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마르 공화국의 착각, 좌파를 몰아내려 나치에 협력
1930년대 초 독일 정계에서 중도파와 우파가 실행에 옮긴 계획은 과도기적 조치로써, 아돌프 히틀러와 그의 측근들을 권좌에 앉혀 독일 국민에게 자유주의적이면서도 권위주의적인 체제를 보다 쉽게 강요하려는 것이었다. 이후의 전개는 세상에 잘 알려져 있지만, 그에 앞서 있었던 타협, 미숙한 권모술수, 그리고 무엇보다도 ‘부르주아 진영’의 어설픈 정치적 계산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이제야말로 그 모든 것을 다시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프란츠 폰 파펜(Franz von Papen)은 천재다. 적어도 그 자신과, 그를 지지하며 ‘안정’을 추구하는 부르주아 진영은 그렇게 믿고 있었다. 우파들의 통합을 통해 ‘안정’을 이루려는 그의 계획은 마침내 1933년 1월 30일 오전 11시 15분, 히틀러–파펜(Hitler–Papen) 정부의 취임 선서로 실현되었다.
1932년, 두 차례의 독일 국회 해산과 그에 따른 두 번의 총선거, 그리고 대통령 선거까지 거친 끝에 집권 세력의 지속성은 ‘국가적 통합’이라는 이름 아래 보장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이 통합은 민주주의를 폐지하겠다는 의도를 숨기지 않았다. 실제로 이 정부의 구성은 외형적으로는 일종의 신의 한 수처럼 보였다. 보수 우파 세력의 ‘국가 진영’은 나치당을 정부에 끌어들이려 시도한 지 벌써 3년이 되어가고 있었고, 그 3년 동안 나치당은 아돌프 히틀러가 총리가 되지 않는 한 어떤 형태로든 참여를 거부해 왔다.
1932년 6월 4일, 프란츠 폰 파펜은 정부 수반으로 임명된 뒤 히틀러를 향해 수차례 선의의 제스처를 보냈다. 그는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 제2대 대통령 파울 폰 힌덴부르크에게 국회의 해산을 요청했고, 돌격대(SA)와 친위대(SS)의 활동을 재허가했다. 이는 모두 재앙에 가까운 결정이었다. 나치당은 1932년 7월 31일에 치러진 총선에서 전체 득표율 37%를 기록하며 큰 지지를 받았다. 이는 이전보다 18%포인트나 상승한 수치였다.
하지만 선거 운동 기간 동안, ‘갈색 셔츠’를 입은 나치당의 돌격대(SA)는 폭력을 휘두르며 사람들을 위협하고 살해하기도 했다. 그 결과 그해 7월 한 달 동안에만 100명이 목숨을 잃었다. 파펜 자신도 1932년 11월 4일 연설에서 인정했듯이, 그는 히틀러와 헤르만 괴링이 내세운 그럴듯한 약속들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모든 것을 내주고 양보했다. 그럼에도 나치당은 그의 정부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제 전통적인 우파 세력도 점차 깨닫기 시작했다. 나치당은 신뢰할 수 있는 정치적 파트너가 아니며, 그들이 폭력과 맺고 있는 관계는 결코 가벼이 넘길 수 없는 심각한 문제라는 것을 뒤늦게 파악한 것이다.
부르주아 중심 세력의 꼼수
두 번째 국회 해산과 초라한 선거 결과로 인해, ‘부르주아 중심’ 세력은 유권자의 10%로 축소되었고, 파펜은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쿠데타적 조치를 고려했으나, 군부가 그 계획에 협조하지 않았다. 결국 정치적 고립 속에 파펜은 1932년 12월 3일, 총리직을 쿠르트 폰 슐라이허에게 넘길 수밖에 없었다.
슐라이허는 1930년부터 독일 우파의 실질적인 조종자 역할을 해왔으며, 처음에는 나치당과의 연합을 고려했지만, 그해 여름의 폭력적인 선거운동을 목격한 뒤 그 생각을 접었다. 그는 나치의 준군사조직인 돌격대를 군에 통합하려는 구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극우 세력이 시민의 평화를 위협하는 심각한 존재임을 깨닫게 되었다.
