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를 주는 진실, “진심을 담아 드립니다”

프랑스어 교사가 학부모에게 보낸 이메일 회신

2025-05-09     프랑수아 베고도 | 작가

『심리학(Psychologies)』(2024년 4월 4일, 암스테르담 출판사 발행)의 저자 프랑수아 베고도는 부르주아 사회의 심리적 움직임을 분석한다. 실제 혹은 가상의 상황을 바탕으로 작가는 우리가 스스로에게 만들어낸 이미지 이면에 자리한, 우리를 스쳐 지나가는 어두운 생각들과 행동의 동기를 포착하고자 한다. 즉, 작가는 개인의 통제를 벗어나 있으면서도 사회적으로 구성된  사안을 모두 들여다보려는 것이다.

 

2024년 3월 12일 월요일 밤 9시 41분, 엘자 라공의 메일함에 세 줄짜리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엘자는 국어과 정교사로 마흔이 채 되기 전에 이미 강단에서 15년 가까이 보낸 인물이었다. 글루텐에 민감한 체질이며, 점성술의 별자리는 사수자리다.

메일의 내용은 이랬다.

“안녕하세요, 지금 4학년 B반의 독서 목록을 점검하던 중입니다. 『삼총사』에 대해 약간 궁금한 점이 생겨 연락드립니다. 선생님께서 추천하신 판본은 100쪽 분량의 축약본인데, 목록에는 ‘완역본’으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혹시 혼동을 줄이기 위해 정정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감사합니다. 진심을 담아 인사드립니다.”

메일의 발신자는 에스텔 드몽조. 로베르-바댕테르 중학교에 다니는 마리우스 드몽조의 어머니였다.

10년 전만 해도 이런 메시지는 상상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2014년 당시만 해도 중학교의 디지털 시스템은 학부모에게 교사의 업무용 이메일 주소를 제공하지 않았으며, 이른바 코로나 시기를 거치며 인류의 비대면 활동이 급격히 증가한 이후에야 이러한 소통 방식이 일상적인 관행으로 자리 잡았다. 그런 점에서 에스텔 드몽조가 엘자 라공에게 보낸 이 메시지는 학부모와 교사 간 협업의 모범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한쪽은 독서 목록에서 발견한 사소한 오류를 지적하고, 다른 한쪽은 키보드를 몇 번 두드리는 것만으로 문제를 바로잡을 수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일이 마리우스의 학업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다. 학부모와 교사가 함께 한 아이의 성공을 염려하며, 공통의 목표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뜻깊은 일이었다. 

 

교사를 긴장시킨 학부모의 이메일

엘자 라공 입장에서도 기뻐할 일이 두 가지나 있다. 첫째, 어떤 어머니가 자신의 수업 내용을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있다는 사실. 둘째, 그 어머니의 세심한 시선 덕분에 수업 내용을 더욱 정교하게 다듬을 수 있게 되었고, 그만큼 교육적 책임의 부담도 조금 덜게 되었다는 점이다. 마리우스 학생의 성공은 교사와 부모가 함께 이뤄낸 공동의 성과, 일종의 협업이다.

그런데, ‘진심을 담아 인사드립니다’로 공손하게 마무리된 에스텔 드몽조의 네 줄짜리 메일은 오히려 엘자 라공에게 긴장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녀는 지금 다리를 포개고 퓌통(futon,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는 얇은 매트리스나 이불—역주) 위에 앉아 노트북을 허벅지에 올려놓은 채였다. 그 메시지를 읽는 순간, 그녀는 몸이 굳어버렸다.

엘자의 긴장은 무엇보다도 그 메시지가 지닌 이중적인 침입성 때문이었다. 첫째는 저녁 시간에 대한 침입이다. 그녀는 막 <Succession 시즌 2>, 에피소드 4를 시청하던 중이었다. 잠시 영상을 멈추고 메일함을 열어본 것인데—사실 그냥 넘길 수도 있었던 일이다. 하지만 아무리 마음을 다잡아도, 엘자는 캘리포니아 서버를 거쳐 도착한 메시지를 몇 초 안에 열어보지 않고는 도무지 견딜 수 없는 성격이다.

둘째는, 자신의 직업적 영역에 대한 침입이다. 엘자는 교실을 자신의 전용 구역, 곧 자율적으로 일할 수 있는 공간으로 여긴다. 그 공간은 공식 시험과 ‘잡 데이팅’(job dating. 구직자가 여러 고용주와 짧게 면접을 보고 후속 연락을 기다리는 방식—역주) 같은 절차를 통해 획득한 전문 자격으로 보장된 영역이다.

