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치용의 시네마 크리티크] 늙은 여성 킬러의 칼 끝에 어떤 페미니즘이 실릴까

영화평 <파과>

2025-05-11     안치용(영화평론가)

영화 <파과> 시놉시스의 제목은 지킬 게 생긴 킬러 vs. 잃을 게 없는 킬러이다. 40여 년을 바퀴벌레 같은 인간을 감정을 배제하고 방역한 60대 킬러 조각’(이혜영)과 평생 조각을 쫓은 젊고 혈기 왕성한 킬러 투우’(김성철)가 주인공이다. 여기서 방역은 말 그대로 해충 제거의 의미로 정확하게는 살인이다.

조각은 과거 ‘28 1’로 붙어 승리한 살아있는 전설이고 한 번도 방역임무에 실패한 적이 없는 대모님. 그러나 세월과 함께 자신이 키운 회사 신성방역에서도 약간은 퇴물 취급을 받는다. 맞수로 설정된 투우가 신성방역에 스카우트되며 둘의 액션 서사가 전개된다.

지킬 게 생긴 킬러는 조각이다. 상처를 입은 어느 날 밤, 지켜야 할 건 만들지 말자고 한 죽은 스승 ’(김무열)와 했던 약속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치료해 준 수의사 강선생’(연우진)과 그의 딸에게 남다른 감정을 느낀다. ‘잃을 게 없는 킬러투우는 조각의 지킬 것을 파고든다.

여기까지는 익숙한 줄거리다. 약간 변용이 가해지면 늙은 킬러, 혹은 은퇴한 늙은 킬러가 되거나 은퇴한 퇴역 군인이 된다. 결말 또한 정해져 있다. ‘더 할리우드 리포터"모든 장르를 정복한 베테랑 민규동 감독의 작품, 나이 듦의 외로움을 그린 액션 영화"라고 평했다고 한다. 칭찬이긴 하나, 여기엔 중요한 정보가 빠져 있다.

 

늙은 여자 킬러

 

영화 <파과>의 주인공은 지킬 게 생긴 늙은 여성 킬러이다. 킬러가 늙었고 여성이라는 두 가지 전제는 모두 중요하다. <니키타> <킬 빌> <마녀> 같은 젊은 여성 킬러를 내세운 액션물과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늙은 여성 킬러를 주인공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익숙한 킬러 서사의 문법 또한 흔들리게 된다.

킬러가 등장한 액션물에서 여성성과 노년성이 결합하면 정체성의 주변화가 중첩된다. 남성성과 노년성의 결합에서 예상되는 주변화는 생각보다 두드러지지 않는다. 반면 여성성과 노년성의 결합은, 장르적 특성에서 주변화를 급격하게 촉진한다. 익숙한 기존 액션 장르가 젊고 강인한 남성 신체를 중심에 둔다면, <파과>는 늙고 병들어가는 여성의 몸을 스크린에 끌어 올렸다. 남성성을 논외로 하고 젊고 강인한 여성의 몸과 비교해도 <파과> 주인공의 주변화는 더 심대해진다.

젊은 여성 킬러가 나오는 영화에서는 대개 여성 킬러의 젊음과 강인함이 섹슈얼리티와 결부돼 소비된다. 폭력의 세계에서 여성이 남성에 맞서 살아남는 모습을 대체로 하드보일드하게 연출하지만 여성성은 보전된다. 여성 킬러가 몸을 무기화하는 방식에서 강인함과 섹슈얼리티가 병존하고 결합한다. 매혹과 위험을 동시에 지닌 존재이다.

<파과>의 섹슈얼리티에서는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하지 않는다. 노쇠와 고통, 후회로 가득 찬 늙은 몸이다. 그럼에도 그 몸은 강인함을 지탱한다. 여성 몸에서 성적 대상화를 빼고 힘만을 남긴 관점은 그렇다면 진보적인가.