비록 현장 경험이 적은 탁상행정의 장교였지만 뛰어난 지성을 지닌 슐라이허는 이후 정치 지형을 재편하는 계획에 착수했다. 그 계획은 나치당 내부를 분열시키는 것으로, 당내 많은 간부들—예컨대 당의 서열 2위인 그레고어 슈트라서, 의회 교섭단체 대표였던 빌헬름 프리크— 이 우파 사회정책을 중심으로 한 정부 참여에 관심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슐라이허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을 품고 있었고, 은행·산업계·지주 계급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던 파펜은 1932년 말 나치와의 동맹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나치당이 내무부 장관 자리를 요구한 이유
투기꾼적 본능을 지닌 그는 기회를 감지했다. 국가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NSDAP)은 내리막길에 접어들고 있었으며, 1932년 11월과 12월에 치러진 여러 선거에서 많은 표를 잃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이번에야말로 ‘헐값’에 나치를 매수해 우파-극우 연립 정부를 구성할 적기라고 판단한 것이다. 이와 같은 연합은 이미 1930년부터 세 개의 주에서 시행되었으며, 관련 정당들로부터 큰 만족을 얻고 있었다.
나치당은 유능한 협력자로 드러났고, 항상 내무부를 요구했는데, 이 자리는 곧 모든 정보기관과 치안기구를 통제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심지어 대학에 이르기까지 교육 체계 전체를 장악할 수 있는 요직이었다.
이제 이 연합을 국가 차원으로 옮겨야 할 때였다. 다만, 핵심 쟁점에 양보가 필요했다. 히틀러는 총리가 되려고 했다. 그는 결코 그 자리를 포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무시무시한 부총리(파펜)를 옆에 두게 되고, 자유주의적 권위주의자와 민족보수 우파에게 지배당할 수도 있었다. 이는 실로 절묘한 한 수였다. 1933년 1월 30일, 12인으로 구성된 정부가 임명되었는데, 그 중 나치당 인사는 단 세 명뿐이었다. 그 가운데 한 명은 총리, 또 한 명은 아무 직책도 없는 무임소 장관이었다(1)!
파펜이 부총리로 임명되면서 그해 6월 4일에 구성되었던 이른바 ‘남작들의 내각’ 출신 장관 네 명이 이번 정부에서도 자리를 유지하게 되었다. 파펜은 베를린의 상류층 살롱에서 승리감을 만끽했다. 당시 유행하던 표현에 따르면, 나치들은 “길들여졌고”, “통제되었으며”, 히틀러는 “집무실 방구석에 몰려서 이제 곧 낑낑거릴 지경”이라는 평가까지 나왔다.
정치를 수문(水門)처럼 흐름을 조절할 수 있는 시스템으로 보는 수리공학적 발상에서 영감을 받은 이 분석은 반박할 수 없을 만큼 그럴듯해 보였다. ‘자유주의적 권위주의’(2)라는 개념으로 불리는 ‘부르주아 중심’을 강화하거나, 지지 기반을 잃고 있는 ‘부르주아 우파’를 메우기 위해서는 극우로 향하는 유권자들의 흐름을 가로채어 자신들의 편으로 돌려야 했다.
이 전략은 더욱 실현 가능해 보였다. 나치당은 본질적으로 자유주의 우파 및 민족보수 정당들에 대한 유권자들의 실망을 바탕으로 성장해왔기 때문이다.(3) 그리고 결국 우파 진영은 핵심적인 이념들을 공유하고 있었다. 즉, 민족주의, 보수주의, 사회적 다윈주의, 전통 엘리트에 대한 지지, 그리고 1932년 여름부터 긴축재정을 대신하게 된 친기업 정책들이다. 1930년부터 나치당에 합류한 경제계의 우상 히알마르 샤흐트 박사가 1932년 여름 발표한 『독일 경제정책의 원칙』은 모두를 안심시켰다. 앞으로의 미래는 자유주의적이며, 친기업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라는 메시지를 명확히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치당 집권의 물꼬를 튼 파펜과 슐라이허
파펜과 자유주의적 권위주의자들은 극우의 언어를 구사했다. 그들은 공산주의자들을 비난할 뿐만 아니라 사민주의자들까지 공격하고, ‘문화적 볼셰비즘(Bolschewismus)’이라는 허구적 허수아비를 저주했다. 이 ‘문화적 볼셰비즘’이라는 개념은 독일 우파가 느낀 도덕적 공황 상태를 응축한 상징이었다. 이 용어는 페미니즘, 도시화, 권리의 평등, 동성애, 예술과 문학의 현대성, 사회 정의, 그리고 ‘무국적자’들의 ‘코스모폴리타니즘’에 이르기까지, 기존 질서를 위협한다고 여겨지는 모든 흐름을 싸잡아 비난할 수 있는 수단으로 작용했다.
프란츠 요제프 마리아 폰 파펜, 곧 ‘베를 및 노이베르크의 엘프젤처’라는 전통 귀족 칭호를 지닌 인물(이때의 ‘엘프젤처’란 중세부터 소금 채굴권을 세습적으로 보유한 귀족 계급을 의미하며, 이는 파펜의 귀족 혈통과 사회적 지위를 부각하기 위한 표현이다—역주)은 SA 돌격대나 나치 계열 주간지 <데어 슈튀르머(Der Stürmer)> 같은 무례한 자들처럼 노골적으로 반유대주의를 외쳐대지는 않았지만, 내심 품은 생각은 그들과 다르지 않았다.
