2) 분열을 피하기 위해, 군 수뇌부는 2013년 티겐투린 가스 시설에 대한 무장 공격 이후 해임되었던 정보기관 고위 장성들을 재등용하기로 결정했다. 이 공격은 무장 단체의 습격으로 외국인 인질 38명이 사망한 사건으로, 이후 정보보안국(DRS)은 세 개의 독립 기관으로 분할되었고, 그 결과 정권 반대 세력에 대한 감시력은 급격히 약화되었다. 그리고 6년 뒤인 2019년, 군부는 강력한 정치경찰 없이 권력을 유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군부 앞잡이’ 테분 대통령
2019년 여름부터, 가이드 살라 장군은 시위대의 목소리가 이미 반영되었다는 이유로 시위의 종료를 촉구했다.(3) 그는 자유롭고 공정한 대통령 선거를 약속하기도 했다. 그러나 2019년 7월 4일로 예정되어 있던 대선은 시민들의 압도적인 반대 여론에 부딪혀 결국 연기됐다.
이에 군부는 전통적인 분열 전략을 꺼내 들었다. 즉, 이슬람주의자와 비(非)이슬람주의자, 아랍어 사용자와 베르베르어 사용자(베르베르계) 사이의 갈등을 부추기기 시작한 것이다. 그 결과 매주 이어지던 시위 행진에는 점차 참여 인원이 줄어들었고, 대통령 선거를 재개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2019년 12월, 대선이 실시됐다. 다만 이 선거를 가능하게 만들기 위해 군부는 히라크의 지지를 등에 업고 군부에 도전할 가능성이 없는 후보를 고르는 전략을 택했다. 압델마지드 테분은 당시 군부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후보’로 간주되었다. 그는 행정 관료 출신으로, 여러 지역의 주지사를 거쳐 주택부 장관을 역임했으며, 2017년에는 짧은 기간 동안 총리직을 맡은 경력이 있다. 무엇보다도 군부의 위계질서를 벗어나 독자적으로 행동할 만한 정치적 카리스마가 부족하다는 점이 오히려 큰 장점으로 작용했다. 테분은 이전 선거들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낮은 득표율로 간신히 당선되었고, 곧이어 히라크의 요구인 부패 척결과 표현의 자유 확대를 자신의 핵심 과제로 내세웠다. 그는 취임 초기 연설에서 자신이 몸담았던 장기 독재정권 부테플리카 체제의 어두운 유산을 서슴없이 비판하며, 마치 자신이 그 정권의 일원이 아니었던 것처럼 행동했다. 군부는 그러한 테분을 내세워 시위에 대한 탄압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한편, 그 책임은 테분에게 지우며 자신들은 뒤로 물러섰다. 2019년 12월부터 정권은 히라크의 중심 세력들을 노골적으로 겨냥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히라크 운동 내에서 활발히 활동해온 시민단체 ‘SOS 바브 엘 우에드’의 해산이 선포되었고, 이어서 형법 개정을 통해 체제 전환 요구조차 ‘테러적 전복 행위’로 간주될 수 있는 조항들이 추가되었다. 이러한 법적 조치는 정권이 개혁에 대한 어떤 가능성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자 함을 드러낸다. 심지어 퇴역 장성들조차 예외는 아니었다.
예컨대, 대선 출마를 선언하며 야권에 가까운 발언을 한 알리 게디리 장군은 결국 “군의 사기를 저하시켰다”라는 혐의로 징역형을 선고받고 투옥되었다.
탄압받는 언론과 야당, 침묵을 강요받는 알제리 사회
2020년 봄, 팬데믹으로 인해 대규모 시위가 중단된 것을 계기로 히라크는 사실상 막을 내렸고, 이후 정권은 점차 강경해졌다. 그 결과, 언론의 제한적 자율성은 완전히 무너졌으며, 합법 야당의 정치 활동 공간도 크게 축소되었다.
오늘날 알제리에서 야당의 존재는 실질적으로 집권 세력을 보조하는 역할에 가깝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슬람계 정당들은 탄압 또는 회유를 통해 무력화되었다. 세속주의적 담론을 내세워온 사회주의전선(FFS) 역시 창립자 오신 아이트 아흐메드 사망 이후 정권에 순응하는 방향으로 노선을 조정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는 지지층에 큰 실망을 안겨주었다. 한편 정치경찰은 조직의 확대와 재편을 통해 강력한 감시 체제로 재구축되었다.
이들은 SNS 활동을 감시하며, 자유에 대해 발언한 수십 명을 체포했다. 현재 알제리에서 양심수로 분류되는 정치적 구금자의 수는 약 300명에 이르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6,000명 이상의 정치범을 수감 중인 이집트와 비교하면 적은 수치이지만, 알제리 당국은 대중적 반발을 불러올 위험을 우려해 탄압을 ‘본보기 수준’으로 제한하고 있다. 즉, 영향력 있는 인물들, 다시 말해 타인의 행동에 불을 붙일 수 있는 상징적 인물들이 주된 표적이 된다.
