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이 오른쪽 날개라면, 왼쪽엔 누가 서는가?
2024년 12월 3일은 윤석열과 이재명의 운명, 동시에 국민의힘과 민주당의 운명이 극적으로 엇갈린 날이다.
윤석열은 ‘친위 쿠데타’라는 초유의 망동으로 자신과 자신의 진영을 민주사회에서 더 이상 발 붙이기 힘든 반체제 세력으로 전락시켰다. 반면 이재명은 라이브 유튜브 방송을 하며 국회로 달려가, 그 앞에 모인 시민들 엄호 속에 민주당 의원들을 이끌고 계엄시계를 제자리로 되돌려 놓는데 성공했다. 한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고, 온전히 민주적인 방식으로 법적 절차에 따라 당신이 잠든 사이 침몰할 뻔했던 대한민국호가 가까스로 위기를 면한 것이다. 그의 빠른 결단은 27년 전인 1997년 12월3일, 파산한 대한민국 정부가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했던 장면과 극적으로 대비되는 순간이었다. 무능하고 무책임했던 정부 관료들이 5천만의 삶을 재앙으로 몰아갈 수도, 명민한 판단과 재빠른 실천으로 위기에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구해낼 수도 있었다.
윤석열의 계엄 발표 이후 3시간 동안, 이재명은 탁월한 위기관리 능력과 민주당에 대한 완벽한 장악력을 입증했다. 시민들의 거대한 힘을 지렛대 삼아 제 힘으로 사용할 줄 알았고, 배부른 거대 야당 민주당을 용의주도하게 움직이는 정예 부대로 바꿔놓는 용병술을 입증했다.
바로 그날, 차기 대통령은 이미 정해진 셈이었다. 거듭되는 국가적 위기에 신물이 난 대한민국 국민에게 이처럼 확실한 위기관리 능력을 실전으로 펼쳐 보인 정치인은 없었다.
그날 이후, 이재명 이름 앞에 명패처럼 따라 붙던 ‘사법리스크’는 자동제거된 지뢰처럼 슬며시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3월 26일, 서울고법은 이재명의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고, 4월8일에는 대장동 개발 사업 관련, 이재명 당시 성남시장과 유착관계로 지목되어온 김만배가 2심에서 무죄 선고를 받기도 했다.
피부에 방탄조끼라도 이식된 듯, 자신을 향해 끊임없이 날아드는 화살을 묵묵히 막아내며 갈수록 더 단단해지는 이재명을 보며, 그를 미심쩍어하던 사람들도, 한 번쯤 나라를 맡겨봐도 좋겠다는 마음을 먹기 시작했다.
4월 17일 시작한 민주당 경선은 이런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이재명은 전국에서 90%에 육박하는 압도적 지지율을 보이며 과거 그 어떤 민주당 대권 주자보다 강력한 지지 기반을 딛고 대권에 이를 것을 예고한다. 슈퍼스타급 돌풍을 몰고왔던 노무현도 72%였고, 촛불 시민의 압도적 열망을 안고 후보로 당선된 문재인은 57%의 지지에 그쳤다.
민주당은 중도 보수 정당이다?
벼락처럼 대권의 기회 앞에 성큼 다가섰으나, 아직 윤석열 탄핵도 완결이 안된 시점에서, “민주당은 원래 진보가 아니라 중도 보수 정당”이란 발언이 이재명 대표 입에서 나왔다. “정체성의 전환”, “우클릭” 혹은 “커밍아웃”이라는 비판들이 사방에서 튀어나왔다. 쏟아지는 질타 속에서도 이재명은 자신의 말을 주어담지 않았다. 실언이 아니라, 신념이고, 반복해서 말한다는 것은 의도적인 전파의 의지다.
민주당이 왼쪽 정당으로 분류되어 왔다면, 그것은 보수의 허울을 쓰고 있는 국민의힘 왼편에 서 있기 때문일 뿐, 객관적 정치 지향점에서 그들은 특별히 진보 좌파의 색깔을 지니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한국 현대정치사를 돌아보면, 김대중도 “우리 당은 시작 때부터 중도 우파를 표방했다”라고 했고, 문재인도 “새누리당과 대비했을 때, 진보라는 소리를 듣지만, 당의 정체성은 그냥 보수 정당”이라고 말한 바 있다.