문학박사 요제프 괴벨스는, 언제나 단어에 민감했던 사람답게, 이러한 유사성에 우려를 표했다. 그는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파펜이 라디오 연설을 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A에서 Z까지 전부 우리 생각 그대로였다.”(4)
이는 성가신 정도가 아니라, 경고등이 켜질 만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자유주의적 권위주의 정부는 사실상 나치당이 요구한 거의 모든 것을 실행에 옮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친기업적 정책(보조금, 세금 감면, 규제 완화), 예산 절감과 ‘개혁’이라는 명분 아래 복지국가 해체, 그리고 여전히 권력을 유지하고 있는 좌파 세력에 대한 정면충돌이 이루어졌다. 국가 차원에서는 1930년 봄, 사민당(SPD) 소속 헤르만 뮐러 총리가 사임하면서 좌파는 더 이상 정권을 잡지 못하고 있었지만, 프로이센에서는 여전히 좌파가 정권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독일 제국처럼 연방제를 채택한 국가에서 프로이센은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독일 전체 영토와 인구의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9만 명 규모의 막강한 경찰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문화적 볼셰비즘’과 좌파, 더 나아가 공화주의적 문화 자체의 마지막 보루 역할을 하던 강력한 행정관료 집단이 존재하고 있었다.
1920년, 볼프강 카프(Wolfgang Kapp)와 발터 폰 뤼트비츠 장군이 주도한 군부 쿠데타가 베를린 총파업으로 인해 실패했던 사건은 여전히 강하게 기억되고 있었다. 그리고 1932년 7월 20일, 파펜은 명백히 중앙정부의 권한을 넘어서는 조치를 단행해 힌덴부르크 대통령에게 긴급명령에 서명하게 했다. 이것은 1919년 이후 거의 끊임없이 프로이센을 통치해 온 사민당 정권을 해임하는 결정이었다.
파펜은 ‘프로이센 제국 총감’의 직함을 받아 직접 통치를 시작했고, 각료들은 일괄 해임되었으며, 고위 행정관료 조직에 속한 인물들 가운데 ‘반국가적 요소’로 간주된 이들은 무력에 의해 숙청되었다. 국가 비상사태가 선포되었고, 군대가 수도에 배치되었다.
이 잔혹한 조치는 나치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고, 그들조차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요제프 괴벨스 박사는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우리 NSDAP 지도부에는 이 정부가 너무 많은 일을 해버려서 우리가 할 일이 남지 않을까 걱정하는 사람이 많다.” 실제로, 독일 우파를 구성하는 자유주의적 권위주의자들과 민족보수주의자들은 나치와 거의 모든 핵심 이념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단 한 가지를 계산하지 못했다. 극우 세력과의 동맹은 결국 극우에게만 이익이 된다는 점이다. 그것은 ‘말’에서부터 시작됐다. 그들의 언어를 빌려 쓰는 순간, 극우의 화두와 논리, 집착이 정당성을 얻게 됐다. 그리고 이는 실제 정치의 영역에서도 드러났다.
괴벨스, “우리는 그들에게 권력을 다시 돌려주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곧 행동으로 이어졌다. 이른바 ‘신사협정’은 권력에 대해 훨씬 더 급진적이고 전복적인 태도를 지닌 정치 세력에 의해 언제나 배신당하기 마련이다. 괴벨스는 이 점을 누구보다 정확히 간파했다. 그는 전통 우파가 나치와 너무도 손쉽게 손잡는 모습을 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고, 그들이 품고 있는 환상을 조롱하듯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퓌러(Führer, 히틀러 총통)가 부르주아 우파 내각의 부총리가 될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은 그 자체로 너무나 우스꽝스러워서 도무지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없다.”
이것은 단지 직책이나 위계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 사이에는 존재 방식, 세계를 바라보는 태도, 그리고 시간에 대한 감각 자체에 이르기까지 근본적인 단절이 있었다. 괴벨스는 밤이면 프리드리히 2세(프리드리히 대왕)의 서신을 읽으며 스스로를 위로하곤 했다. 그는 이렇게 곱씹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7년에 걸친 전쟁을 견뎌냈다. 그는 ‘쿠너스도르프 전투’(1759년 프로이센군이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에 참패한 전투—역주)에서 거의 모든 군대를 잃었지만(…).”
