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프레시 4월 월요시네마 <콘클라베>에 관하여... 세 텍스트들의 상호텍스트적 읽기

4월 28일 정문영 영화평론가 발제 후 열띤 토론 매월 마지막 주 월요일, 국제영화비평가 ‘줌’ 세미나 열어

2025-05-16     ilemonde

국제영화비평가연맹(Fédération Internationale de la Presse Cinématographique. 이하 FIPRESCI/피프레시) 한국지부는 매달 마지막 주 월요일 오후 8~10시, 줌(Zoom)으로 월요 시네마 세미나를 열고 있다. 피프레시는 1930년 전 세계의 전문영화비평가와, 영화기자, 각국의 영화 단체들이 영화문화의 발전을 위해 결성한 단체로, 한국지부는 1994년 창립됐다. 
 

사회자: 안녕하십니까? 피프레시 코리아 회장을 맡고 있는 영화평론가 심영섭입니다. 오늘은 새로운 교황님이 선출되는 시기에 아주 시의 적절한 영화 한 편을 가지고 월요 시네마를 진행 해 볼까 합니다. 바로 에드바르트 베르거 감독의 영화 <콘클라베>인데요. 교황 선출을 의미하는 이 용어는, 봉쇄하다라는 뜻을 가졌다고 합니다. 오늘 영화 <콘클라베>를 진행해주실 계명대학교 명예교수(영문학과)이신 정문영 영화평론가를 소개합니다.

 

발제자:

안녕하세요. 정문영입니다지난 421일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선종하시고, 최근 바티칸에서 일어나고 있는 교황 선종 후 장례 절차와 의식의 중계방송과 콘클라베에 대한 전망 등, 지금 우리는 바티칸과 콘클라베를 아주 가까이 있는 현실로 접하게 되었습니다. 이 영화는 골든 글로브, 영국 아카데미, 그리고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모두 각본상, 각색상을 수상했습니다. 사실 저의 영화에 대한 진지한 관심은 각색 연구’(Adaptation Studies)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영화를 각색 연구의 관점에서 접근하기에도 매우 적절한 영화라고 생각해서 감히 제가 다루기로 했습니다.

 

 


1. 각색영화 <콘클라베>: 다시-보기(re-vision)

최근 각색 연구는 각색 작품, 각색 영화를 분석할 때, 원작에의 충실성을 적절한 기준을 삼기보다는, 원작과 각색 모든 텍스트들이 하나의 상호텍스트적 참조, 변형, 리사이클링, 변용(transmutation)의 매트릭스 내에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로, 원본에 대한 충실성 또는 우열을 평가하는 대신 다른 종류의 보기들, 일종의 대화적 반응들로 간주하고 접근합니다.

사실 이 영화는 원작의 주제와 메시지의 핵심을 비교적 충실하게 전달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소설을 영화로 각색한다는 것, 즉 매체 전환을 한다는 것은, 들뢰즈(Gilles Deleuze)에 의하면 기존의 내레이션을 다른 사유 방식, 영화 이미지를 통한 새로운 사유방식의 매체로 전환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화의 사유방식은 우리의 기존 인식을 나아가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정치성를 구현하는데 매우 유력한 매체라고 들뢰즈는 주장합니다.

각색은 기존 텍스트에 대한 개입 행위, 다른 수정된 관점을 제시하는 다시-보기”(re-vision)의 글쓰기입니다. 다시-보기로서의 각색 동기는 기존 텍스트에서 여전히 비가시화되고, 주변화된 소수에게 목소리를 부여하고 가시화하기 위한 정치적 의도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시-보기는 각색 연구의 주요 개념으로 쓰이지만, 원래 아드리엔 리치(Adrienne Rich)의 페미니즘의 산물로 성정치성이 반영된 용어입니다. 사실, 다시-보기로서의 각색영화들 가운데, 의도적이 아닌 경우에도 성정치적 전복성을 구현한 사례들이 많습니다. 예컨대, 극작가 해럴드 핀터가 소설을 영화로 각색한 30여 편의 각색 작품들의 대부분도 성정치적 전복성을 그의 다시-보기의 동인으로 전유한 사례(해럴드 핀터의 영화 정치성(2016) 참조)입니다. <콘클라베> 또한 원작 소설의 각본 작업과 영화화 과정을 통해, 기존 텍스트에서 여전히 또는 충분히 주목 받지 못한 여성 등장인물 수녀들, 특히 아그네스 수녀(Sister Agnes)의 목소리와 역할이 더욱 가시화되는 성정치적 관점에서 다시-보기를 시도한 각색으로 볼 수 있습니다.

 

2. 텍스트들의 상호텍스트적 읽기

<콘클라베>각본작가 피터 스트로언(Peter Straughan)이 다수의 유력한 각색상 또는 각본상을 받았지만, 영화는 연극의 경우와는 달리 스크립트를 쓴 각본작가가 아니라 감독의 영화, <콘클라베>는 에드바르트 베르거(Edward Berger)의 영화로 간주됩니다. 사실 영화는 각본대로가 아니라, 주어진 여건과 촬영 현장의 변수도 있지만, 감독 자신의 수정된 관점을 반영한 각본에 대한 다시-보기로, 변형되어 완성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물론 영화 <콘클라베>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완성된 텍스트를 제공하지만, 원작 소설, 각본, 그리고 영화화된 <콘클라베>, 세 텍스트들 사이의 상호텍스트적 읽기는 세 배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관람 방식이 될 수도 있습니다.

 

(1) 해리스의 원작소설 콘클라베(2016)

<콘클라베>는 캠브리지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로버트 데니스 해리스(Robert Dennis Harris)의 동명 소설을 각색한 영화입니다. 로만 폴란스키(Roman Polanski) 감독하고도 각색 작업(<폼페이>(Pompeii, 2007), <유령 작가> (The Ghost Writer, 2010)<장교와 스파이> (An Officer and a Spy, 2019))을 한 해리스는 대체 역사 소설이라는 장르의 작품들을 주로 쓴 소설가입니다. 그가 소설 콘클라베를 쓰게 된 계기는 바로 최근 선종하신 제266대 프란치스코 교황이 선출된 2013년 콘클라베라고 합니다. TV 화면에서 비밀선거가 끝나고, 새 교황의 선출, ‘하베무스 파팜’(Habemus Papam) 선언 직전 등장해 발코니 양쪽 창문을 가득 채운 늙은 추기경들의 얼굴을 보면서 이 소설을 쓰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서 그때 막 끝낸 키케로(Cicero)3부작이 다룬 지배권을 가진 남성 일색의 원로원(입법부)의 로마공화정이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것을 작가는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정치적 권력을 가진 나이든 남성 추기경들과 로마공화정과의 직접적인 연관 관계의 발견으로 콘클라베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고, 그 결과 픽션 콘클라베를 다룬 정치 스릴러 콘클라베를 썼다고 합니다. 최근 프란치스코 교황의 선종으로 새롭게 주목을 받게 된 바티칸 교황청의 역사를 다룬 다큐에 등장하는 꾸리아(Curia)는 로마 원로원(senate house)과 같은 용어라고 합니다. 교황을 보필하는 조직이어야 할 꾸리아가 실은 교황을 괴롭히는 특권을 휘두르며 만행을 일삼는 집단이 된 것을 다큐를 통해 보게 됩니다. 이 소설은 이러한 다큐 속 꾸리아를 연상시키는 늙은 추기경들이 참가한 콘클라베의 전개 과정을, 로마 원로원에서부터 시작하여 21세기에도 계속되고 있는 정말 매혹적인 원색적 정치를 다룬 일종의 대체 역사 소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스트로언의 각색 콘클라베(2024)

원작 소설은 교황의 선종으로 인한 세데 바칸테(Sede Vacante)’, 3주후 콘클라베 전날, 첫째, 둘째, 셋째 날, ‘하베무스 파팜에 이르기까지 1996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제정한 정확한 규칙을 반영하여 진행하는 허구적인 콘클라베 이야기를 다룬 19장으로 마치 시퀀스를 염두에 둔 구조로 구성되었습니다. 혁신적인 소설 기법으로 절대로 영화로 만들 수 없는 소설을 쓰겠다는 존 파울즈(John Fowles) 같은 작가와는 달리, 최근 대부분의 소설가들은 해리스처럼 영화로 각색될 것을, 상호매체성을 염두에 두고 소설을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실 파울즈의 메타픽션적인 소설 프랑스 중위의 여자(1969)도 결국은 핀터의 각색으로 카렐 라이즈(Karel Reisz) 감독이 메타영화적인 동명의 영화(1981)로 만들어졌습니다.
각색 각본 콘클라베를 쓴 스트로언은 핀터처럼 극작가입니다. 그의 각본의 구성과 주제는 원작에 매우 충실한 다시-보기임을 확인시켜줍니다. 각색 작업을 위해 바티칸 답사와 콘클라베를 연구한 스트로언은 바티칸이 상당히 황홀한 연극적인 세계이며, 콘클라베는 그 세계의 숨막히는 통제와 형식성을 드러내 보이는 엄숙한 의식”(ritual)임을 확인했다고 합니다. 이에 그는 매체전환을 통해 원작의 바티칸이라는 공간과 콘클라베를 연극적인 스펙터클로 만드는 각본을 씁니다.