고약한 이웃 때문에, 겉과 속이 달라져야 했던 지금까지의 기형적 현상을 이재명은 국민의힘을 오른쪽 극단으로 몰아넣는 방식으로 바로 잡으려 한다. 집권 세력이 군을 동원해 내란을 주도했고, 심지어 거기에 실패했다면, 링에서 퇴출되는 것은 마땅히 감당해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물론 이를 제도적으로 마무리해야 하는 단계가 남아있을 터이나,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강한 영향력을 가진 한 사람으로서, 이재명은 내란 공범자들의 합당한 자리를 지목하며 언론으로 하여금 그것을 떠들게 하고 있는 셈이다. 동시에 보수 성향 지지자들에게 안심하고 얼마든지 표를 맡겨도 좋다는 사인을 보내는 중이기도 하다.
소년공 출신으로 중고교를 거치지 않고, 검정고시로 다다른 대학에서 흔한 운동권 이력 하나없이 괴물 같은 학습 능력으로 사법고시를 통과한 이재명. 이후 율사로, 지자체장으로 살아온 그는 먹물들이 꼬깃꼬깃 지닌 거추장스런 이념적 관성으로부터 자유롭다. 생존을 위한 직관력도 뛰어나다. 인간에게 사육된 가축보다, 야생의 공간에서 살아온 동물에게 생존의 지혜가 잘 보존되어 있는 이치와도 같다. 다행히, 그에게 자아의 범위는 가족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 성남시장 시절엔 성남 시민이 그가 속한 “우리”의 범위였고, 대권에 도전하는 지금은 대한민국 국민이다.
자신이 속한 민주당을 “중도 보수 정당”이라 천명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는 스스로에 대해서도 “보수”에 가깝다고 성남시장 시절부터 밝혀왔다. 그것은 보수 진영의 표를 얻기 위한 정치공학적 계산에서 나온 언행이기보다는, 법을 통해 세상과의 접점을 만들어온 소년공 출신 율사의 정직한 대답이다. 급진적 포퓰리즘으로 불렸던 성남시장 시절의 화려한 복지 정책들은, 이재명에게 헌법이 규정하고 있는 지자체장의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한 결과였을 뿐이다. 헌법 34조는 “국가는 사회보장, 사회복지의 증진에 노력할 의무를 진다”라고 규정되어 있고, 그는 헌법이 규정한 지자체 장의 의무를 다하려 노력할 뿐이라고 자신의 역할을 정의한다.
직 <생존>하기 위해 공장을 전전하며 전쟁 같은 어린 시절을 보낸 이재명은, 법학도가 된 후, 법이 규정하는 대로의 상식적 세상이 작동할 것을 꿈꿨으며, 거기까지를 자신의 역할로 정한 것이다. “우리 사회가 합의한 지향점들의 고갱이인 헌법적 가치들을 현실에서 실현해 내는 것이 내 목표고, 현 체제를 넘어서 새로운 체제를 꿈꾸고 실현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진보라 불러야 옳습니다. 내가 택한 역할은 거기까지는 아닙니다. (…) 지금 자유한국당이 보수를 자처하지만, 그들은 보수가 아니라 수구부패 세력이며, 지금은 진정한 보수가 진보와 힘을 합해, 수구 부패 세력을 몰아내야 할 때라고 봅니다”.
성남시장 시절 그가 피력한 입장은 지금, 그가 주장하는 바와 일치한다. 적어도 10년 동안 그의 입장은 한결같았다.
비어 있는 왼쪽 날개, 어떻게 채울 것인가?
그러나, 이재명이 구상한 바가 실현되기 위해선 몇가지 해결되어야 할 선결 과제들이 있다.
첫 번째 문제는 그가 말한 대로, 국민의힘이 구석으로 밀려난 후, 오른쪽과 왼쪽 날개로 함께 국정을 책임져야 할 정치판에 왼쪽 날개가 부재하다는 점이다. 민주노동당의 의회 진출 10년 만에, 그 후신인 정의당은 원외 정당으로 밀려났고, 진보당 계열 의원들은 민주당으로 흡수되었다. 조국혁신당은, 진보 의제를 설계하고 제시하는 좌파 정당이기보단, 윤석열 검찰 정권을 향한 불타는 투지로 뭉친 민주당 계열 위성 정당에 가깝다.