“그가 그때 손을 놓고 치욕적인 평화에 서명했더라면 프로이센은 결코 세계 강국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정치는 이성보다도 의지와 기개로 하는 것이다. 세상은 대담한 자의 몫이다. 퓌러(히틀러)의 위대함은, 오직 하나의 목표를 끊임없는 집념으로 추구하며, 그 목표를 위해 모든 것을 아낌없이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데 있다. 바로 이 점이 입으로는 히틀러와 같은 것을 원한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부르주아 정치인들과 퓌러를 분명히 구별 짓는 것이다.”
나치들은 모든 것을 차지하려 했고, 그 어떤 것도 내줄 생각이 없었다. 괴벨스는 이렇게 적었다. “우리는 그들에게 다시는 권력을 돌려주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나가게 된다면, 시체가 되어서 나가야 할 것이다.”
그토록 뚜렷한 전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극우와 손잡고도 자신들은 그 흐름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이 여전히 존재했다는 사실은 경악스럽기만 하다. 그들은 과거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거나, 애초에 배울 의지가 없었던 것이다.
착각에 빠진 극우·자유주의 세력, 히틀러에 권력 이양
그들은 “그쪽이 더 나아 보인다”라고 말하며, 정치권력을 잃기 훨씬 전부터 이미 문화와 언어, 담론의 장에서 패배—다시 말해 ‘그람시적 패배’의 징후를 분명히 보이고 있음에도, 극우의 화두와 언어를 거리낌 없이 차용하고, 그 흐름을 자신들이 통제할 수 있다고 착각했다. 그러나 그 담론의 역동성은 이미 오래전에 그들의 손을 떠나버렸다. 그리고 마침내, 나치가 우스꽝스럽게도 ‘자신들의 권력 장악’이라 불렀던 바로 그 사건 이후….
이른바 ‘권력 장악’이라는 표현과는 달리 나치의 권력 획득은 실제로 보수 및 자유주의 세력에 의해 이루어진 ‘권력 이양’에 불과했다. 그 유일한 ‘승리’를 가능케 한 핵심 인물은 파펜이었지만, 그는 곧 자신의 권한을 점차 박탈당하게 됐다. 그가 실질적으로 보유한 유일한 집행 권한은 ‘프로이센 제국 총감’ 직책이었다. 이 직책은 1932년 7월 20일부터 12월 3일까지 총리 자격으로 수행한 것이며, 그 후 후임자 슐라이허에게 넘겨주었다. 그러나 1933년 1월 30일, 히틀러-파펜 내각이 출범하면서 그는 부총리 자격으로 다시 이 직책을 맡게 됐다. 이 직책 덕분에 파펜은 프로이센 주 정부의 수반이자, 행정조직과 막강한 경찰 권력의 총책임자가 될 수 있었다.
경찰 최고책임자가 된 괴링, 좌파에 대한 살인면허 공표
그러나 파펜은 이 과정에서 다루기 힘든 동반자와 함께하게 됐다. 그는 히틀러-파펜 내각에서 무임소 장관으로 임명된 괴링과 함께 일하게 되었고, 괴링은 동시에 프로이센 내무장관이자 이 주(州)의 부총감으로도 임명되었다. 이러한 세부 사항들은 자칫 사소해 보일 수 있지만, 1933년 겨울, 당시 연방제 체계를 유지하고 있던 독일의 법적 구조 안에서는 결정적인 의미를 지닌다.
괴링은 제국 차원에서는 단지 무임소 장관에 불과했지만, 프로이센에서는 ‘최고 경찰 책임자’, 즉 실질적인 치안권자로 급부상했다. 당시 경찰 권한은 연방이 아닌 각 주의 소관이었기 때문이다. 괴링은 이 권한을 적극적이고 전략적으로 활용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 그는 나치당 출신 법률가 루돌프 딜스를 프로이센 정치 경찰의 수장으로 임명했고, 이 조직은 곧 게슈타포(Gestapo)로 개편되었다. 게슈타포는 기존의 경찰청장(프레펙)의 감독을 벗어나 내무장관인 괴링에게 직접 보고하는 독립적인 비밀경찰 조직으로 재편되었다. 이 변화는 불과 몇 주 뒤인 1933년 4월 26일에 공식적으로 단행되었다.
한편, 괴링은 2월 17일 ‘총격 규정’에 관한 포고령을 내렸다. ‘공산주의자들의 공격과 테러 행위’에 맞서 프로이센 경찰은 체계적으로 발포하도록 권장됐다. 그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과잉진압이나 ‘오발 사고’는 사전에 면책됐다.
“무기를 사용한 경찰 공무원은 (…) 나의 권위에 의해 보호된다.”