대중문화에서 노년 여성의 몸은 불쾌한 것으로 간주해 조롱의 대상 혹은 비가시적인 것으로 처리된다. 수잔 손탁이 말한 노화에 관한 이중의 잣대(The Double Standard of Aging)”가 적용된다. 남성이 나이가 들수록 성숙하고 권위를 확보하는 것으로 간주되지만, 여성의 노화엔 그것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특별히 몸에 관한 한 늙은 남성 또한 불쾌의 대상이 되는 것에서 벗어나 있지 않지만. 늙은 여성에게는 더 극렬한 사회적 반감이 집중된다.

성적 대상화에서 벗어난 몸의 존중이란 견지에서 그러므로 <파과>는 진보적이다. 그 진보는 역설이고, 진보를 도출한 과정은 덜 진보적이다. 그 진보가, 말살된 존재의 윤곽을 복원하는 윤리적 시선이라기보다는 비가시적 존재의 상기를 통한 상업적 차별화에서 비롯하였기 때문이다. 상업적 진보를 그렇다고 엄숙주의를 동원해 폄훼할 까닭은 없다. 진정한 진보는 어쩌면 상업적인 게 맞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노화한 여성을 가시성과 영향력을 동시에 상실한 존재로 보는 젠더적 폭력에 맞선 의식적 행위가 아니라고 하여도 <파과>의 상업적 전복은 충분히 의의를 가진다. 따라서 파과라는 제목 또한 의미화의 맥락 안에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게 된다.

 

기묘한 페미니즘

 

노화와 연결된 여성성의 폐기는 이미 오래전 시몬 드 보부아르가 지적했듯이 생식 능력과 섹슈얼리티란 사회적 유용성과 결부된다. 이 영화가 의도하지 않게 페미니즘을 지향했다면, 흥미롭게도 좀 애매한 영역으로 논의를 끌고 간다. 노화에 패배하지 않은 여성 킬러의 강인한 몸은 일종의 모성과 보호의 감정의 지평을 연다. 생식 능력과 섹슈얼리티가 사라진다. 로맨스는 없고 보호가 있으며 특히 젊은 남성 킬러와 늙은 여성 킬러 사이의 대결은 모성의 상상력으로 채색된다.

늙은 여성 킬러가 젊은 남성(강선생)을 보호한다는 설정은, 일반적인 액션 서사의 권력 구조를 미러링하여 전복한 것이지만, 늙은 여성 킬러와 젊은 남성 킬러 사이의 대치는 모성을 복원한다. 액션 문법을 활용하면서도 페미니즘 감성으로 재구성한 이 영화의 페미니즘은 따라서 완전히 상업적 상상력에 복속된 것이다.

<더 이퀄라이저>처럼 늙은 남성 킬러가 주인공인 영화에서는 과거를 반성하지만 재차 남성성을 입증하여 약자의 보호와 자신의 구원, 정의 실현의 서사를 완성한다. 노화하여도 노쇠하지 않은 힘을 과시한다. 대조적으로 <파과>의 주인공에게 반성은 없고 늙은 몸을 받아들이면서 타자와 연결을 발굴하고 주어진 삶을 지속한다. 마지막에 모성이 돌출한 것은 반전 장치였을 테고, 더불어 논의 거리가 된다.

 

 

마지막 결투가 펼쳐진 해피랜드는 조각과 투우 사이의 대결이 대단원을 맞는 장소이다. 가족의 공간인 놀이공원에서 최후의 격투를 벌이며 모성을 부각하는 결말은 반전이자 해소이다. 파괴된 놀이공원에서 과거를 복원하며 모성을 지목하는 결론을 관객은 참신하다고 판정할 것인가?

<파과>는 킬러 영화이지만 그냥 킬러 영화가 아닌 여성 킬러 영화이며, 그것도 늙은 여성 킬러 영화라는 점에서 장르적 상투성을 어느 정도 돌파하고, 새로운 감정선의 묘사와 다른 유형의 윤리 구조를 선보인다. 늙음이라는 생물학적 조건을 원숙하게 수용하면서 능동적이고 강인한 주체로 선 여성을 주인공으로 제시한 것은, 절대 의도하지 않았을 페미니즘의 비판적 시선을 상업 영화의 치열한 고민 안에 우연찮게 담아낸 재미난 성취다. 모로 가도 서울에 가면 그만이긴 하다.

 

글 안치용 사진 (주)NE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