세면대 수리법을 배관공에게 설명하지 않듯, 탈세 기술을 제롬 카위작에게 설명하지 않듯, 수업 방식 또한 교사에게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엘자에게 교실은 설명을 듣는 곳이 아니라 설명을 하는 곳이며, 그 안의 모든 설계는 전문가인 교사의 몫이다.

 

학부모의 교육 개입권, 트로이의 목마?

사회적 동물로서의 직감, 그리고 정치적으로 민감하거나 피해의식이 강한—혹은 그 둘 다인—몇몇 동료 교사들의 말을 떠올린 끝에 엘자는 한 가지 의심을 품게 됐다. 학부모용 디지털 인터페이스는 ‘교육의 유연성’을 명분으로 도입되었지만, 결과적으로 학부모의 개입을 확대하고 교사에게는 새로운 부담을 지운다. 이는 과거 교사 신분으로 인해 면제되었던 성과 의무를 교묘히 끼워 넣기 위한 전략이라는 것이 엘자의 의심이다.

즉, 학부모의 교육 개입권은 시장 논리가 침투하기 위한 트로이 목마이며, 공무원 조직의 관성으로 굳게 닫혀 있던 성벽을 허무는 수단이라는 해석이다. 이런 인식 탓에 엘자는 가끔 학부모의 메시지에 일부러 답하지 않는 자율권을 자신에게 부여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메시지 중 단 한 건이라도 교묘하고 은근한 어조를 띠고 있을 경우, 그녀의 신경이 마치 비명을 지르듯 즉각적으로 반응한다는 점이다.

신경은 디지털 상호작용의 연료다. 이성적으로는 그냥 넘기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엘자의 손가락은 어느새 키보드를 향해 달려간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그녀는 분명 후회할 것이다. 눈을 뜨자마자, 전날 자신이 보낸 답장이 떠오르고, 그녀는 늦은 사과와 화해의 의미로 PS 한 줄을 덧붙이게 될 것이다.

그러나 공화국 교사로서의 자존심은, 그 PS의 말미에 이모티콘 하나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어쩌면 접이식 매트리스 위에서 굳어버린 그녀의 몸은, 단순한 짜증이 아니라 내면 깊은 불안의 징후일지도 모른다. 엘자는 누군가 자신의 수업 방식에 개입하는 것을 극도로 불편해한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가 자신의 전문성에 절대적인 확신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 확신이 점점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해마다 수업을 마치고 교실을 나설 때면, ‘나는 정말 잘하고 있는 걸까?’ 하는 질문이 마음속에서 고개를 든다. 그 질문은 처음에는 희미한 불안에 불과했지만, 이제는 거의 확신처럼 그녀를 짓누른다. ‘나는 점점 더 형편없는 교사가 되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 엘자는 긴장한다.

왜냐하면 그녀에게는 배관공의 확신, 즉, 결과로 증명되는 기술자의 단단한 자부심이 없기 때문이다. 배관공은 도착해서 고장 난 배관을 고친다. 그가 떠난 뒤, 물은 새지 않는다. 확실하고 눈에 보이는 성과다. 

 

교사의 자의식과 불안 심리를 건드린 이메일

하지만 교사는 다르다. 아침에 들어선 교실은 시끄럽고, 어지럽고, 무기력하다. 오후가 되어 교실을 나설 때도, 별다른 변화는 없다. 그 하루에서 얻는 것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무력감과 ‘과연 내가 뭔가를 가르치긴 한 걸까’ 하는 깊은 회의감뿐이다.

그리고 그런 감정을 에스텔 드몽조의 그 짧고도 정중한 메시지가 고요히 그러나 날카롭게 건드린다. 그것은 단지 교사 한 사람의 예민함이 아니라, ‘교사’라는 존재가 안고 있는 구조적이고도 만성적인 불편함, 곧, 교사로서의 자의식과 불안이다. 결국, 사람을 가장 깊이 상처 입히는 것은 틀린 말이 아니라, 맞는 말이다.