더 나아가, 신중한 대응 자체가 오히려 잘못으로 간주됐다. 괴링은 “억압 조치에 소극적으로 대응한 자는 징계와 행정상의 결과를 감수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공무원은 억압 조치를 소홀히 하는 것이 합법적 폭력을 행사하는 과정에서 저지를 수 있는 어떤 실수보다 더 중대한 잘못이라는 점을 분명히 이해해야 한다.”라고 선언했다. 즉, 괴링 내무장관은 무죄 추정의 원칙을 넘어 사실상 ‘살인 면허’를 공표한 셈이었다—바로 좌파를 향한 살인 면허였다.
왜냐하면 경찰은 “민족주의 집단(SA, SS, 철모단 등)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보여서는 안 되며”, 오히려 이들과 “최상의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지시를 받았기 때문이다.
괴링이 모집한 ‘보조 경찰’, 사민당 선거운동 전면 봉쇄
상황을 보다 명확히 하기 위해 괴링은 그해 2월 22일 ‘보조 경찰’ 5만 명을 새로 모집했다. 이로써 프로이센 경찰 병력은 총 14만 명으로 늘어났다. 이 보조 경찰관들은 모두 SA(돌격대)와 SS(친위대) 출신으로, 갈색 또는 검은색 제복 위에 ‘Hilfspolizei’(보조 경찰)라고 적힌 흰색 완장을 착용하고 거리에서 행진했다.
그로부터 몇 주 뒤, 다른 주들 또한 이 조치를 모방하면서 공공장소에서의 국가 권력의 상징은 더욱 희미해졌다. 단지 완장 하나만으로, 사설 민병대 소속 인물들이 공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은 것이었다.
이제 SA와 SS는 공산주의자, 노동조합원, 사민당원, 그리고 그들의 자의적 기준에 따라 ‘위험 요소’로 간주된 모든 이들에 대해 ‘합법적인 공포정치’를 자행할 수 있게 되었다. 이를 위해 수백 곳에 달하는 ‘비공식 강제수용소’가 급조되어 설치되었다. 창고, 폐건물(예: 오라니엔부르크의 옛 맥주 양조장), 심지어는 영화관(예: 베를린 템펠호프의 콜럼비아하우스)까지 수용소로 전용되었다. 괴링 휘하의 인물들은 좌파 진영을 철저히 파괴했다. 그들은 1933년 3월 5일 국회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사민당(SPD)과 독일공산당(KPD)의 선거운동을 전면적으로 봉쇄했다.
1933년 4월 7일, 괴링은 파펜을 대신해 공식적으로 프로이센의 제국 총감 자리에 올랐다.
다시 말해, 제국 부총리의 관저였던 보르지히 궁은 점점 실질적인 권한을 상실하게 된 셈이다.(5) 그럼에도 파펜은 직책을 유지했다. 왜냐하면 그는 여전히 독일의 새로운 지배자들에게 유용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자 중앙당의 전직 당원이었던 그는, 1933년 3월 23일 새 국회에서 ‘전권위임법’(1933년 3월 23일 통과된 법률로 히틀러 내각에 국회의 동의 없이 법률을 제정·시행할 수 있는 전권을 부여함으로써, 나치 독재 정권 수립의 법적 기반이 됨—역주) 통과로 이어지는 협상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나치와 바티칸, 권력과 신앙의 거래
이 법이 통과되기 위해서는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필요했으며, 히틀러–파펜 정부가 앞으로 4년 동안 국회의 동의 없이 법률 수준의 포고령을 발효할 수 있는 권한을 얻기 위해서는 카톨릭 중앙당의 표가 반드시 필요했다. 부총리 파펜은 중앙당 대표 루트비히 카스 주교와의 협상에서 중심적 역할을 맡았고, 카스는 일종의 보상으로 제시된 여러 약속에 기꺼이 설득되었다. 이후 파펜은 훗날 교황 비오 12세가 되는 바티칸 국무성 장관 에우제니오 파첼리와 함께 ‘제국-교황청 협약’을 협상했고, 이 협약은 1933년 7월 20일 바티칸에서 정식 체결되었다.