이러한 스펙터클의 구성으로 그는 형식주의적 의식과 의례가 전개되는 화려하고 세련된 세계뿐 아니라 그 표면 세계의 이면에 작동하고 있는 권력과 욕망의 세계를 함께 시각적으로 드러내 보일 수 있는 다시-보기를 실천합니다. 그 스펙터클은 절대적인 고대의 아름다움과 굉장한 스케일의 시스티나 예배당(Sistine Chapel)과 이와는 대조를 이루는 비즈니스 컨퍼런스 센터 느낌의 소박한 도미토리, 성녀 마르타의 집(Casa Santa Marta)이라는 시각적으로 기묘한 조합으로 구성됩니다.

이 영화는 추기경들이 전 세계의 카톨릭을 대표할 교황을 결정하는 중대한 일을 하고 있는 시스티나 예배당을 주 무대“(major stage), 수녀들이 서비스를 제공하는 성녀 마르타의 집을 무대 뒤“(backstage)로 하는 대조 효과로 멋진 세팅을 만듭니다. 이러한 대조를 위해, 실제로는 좀 밋밋한 성녀 마르타의 집을 추기경들이 갇혀 있는 감옥 같은, 음모가 일어나는 곳 같은 느낌을 주도록 극적인 파격을 더해서 세트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극적인 파격은 가장 중요한 일들은 항상 다른 곳에서, 법정의 복도에서, 회의의 막후에서 일어나며 거기서 사람들은 정의의 실제 문제인 권력과 욕망의 실제적이고 내재적인 문제들을 직면한다라는 들뢰즈의 지적을 떠올리게 합니다. 추기경들이 모여 비밀 모의를 하는 성녀 마르타의 집의 어두운 강당, 표를 누구에게 그리고 어떻게 모아 줄 것인가를 논의하는 어둠 속 층계참, 자격이 없는 추기경에게 경선을 포기하라고 설득하는 어두운 복도 등, 여러 장면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반복과 차이를 지적하다 보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지만, 세 텍스트들 사이의 몇몇 차이점들을 중심으로 상호텍스트적 읽기를 시도해볼까 합니다.

 

3. 세 텍스트들 사이의 차이들

(1) 등장인물들의 국적의 다양성과 파벌

세 텍스트의 주인공인 추기경단장의 경우, 원작에서는 야코포 발다사르 로멜리라는 이탈리아인 추기경으로, 영화에서는 토머스 로렌스라는 영국인 추기경 (영국인 베우 레이프 파인스)으로 국적과 이름이 바뀝니다. 의문의 의중 결정(in pectore) 추기경인 빈센트 베니테스는 원작에서는 필리핀인 추기경으로 이라크 바그다드 교구의 교구장으로 활동한 것으로, 영화에서는 멕시코인 추기경(멕시코계 캐나다인 카를로스 디에즈)으로 아프가니스탄의 카불에서 활동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국적 변화는 캐스팅된 배우의 국적을 반영한 것으로, 몇몇 다른 등장인물들도 배우에 따라 국적이 변합니다. 그러나 언어의 변환에 있어서 주목하겠지만, 콘클라베의 총책임자, 관리자를 영국 추기경으로, 선출된 새 교황을 최초의 남미권 출신 교황으로 바꾼 것은 다양성을 추구하는 교회의 미래를 구체적으로 시사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아그네스 수녀는 원작에서는 체구가 작은 고집 센 프랑스인 여자이지만, 영화에서는 이탈리아계 미국인 수녀(로셀리니 이자벨라)로 키도 크고 인물로도 존재감이 부각되는 배우로 캐스팅되었습니다. 이는 아그네스의 역할과 존재를 부각시키기 위한 것으로 해석됩니다. 등장인물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참에, 세 텍스트 모두에서 콘클라베의 주요 후보 추기경들로 등장하지만, 미래의 교회가 나아가지 말아야할 방향을 대변하고 있는 4명의 추기경들을 언급해볼까 합니다. 콘클라베가 진행되면서 당선 가능성을 상실하게 되는 순서로, 첫 번째, 조슈아 아데예미 추기경(루시언 음사마티), 나이지리아인 추기경으로 사상 최초의 아프리카 출신 흑인 교황이 될 가능성을 가진 추기경, 두 번째는 미국인 조지프 트람블레이 추기경(존 리스고), 최초의 북미 출신 교황이 될 가능성을 가진 추기경, 세 번째, 알도 벨리니 추기경(스탠리 투치), 이탈리아계 미국인 추기경으로 외부의 일반인들이 최유력 후보로 꼽는 소위 깨인진보주의자, 네 번째는 고프레도 테데스코 추기경(세르조 카스텔리토), 이탈리아 추기경으로 극도로 보수적인 추기경을 들 수 있습니다. 이들은 세속적인 정치계처럼 교회 내에 존재하는 보수와 진보 파벌들을, 이 영화의 키워드를 빌면, “확신들을 대변하는 추기경들입니다. 자신은 자격도 없고 전혀 교황이 될 생각이 없고 관리자 역할에 전념하고자 하는 로렌스에게 그의 설교로 자신의 표가 갈라져 불리하게 된 벨리니가 그의 숨겨진 야심을 지적하듯이, 그도 유력한 후보자로 부상합니다. 그러나 이 콘클라베의 승자는 이러한 확신들의 파벌에 속하지 않는, 어떤 선입견도 없는 순수를 상징하는 베니테스입니다. 의문의 인물입니다만, 이 영화의 첫 부분에 주제를 시사하는 로렌스의 설교에서 우리에게 주십사고 기도한 교황에 가장 가까운 추기경입니다.

 

(2) 언어의 전환

이 영화는 모국어 독일어를 사용하여 영화를 만들어온 베르거의 영어 데뷔 영화입니다. 원작 소설에서는 언어의 전환이 명시되거나 그 의미가 언급되고 있지 않습니다. 다양한 언어권에서 콘클라베에 참가하고 있는 추기경들이 등장하는 이 영화에서 추기경 집단은 언어권별로 나누어집니다. 식당에서도 언어권별로 나눠져 끼리끼리 식사를 하고, 선거운동 또한 언어권별로 전개됩니다. 이러한 분열을 해결하기 위해서, 라틴어 전용 미사뿐 아니라 추기경들이 라틴어로만 이야기하던 시절 1960년대 이전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보수주의자 테데스코의 주장은 전혀 설득력이 없을 정도로 라틴어는 이제 죽은 언어가 되었고, 바티칸의 공식언어는 이탈리아어 입니다. 이 영화의 언어 또한 기도서 낭독, 사도좌 공석과 새로운 교황 선언, 투표전 선서를 제외하고는 라틴어는 사용되지 않습니다. 여기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라틴어 또는 공식 언어 사용이 아니라 원작에서 명시되지 않은 언어의 전환의 효과, 즉 공식 언어 또는 다수의 공용 언어에서 각자의 모국어로 전환하는 사례에서 발견되는 효과입니다.

예컨대, 의문의 베니테스가 처음 추기경들에게 소개되며 식사기도를 부탁받았을 때, 영어로 의례적인 식사기도를 시작했다가, 스페인어로 바꾸어 식사를 준비해준 수녀들과 굶주리고 있는 자들을 기억하자며 마치는 기도의 사례를 들 수 있습니다. 이 사례보다 로렌스가 이탈리아어로 준비한 설교를 하다가 모국어인 영어로 잠시 제 마음을 진솔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라고 전환하여 설교를 계속할 때, 언어 전환의 의미와 그 효과가 더 뚜렷하게 부각됩니다. 이처럼 모국어로의 언어 전환은 화자가 진심으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전달하는 효과를 가져 옵니다. 후반부에 이르러 테데스코가 테러공격이 발생한 직후 그의 모국어이자 공식언어인 이탈리아어로 한 분노에 찬 연설은 파시스트 독재자 무솔리니 같은 그의 호전적인 야만적 증오감과 적나라한 야망을 드러내 보입니다. 반면에 테데스코의 발언 후 침묵을 깬 베니테스는, 우선 원작에서는 이러한 시기에 적절한 새로운 지도자로 로멜리(로렌스)를 추천하며 자신에게 준 표를 로멜리에게 주기를 바란다는 일종의 후보 단일화를 제안하는 등, 비교적 긴 발언으로 테데스코와 로멜리, 벨리니 사이의 논쟁에 개입합니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영어로 침묵을 깨고, 곧 모국어 스페인어로 전환하여,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고, 싸우자는 테데스코에게 우리가 지금 싸우고 있는 곳은 여기”(aquí), 우리 각자의 마음속이라는 진정성 어린 발언으로 시작하여, “교회는 다가올 미래입니다라고 끝맺는 간결하고도 강한 울림은 주는 연설을 합니다. 그의 이러한 언어 전환의 연설은 그를 교황으로 선출시키는 예상을 벗어날 정도로 강렬한 효과를 발생합니다.