적어도 엘자는 에스텔의 이메일에서 은근한 비난의 기색을 분명히 감지했다. 겉보기엔 순진해 보이는 그 질문은, 사실 절반쯤은 순진하지 않았다. 에스텔은 묻고 있는 게 아니었다. 놀라고 있었고, 아니, 놀라는 것이 아니라 한탄하고 있었다. 그건 마치, 가사 도우미가 청소기를 돌린 뒤에도 카펫 위에 남아 있는 빵 부스러기를 보고 여주인이 느끼는 묵묵한 실망과도 같았다.

에스텔은 정중한 어투라는 얇은 가식의 베일 아래에서 아들의 프랑스어 교사가 소설 『삼총사』의 완역본이 아닌 축약본을 추천했다는 사실에 놀라고 있었고, 한탄하고 있었다. 엘자의 예민한 레이더는 그 진의를 정확히 간파했다. 에스텔은 4학년 B반의 프랑스어 교사가 학생들, 특히 마리우스에 대해 야심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이제, 엘자는 그 기억을 떠올렸다. 개학 초 학부모 상담회에서 드몽조 부인은 마리우스의 뛰어난 자질에 걸맞는 독서 프로그램이 필요하다고 우려를 나타냈었다. 그런데 지금 축약본을 읽게 한다는 건, 결국 수준을 낮추는 일 아닌가? 그것은 결국 내가 손을 놓았다는 뜻이고,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며, 믿고 맡긴 사람을 저버렸다는 뜻이다. 마치, 팔아서는 안 될 상품을 속여 판 것처럼.

 

학생 어머니가 이메일을 쓴 진짜 이유는?

그날 저녁, 엘자의 머릿속에 의심이 스며들어 좋아하던 드라마마저 포기하게 된 이유는, 그 의심이 정확히 그녀의 급소를 찔렀기 때문이다. 맞다. 어떤 의미에서는 엘자는 이미 포기한 상태였다. 자신이 선택한 작품을 모든 학생들에게 읽히려는 시도를 포기했고, 문학에 대한 사랑을 전하려던 사명감도 내려놓았으며, 틱톡 앞에서 자신의 패배를 인정한 셈이었다.

자기비하에 관해 누구보다 능숙한 엘자로서는, 그날 밤 이메일이 불러일으킨 사소한 자존심  손상이 단순히 메시지를 보낸 사람의 말투 때문만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른다. 그 상처는 어쩌면, 그녀가 이미 오래도록 품고 있던 열등감과 닿아 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학생 어머니 에스텔은 여성 잡지의 문화부 기자이기 때문이다. ‘기자’라는 직업이 엘자를 압도하는 것은 아니다. ‘문화부’라는 단어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엘자 스스로도 어쩔 수 없이 인정하게 되는 것이 있다. 그건 바로, 기자라는 직업이 갖는 상징적이고 실질적인 위상이 자신을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위축시킨다는 점이다. 낯선 사람 앞에서 “기자입니다”라고 말하는 편이 가끔 미안한 듯 어깨를 으쓱이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교사예요”라고 소개할 때 느끼는 그 난처함보다는 분명 덜할 것이다.

무엇이 미안한 것인지, 왜 미안해해야 하는 것인지 그것은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에스텔과 엘자가 대화를 나누게 될 때면, 한쪽의 사회적 여유로움과 다른 한쪽의 사회적 위축감이 맞부딪치고, 결국 후자는 전자가 자신을 깔보고 있다고—적어도 자신보다 우위에 있다고—명확히 느끼게 된다.

물론 에스텔은 그런 인상에 강하게 반박할 것이다. 그녀는 아마 교사들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강조하며 항변할 것이다. “그들이야말로 감독 기관으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서도 미래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신경 조직은 이미 무의식 중에 이해하고 있다. 프랑스어 교사에게 말을 걸 때, 자신이 하급자에게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렇다면 하급 직원인가? 피고용인? 서비스 제공자인가? 자유주의자인 에스텔은 세금을 통해 공무원인 엘자의 급여를 지불하는 셈이며, 게다가 드몽조 가정은 이 학교에서도 가장 많은 세금을 내는 편일 것이다.

바로 이 사실이 에스텔과 엘자 사이에 놓인 암묵적인 계약의 조건을 규정짓는다. 즉, 요컨대, “우리가 이 공립학교에 아이를 보내는 유일한 조건은 이곳의 교육 수준이 우리 계층과 어울릴 만큼 우수해야 한다”라는 것이다.

 

이메일 행간에 담긴, 학생 가족의 작은 폭풍

이런 관점에서 보면, 학생 어머니인 에스텔의 세련된 메시지는 다음과 같은 행간의 의미를 품고 있다고 읽을 수 있다.