특히 눈에 띄는 활동가들인 미라 모크나슈, 카림 타부, 페티 게라스, 브라힘 랄라미, 카두르 슈이샤, 사이드 부두르 등은 감옥에 갇히거나, 정기적으로 괴롭힘과 위협에 시달리고 있다. 히라크의 젊은 시인 모하메드 타자지트는 이미 수차례 체포되었으며, 최근에도 다시 5년형을 선고받았다. 한편, 해외에 체류 중인 활동가들 역시 알제리에 입국할 경우, 가족 방문이나 휴가 등의 사유와 관계없이 출국 금지를 당할 위험에 여전히 놓여 있다.
공식 행사들—비록 군과 무관한 자리일지라도—에서 테분 대통령은 종종 참모총장 사이드 셍그리하 장군과 나란히 등장한다. 이는 알제리 체제의 본질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이다. 즉, 대통령은 군에 종속되어 있으며, 실질적인 권한은 군부가 행사하고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예산 수립에서부터 외교 정책의 큰 방향에 이르기까지 결정은 군부가 내리고, 민간 정치인들은 이를 실행하는 구조다.
민간 ‘희생양’으로 대중 불만을 잠재우려는 꼼수들
이들 민간 인사들은 대중의 불만이 폭발할 경우 교체 가능한 ‘희생양’ 역할에 지나지 않는다. 고위 장성들 또한 서사하라 문제의 교착 상태, 사헬 지역(Sahel, 아프리카 대륙 중북부에 위치한 반건조 지대로, 대서양 연안의 세네갈에서 시작해 모리타니, 말리, 부르키나파소, 니제르, 나이지리아 북부, 차드, 수단, 에리트레아까지 이어지는 동서 약 5,400km에 걸친 지대—역주) 국가들로부터의 적대감 증가 등 외교·경제 정책의 실패를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책임을 ‘무능한 민간인’에게 전가하고 있으며, 정작 그러한 정책 결정을 주도한 주체가 군부 자신들이었음은 애써 외면하고 있다.
이 정권이 의지하고 있는 두 가지 핵심 기반은 다음과 같다. 하나는 고위 장교들 사이의 강한 연대 의식, 다른 하나는 석유 수익이라는 ‘지대(rente)’, 즉 정권의 생존을 떠받치는 자원 기반의 재정이다. ‘탈석유 시대’에 대비해야 한다는 공식 담론에도 불구하고, 역대 정부들은 지대 중심의 경제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지대경제는 정권이 사회를 통제하는 수단이기도 하다.(4)
그 결과, 권력은 점점 더 경직되고 있다. 오늘날의 알제리 체제는 경제·사회 정책을 기획하고 조율할 수 있는 실질적 정당도 없고, 전략적 결정을 도출할 수 있는 지성 기반의 싱크탱크도 없으며, 시민의 목소리를 반영할 자유 언론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 변화나 국제 정세의 흐름에 무감각한 군부 엘리트들은 마치 냉전이 아직 끝나지 않은 것처럼, 1960년대에 설계된 낡은 체제 모델에 집착하고 있다. 그들의 사고는 마치 베를린 장벽이 아직 무너지지 않았고, ‘제3세계주의’가 국제 질서의 틀로 여겨지던 시절에 머물러 있는 듯하다.
심각한 경제위기 상황에도 구시대 모델에 집착
사회적 기반이 부재하고, 정당이나 노동조합 등 자유 선거를 통해 구성된 중간 집단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정권은 자신에게 충성하는 고객집단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사회 내 영향력 전달자로 활용하고 있다. 이와 동시에, 선거에서 정치적 의미를 제거하는 전략도 병행된다.
실제로 행정부는 투표함 조작을 통해, 석유 수익 분배 구조를 위협하지 않는 인물들, 혹은 수입 기반의 축적·투기 활동에 협조적인 이들을 ‘선출된 대표자’로 만들고 있다. 그 대상에는 대통령조차 포함된다. 2024년 9월, 테분 대통령은 94.65%라는 압도적인 득표율로 재선되었다.