 

(3) 연극적 대사와 구조

 

각색 과정에서 이 영화는 원작의 대사를 침묵(silence), 휴지(pause) 등의 연극 언어를 채워 넣어 연극적 대사로 만들고 있습니다. 예컨대, 레이몬드 오말리 몬시뇰 추기경단 부단장(브라이언 오번)이 뒷조사한 추기경들의 비밀과 스캔들을 로렌스에게 보고할 때, 의 대사는 긴장감 넘치는 기대감을 유발시키는 휴지로 가득 차 있습니다. 로렌스의 탐정 놀이의 조수 레이는 고대 그리스 비극의 메신저의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무대 밖(외화면)에서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을 전달하는 메신저로 그의 연극적 대사는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관객에게 불확실성의 감정을 전달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고전 연극의 주요 요건인 삼일치의 법칙을 따르고 있습니다. 바티칸 공간을 벗어나지 않기 위해, 중요한 사건인 2번의 폭발사고도 외화면에서 발생하고, 메신저 레이의 보고로 전달됩니다. 추기경들의 납치와 살해 등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장면들로 스크린을 가득 채우는 정치 스릴러 <천사와 악마>(Angels & Demons, 2009)와는 달리, 이 영화는 리소르지멘토 광장, 산마르코, 뮌헨, 루뱅 등에서 일어나고 있는 동시다발적 테러공격과 사상자 발생과 같은 주요한 사건들이 모두 외화면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처리됩니다. 영화에서는 레이의 보고로 확인되는 두 번의 차량 폭탄 사건들 중 첫 번째 사고는 시스티나 예배당 테이블 위에 놓인 컵의 진동으로, 그리고 성녀 마르타의 집에서 아그네스 수녀의 카나리아의 반응과 이를 감지한 아그네스, 놀란 수녀들이 창문으로 몰려가 바라보는 검은 연기로 외화면에서 일어나는 불확실한 사건이 암시됩니다. 두 번째 경우는 강력한 폭발음과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쪽 유리창들이 깨지고, 바깥에서 들어온 일광으로 의문의 사건의 발생을 시사합니다.

 

(4) 여성 관객성: 모든 것을 보고 있는 여성 보는 자”(woman seer)

각본과 영화 택스트가 원작 소설보다는 여성 문제에 대하여 열린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소설에서 로멜리(로렌스) 추기경은 요한 23세의 <영혼일기>의 가르침, 여자 문제라면 해결책은 단 하나뿐, 대화하지 말라, 단 한 마디도 이 세상에 여자가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라는 가르침을 철저하게 따르는 페쇄적인 지적 시스템에 갇혀 있습니다. 그러나 각본과 영화에서 로렌스는 아그네스 수녀와 비교적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원작에서 벨리니 선거 대책 비밀회의에서 그의 교황선거 공약에서 여성문제는 뺏으면 좋겠다는 사바딘 추기경 의견에 양보하여, 여성 서품은 그가 살아 있는 동안 금지하겠다고 합니다. 이에 사바딘은 영원히 금지해야한다고 덧붙입니다. 그러나 각본과 영화에서는 사바딘의 건의에 벨리니는 여성혐오주의자 테데스코와는 무조건 반대로 여성문제를 공약에서 빼지 않겠다며, 그의 주장을 굽히지 않습니다.

바티칸 교황청에서 비가시적인 존재로 간주되는 여성들, 수녀들은 콘클라베에 참가하고 있는 남성 추기경들의 스펙터클에서 행위자”(agent)의 역할을 할 수 없는 소수로서 보는 자”(seer)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보는 자로서 수녀들, 특히 아그네스의 혼란스러운 침묵과 위협적인 시선은 들뢰즈가 현대 영화를 행위자가 아니라 보는 자의 영화라고 했을 때, 바로 그 보는 자, 행위자 보다 더 중요한 역할, “여성 보는 자의 역할을 하는 존재임을 시사합니다. 이러한 존재를 부각시킨 감독의 의도는 남성일색의 닫힌 스펙터클에 균열을 가져올 수 있는 여성 보는 자의 시선을 관객으로 하여금 의식하게 유도하는 여성 관객성을 구현하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베르거 감독의 이러한 의도는 로셀리니 이자벨라에게 한 아그네스 수녀의 역할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장면에 등장할 때마다, 우리는 실제로 당신을, 당신이 생각하는 걸 보고 그리고 우리와 함께 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고자 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그녀는 항상 클로즈업을 받는, 그 장면의 그냥 일부가 아닌 중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그의 이러한 요구는 가부장적 구조에 균열을만들려는 것임을 분명하게 밝힙니다.

 

(5) “가장 수동-공격적인 인사억압된 자의 귀환

 

감독은 보는 자로서 아그네스와 수녀들을 영화 곳곳에 등장시킵니다. 예컨대, 콘클라베 전날 밤, 불 꺼진 극장의 객석에 부분 조명을 받으며 앉아 있는 벨리니를 지지하는 추기경들의 비밀 모임에 어두운 뒷면에 나 있는 문을 통해 볼일을 보러 들어온 수녀들의 롱샷 장면, 로렌스의 설교를 밖에서 듣고 있는 아그네스의 클로즈업 장면, 트람블레이에 대한 비밀 보고서와 증거를 찾기 위해 봉인을 깨고 교황의 방에 들어간 로렌스의 존재를 문밖에 귀를 대고 감지하는 아그네스의 클로즈업 장면, 그리고 로렌스가 트람블레이의 음모와 성직매수를 추기경들에게 공개하는 장면의 배경에서 조용히 지켜보다가 로렌스를 돕기 위해 추기경들 앞에 나서 목소리를 내는 아그네스의 클로즈업 장면 등이 주요 사례들입니다. 마지막 두 장면은 로렌스와 아그네스 사이의 긴밀한 연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우리 수녀들은 눈에 띄지 않아야 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께서는 우리에게 눈과 귀를 주셨고, 또한 전 수녀들의 안녕을 책임지고 있습니다라는 말로 시작하여, 트람블레이를 공포에 질리게 만드는 진실의 직격탄을 날리는 아그네스를 로렌스는 경외감에 휩싸여 쳐다봅니다(원전에서 로멜리는 만약 결혼을 할 수 있었다면 아그네스 같은 여자와 했을꺼라고 합니다). 연설을 마치고, 추기경들을 향해 무릎을 살짝 굽히는 인사, 영화사에서 가장 수동-공격적인 인사”(the most passive-aggressive curtsey)를 하고 곧 바로 돌아서서 고개를 똑바로 들고 식당을 빠져 나갑니다. 그녀의 당당하고도 공격적인 목소리에 눌려 무릎을 굽힌게 아니겠지라고 생각할 정도로 그녀의 승리감을 느끼게 하는 장면입니다. 그녀의 이러한 태도는 전날밤 로렌스가 트람블레이의 성직 매수 관련 보고서를 찾아서 벨리니를 찾아갔을 때 그가 보여준 태도와는 대조적입니다. 벨리니는 교황청의 리처드 닉슨은 되고 싶지 않다는 핑계로 로렌스의 제안을 거절합니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수동-방어적”(passive-defensive), 즉 능동적으로 문제 해결에 참여하기보다는 수동적으로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는 태도라고 하겠습니다. 이에 로렌스는 벨리니가 용기가 없는 사람이라 교황이 될 자격이 없다며, 그의 지지와 제안을 철회합니다.

로렌스가 시스티나 예배당의 콘클라베를 책임지는 관리자라면, 아그네스는 성녀 마르타의 집의 수녀들을 책임지고 있는 관리자입니다. 이들 사이의 연대는 로렌스의 행위자에서 보는 자로의 되기, 닫힌 스펙터클로부터의 로렌스의 탈주, 즉 구원의 가능성을 추구함에 있어서 공모자 나아가 구원자로서의 아그네스 역할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아그네스 수녀만큼은 아니지만, 샤누미 수녀(Sister Shanumi) 또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샤누미는 30년전 아데예미가 범한 성추문 사건의 피해자로 경쟁자 아데예미를 탈락시키려는 트람블레이의 음모로 성녀 마르타의 집으로 소환되어 온 수녀입니다. 그녀는 일종의 억압된 자의 소환”(return of the repressed)으로, 성정치적 전복성을 발휘하여 콘클라베의 스펙터클에 균열을 만들어 냅니다. 샤누미는 그녀의 존재 자체만으로 아더예미를, 그리고 그녀를 소환한 트람블레이까지 파멸시킬 수 있습니다. 소환된 그녀의 존재가 이들이 그녀에게 행사한 권력이 비합적인 폭력임을 상기시킴으로써 이들의 전락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샤누미와 아그네스에게는 남성들이 행사하는 폭력적인 힘이 부재합니다. 사실 남성일색의 세계에서 여자는 폭력적인 힘을 행사하는 자가 아니라 희생자가 아니면 이용자(user), 흔히 팜므파탈로 불리는 여자, 두 종류밖에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부재 때문에 이들은 남자들을 감금하고 있는 닫힌 스펙터클의 심연에 작동하고 있는 폭력과 욕망의 세계로부터 그들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베르거는 수녀들에게서 구원의 가능성, 새로운 미래로 나갈 수 있는 용기를 발견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베르거의 다시-보기로서 영화는 보는 자로서 아그네스, 샤누미, 그리고 익명의 수녀들의 존재와 그 자체가 발휘하는 성정치적 전복성을 전유하여, 보는 자의 영화, 현대 영화로 진입에 성공할 수 있습니다.