“라공 선생님, 만약 마리우스가 받는 수업이 저희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고 판단된다면, 만약 저희 아들이 고작 ‘축약된’ 교양밖에 배우지 못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면, 저희는 공교육에 대한 깊고도 본능적인 애착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아프더라도 마리우스를 생트-세실 중학교로 전학시키는 편이 더 낫겠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엘자는 지금, 이 문장들처럼 문제를 그렇게 명확히 의식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사회적이고 직업적인 취약성으로 예민해진 감수성을 지닌 까닭에 에스텔이 보내온 그 친절한 이메일에서 은근한 협박의 기운을 감지했다. 그러나 엘자가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지난 4월 이후 드몽조 가족이 조용히 겪고 있는 작은 폭풍이었다. 그리고 사실, 그것이야말로 에스텔이 이메일을 쓰게 된 진짜 이유였다.

사실, 에스텔과 아르튀르 드몽조 부부의 결혼생활은 이미 파국을 맞고 있었다. 연극배우로 이름을 알린 뒤, 정치인과 기업가들을 상대로 미디어 트레이닝 전문가로 성공적으로 전환한 남편 아르튀르가 파리 근교의 소도시에서 환경 담당 부시장으로 일하는 고객과 불륜 관계를 맺었기 때문이다. 몇 장의 적나라한 사진이 담긴 화면을 우연히 본 순간, 두 사람 사이에는 회복 불가능한 갈등이 촉발됐다.

최종적인 법적 정리를 기다리는 동안, 아르튀르는 가까운 곳에 작은 스튜디오를 얻어 따로 나와 지내고 있었다. 물론, 그는 그 스튜디오에서 자신이 마음을 준 그 부시장과 일주일에 세 번이나 몸을 포개며 지낸다는 사실을 에스텔에게 비밀로 했다.

이혼을 앞두고 부부는 13세와 9세인 두 아들에게 이번 상황이 최소한의 상처에 그치길 바라며 부모로서의 책임을 다하려 애썼다. 하지만 최근 몇 주간 반복된 부부 싸움이 아이들에게 아무런 영향을 남기지 않기를 바란다는 건, 사실상 기적을 바라는 일이었다. 실제로 에스텔은, 큰아들이 점점 자기 안으로 움츠러들고, 간신히 나누는 대화마저도 엉망이 되고, 식사시간에만 방 밖으로 나와 급히 밥을 먹고는 다시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예전에는 자신이 직접 만든 랩 음악의 반주를 들려주던 아이가 이제는 아무것도 공유하지 않았다. 이런 일은 에스텔을 괴롭혔고, 그녀 안에 지울 수 없는 죄책감을 남겼다. 잡지사의 디자인 섹션 편집장인 아믈린은 “이 모든 상황은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다독였지만, 에스텔을 갉아먹는 후회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부부가 성공하려면 두 사람의 노력이 필요하지만, 실패하는 데도 두 사람의 잘못이 있는 거야.”

에스텔은 흐느끼며 울었고, 만약 아르튀르가 자신과의 결혼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을 얻었다면, 그가 유럽 생태녹색당 소속의 그 요염한 여인에게 눈길을 줄 일도 없었을 것이라 확신했다.

잠 못 드는 밤들을 보내며 에스텔은 지난 몇 년간의 일을 자꾸 되새겼다. 주말 계획을 먼저 제안하지 않았던 일, 브뤼셀에서 열리는 도자기 박람회 참석을 이유로 자주 집을 비우며 남편을 소홀히 했던 일들. 그 모든 사소한 회피들 하나하나가 마치 되감기 필름처럼 머릿속을 돌고 또 돌았다.

약물치료를 병행한 이후 넉 달간 무기력한 시간을 보내면서 몇 권의 자기계발서를 읽고, 심리상담가들의 수많은 동영상 강의를 본 덕분에 에스텔은 다시 일어설 힘을 조금씩 되찾았다. 그녀는 삶의 중심을 다시 세우기로 결심했다. 본질적인 것에 집중하자. 그녀가 말하는 본질이란, 바로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파리 패션 위크 참석도 기꺼이 취소할 수 있었다. 전적으로 어른의 잘못인 이혼 때문에 아이들이 피해를 입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건 마치, 아이들의 치열이 고르지 않은 것이 아이들 탓이 아닌 것과 같은 이치였다.