바티칸 협약(콘코르다트)은 파첼리의 오랜 숙원이자 야망이었다. 그는 과거 바이에른에서 교황청 대사(공식 명칭: 교황청 임시 교황 대리)로 재직할 당시 뮌헨과는 협약을 체결했지만, 이후 베를린 주재 교황 대사로 임명된 뒤에는 독일 제국 전체와는 협약을 맺지 못하고 있었다.(6)
바티칸의 이러한 의지는 카톨릭 신자인 파펜의 적극적인 협력과 맞물렸고, 여기에 나치당의 이해관계도 더해졌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권위 있는 국가인 바티칸과의 조약 체결은, 국제적 승인과 정당성이라는 측면에서 나치 정권에게 매우 귀중한 외교 자산이었기 때문이다. 그 효과는 바티칸에서 촬영된 유명한 사진 한 장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그 사진 속에서 파첼리는 협약 서명식을 주재하고 있으며, 그의 양옆에는 파펜과 카스 주교, 내무부 고위 관료 루돌프 부트만, 그리고 훗날 교황 바오로 6세가 되는 조반니 몬티니가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독일 보수세력과 군부를 공포로 몰아넣은 나치 돌격대장
그러나 1933년 여름의 승리는 파펜의 마지막 주요 정치 행위로 남게 된다. 그의 측근들과 내각 구성원들은 점차 나치 출신의 법률가들과 고위 관료들로 구성된, 실질적인 제국 정부의 중심부에서 밀려나게 된다. 이 나치 인사들은 2선, 3선급 인물들이었지만, 잘 교육받았고 야심차며 근면한 인물들이었다.(7)
히틀러를 “천박한 연극배우 같은 졸부”로 여겼던 전통 보수세력은 이들의 부상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파펜의 주변 인물들 사이에서는 점차 히틀러를 제거하거나 배제한 채 보수 세력이 주도하는, 이른바 ‘히틀러 없는 보수 혁명 시나리오’까지 거론되기 시작했다. 그 출발점에는 SA 대장 에른스트 뢈의 과격한 발언들에 대한 불안감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미 300만 명에 달하는 병력을 지휘하게 된 뢈은 스스로를 제국 내 “실질적인 2인자”라고 자처하고 있었다. 슐라이허가 한때 상상했던 것처럼 제국군이 SA를 흡수 통합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나치의 두 번째 혁명’, 즉 오랫동안 지체되고 있는 ‘사회 혁명’을 실현할 보증 세력은 바로 SA라는 인식이 퍼지고 있었다. 이러한 야심은 보수 세력과 군부에게 깊은 공포감을 안겼고, 그들은 히틀러에게 뢈을 공개적으로 배제할 것을 강하게 압박하기 시작했다.
1934년 6월 18일, 마르부르크 대학교에서 열린 연설에서 파펜은 나치당 내 사회주의적(좌파적) 성향을 대표하는 세력에 맞서 공개적으로 개입할 결심을 드러냈다. 그는 SA 소속의 평민 출신 인사들이 내세우는 과도한 사회적 요구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파펜이 강조한 바에 따르면, 나치와의 동맹은 어디까지나 히틀러가 1930년 이래로 재계에 반복해온 약속들에 기반한 것이었다.
즉, 기존 사회 계층 구조의 유지, 저임금 체계에 대한 합의, 재무장과 공공 발주를 통한 이윤 극대화, ‘마르크스주의’ 및 ‘문화적 볼셰비즘’의 파괴, 좌파 정당과 노동조합의 철폐가 그것이었다. 파펜은 거만하리만큼 단호한 어조로 질서의 회복을 요구하며 이렇게 요구했다. “혁명을 완수할 두 번째 물결이니 하는 말장난은 이제 그만둬야 한다.” 그리고 그는 이어서 되물었다. “앞으로 국유화가 많아질 거라고들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마르크스주의의 프로그램을 실현하기 위해 반(反)마르크스주의 혁명을 일으킨 것인가?” 파펜은 사회 문제는 재산의 보호와 ‘책임 있는 소유’의 방식으로 해결되어야 하며, 집단화의 무책임함, 곧 ‘약탈과 수탈’, 그리고 ‘사회화’라는 이름의 파괴로 해결해서는 안 된다고 강변했다. 그는 이러한 환상, 다시 말해 그가 보기에 당시 독일 자본가들의 공포 속에만 존재하던 허상, 그리고 ‘하층 계급의 끊임없는 반란’에도 이제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히틀러는 파펜의 이 주장을 전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13일 후, ‘장검의 밤’, 즉 SA(돌격대) 수뇌부 숙청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그동안 SA 아래에 있던 SS(친위대)가 독립적인 권력으로 부상하게 되는 결정적 전환점이 되었다. 히틀러와 그 측근들에 대한 빈정거림이 오가는 틈새로, 파펜의 연설은 19세기 ‘유능한 자들’의 자유를 중시하던 부르주아 계층의 불만 또한 드러냈다. 그들은 읽고, 말하고, 듣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정신의 가치를 부정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위대한 모든 것은 정신에서 비롯된다. 정치에서도 마찬가지다”라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파펜은 이렇게 촉구했다. “독일인은 수세기에 걸친 치열한 투쟁을 통해 사적 삶의 안전과 자유를 쟁취해왔다. 이제 그 자유를 침해하는 공격을 끝내야 할 때다.” 그리고 그는 말을 계속 이어갔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자유는 본디 게르만적인 개념이라는 점이다.”
