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인슈타인, “왜 사회주의인가?”

76년 전, 세계적 물리학자가 미국 사회에 던진 제언

2025-05-09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 물리학자(1879~1955)

비경제학자가 사회주의에 대해 의견을 밝히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일일까?  나는 여러 가지 이유에서 그렇다고 생각한다. 우선 과학적 인식의 관점에서 이 문제를 살펴보자. 겉보기에는 천문학과 경제학 사이에 본질적인 방법론의 차이가 없어 보일 수 있다. 두 분야 모두 각각의 과학자들이 제한된 범위 내에서 나타나는 현상들에 적용 가능한 일반 법칙을 발견함으로써, 그것들 사이의 상호 관계를 명확하게 이해하려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하지만 실제로는 중요한 방법론적 차이가 존재한다. 경제학 분야에서는 일반 법칙의 발견이 어렵다. 이는 경제 현상이 매우 많은 변수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개별 변수의 효과를 분리해 평가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까지의 역사적 경험은 순수한 경제적 요인에 의해서만 형성된 것이 아니며, 사회적·정치적·문화적 요인에 깊이 영향을 받아왔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역사적 국가는 정복을 통해 형성되었으며, 정복자들은 점령지에서 법적·경제적으로 특권 계급이 되었다. 이들은 토지 소유를 독점하고, 자신들 중에서 사제 계급(priesthood)을 임명했으며, 사제들은 일반대중의 교육을 통제함으로써 계급 분화를 영속화했고, 사람들의 사회적 행동을 무의식적으로 지배하는 가치 체계를 만들어냈다.

 

베블런이 이 시대를 ‘약탈적 단계’라고 부른 이유

이러한 역사적 조건은, 말하자면 불과 어제의 일일 뿐이다. 소스타인 베블런(Thorstein Veblen, 1857~ 1929. 사회학자 겸 경제학자로 대표적 저서 『유한계급론』을 통해, 지배 계층이 과시적 소비와 교육·문화의 독점을 통해 사회적 위계와 계급 분화를 재생산한다고 분석—역주)이 ‘약탈적 단계’라고 부른 시대를 우리는 아직도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경제적 사실들은 여전히 이 단계에 속해 있고, 거기서 도출된 법칙들은 그 너머의 사회 발전 단계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사회주의가 추구하는 진정한 목표는 이 약탈적 단계를 극복하고 인류를 더 높은 단계로 이끄는 것이다.

따라서 현대 경제학은 미래 사회주의 사회에 대한 통찰을 거의 제공하지 못한다. 또한, 사회주의는 본질적으로 ‘사회윤리적 목표’(공동체의 정의·복지·책임·공공선 등을 실현하기 위해 사회가 지향하는 윤리적 가치와 실천 방향—역주)를 추구한다. 그러나 과학은 목표를 창출하거나 그것을 인간에게 불어넣을 수 없다. 과학은 특정 목표를 실현하는 수단을 제공할 수 있을 뿐이다. 윤리적 목적은 고결한 이상을 지닌 인물들이 구상하고, 그 목적이 생명력 있고 설득력 있다면, 그것은 수많은 사람들—대개는 무의식적으로—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사회 진화의 방향을 결정짓는 원동력이 된다. 그러므로 인간 사회의 문제를 다룰 때, 과학적 방법이나 전문가의 권위에 대한 과도한 신뢰는 경계해야 한다. 사회 구성에 관한 논의는 전문가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요즘 우리는, 인류 사회가 심각한 전환의 위기를 겪고 있으며, 그 기초적인 안정성이 크게 흔들리고 있다는 수많은 목소리를 듣는다. 그러한 상황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심지어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다.

내가 직접 겪은 일 하나를 소개하고 싶다. 나는 최근 어느 총명한 선의의 사람과 새로운 전쟁의 위협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나는 그것이 인류의 존속 자체를 위협하는 일이므로, 초국가적 조직만이 이 위협으로부터 인류를 보호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그는 침착하고 냉정하게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왜 인간 종(種)이 사라지는 것을 그렇게 반대하십니까?” 불과 한 세기 전만 해도 아무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자기 내면의 균형을 이루려다 실패하고, 희망 자체를 잃어버린 사람의 절망적인 표현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고통스러운 고립과 단절 속에 살아가고 있다. 그 원인은 무엇일까? 그리고 출구는 존재하는가?

이 질문에 확신을 가지고 답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하지만 나는 가능한 한 정직하게, 조심스럽게 답해보려 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감정과 욕구는 복잡하고 모순되며, 간단한 공식으로 표현될 수 없기 때문이다.

 

위기는 개인과 사회의 ‘관계’에 있어

인간은 동시에 고립된 존재이면서 사회적 존재다. 고립된 존재로서 인간은 자기 생존과 가까운 이들의 안위를 지키고,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며, 자신의 능력을 개발하려 한다.

반면 사회적 존재로서 그는 타인의 인정과 애정을 원하고, 함께 기뻐하고, 슬픔을 나누고, 다른 이들의 삶을 개선하려 한다. 이러한 충동의 조합과 균형이 인간의 성격을 결정짓는다. 그 균형이 어떻게 형성되느냐에 따라 개인은 자기 내면의 평화를 이루기도 하고, 사회에 기여하기도 한다.

이 충동들의 상대적인 힘은 일부 유전적으로 결정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이 어떤 성격의 존재로 성장하느냐는 전적으로 그가 속한 사회의 구조와 전통, 사회가 보상하는 행동 양식에 영향을 받는다. ‘사회’라는 말은, 개인이 현재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과거 세대와 맺고 있는 직접적이고 간접적인 관계들의 총합을 의미한다. 인간은 스스로 생각하고 느끼며 행동할 수 있는 존재지만, 그는 육체적·정신적·감정적인 면에서 사회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사회는 인간에게 언어, 사고방식, 도구, 의복, 음식, 주거, 그리고 삶의 의미를 제공한다. 그의 삶은 수많은 사람들의 과거와 현재의 노동과 성취를 통해서만 가능해진다. 이 모든 것이 ‘사회’라는 한 단어 속에 담겨 있다.

