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상호의 시네마 크리티크] <케이 넘버(K-Number)>, 기록하려는 주체의 마음

2025-05-14     송상호(영화평론가)

서류에 여기저기 흩어져 조각난 알파벳을 한데 모아 ‘케이 넘버(K-Number)’로 소환하는 오프닝 타이틀은 명확히 두 가지 지향점을 제시한다. 첫째, 어느 한 사람의 관점이나 의견이 아닌, 여러 존재의 호소를 담아내겠다는 의지의 증표. 두 번째, 말과 증언이 아닌 기록에서 출발하는 여정이 될 것이라는 사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케이 넘버(K-Number)’는 한국에서 해외로 입양된 아이들에게 부여한 고유번호다. 이 번호를 통해 몇 명의 아이들이 포기됐는지, 살아남거나 살아남지 못했는지 따져볼 수 있기에 분류 체계를 파악하는 작업이 그만큼 중요하다. 입양아들의 수많은 목소리로 시작하는 <케이 넘버>의 오프닝 타이틀 시퀀스를 유심히 뜯어 보자. 입양인들의 목소리는 들리는데, 정작 얼굴은 나오지 않는다. 배경으로 제시되는 건 이들의 추억이 담긴 사진들, 이들이 이야기하는 정보와 서류뿐. 그러니 이쯤에서 관객들이 <케이 넘버>의 구심점이 ‘기록’에 있을 거라 유추해 보는 건 전혀 무리수가 아니다.

이 다큐멘터리가 기록에서 출발한다는 점은 알겠는데, 우리는 여기서 기록의 불완전성을 잊어서는 안 된다. 기록이 곧 진실과 동치는 아니라는 점에서다. 기록이 왜곡되거나 조작될 경우, 진실은 저 너머에 있을 수밖에 없다. 친가족을 찾기 위해 기억을 따라가는 미오카 밀러(김미옥)의 여정 역시 아이러니하게도 ‘기록’에 번번이 가로막힌다. 잘못 기재된 정보들, 불완전하게 남겨진 흔적들이어서다. 극 중 미오카는 내 기억과 서류상 정보 간 격차가 생기는 상황을 종종 마주한다. 미오카는 “난 버림받은 기억이 없다. 그러니 생모를 찾아야 한다는 의무감이 강하다. 내가 실종돼서 어머니가 50년 넘게 고통받으셨을 텐데, 그게 미안하다. 이게 내 기억”이라고 토로하기까지 했다.

‘기록’보다는 ‘기록하려는 주체’와 가까워지기

이제 <케이 넘버>를 구성하는 신과 시퀀스를 찬찬히 뜯어보자. 오랫동안 보관된 문서를 비롯한 수많은 사료, 당대 사회상을 보여주는 언론 보도나 방송 자료 화면들이 다채로운 인터뷰와 번갈아 밀도 있게 배치돼 있다. 여기까지만 보면, <케이 넘버>는 여타 다큐멘터리와 비교해 크게 다를 바 없는 안정적인 구성처럼 느껴질 수 있겠다. 하지만 우리가 놓쳐서 안 되는 지점이 몇 군데 있다. 바로 한국에서 자신의 뿌리와 흔적을 찾는 미오카가 휴대전화 카메라로 어딘가를 촬영하는 장면들 말이다.

미오카가 유독 반복하는 행위가 있다. 바로 내가 방문했던 그곳을 사진으로 꼭 남긴다는 점. 남기든 남기지 않든 그건 개인의 자유지만, 어쨌든 조세영의 카메라는 미옥이 그런 식으로 자신만의 기록을 남기는 모습을 잡아내고자 했다. 재밌게도 이런 숏이 한 번에 그치지 않고, 여러 차례 삽입됐다는 것. 감독이 그런 장면을 굳이 한 구간이 아닌 여러 구간을 강조해서 최종 편집본에 넣은 셈이다. 사실 우리는 미옥이 보육원의 정문을 찍는 건지, 뛰노는 아이들을 찍는 건지, 아니면 오래된 골목길을 찍는 건지, 위탁모로 추정되는 이의 집 주변 자연을 감상하고자 남겨놓는 건지 제대로 알 수는 없다. 미옥이 어떤 광경에 사로잡혀, 무엇을 눈에 눌러담고 기억에 저장하려고 이처럼 열심히 찍는지도 역시 명확한 이유는 모른다. 그렇지만 확실한 건, 미옥이 무언가를 남기려는 모습이 조세영의 카메라에도 담겼다는 것. 그러니 조세영은 미옥의 기록을 자신의 카메라에도 기록해 관객들이 미옥이 어떤 마음으로 기록을 이어갔을지 상상해 보고 생각해 볼 기회를 마련해준 셈이다.

그러니까 <케이 넘버>에서 기록보다 중요한 건, 기록하는 주체를 들여다보는 작업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케이 넘버>가 강조하는 ‘기록’은 바로 기록 자체가 아닌, 기록하려는 행위와 그에 따르는 마음에 방점이 찍혀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케이 넘버>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신은 바로 미옥이 자신의 어릴 적 모습이 불연속적으로 담긴 네 장의 사진들을 재배열하는 구간이다. “이때는 머리가 길었으니, 이때보다는 예전이고, 고아원에서 머리를 잘랐으니 이 때와는 구분되고…” 즉 진실에 가까워진 그 시절 미옥의 ‘기록’은 바로 미옥의 그 ‘기록하려는 마음’ 덕분에 완성될 수 있는 것 아닌가.