 

(6) 세 가지 엔딩

세 텍스트 모두 바티칸을 벗어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모두 주인공이 바티칸으로 들어가는 로마의 거리에서 시작하여, 일단 그가 바티칸에 들어가면 시스티나 예배당과 성녀 마르타의 집과 그 사이를 오가는 거리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비교적 공간 이동이 자유로운 영화에서도 오프닝 시퀀스 이후 바티칸을 벗어난 공간으로 이동하지 않습니다. 세 텍스트의 엔딩 또한 바티칸을 크게 벗어나지는 않지만, 각각의 다시-보기의 의도의 차이를 반영한 상호텍스트적 변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원작의 엔딩은 시스티나 예배당 안에서 로멜리(로렌스)가 천장 쪽 깨진 유리창을 통해 밖을 올려다 보는 장면으로 끝납니다. 레이가 투표용지를 태워 피워 올린 흰 연기를 뿜어내는 연통이 깨진 유리창을 통해 어두운 하늘로 빠져나가 있어 흰 연기는 못 보고 희미하게 반사되는 불빛만을 보며, 관중들의 희망의 함성을 듣는 로멜리의 시점으로 엔딩이 처리되어 있습니다. 각본의 엔딩은 다른 두 텍스트들과는 달리 주인공의 시점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카메라가 로마의 거리로 나가, 작은 카페 안으로 들어가 스탠드 바 위에 놓인 식은 에스프레소를 지나 배경에 놓여 있는 TV의 스크린에 멈춰 거기서 보여주고 있는 발코니에 나타난 한 추기경이 하베무스 파팜을 외치고, 흰색 수단을 입은 작은 인물이 등장하고 멀리서 축하의 함성이 들리는 장면을 포착하는 객관적인 시점으로 끝납니다.

영화는 성녀 마르타의 집, 로렌스의 방안에서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는 그의 시점에서 엔딩을 맺고 있습니다. 원작에서는 등장하지 않지만, 각본과 영화에서 선종한 교황이 앙골라에서 선물로 받아 성녀 마르타의 집 연못에 살고 있는 거북이들이 등장합니다. 이 영화에서 묵묵히 그러나 끊임없이 탈출을 시도하는 수륙양용의 거북이는 영적인 독립성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거북이는 베니테스와 밀접한 연관성이 있습니다. 첫 투표 후 저녁 휴식 시간에 로렌스는 연못가에서 거북이들과 있는 베니테스를 발견하고, 처음으로 사적인 이야기를 나누다 그를 건물 안으로 인도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엔딩 부분에서 거북이가 다시 등장합니다. 베니테스가 새 교황, 인노첸시오 14세로 선출된 후 성녀 마르타의 집으로 돌아온 로렌스가 연못을 벗어나 건물로 들어온 거북이를 발견하고, 들어 올려 연못에 다시 데려가 놓아 줍니다. 이어 이 영화의 엔딩 장면에서 로렌스는 마침내 감금이 해제되자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봅니다. 그가 내려다 본 것은 건물에서 세 명의 수녀들이 웃고 떠들며 안뜰로 나와 밖으로 나가는 광경입니다. 이러한 엔딩은 거북이로 상징되는 영적인 자유와 수녀들의 웃음과 그들의 퇴장으로 상징하는 폐쇄된 공간을 벗어날 수 있는 구원의 가능성을 로렌스가 마침내 깨닫게 된다는 것으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베르거가 원작과 각본의 엔딩을 의도적으로 익명의 수녀들의 등장과 퇴장으로 변형했다는 사실은 그의 다시-보기가 성정치성과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다시 확인시켜줍니다. 또한 이 엔딩은 미래를 향한 활력, 즉 탈주의 가능성을 아직도 가시화되지 않은 여성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원작 소설, 극작가의 각색, 감독의 완성된 영화, 세 텍스트들의 상호읽기는 각 매체 사이의 상호매체성을 각 매체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동인으로 활용함으로써, 각 매체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영화 <콘클라베>가 추구한 영화 매체의 새로운 가능성이 무엇인지를 살펴볼까 합니다.

 

4. 베르거의 <콘클라베> (2024)

 

(1) 베르거의 카메라의 눈과 카메라 의식

에드바르트 베르거 감독은 그의 세 번째 장편영화 <>(Jack, 2014)과 더불어 카메라 기법을 중심으로 영화에 대한 도전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 영화에서 그는 관객을 주인공 소년과 동일시하도록 유도할 목적으로 카메라를 그의 얼굴에만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영국 아카데미 작품상과 각색상을 비롯하여 7개 부문 수상과 아카데미 국제영화상을 비롯하여 4개 부문 수상을 비롯하여 많은 상을 가져다 준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의 동명 일인칭 소설(1929)을 각색한 <서부전선 이상 없다>(2022) 또한 카메라가 주인공 폴을 따라가고 있으며, 그의 시점에서 1차세계대전의 서부전선 상황이 포착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만의 카메라 기법 탐구는 <콘클라베>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시도되고 있습니다. 물리적인 전쟁을 다룬 <서부 전선 이상 없다>에서 지적인 전쟁을 다룬 <콘클라베>를 그는 정치 스릴러로 보다는 주인공 로렌스의 내적 혼란을 심도있게 다루는 영화로 만들려고 했다고 합니다. 즉 그는 정치적 권력 투쟁을 다룬 정치 스릴러보다는 로렌스의 심리적 혼란과 갈등을 다룬 심리 스릴러로 만들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추기경으로서 기도하는데 어려움을 갖는 신앙의 위기를 겪고 있는 로렌스의 고백은 감독으로서 난 나의 카메라가 포착하는 이미지를 신뢰하는데 어려움이 있다는 말과 같은 의미라고 감독을 말합니다. 여기선 종교이지만, 그것은 실존적 위기로, 우리의 내적인 확신에 대한 의심과도 같은 것이며. 그가 영화에서 다루고 싶은 것이 바로 이것이라고 합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콘클라베의 매니저로서 추기경 로렌스의 실존적 위기를 영화 <콘클라베>의 관리자로서 실존적 위기를 겪는 감독의 입지에서 다루고 싶었다는 것입니다. 이에 이 영화의 카메라 기법은 바로 확신할 수 없는 카메라의 눈에 대한 감독의 의심에서 출발하여 탐구된 것입니다.

이 영화의 원작소설은 서부전선 이상 없다와는 달리 일인칭 화자의 시점이 아니라 주인공의 주관적 시점과 객관적 시점을 넘나드는 파졸리니(Pier Paolo Pasolini)자유간접화법”(free indirect discourse)의 방식으로 서술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콘클라베>는 전작과는 달리 주인공의 주관적 시점이 아니라, 주인공 로렌스의 주관적 시점을 포착하는 카메라의 눈과 이에 의심을 재기하는 독립된 (어느 누구의 시점이 아닌, 그러나 전지적 시점과는 구별되는) 카메라의 시점을 함께 포착하는 카메라 기법을 탐구합니다. 이 기법은 원작 소설의 자유간접화법의 서술방식처럼 주인공의 주관적 시점과 이를 보고 있는 객관적 시점을 넘나드는 자유간접주관성”(free indirect subjective)의 카메라 기법으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콘클라베의 관리자로서 로렌스의 역할은 행위자라기보다는 보는 자의 입지에 처하게 됩니다. 이러한 입지에서 그는 그가 속한 바티칸 세계에 대한 일종의 다시-보기를 할 수 있게 됩니다. 그의 주관적인 시점에서 카메라의 눈이 포착한 그 세계의 기호들의 의미를 확신할 수 없는 로렌스, 또 다른 객관적인 시점에서 그 기호들을 보고 있는 그를 포착한 카메라의 눈이 상호작용하는 자유간접주관성의 카메라 기법이 이 영화가 추구하는 카메라 의식을 생성할 수 있습니다. 로렌스는 이 영화가 탐구하는 카메라 의식을 대변하는 주인공인 것입니다.