장검의 밤: 나치와 손잡은 우파의 최후
독일은 결국, 우파가 나치와 손잡으면서 예기치 않은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좌파를 파괴한다? 물론이다. 노동조합원,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들이 살 수 없도록 만드는 것? 당연하다. 국가는 기본권을 보장하던 헌법상의 권리를 스스로 포기하고, 사법적 통제 없이 사람들을 강제수용소에 ‘보호 구금’할 수 있는 제도를 도입한다? 물론, 그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좌파와 하층민들을 겨냥한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부르주아들이 이제 자신이 좋아하던 <포시셰 차이퉁>(계몽주의와 자유주의적 전통을 가진 베를린의 대표적인 교양 신문. 1934년 나치의 언론 통제로 인해 폐간. 중산층, 부르주아, 자유주의 지식인들이 주요 독자층—역주) 일요판 연재소설조차 읽을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이야말로 터무니없는 일이다.
나치 수뇌부는 격분했다. 파펜의 연설문은 즉시 압수되었고, 복제도 금지되었으며, 진짜 작성자인 에드가 융은 체포되었다. 파펜은 히틀러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의 충성을 해명하며 이렇게 변명했다. “이 연설은 당신과 당신의 위대한 과업의 성공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제가 총리였을 때, 독일의 부흥은 당신과 당신의 방식으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았기에, 진정으로 민족적인 모든 세력의 통합을 위해 당신에게 길을 열어준 것입니다.”(8) 이처럼, 오랜 동행의 논리는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다. 파펜은 그 연설에서 어디까지나 “당신의 위대한 이상을 방해하는 자들”을 비판한 것일 뿐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총리 파펜 주변에 정권을 위협할 수 있는 반대 세력의 형성 가능성이 구체화되자, 나치 지도부는 그쪽 역시 제거 대상으로 판단했다. 1934년 6월 30일부터 7월 3일까지 이어진 ‘장검의 밤’ 기간 동안, 살해된 150~200여 명 중 대부분은 SA(돌격대) 소속 인사들이었지만, 그 가운데는 1933년 1월 30일, 나치와의 동맹이 이익이라고 믿고 그들에게 권력을 안겨준 우파 인사들 수십 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나치에 협조했던 우파 인사들, 나치에 암살돼
1년 반이 지난 뒤, 나치를 총리직에 앉히고 전권위임법 통과를 가능케 했던 이들은 어떤 운명을 맞았을까? 슐라이허는 죽었다. 그는 1932년 여름부터 가을까지, 우파 정당들과 함께 ‘국가적 통합’을 도모하며 나치당의 참여를 시도했으나, 결국 입장을 바꾼 인물이다. 1934년 6월 30일 정오 직후, 그는 자택에서 보안국(SD) 요원 6명에게 여러 발의 총을 맞고 살해되었다.
그의 친구이자 라이벌이었던 파펜은 괴링의 보호 덕분에 가까스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괴링은 그를 자택에 연금시켜 살해 위협에서 벗어나게 했다.
그러나 파펜의 측근들은 살아남지 못했다. 에드가 융과 헤르베르트 폰 보제는 SS 요원들에 의해 살해당했다. 보제는 제국 부수상 관저 내 자신의 사무실에서, 융은 정확한 장소조차 확인되지 않은 곳에서 살해되었고, 융의 시신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그 가운데 유일하게 출세한 인물은, 가장 위협적이지 않았던 자였다. 오스카르 폰 힌덴부르크, 그는 단지 ‘그 아버지(힌덴부르크 대통령)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정치에 개입했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1933년 1월 22일부터 30일까지의 결정적 시기에 개입한 공로로 풍부한 보상을 받았다. 프로이센 주와 제국 정부는 그에게 토지를 하사했고, 그는 자신의 노이데크(Neudeck) 영지를 더욱 확장할 수 있었으며, 거의 전면적인 세금 면제 혜택까지 누렸다. 한때 단지 아버지의 비서처럼 활동했던, 실패한 장교 출신이었던 그는 1934년 8월 아버지가 사망하자 ‘장군’이라는 칭호까지 수여받았다. 그리고 히틀러에게 마지막으로 봉사하기 위해, 라디오 연설을 통해 이렇게 선언했다.
“노(老) 원수는 후계자로 퓌러를 원했다.”
한편, 언론 재벌 알프레트 후겐베르크는 1933년 6월 이미 장관직을 박탈당했고, 그의 방대한 언론 제국도 국가 기관들에 헐값으로 매각되었다. 이제 정치적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한 이 극우 세력의 원로는 은퇴한 재벌로서 사교 행사에나 얼굴을 내미는 삶을 살고 있었다.