 

“시험 전에 담배는 눈감아 주지만, 약물은 안돼”

아들이 음악학교 수업에 두 번째로 정당한 이유 없이 결석하자, 에스텔은 아들을 청소년 전문 심리상담가에게 데려갔다. 마리우스의 환기되지 않은 방에서 담배 냄새가 코끝을 스쳤을 때, 그녀는 아들과 신뢰의 약속 하나를 맺었다.

“담배까지는 눈감아 줄게. 하지만, ‘바칼로레아 시험’(프랑스 고등학교 졸업 시험이자, 대학 입학 자격 시험—역주) 전까지는 절대로 다른 약물에는 손대지 않겠다고 약속해.”

만약 마리우스가 아이스하키 클럽 친구들의 영향으로 몇 번 그런 걸 피웠다고 솔직히 털어놓는다면, 그녀는 그 잘못은 어디까지나 아빠와의 관계 악화로 겪는 고통 탓이라고 받아들일 작정이었다. 가슴을 뛰게 만드는 교사 한 명조차 없는 학교에서 마리우스가 의지할 수 있는 건 결국 자기 자신뿐이었다. 그가 너무 이른 나이에 대마초에 의존하게 된다면, 신경정신과 전문의 수피안 갤러거가 말하는, 이른바 ‘성공의 길’은 거기서부터 막히게 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들은 에스텔의 결심을 더욱 굳건하게 만들었다. 

a) 매일 밤 잠들기 전에 스스로에게 허락하던 작은 대마초 한 개비를 끊기로 했고, b) 아이들 곁에 더 많이 있어 주기로 결심했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b1) 아무리 채식용이라고 해도 피자 주문을 줄이기로 했고, b2) 아이들의 학업 생활에 보다 적극적으로 관여하기로 한 것이다.

 

“마리우스는 오로지 점수 따는 독서만 해요”

새 학기가 시작되었을 때, 그녀는 단 두 표 차이로 학부모 대표 선거에서 낙선했다. 1월이 되자, 아이들의 외출과 귀가 시간을 더 철저히 관리하기 위해 회사에 요청해 주 1일의 재택근무를 추가로 허락받았다. 아이들이 영화관에 가기 전에는 숙제를 끝냈는지 꼼꼼히 확인했고, 하루에 허용된 게임 시간을 줄이면서, 소아 자연치유 전문가 잉그리드 비안다르가 강조한, 이른바 ‘가족을 만드는 공유의 시간’을 늘리려 애썼다.

이후 그녀는 아이들의 성적표를 오랜 시간 들여다보았고, 역사 선생님과 함께 이민사 박물관 견학에 자원봉사자로 참가했으며, 유럽식 클래스 폐지 소문에 대응하기 위해 결성된 학부모 7인의 왓츠앱 단체 채팅방에도 가입했다. 주요 과목의 교사들과 개별 면담 일정을 잡았고, 그중 엘자 선생님과의 면담에서는 대화 중 선생님이 저지른 두 가지 문법적 실수를 지적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러던 중, 에스텔은 「프랑스 혁명기의 영화 각색」 단원에서 다룰 예정인 작품 목록을 자세히 살펴보다가 그 안에 『삼총사』가 축약본으로만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놀랐다. 그녀는 그것이 단순한 실수인지 확인하고자, 일요일 저녁 해당 교사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하지만, 겉보기에 무심한 이 질문은 상대방인 엘자를 격노하게 만들었다. 엘자는 같은 날 밤 11시 44분, 전자메일로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응수했다.

“만약 제가 4학년 B반 학생 중 단 한 명이라도 뒤마의 완역본을 끝까지 읽을 수 있으리라 믿었다면, 제가 가장 먼저 그것을 추천했을 겁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 학급의 학생 중 그 두꺼운 작품을 끝까지 읽어낼 수 있는 학생은 없습니다. 뛰어난 마리우스조차도 말이지요. 이제는 인정하셔야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마리우스가 학교라는 무대에서 보여주는 뛰어난 연기력과는 달리, 그는 거의 책을 읽지 않으며, 오로지 점수와 성적표를 위한 독서만 하고 있다는 사실을요. 이는 오히려 부모님께서 몸소 보여주신 실용주의적 사고를 그가 충실히 물려받았다는 증거 아닐까요.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진심을 담아 드립니다.”

 

 

글·프랑수아 베고도 François Bégaudeau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