 

(2) 콘클라베 첫날의 시퀀스의 카메라 기법

콘클라베 첫날의 시퀀스는 베르거가 이 영화에서 탐구하고 있는 카메라 기법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콘클라베 첫날이라는 타이틀로 시작하는 시퀀스의 첫 장면은 아침에 성 베드로 대성당 미사에 가기 위해 붉은 수단을 입은 추기경들로 온통 붉은 바다를 이룬 안마당을 2층 주랑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로렌스의 뒷모습을 내려다보는 하이앵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장면은 로렌스의 시점에서 보고 있는 붉은 색 수단을 입은 추기경들 무리라는 바티칸의 주요 기호들을 담고 있습니다. 그 기호들과 그것들을 보고 있는 그의 뒷모습을 약간 위에서 내려다보는 카메라의 눈이 포착합니다. 전날 밤 영적인 불면증으로 시달리며 설교를 준비하고 나서, 신경질적으로 세면도구 포장을 찢으며, “넌 관리자야라며 분노를 터뜨리던 콘클라베 관리자 로렌스의 뒷모습에서 마치 파놉티콘의 간수처럼 떠올리게 됩니다. 원작을 참조하면, 이 장면에서 붉은 수단을 입은 추기경들을 내려다보며, 그는 저 꼭두각시가 누구지? 저 영혼 없는 사내가? 말 그대로 육신이 완전히 떨어져 나와 바로 옆에서 떠다니는 것만 같네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생각은 로렌스의 주관적인 시점에서 본 기호들이 그 의미에 대한 사유를 오히려 무화시킬 정도의 상투성과 공허함의 기호들임을 시사합니다. 이어서 또 다른 카메라가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로렌스의 정면을 약간 아래에서 위로, 로우앵글로 잡아 보여줍니다. 이 장면은 그 기호들의 의미를 확신할 수 없는, 그 상투성과 공허함에 압도된 로렌스의 혼란과 의심을 잘 포착하고 있습니다. 그의 혼란과 의심은 역설적이지만 그의 신앙을 살아있게 하는 동인이 됩니다. 로렌스가 미사 때 충동적으로 진심을 토로한 설교, 확신과 의심에 대한 설교가 이러한 논지를 확인시켜줍니다. 또한 자신의 카메라의 눈이 포착하는 이미지들을 신뢰할 수 없는 베르거의 혼란과 의심 또한 카메라 의식을 탐구하는데 동인이 된다는 것도 확인시켜 줍니다. 사실 베르거는 이 영화로 카메라의 포지셔닝을 잘하는 감독이라는 평가를 받기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습니다.

 

(3) 연극적 스펙터클의 구축과 로렌스의 설교

 

<콘클라베>는 스트라우한이 연극적인 세계로 요약한 바티칸을 배우 같은 성직자들의 의식적 행위가 전개되는 자족적인 성역, 현실세계로부터 단절된 인공적인 영역으로, 즉 연극적인 스펙터클로 구축합니다. 대리석, 프레스코화, 추기경들의 대담한 붉은 색(1600년대 추기경 복장의 붉은 색을 선택하여 르네상스식의 전통적인 아름다움과 화려함을 부각) , 세련된 표면적인 세계로서의 바티칸의 기호들로 이 영화의 연극적 스펙터클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르네상스 원근화법을 연상시키는 화면의 프레임화로 바티칸의 엄숙하고 의식적인 질서와 숨막히는 통제와 형식성을 또한 부각시킵니다. 뿐만 아니라 키아로스쿠로 기법을 쓴 렘브란트의 집단 초상화처럼 명암대비를 부각시켜 마치 연극 무대를 포착한 것처럼 추기경들의 표정, 스토리, 분위기를 드라마틱하게 표현합니다. 이러한 연극적 스펙터클의 구축을 잘 구현하고 있는 사례로 콘클라베 첫날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의 미사와 로렌스의 설교 시퀀스를 들 수 있습니다.

이 시퀀스는 <서부 전선 이상 없다>로 아카데미 음악상을 수상한 볼커 베르텔만(Volker Bertelmann)이 작곡한 사운드트랙이 생성한 청각-이미지의 효과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합니다. 이 영화는 오프닝 시퀀스에서 사용한 크리스탈 바셰트(crystal baschet)과 현악기(리코셰 기법)로 연주하는 서곡에서 사용한 주제를 영화의 라이트모티프로 하여 테마별로 변주한 곡들을 사운드트랙으로 사용합니다. 종교적 이상주의를 다루는 영화이지만 여기서만 유일하게 사용한 경건한 성가가 울리는 가운데 로렌스가 사제들의 도움으로 감마렐리에서 맞춘 린넨 소백의, 수단, 진홍색 모관, 각모, 어깨 망토, 십자가 등, 예복을 입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카메라는 각 악세서리의 신성한 의미를 음미하면서 자신의 영적 각성을 고양시키고자 하는 로렌스의 시선을 따라가지만, 이어서 미사가 진행되는 동안 마치 배우의 의상을 담당하는 스태프처럼 예복의 악세서리를 고쳐 매만지는 사제들의 손길과 이에 대한 로렌스의 반응을 비추는 장면은 그 또한 좀 전 안마당에서 그가 내려다 본 추기경들처럼 꼭두각시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그의 내면을 엿보게 만듭니다. 로렌스가 설교를 시작하자 성가는 멈춤니다. 그가 이탈리어어로 설교를 하는 동안 카메라는 중계방송하는 카메라맨의 카메라처럼 제단 언저리를 돌다 로렌스를 비교적 와이드샷으로 뒷모습, 프로필을 잡다가, 영어로 그의 본심 이야기를 시작하자 그를 정면 클로즈업으로 포착합니다. 그리고 리버스 와이드샷으로 설교가 계속되는 동안 그의 목소리에 집중하는 추기경들을 보여주고, 차기 교황이 되고자하는 야망을 가진 선두주자 추기경들을 한 사람씩 중앙에 놓고 프레임화하여, 새로운 경쟁자로 등장한 로렌스에 대한 두려움과 놀람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한 프레임에 키아로스쿠로 기법을 살려 모든 추기경들을 연극무대에 올려놓은 듯한 집단 초상화를 보여줍니다.

 

그가 설교를 마치자 잠시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둔중한 북소리와 종소리와 함께 시작한 짧은 테마 변주곡이 성당을 나가는 행렬 앞에 서서 옆에 늘어선 당황하는 동료 추기경들의 반응을 곁눈으로 살피는 로렌스를 슬로우모션으로 카메라가 따라가는데 울리면서 이 시퀀스는 끝납니다. 이 시퀀스 분석을 통해 이 영화의 사운드트랙이 화려하고 세련된 의식적인 스펙터클을 구축하고 있지만 동시에 그 이면에 작동하고 있는 숨막히는 억압과 형식성의 파괴력을 드러내 보이는 긴장감과 충격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며, 이 영화의 부조화와 불협화음을 압축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음을 새삼 확인하게 됩니다.

자신의 설교에 청중, 동료 추기경들이 나타내는 놀람과 충격에 대한 로렌스의 민감한 의식은 그의 복합적인 심리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벨리니가 당신도 야망이 그렇게 많은 줄 몰랐다고 할 때 그가 보이는 강한 부정은 실은 자신도 설교 중 충동적으로 본심을 말하게 된 것이 혹시나 나를 위해서 주께서 자리를 안배한 것이 아닐까라는 위험한 생각(원작 참조)을 하고 있는 자신에 대한 부정인 것입니다.

확신이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죄이고, 의심이 없고, 확신만 있다면 신비도 존재할 수 없고, 신앙도 필요없게 된다, 우리의 신앙이 살아 있는 것은 의심과 함께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의심하는 교황, 죄를 짓고 용서를 구하고 또 실천하는 교황을 주십사고 주께 기도하자는 내용의 설교는 이 영화의 주제를 함축하고 있음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자신이 적절한 교황 후보임을 피력하는 로렌스의 선거 운동 연설로 간주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설교 이후 관객도 그가 차기 교황이 되는 반전을 기대하게 됩니다. 사실 그는 요한 24라는 교황명을 이미 정해 놓았습니다.

(4) 폭발과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

결국 테데스코를 제외하고 유력 후보자가 다 탈락하게 되자, 테데스코가 교황이 되는 것만은 막아야 된다는 생각에 로렌스는 6차 투표에서 자신의 이름을 써서, “내 표가 반드시 교황이 되어야 할 분께 가도록 이끄소서(라틴어)”라는 위증을 하는 순간 번개와도 같은 타이밍으로 광장에서 폭발이 일어나고, 그 위력이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 쪽 창문을 깨고 들어와 로렌스를 쓰러뜨리고, 추기경들을 타격합니다. 이 순간, 시스티나 예배당에서 콘클라베의 진행이 구축해온 스펙터클에 구멍이 뚫립니다. 감금이 된 후 처음으로 아침햇살이 어두운 예배당을 가득 비춘 가운데, 쓰려진 로렌스는 주의 심판의 두려움뿐 아니라 환희를 느끼며, 미켈란젤로의 프레스코화 <최후의 심판>을 바라봅니다.