공식적으로 민주당의 위치를 중앙의 오른편에 놓고자 하는 지금, 비어있는 왼쪽의 자리에 건강한 정치적 파트너가 자리잡을 수 있도록 제도를 마련하는 것은 그들의 의무에 해당한다. 그 의무의 이행을 미룬다면, 독재를 하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당장, 정의당 권영국 대표와 한상균 전 민주노총 위원장이 ‘사회대전환 연대회의’의 이름으로 대선 단일 후보를 뽑기 위한 경선의 막이 올랐으나, 그들을 향한 싸늘한 시선이 적지 않다. 바로 지난 2022년 3월 대선에서 민주당 패배 원인을 심상정이 얻은 2.37%에서만 찾는 사람들의 시선이다. 민주당 진영이 패배할 때, 진보정당 후보의 “이기적” 완주를 탓하는 찾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수십년째 반복되어 왔으며, 그것은 대한민국 진보정치 성장의 발목을 잡고, 결과적으로 발전없는 보수 양당 체제의 고착을 가져왔다.
‘결선투표제’와 ‘연동형 비례대표제’의 도입은, 이런 악행을 끊기 위한 해법으로 이미 오래전부터 제시되어왔지만, 민주당이 실천을 거부하면서 채택되지 못했다. 당장 2026년 지방선거, 2028년 총선에 적용될 수 있도록 제도 개편이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명태균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국민의힘 의원들에게 엄중한 법적 책임을 물어, 그들의 자격을 박탈하는 것도, 건강한 의회를 만들기 위해 시급히 실현해야 할 과제 중 하나다. 108명이나 되는 국민의힘 의원들을 그대로 둔 채, 의회가 건강한 민주적 토론의 장이 되긴 쉽지 않을 터이다.
사회 통합을 위한 균형 내각 구성을 위해 범진보 진영을 포괄한 탕평책을 펼치는 것도 왼쪽 날개를 구성하기 위해 고려해 볼 수 있는 방식이다. 1981년 프랑스 사회당의 미테랑 정부가 집권하였을 때, 4명의 공산당 출신 장관을 비롯해 총 7명을 사회당 외부의 극좌 진영 출신 장관으로 기용, 개혁 드라이브의 기폭제로 삼았던 것은 그 사례라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문재인 정권의 전철을 결코 밟아서는 안된다는, 뻔하지만 어려운 과제가 있다. 문재인 정권 초, 문재인 정부에 대한 비판은 사회적 죽음을 각오해야 할 만큼, 굉장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준동에 가까운 문빠 집단의 행패는 <한겨레>, <경향>, <오마이뉴스> 같은 소위 진보 언론의 펜에 재갈을 물리는 데까지 이르렀다. 문재인 정권은 촛불 시민들의 열망이 담긴 개혁 의제들을 실현해 가는 대신, 전문 이벤트 업자를 데려다, 이벤트들을 벌이며 정책의 부재를 메워 갔다.
문정권의 언과 행은 점점 더 사이를 벌였고, 문재인을 감싸고 돌았던 소위 문빠 집단의 행패는 건설적 비판의 통로를 차단하며 정권의 궤멸을 재촉했다. 그런 정치 집단이 정권 재창출에 실패한 것은 당연한 결과다. 이재명에게도, 문재인 정권의 퇴행에 대해 냉정한 비판을 가하지 않은 책임이 있다. 윤석열을 추종하는 비상식적 집단의 출현은, 종교 집단의 광신도를 방불케 하던 문재인 추종자들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난 세력으로 볼 수도 있다. 그들은 정치인을 비판하거나 지지하는 대신 맹목적으로 추종한다는 면에서 데칼코마니다.
이재명에게도 그와 유사한 강성 지지자 그룹이 있다. 그들의 과도한 충성심이 정치인의 눈과 귀를 막기 시작할 때, 권력자는 권력의 독에 취해 주저앉는다. 권력이 썩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것은 건강한 경쟁 관계에 있는 야당의 존재이며, 김대중 이후 노무현, 문재인에 이어 네번째로 권력을 얻게 될 민주당에겐 더 이상 실패할 권리가 없다.
글·목수정
파리에 거주하며, 칼럼 기고와 책 저술, 번역을 하고 있다. 2023년 저작으로 『파리에서 만난 말들』 , 역서로는 『마법은 없었다』 (알렉상드라 앙리옹-코드 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