그러나 국가기구가 보유한 막대한 자원에도 불구하고 그는 국민과 실질적인 유대를 형성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 첫 임기 동안, 그는 58개 주로 이루어진 이 광대한 국토에서 단 5개 주만을 방문했을 뿐이며, 이는 자신의 지지 기반과 현실을 직접적으로 마주할 의지가 없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경제 상황은 여전히 심각한 우려를 낳고 있다. 육류, 과일, 채소 등 생활필수품의 가격이 계속해서 오르면서 소비자들의 구매력은 갈수록 떨어지고 있고, 청년 실업자 수는 10년 전과 비교해도 거의 줄지 않은 상태다. 한편, 불법적으로 해외이민을 가기 위해 목숨을 건 탈출 시도는 점점 더 위험해지고 있다. 이주를 희망하는 이들은 낡고 위험한 배에 올라타기 위해 5,000유로를 지불하는데, 이는 알제리 현실에서는 엄청난 금액이며, 그 여정은 언제든지 바다 한가운데서 배가 뒤집힐 수 있는 치명적인 위험을 안고 있다. 국제단체 카미난도 프론테라스에 따르면, 2024년 한 해에만 500명 이상의 젊은 알제리인들이 스페인 해안에 도달하려다 목숨을 잃었다.(5)
민주화 기회 놓친 알제리, 역사적 전환기 잃어버려
국민들이 어려운 삶의 조건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테분 대통령은 현실을 미화하는 연설을 이어가며 국가 상황에 대해 자화자찬을 멈추지 않고 있다. 2024년 12월, “나는 만족하지 않는다”라는 의미의 해시태그 #ManichRadi가 소셜미디어상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고, 이에 공감하며 이를 확산시킨 활동가들은 ‘공공질서 위협’ 혐의로 경찰에 체포되었다. 비록 이 항의는 온라인상에서 벌어진 가상 저항에 불과했지만, 국가 최고위층을 긴장시키기에는 충분했다.
실제로 대통령은 지방 주지사들과의 회의 중 다음과 같은 발언을 내놓았다.
“알제리는 해시태그 따위에 삼켜질 나라가 아니다.”(6) 이 발언은, 디지털 공간에서 터져나오는 민심의 파동조차 정권이 얼마나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하지만 저항은 단지 온라인상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2025년 1월, 수천 명의 고등학생들이 주요 도시의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이들은 과중한 교육과정에 항의하며 정부를 비판하는 구호를 외쳤다. 교사들 또한 학생들의 목소리에 공감하며, 임금 인상과 근무 환경 개선을 요구하는 전국적인 파업을 단행했다. 한편, 병원에서는 의사들의 장기적인 항의 행동이 이어지고 있다. 그들은 병원 내부나 의과대학 캠퍼스에서 집회를 조직하며 지속적인 현장 내 저항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거리로 나서는 순간, 수백 명의 경찰이 동원되어 시위대를 거칠게 진압한다. 이는 공공 부문 전반에서 터져 나오는 사회적 불만이 더 이상 억누를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당국은 특정 부문에서 촉발된 사회적 갈등이 연쇄적으로 확산되면서, 더는 ‘대테러 투쟁’이라는 명분만으로 이를 손쉽게 억압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질 것을 우려하고 있다. 이념적으로 국민을 결집시킬 힘을 잃은 정권은 결국 말뿐인 민족주의적 주장에 기대는 선택을 했다. 이는 프랑스 정부와의 반복되는 외교 갈등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이처럼 노쇠한 체제는 국내외의 새로운 현실에 더 이상 능동적으로 대응할 역량을 상실한 듯하다. 무엇보다, 히라크가 제시했던 평화적 민주 전환의 기회를 놓침으로써 국가와 사회를 새롭게 연결하고, 알제리가 국제사회에서 마땅히 회복해야 할 위상을 되찾을 수 있는 역사적 전기를 허무하게 흘려보내고 말았다.
글·라후아리 아디 Lahouari Addi
리옹 고등사범학교 소속 트리아농 연구소의 연구원, 메릴랜드대학교 볼티모어 카운티 캠퍼스의 겸임 교수. 최근 저서로는 『이슬람 종교 담론의 위기: 플라톤에서 칸트로의 필연적 이행』(루뱅 대학출판부, 2022)이 있다.
(1) 아레즈키 메트레프, 「히라크, 깨어난 알제리의 화산」,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9년 12월.
(2) 「알제리의 지옥 같은 역학」,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1995년 10월.
(3) 아크람 벨카이드, 「알제리, 찬사와 경찰봉, 아랍의 지평선」, 『디플로』 블로그, 2020년 9월 30일.
(4) 사미르 벨랄, 『지대(레옹) 체제의 위기 - 정체된 알제리에 대한 에세이』, 프란츠 파농 출판사, 부메르데스, 2017; 또한 무라드 우치시, 『알제리 지대경제의 정치적 기반』, 데클릭 출판사, 베자이아, 2014 참조.
(5) 마를렌 파나라, 「알제리-스페인 이주 경로에서 침몰 사고 급증」, 2024년 12월 31일, www.infomigrants.net
(6) 마흘루프 메헨니, 「테분: ‘알제리가 해시태그에 삼켜질 수는 없다’」, 2024년 12월 24일, www.tsa-algeri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