히틀러에 목숨 구걸한 파펜, 나치 외교관으로 몰락
그리고 파펜. 1934년 7월, 그는 기이하고도 애매한 ‘틈새’에 머물러 있었다. 정부의 일원이기는 했지만, 그의 사무실은 게슈타포에 의해 봉인되었고, 자신은 출입조차 할 수 없었다. 히틀러에게 무려 여덟 통의 편지를 보냈지만, 단 한 번도 답장을 받지 못했다.(9) 그 편지들 속에서 그는 살해된 자신의 측근들에 대해 슬퍼하면서도 히틀러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서류를 압수당한 일”과 “임시 구금으로 인해 손상된 자신의 명예”를 한탄하며, “자신의 처지가 참을 수 없을 만큼 불편하다”라고 호소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히틀러에게 “직접 찾아가 악수하며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라고 말하고, “당신과 당신의 위대한 독일 재건 사업에 여전히 충성을 바친다”라고 맹세하며, “자신에게 가해진 특별한 처우를 거두어달라”, 그리고 “이 부끄러운 게임을 이제 끝내달라”라고 애원했다. 그를 살려두기로 한 결정은 철저히 냉정한 공리주의적 계산에서 비롯되었다. 파펜은 실제로 큰 공을 세웠다. 힌덴부르크 부자(父子)를 설득해 히틀러를 총리로 임명하게 만들었고, 우파와 중도 정당들을 교묘히 조종해 전권위임법 통과를 이끌어냈으며, 바티칸과의 ‘라이히 콘코르다트’ 협정을 협상하고 서명했다. 그리고 그는 앞으로도 여전히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인물이었다. 1934년 7월, 오스트리아에서 벌어진 사건들은 그를 다시금 필요불가결한 존재로 만들었다. 나치가 주도한 쿠데타로 인해 오스트리아 수상 엥겔베르트 돌푸스가 암살당하고, 쿠데타는 실패로 끝났다. 히틀러는 경악한 채, 20년 전 프란츠 페르디난트 오스트리아 황태자가 암살당한 사건처럼 ‘또 하나의 사라예보’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바티칸과 유럽 보수 엘리트층에 정통하며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인물을 비엔나에 급파하는 것이 필수적이었고, 바로 그 이유로 파펜은 독일의 오스트리아 대사로 임명됐다. 그는 완강하고도 충실하게 히틀러의 대외정책에 봉사했다. 쿠르트 슈슈니크가 이끄는 오스트리아의 민족-가톨릭 독재 정권과 협상하며, 비엔나가 점차 자국의 무역·외교 정책에 대한 주권을 상실하도록 만드는 과정에 앞장섰고, 이는 결국 1938년 3월의 오스트리아 합병으로 귀결되었다. 합병 시점에 다뉴브 강에서 익사체로 발견된 자신의 협력자 빌헬름 폰 케텔러의 암살에 대해 파펜은 한 마디 항의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터키 주재 제국 대사로서, 자신의 복종적인 외교관 인생을 꿋꿋이 이어갔다.
글·요한 샤푸토 Johann Chapoutot
역사학자. 『무책임한 자들: 누가 히틀러를 권좌에 올렸는가?』(갈리마르, 파리, 2025)의 저자
(1) 「히틀러, 권력 장악의 이면」,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24년 8월호 참조.
(2) 칼 슈미트와 헤르만 헬러, 『권위주의적 자유주의에 대하여(Du libéralisme autoritaire)』, Zones 출판사, 파리, 2020.
(3) 독일 국가인민당(DNVP), 독일 국민당(DVP), 그리고 더 적은 비중으로 중앙당(Zentrum)과 바이에른 인민당(BVP).
(4) 요제프 괴벨스, 1932년 8월 28일자. 『요제프 괴벨스 일기 1923-1933(Journal de Joseph Goebbels. 1923-1933)』, 탈랑디에, 파리, 2006.
(5) 라이너 오르트, 『“야당의 집무실”인가? 1933~1934년 제국 부수상실에서의 정치와 국가 개편 계획』, 뵐라우, 쾰른, 2016
(6) 마리 르방, 『베를린의 파첼리. 바이마르에서 히틀러까지의 바티칸과 독일(1919-1934)』, 렌 대학교 출판부, 2019.
(7) 크리스티앙 앙그라오, 『믿고 파괴하라. SS 전쟁 기계 속 지식인들』, 파야르, 파리, 2010. 또한 『복종할 자유』, 갈리마르, 파리, 2020도 참조.
(8) 앙드레 포스테르, 라이너 오르트, 「프란츠 폰 파펜이 아돌프 히틀러에게 보낸 편지, 1934년 여름」, <시대사 분기학술지(Vierteljahreshefte für Zeitgeschichte)>, 제63권 2호, 뮌헨, 2015.
(9) 요한 샤푸토, 『무책임한 자들: 누가 히틀러를 권좌에 올렸는가?』, 갈리마르, 2025에 인용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