결국 오프닝 타이틀 시퀀스에서 기록에 집중하면서 시동을 걸었던 영화를 움직이는 실질적인 동력은 바로 기록자의 내면에 있다. 그러니 <케이 넘버>가 가치 있는 이유는 바로 기록을 추적하고 정밀한 아카이빙과 기록에 기반한 다큐멘터리라는 데에 있지 않고, 그 기록을 붙들고 재구성하려는 각 주체의 마음에 밀착했다는 데 있다. 그 마음을 포착하기 힘들지라도, 그 마음이 온전히 구현되지 않을지라도 굴하지 않는 게 핵심이다. 여기서 특히 강조하고 싶은 건 입양기관 종사자, 유관 단체 관계자들이 기록을 증언하고 검증하고 재구성하려는 마음이나, 미오카를 비롯한 입양인들이 자신을 돌아보며 나와 연결된 무언가를 기록하려는 마음이 결국엔 맞닿아 있다는 점이다.

결과가 아닌, 과정의 미학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벌어진 사건 자체보다는 이로 인한 연쇄 작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케이 넘버>의 가치가 이를 토대로 어떤 궤적을 그리고 어떤 기록을 남기는지 살펴볼 때 극대화된다는 점에서다. 그렇기에 우리는 후반부 삽입되는 아담 크랩서의 외침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는 1979년 미국으로 입양됐지만, 시민권이 없다는 사실을 본인도 모른 채 불법 체류자로 낙인찍혔고 결국 2016년 한국으로 쫓겨났다. 모국에서조차 타국인 신세인 ‘추방 입양인’이 된 그는 지난 2019년 해외 입양인 중에선 국내 최초로 정부와 입양기관에 소송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2023년 5월18일 서울중앙지법은 “홀트는 1억원을 배상하라”고 원고 일부 승소 판결했다. 국외 입양 알선기관이 아동을 입양 보낸 뒤에도 보호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면 배상 책임이 있다는 판단이었다. 하지만 인권침해에 대한 국가의 책임은 인정되지 않았다.

우리가 <케이 넘버>에서 확인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다. 당시 1심 판결에 관해 아담의 변호인단은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은 점을 용납할 수 없다”라고 언론에 입장을 밝혔고, 아담은 이젠 너무 힘들어서 그만하고 싶다고 토로했다. 이 재판의 향방은 어떻게 됐을까. 이어진 항소심에서는 1심 판결이 뒤집혔다. 2025년 1월8일 서울고법은 홀트의 1억원 배상 책임을 인정한 원심판결을 취소하고, 정부와 홀트에 대한 청구를 모두 기각했다. 정부와 입양기관의 책임 모두 인정하지 않은 셈이다.

<케이 넘버>는 정답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영화 스스로도 그 기록의 모범 답안이 정해져 있다는 식으로 단언하지도 않는다. 애초에 진실에 도달하기는 어렵다. 영화 스스로도 그걸 찾기 힘들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극 중 메리 쉬라프만도 “우리는 그저 우리의 뿌리에 대해 알고 싶은 거예요. 이 과정에서 힘든 건 누군가 우리를 속였다고 느끼는 거죠. 우리의 사연이 바뀌었고 어떤 경우엔 조작되었어요. 그래서 진실을 찾는 게 어려워요.”라고 털어놓지 않나. 즉 <케이 넘버>는 그 자체로 닿기 힘든 진실에 매달리는 투쟁의 기록이면서 동시에 조작된 기록에 좌절하고, 실체 없는 증거에 무너지고, 바뀌지 않는 현실에 신음하는 이들의 내면 자체를 형상화한 결과물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개개인이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다.

이젠 극의 종반부 조세영과 미오카의 대화를 엿볼 차례다. 조세영이 묻는다. “서류에 근거해 (자신의 뿌리에 관해) 추적을 하는 게 의미가 있을까요?” 미오카가 답한다. “의미가 있다고 본다. 뭐가 진짜고 실체인지 밝혀내려는 거니까요. 이 모든 걸 떠나보내기 전에 뒤집어 볼 수 있는 패는 다 뒤집어 봐야 하잖아요?” 그러니 진실에 가닿는 것 자체보다 중요한 건, 그 여정에 동참하는 이들의 내면이 어떤지 놓치지 않으려는 존중, 그들 곁을 지키려는 성실한 태도다. 오로지 ‘결과’의 유효성만 중요한 거였다면, 사실 <케이 넘버>라는 ‘과정’이 제작될 이유도, 명분도 없지 않나. 그렇기에 과정에 매달리는 조세영의 카메라가 오히려 본질에 도달할 수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진실’이라 취급하는 것들은 대개 그 자체로 의의를 획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진실’이 가치를 얻으려면, ‘진실’을 향하는 과정이 선행되고 성립되어야만 한다. <케이 넘버>는 그 과정의 미학을 보여주고 있다.

글‧송상호
영화평론가, 경기일보 기자로 활동하며 글을 쓰고 있다. 2021년 박인환상 영화평론 부문 수상. 2023년 영평상 신인평론상 우수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