원작에서는 이 엄청난 걸작을 봐. 기막히게 예언적이지 않은가? 그림 끝에 어둠의 장막 보이지? 예전엔 그저 구름이라고 여겼는데, 지금 보니까 연기가 틀림없구먼. 어딘가에 불이 났어. 가시권 너머일텐데 미켈란젤로가 감추려 한 걸 보니. 폭력, 전쟁, 갈등의 상징일까?”(338)라고 레이에게 그때의 그의 깨달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각본에서는 난 그 그림의 윗부분에 어둠을 보고 있었어. 이전엔 구름이라고 생각했었지. 그런데 연기라는 생각이 들어. 어떤 폭력. 그런대 베드로는 그의 머리를 꼿꼿하게 들고 있네라고 레이에게 말합니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이러한 설명의 대사 없이, 시각적, 청각적 이미지로만 로렌스의 이러한 깨달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외부와의 접촉이 봉쇄되고, 인공적인 조명과 인위적인 의례와 질서로 스펙터클을 구축하고 있는 공간에 높은 창문을 통해 바닥까지 길게 삼각형 구도로 쏟아져 들어오는 일광이 바닥에 쓰러진 추기경단장 로렌스를 비춥니다. 이 장면은 원근법과 명암대조효과 등으로 구축된 스펙터클의 위계질서를 한 순간 무너뜨리는 뻥 뚫린 구멍을 부각시키는 시각적 이미지를 창출합니다. 바닥에 누워서 <최후의 심판>의 지옥도를 바라보는 로렌스, 연기 속을 뚫고 비치는 지옥도 부분을 번갈아 보여주는 카메라의 움직임은 바닥에 쓰러져서야 다시 보게 된 로렌스의 새로운 인식 단계로의 진입을 시사합니다.

 

(5) 새로운 교황의 탄생: 인노첸시오 14

폭발사고 이후 추기경들 사이에 벌어진 이데올로기적 논쟁은 베니테스의 발언으로 종식됩니다. 중단된 콘클라베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강당에 모여 재를 뒤집어 쓴, 마치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에 재를 바르고 회개하고 있는, 사실은 회개를 강요받고 있는 추기경들 가운데, 테데스코의 발언 이후 일어나 조용한 목소리로 영어로 시작하여 스페인어로 전환하여 행한 베니테스의 연설은 혹자는 챗gpt가 써준 것같은 상투적인 표현들로 가득하다고 지적하지만, 로렌스의 설교와 함께 의심과 다른 종교에 대한 관용을 주장하는 다양성에 관한 연설로 이 영화의 주제를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설교는 추기경들의 마음을 움직여, 전혀 예상하지 못한 그를 인노첸시오 14세로 탄생시키게 되는 기적에 가까운 반전을 가져옵니다.

베니테스가 택한 교황명, 인노첸시오(영어로 Innocent)어떤 선입견도 없는 순수의 이름이라고 베르거는 설명합니다. 이 말은 어떤 확신도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새로운 교황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멕시코계 추기경이 선출되는 반전이 끝이 아니라 이 영화는 또 하나의 반전을 준비해놓고 있습니다. 백인도 흑인도 아닌 교황이 여자도 남자도 아닌 간성(intersex)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는 사실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생물학적 성과 염색체까지도 확실하지 않은 교황이 탄생한 것입니다. 이러한 반전에 당황하는 로렌스에게 전 주님이 만드신 그대로의 모습이고, 아마도 저의 이러한 차이가 저를 더욱 유용하게 만든 것 같습니다. 당신의 설교를 다시 생각해봅니다. 저는 이 세상의 확신들 사이에서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습니다라고 그는 말합니다. 이 말은 로렌스 뿐 아니라 관객에게도 무척이나 설득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5. 나가면서

영화를 다 보고나서, 언뜻 이 모든 판을 선종한 교황이 짜놓았던 것은 아니었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우린 제단 위에 화려한 예복을 입고 앉아계신 신성한 위엄을 보이는 교황이 아니라 침대에 누워있는 죽은 교황을, 그리고 플라스틱 바디 백에 담겨 응급차로 덜컹거리며 호송되는 시체로 교황을 만납니다. 그러나 그가 진보적이고 탈권위적 성향의 교황으로 꾸리아의 만행으로 타락한 교회에 대한 믿음을 잃었다는 사실, 그리고 중요한 두 추기경, 로렌스와 베니테스의 사임을 허락하지 않았다는 사실, 무엇보다도 트람블레이의 성직 매매 관련 비밀 보고서를 비롯해서 추기경들의 바티칸 은행 구좌를 조사한 문서를 숨겨 놓았다는 사실, 똑똑한 벨리니와 체스를 두면 늘 8수씩 앞서 이기곤 했다는 사실을, 특히 콘클라베가 진행되는 가운데 첫 난국에 부딪혀 고뇌하는 로렌스의 환상 속에 눈을 뜨고 그를 바라보는 모습을 떠올리며, 그런 생각을 뒤늦게 해봅니다. 이러한 생각에 266대 프란치스코 교황을 영화의 선종한 교황에 비교해보기도 하고, 영화 속 선종한 교황이 지난 2022년 선종한 베네딕토 16세와 너무 닮아서 놀라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영화 속 선종한 교황은 현실의 두 교황 모두를, 이 두 교황이 등장하는 <두 교황>(2019)이라는 영화도 있습니다만, 닮은 허구적 교황임은 분명합니다.

최근 프란치스코 교황이 선종하여, 새로운 교황을 뽑는 콘클라베를 기다리고 있는 현재(*이 원고가 정리될 때, 이미 레오 14세를 선출하는 콘클라베가 끝났습니다), 이 영화는 14억의 카톨릭 신자들의 새로운 목자가 되실 교황이라는 직책이 갖는 무게를 새삼 생각해보게 합니다. 지금까지 266명의 교황 가운데, 267대 교황이 탄생하지만,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중에는 남장을 하고 교황이 된, 물론 역사적 논란의 여지는 많지만, 여성 교황(Pope Joan)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영화에서 새로 탄생한 간성의 교황도 허구이기는 하지만, 전혀 불가능한 설정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베니테스가 선택한 인노첸시오 교황명은 아이러닉하게도 인노첸시오 10세를 떠올리게 합니다. 베르거가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여성 교황 스캔들 이후 교황의 성적 정체성을 확인하기 위한 절차로 도입된 구멍 뚫린 의자(La Sedia Stercoraria)에 앉아서 검증을 받고 있는 인노첸시오 10세 그림, 그리고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그린 <교황 인노첸시오 10세의 초상>(1650)과 이를 재해석해서 그린 프란시스 베이컨의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교황 인노첸시오 10세 초상에서 출발한 습작>(1953)이 한꺼번에 떠오릅니다. 첫 번째 연상은 인노첸시오 14의 성적 정체성에 대한 의심과 폭로의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그러나 벨라스케스와 베이컨이 그린 인노첸시오 10세의 이미지는 이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인노첸시오 교황에 대한 기대와 열망을 더욱 부추기기도 합니다. 벨라스케스의 지적이고 권위적인 확신에 찬 교황도 침묵과 어둠 속에서 비명을 지르는 비관적인 교황도 아닌, 의심하고, 죄도 짓고, 그래서 용서도 구하고, 또 다시 실천하여 교회의 미래를 열어나갈 그런 새로운 인노첸시오 교황에 대한 열망을 더욱 불러 일킨다고 하겠습니다. 영화 <콘클라베>가 탄생시킨 그런 교황이 곧 선출될 현실의 콘클라베를 고대하며, 제 이야기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사회자:

교수님 아 이런 재미있는 사실들을 알고 영화를 봤다면 또 얼마나 더 재미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영화를 보는 교수님의 풍성한 여러 가지 해설이 이 영화를 정말 다시 보게 합니다. 이제 플로어로 옮겨서 여러 가지 질문을 듣는데요. 보통 관례상 사회자인 제가 제일 먼저 질문을 드리니까는요 질문을 하나 드리고 플로어로 가겠습니다. 저는 많은 신앙을 다룬 영화가 의심에 관한 영화라는 것이 항상 흥미롭습니다. 예를 들면, 예전에 메릴 스트립이 나왔던 <다우트>란 영화도 결국 의심과 확신에 관한 영화였다고 봅니다.
저는 이 영화도 의심을 하는 교황을 달라라고 말하는 로렌스의 말이 결국 이렇게 비유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의심은 신앙이나 확신으로 가는 다리 같은 것이다. 의심을 건너지 않는다면 우리는 확신의 다리에 갈 수가 없다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여러 가지 빛이나 암흑으로 또 이 암흑은 결국 콘클라베 즉 폐쇄란 뜻이잖아요.
폐쇄되고 봉쇄된 것, 모든 비밀스러운 것, 갇혀있는 것, 암흑에 싸여있는 것, 불신하고 있는 것, 이런 세상을 이제 결국 열려있는 세상, 빛으로 가는 세상, 또 신이 원했던 세상, 결국 그 사람을 확신으로 나아가게 하는 여러 가지 과정이 저는 <콘클라베>라는 영화에 들어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개인적으로 그 흰 우산하고 검은 우산 장면이 아주 흥미로웠는데요. 처음엔 검은 우산을 모두다 쓰고 있다가 나중에 이제 모든 게 해결이 됐을 때, 추기경들이 흰 우산을 쓰고 무리를 지어 가고 있는데, 그 장면을 자세히 보면 로렌스만 우산을 안 썼어요.
그렇듯 로렌스만 혼자서 흰 우산을 안 쓰고 비를 맞고 가서 결국 그가 어떤 초월적인 신의 눈빛조차 가리는 것을 해냈다고 저는 봅니다. 개인적으로 드릴 질문은 이 영화의 하이 앵글과 로우 앵글 즉 영화적인 기법에서 하이앵글과 로우앵글이 상당히 흥미롭다고 생각합니다. 하이앵글은 로렌스의 시선이지만 동시에 저는 신의 시선인 것 같은 느낌이 있거든요. 그래서 진실은 어디에서 바라봐야 하는가? 신의 시선처럼 하이앵글로 보지만 침묵을 하고 있지만, 거꾸로 이제 로렌스가 인간의 그 위치에서, 아니 인간보다 못한, 거의 대리석 바닥에 엎드려 누워있는 지경에 이르잖습니까. 그러면서 시스티나 성당이, <최후의 심판>이 있는 방이 빛으로 열려버리는 것이 굉장히 인상적인데 이때 신은 이미 우리 안에 있는 균열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로렌스는 처음부터 사실은 교황이 되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에 그토록 신경질적으로 세면도구세트를 막 뜯고 내가 왜 매니저가 되어야 하지라는 마음을 가지지 않았을까? 하는 그런 상상을 하게 됩니다.
하이앵글과 로우앵글 기법이 영화적으로 갖고 있는 어떤 함의, 폐쇄라든가 봉쇄라든가 그 봉쇄가 열리는 순간이라든가, 이런 굉장히 메타포릭한 함의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교수님은 어떠신지요?