그러나 인간 사회는, 개미나 벌과는 다르다. 개미나 벌은 본능에 따라 엄격히 정해진 방식으로 삶을 살아가지만, 인간 사회는 기억력, 창조력, 언어, 문화를 통해 매우 다양하고 변화무쌍하게 구성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자신의 삶을 의식적인 사고와 행동을 통해 변화시킬 수 있는 존재라는 점을 보여준다. 인간은 태어날 때 변하지 않는 생물학적 본성을 갖고 태어나며, 그 안에는 인간 종에 고유한 충동들이 내재해 있다. 그러나 그는 성장하면서 사회로부터 문화적 성향을 학습하게 되며, 이 문화야말로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규정하는 주요 요소가 된다. 문화는 시간이 흐르면서 바뀔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파괴와 자기 파멸에 빠질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는 근거다. 그렇다면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한다.

“인간의 삶을 보다 충만하게 만들기 위해, 사회 구조와 문화는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답할 때, 우리는 변경이 불가능한 조건들도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예를 들어 인간의 생물학적 본성은 실질적으로 바뀌지 않는다. 또한 지난 몇 세기 동안의 기술 발전과 인구 증가는 극단적인 분업과 고도로 중앙집중화된 생산 체계를 필연적으로 만들었다. 과거처럼 소규모 집단이 자급자족하는 삶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오늘날 인류는 이미 지구적 차원의 생산과 소비 공동체로 살아가고 있다. 이제 나는 우리 시대의 핵심 위기를 분명히 밝힐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위기는 개인과 사회의 관계에 있다.

 

관료 권력에 맞서, 민주적 균형추를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오늘날 개인은 사회에 대한 자신의 의존을 그 어느 때보다 잘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그 의존을 자연스러운 유대나 보호의 힘이 아니라, 자연권과 경제적 존속을 위협하는 위험 요소로 경험한다. 또한 개인의 사회적 위치는, 그의 이기적 본능을 계속 강화시키는 한편, 그보다 약한 사회적 본능을 점점 약화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다.

그 결과, 모든 인간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내면의 황폐화를 겪고 있다. 사람들은 자기 이기심의 감옥에 갇혀 있다는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한 채, 불안과 고립 속에서, 삶에 대한 단순한 기쁨과 순수한 즐거움을 상실한 채 살아간다. 그러나 인간은 오직 사회에 대한 헌신을 통해서만, 이 짧고도 위험한 삶에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나는 이러한 심각한 폐해를 제거하는 유일한 방법은, 사회주의 경제 체제와 사회적 가치를 지향하는 교육 체계의 수립이라고 확신한다. 사회주의 체제에서는 생산수단이 사회의 소유가 되며, 전체 공동체의 필요에 따라 생산이 계획적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계획 경제는, 일할 수 있는 모든 사람에게 일자리를 공정하게 분배하고, 기본적인 생계 또한 보장할 수 있다. 개인의 교육은, 그의 능력을 계발하는 동시에, 현재 사회가 숭배하는 권력과 성공 대신, 타인에 대한 책임감을 심어주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계획 경제만으로는 사회주의가 아니다. 계획 경제는 개인을 전체에 예속시키는 억압 체제로 전락할 위험도 있다. 그러므로 사회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매우 어려운 사회적·정치적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

“정치·경제 권력이 고도로 중앙집중화된 상황에서, 어떻게 관료주의가 전능해지는 것을 막을 것인가?”

“어떻게 개인의 권리를 보호하고, 관료 권력에 대한 민주적 균형추를 확보할 것인가?”

우리는 지금 역사적 전환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이러한 시기에, 사회주의의 목표와 과제에 대한 명확한 인식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오늘날 이와 같은 문제들에 대해 자유롭고 방해받지 않는 토론조차 금기시되는 현실에서, 나는 이 잡지 <Monthly Review>(1949년 창간된 미국의 독립 좌파 월간지로, 자본주의 비판과 사회주의적 대안을 다루는 대표적인 진보 매체로 현재도 활발하게 발행되고 있음—역주)의 창간이 공공적 차원에서 매우 귀중한 기여라고 믿는다.

 

 

글·알베르트 아인슈타인 Albert Einstein
물리학자(1879~1955)

 

※ 이 글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1949년 <먼슬리  리뷰 (Monthly Review)> 창간호에 기고한 에세이 「왜 사회주의인가?(Why Socialism?)」이며, 2009년 5월에 재수록되었다. 이글은 자본주의의 구조적 문제를 비판하고, 사회주의적 계획경제와 민주주의의 결합을 통해 이를 극복할 수 있다는 주장을 담고 있으며, 아인슈타인의 정치적 신념을 명확히 보여주는 대표적인 글로 평가받는다. ‘실체 없는’ 공산주의와 좌파를 희생양 삼아 정권의 명운을 걸었던 윤석열 정권은 결국, 내란 범죄와 헌법 유린이라는 역사적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됐다. 그의 몰락 이후에도, 시대착오적 극우 세력은 여전히 ‘빨갱이’라는 유령을 쫓으며 낡은 이데올로기의 망령에 사로잡혀 있다. 본지는 이러한 시대적 배경과 혼란 속에서, 사회주의의 가치를 진지하게 성찰할 수 있는 기회로 아인슈타인의 글을 다시 소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