 

발제지:

사실 제가 영화학 전공자와 전문가분들 앞에서 카메라의 앵글과 같은 영화 기법에 대한 것은 되도록 언급을 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제가 앞서 콘클라베 첫날 시퀀스를 분석할 때 로렌스가 하이앵글로 추기경들을 내려다보는 장면에서 저 우스운 인간들 하면서 보는 그의 시각을 언급했습니다. 로렌스는 상당히 엘리트 추기경입니다. 그러면서도 굉장히 자기 비하를 많이 하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교황이라는 성직을 자신과 같이 성스럽지 못한 자가 한다는 것은 못 참겠다는 그런 입장을 취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로렌스가 바닥에 쓰러져 <최후의 심판>을 로우앵글로 올려다보면서, 많은 걸 깨닫게 되는 것 같아요. 예전에는 그냥 이상적으로 저건 구름이겠지, 최후의 심판을 받아 저기에 있는 사람들은 지옥에 있는거겠지라고요. 지옥에 대한 그의 그런 생각이 현실 세계, 지옥 같은 폭력과 전쟁의 위력이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쪽 창문을 통해 들어왔을 때, 그는 양가적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위증에 대한 주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과 바닥을 치며 넘어져서 미켈란제로의 지옥도를 보면서 오히려 역설적이지만 콘클라베 매니저로서 강요당하는 확신으로부터의 해방감, 희열감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사실 저도 로렌스는 줄곧 자신의 야망을 위험한 생각으로 부정하고 억제해 왔지만, 처음부터 콘클라베의 매니저가 아니라 교황이 되고 싶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이미 요한이라는 교황명도 생각해놓고 있었거든요. 사실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순수한 추기경으로 보이는 베니체스도 인노첸시오라는 교황명을 미리 정해놓았던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회자:

. 플로어로부터 또 질문 받도록 하겠습니다. 어떻게 보셨는가라는 코멘트도 좋고요. 또 질문도 좋습니다.

 

참가자1:

김미현입니다. 전 오늘 처음 들어왔는데요. 너무 재미있었고, 선생님 발표가 저도 미처 몰랐던 지식과 정보들을 다양하게 제공해 주셔서 아주 흥미진진하게 들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정말 오랜만에 즐거움을 느끼게 하는 영화라고 생각하면서 보았습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로 재미있는 지점들이 많았습니다. 일단 드리고 싶은 말씀은 로렌스의 마음과 진실에 대한 언급을 잘 담아내는 장면들이, 오프닝에서 나온 트래킹샷 같은 것들이 몇 번 나오는데, <샤이닝> 이후로 그런 인물을 뒤에서 따라가는 트래킹샷을 굉장히 합리적으로 쓰이고 있는 사례들이라는 것입니다.
이 영화에서 처음에 벨리니를 통해 누가 제정신인 사람이 교황이 되고 싶겠냐고 말하지만, 결국 누군가가 교황이 되는 것을 막겠다는 명분으로 자신이 교황이 되고자 하는 명분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까. 추기경들 모두 마음속에 자신의 교황명을 갖고 있다는 대사도 있지 않습니까. 사실 이것은 모든 인간의 마음이라서, 이 영화는 종교적인 영화라기보다는 장르로는 스릴러 영화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대통령 선거 또는 어느 당 대표 심지어 학급 반장, 학부모회장 선거와 같은 모든 선거에서 일어나는 사람들의 흔들리는 마음을 반영하고, 그 마음은 계파가 형성될 정도로 크다고 하겠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인간의 마음을 보여주는 보편성의 영화라는 생각이 들어 매우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제가 먼저 질문을 드리고 싶은 지점은 이 영화에 나오는 2가지 연설입니다. 전반부에 로렌스의 연설이 나오고, 이 연설은 영화를 본 사람은 누구나 기억할 만큼 확신과 의심에 관한 명연설입니다. 자신의 본심을 담아서 한 로렌서의 연설로 저와 관객들은 로렌스가 선출되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후반부에 이르러 누군지 존재도 몰랐던 신자가 몇 명이 있는지도 모르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온 익명의 추기경이 그때까지 몇 표 나오지도 않았다가 모두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한 연설로 결국 당선이 됩니다. 저는 몰랐지만, 발표자께서 그의 연설이 희화화되기도 한다고 하셨는데, 사실 저도 저렇게 넘어가나 하다가, 교황직을 받아들이겠습니까?라는 질문을 받는 상대가 누구지 설마라는 생각을 하게 되더군요. 그래서 이 영화에 대하여 크게 2가지를 지적해봅니다. 첫 번째, 범인을 밝혀내는 스릴러 장르라는 것, 두 번째, 본질적인 차원에서 이 영화를 볼 때 결정적인 순간에 모두의 마음을 울리는 이야기란 아주 단순한 본령을 이야기하는 것, 누구나 그 순간에 이야기할 수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영화를 통해 결정적인 순간에 마음에 품고 있는 진실을 말하는 그 단순함이 결국은 모두를 설득하는 시대 정신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로렌스의 연설과 베니티스의 연설이 갖는 함축적인 의미와 두 연설의 배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의견을 묻고 싶습니다.

 

발제자:

제가 답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선생님이 이미 정확하게 잘 말씀해 주셨어요. 두 추기경의 연설은 굉장히 아름다운 연설로 평가됩니다. gpt가 해도 그 정도는 했을꺼라는 평가는 베니테스 연설의 상투성과 진부성에 대한 부정적인 지적을 의미하는 동시에 선생님이 말씀하신 그 타이밍에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마음의 본령을 드러내는 단순성과 보편성을 인정하는 지적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베니테스의 연설도 로렌스의 연설도, 단순하면서 아름다운 연설로 평가되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처럼 저도 끝까지 로렌스가 선출되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했습니다. 베니테스의 진솔하고도 단순하면서 아름다운 연설이 모두의 마음을 움직일 정도로 감동적이었다고 해도, 베니테스가 교황으로 결정되었을 때, 상당한 반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거기다 그가 간성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 더 큰 반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로렌스의 확신과 의심에 대한 연설이 가르쳐준대로, 저의 논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선출 결과에 대한 의심 덕분에 결국 이 반전들이 신비, 하나님의 뜻임을 알게 되었음을 인정하니 좀 설명이 되는 것 같았습니다.

 

사회자:

김미현 선생님 말씀을 듣고 생각이 난 건데요. 이 영화 첫 장면은 알프레드 히치콕의 <마니>라는 영화의 첫 장면하고 거의 닮아있죠. 기억나시죠. 아주 똑같습니다. 제가 볼 땐 베르거의 히치콕에 대한 오마주도 있는 것 같습니다. <마니>는 마니라는 인물에 대한 탐구거든요. 이 영화가 본질적으로 로렌스라는 사람의 뒤를 따라가서 그 사람의 마음을 살펴볼 것이라고 하는 어떤 선언을 하는 첫 장면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참가자2:
모든 그 현대 미스테리 스릴러 감독들은 다 히치콕을 오마주하고 패러디해서 히치콕을 다 떠올리게 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오늘 정문영 선생님이 붉은색 의상으로 이 영화에 적절한 의상 코드로 맞춰 입고 오셨어요. 발제자의 이런 준비 너무 좋습니다. 보는 사람이 너무 재미있어요. 아까 연극적 스펙터클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연극적 대사가 많고, 연극적인 무대로 하나의 공간에서 찍기 때문에 그런 아름다움이 있는 것 같습니다. 붉은색 코드가 믿음과 정열에 대한 것이기도 하지만 또 폭력과 야만성의 코드이기도 해서, 화려함의 이면에는 야만성이 있음을 뜻하는 것 같습니다. 콘클라베 또한 굉장히 민주적인 제도인 것 같지만 굉장히 폐쇄적이고, 로렌스도 모든 정보를 갖고 있으면서 그것을 깔지 말지를 자기가 판단을 하잖아요. 물론 그의 판단이 선종한 교황 또는 주님과의 대화 가운데 판단한 것이긴 합니다.이러한 상황은 카톨릭교회 내에서 일어나는 것뿐만 아니라 김미현 선생님이 말씀하신대로 정치계일 수도 주주총회일 수도 대표이사를 뽑는 것일 수도 있어서, 상당히 현대적인 메시지를 전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저는 장르적으로 접근하여 좀 단순하지만 호기심 어린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맨 처음에 베니테스는 딱 한 표를 얻거든요. 근데 아무도 그 사람이 누군지 모르잖아요. 그리고 베니테스가 추기경인지 아닌지 정말 의심이 가거든요. 선종한 교황이 비밀리에 임명했다고 하지만, 증거도 없고, 그래서 이 1표는 자기가 찍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저는 영화를 따라갔어요. 본인은 로렌스를 찍었다고 계속 얘기를 하는데 그것도 의심이 갑니다. 그가 빌런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어떤 사명에 따라 그런 행동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잖아요. 지금 생각해보니, 1표에서 시작해서 3분의 2까지 간다는 불가능의 도전을 하고 있는 되게 재미있는 인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사회자:

색깔에 관한 멋진 코멘트를 정민아 교수님이 해주셨습니다. 선생님의 코멘트는 그냥 넘어가고 또 질문을 받아도 되겠죠? 코멘트 또는 질문을 누가 하시겠습니까?

 

참가자3:

제가 처음 참가하고, 또 잘 모르지만, 간단하게 제 생각을 좀 정리하고자 합니다. 로렌스는 콘클라베 책임자이자 추기경단장으로서 자기 소임을 다 하고 싶다라는 의지를 처음부터 끝까지 놓치지 않잖아요. 그래서 이 단장직을 하나의 보케이션(vocation)으로, 성직을 하나의 보케이션으로 보여주려고 엄청 노력을 하십니다. 사실 그의 노력은 단장으로서의 보케이션뿐만 아니라 교황의 보케이션을 단장을 통해서 보여주려고 엄청 노력한 것은 아닌가, 그래서 교황 선출을 다루고 있지만 교황 선출보다 단장의 역할을 통해서 교황이 어떠해야 된다라는 걸 대리로 보여주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사실 전체 이야기가 다 레이프 파인즈에게, 단장 역할에 다 집중되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는 자신은 자기 자신을 위선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데, 타인은 상대방을 위선자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같은 편 내에서도 서로 속이지 말라고 합니다. 마지막에 교황 선출될 때, 전임 교황에게서 진보적인 가치가 전승이 된다는 의미가 있긴 하지만, 좀 갑작스럽고 너무 생뚱맞다는 놀람, 너무 급마무리되는 게 아닌가라는 그런 놀람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같은 진보주의자들이 봤을 때는 당연한 귀결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보수주의자들이 봤을 때는 그 또한 위선으로 볼 수도 있겠다는 그런 생각을 잠깐 해봤습니다. 서로 생각이 같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진보적 가치이지만 상대방의 입장에서는 그 또한 위선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약간 들었습니다.

 

발제자:

등장인물들 가운데 교황이 되고자 하는 걸 직접 밝히거나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다 확신에 차 있잖아요. 그러나 로렌스는 설교에서 의심할 수 있는 교황을 주십사 하지 않았습니까? 자기는 위선이 아니고 남이 위선이라고 하는 건 자기는 아니라는 확신이 있는 거잖아요. 그래서 그런 사람들을 하나씩 탈락시키고 남은 사람이 베니테스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 의심이라는 게 어떻게 보면 상대주의를 만들어내는 원인이 됩니다. 상대주의 때문에 세상이 혼란스럽다고 하지만, 좋게 말하면 그것은 다양성이 있는 세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느 쪽에서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할 얘기도, 반박할 여지도 많습니다. 지금 우리도 그런 현실 속에 있습니다.

사회자:

여기 지금 캐나다에서 새벽 6시부터 일어나셔서, 참여하고 계신 캐니 김 선생님이 계신데요. 어떻게 보셨는지 궁금합니다. 선생님께 저번에 제가 발언할 기회를 못 드려서 되게 죄송했었거든요. 오늘은 꼭 한 말씀 해주셔요.

 

참가자4:

정 교수님 오늘 수고 많으셨습니다. 말씀 잘 들었습니다. 저도 이 영화를 봤을 때 로렌스 추기경이 당연히 승계하지 않을까라는 그런 선입견을 갖게 되더라구요. 그런데 나중에 베니테스가 교황이 되는 걸 보고 비판적 관점에서 감독이 관객에게 전달해 주고자 하는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좀 가졌거든요. 거기에 대한 좀 설명을 부탁드려도 될지요.

 

발제자:

로렌스가 아니고 베니테스가 되어야 한다, 무엇 때문에 그래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답하기가 정말 어려운 것 같아요. 솔직히 제 논리와 이성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는 베니테스가 교황이 되어도 그 역할을 감당해내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인간적인, 뭔가 순수하지 못한 때 묻은 시각에서 생각해서 그렇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렇지만 3분의 2가 넘는 추기경들의 찬성으로 그가 교황으로 선출되었다는 사실, 그들이 저보다 훨씬 뛰어난 혜안이 있는 분들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 저의 선입견을 반성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가 교황이 되어야 한다는 이유는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의 정체성 자체가, 인터섹스 그 자체가, 그래서 그의 존재 자체가 의심을 보여준다는 점이 로렌스가 기도한 교황의 자격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이 적절한 이유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다른 추기경들, 대부분 관료 출신으로 교황청에서 한자리 하던 사람들로 능력이 검증되었지만, 그는 지금까지 삶의 현장에서 봉사를 해온 추기경으로 그만이 갖고 있는 현실적인 감각으로 무엇이 문제인지를 잘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지 않았을까요.
이런 맥락에서, 교황의 역할, 그리고 우리가 기대하는 교황에 대해서 저는 좀 생각을 하게 됐어요. 교황은 성스럽고 존경할 수 있고 그런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보다는 인간으로서 가장 소수자의 입장까지도 대변할 수 있는 그런 인간적 자격이 더 중요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렇지 않을까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사회자:

, 좋습니다. 또 다른 질문이 없습니까?

참가자5:

저는 마지막에 그렇게 결론을 내리는 것에 대해서 사람들이 굉장히 비현실적이라고 네티즌들 사이에서 얘기하는 걸 봤는데, 그 비현실적인 것을 보여주는 게 바로 영화가 하는 역할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영화의 역할은 언제나 상징성이나 우화성을 담는 것이고, 그리고 제가 생각하기에는 카톨릭에 대한 비판이 좀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 여성이 이 세상에서 지금 할 수 없는 유일한 영역이 카톨릭에서 교황이 될 수 없는 것, 추기경도, 신부도 될 수 없고, 여자들은 모두 수녀가 되어야 하는데, 수녀는 공부를 많이 해서 박사가 되어도, 사실 박사 학위를 받은 수녀들도 많은데 그분들이 하는 일이란 신부들 옷을 다리고, 그들이 먹을 음식을 장만하는, 이런 일을 할 수밖에 없어서 굉장한 인력 낭비이며, 여기에 대한 비판의 소리도 카톨릭 내부에 있어 왔거든요. 하지만 가장 불가능한 것이 카톨릭에서 영원히 아무리 세계가 많이 진보되어도 바뀔 수 없는 것은 여성이 신부가 될 수 있는 것 그리고 신부가 결혼을 한다는 것, 이 두 가지는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이야기를 하거든요. 그래서 여자가 교황이 되는 것은 너무 비현실적이기 때문에, 그것을 살짝 비튼 게 인터섹스가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어요.

 

발제자:

, 그래서 여성도 남성도 아닌 인터섹스로 하지 않았나라는 생각이시군요. 아까 제가 말씀드린 여성 조안 교황은 사실은 남장을 한 여자였습니다. 신학교를 남자 친구와 함께 가고 싶어서 남장을 했는데, 여자가 남자보다 훨씬 똑똑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여자는 교황까지 하게 되었지만, 자신의 성적 정체성과 섹스 자체에 대한 무지로 바티칸 거리 퍼레이드에서 출산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거기서 군중들로부터 적그리스도가 나타났다면 돌에 맞아 죽었다고 합니다. 여성 교황의 역사적 진실 여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지만, 가장 신뢰할만한 증거로는 <데카메론>의 작가 보카치오의 언급과 교황 재직 연보 확인을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이라고 해도, 어쨌든 남장한 여자이지 여자로서는 가능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따라서 선생님이 지적하신대로, 여성이 교황이 된다는 것은 제일 불가능하지 않을까라고 저도 생각합니다. 물론 여성을 교황을 뽑는 게임에 행위자로 참가시키지는 않지만, 여성이 아니라 인터섹스가 교황이 되지만, 이 영화에서 주목할 점은 비가시화된 여성을 모든 걸 다 보고 있는 여성으로 등장시키고, 눈과 귀가 있는 수녀들을 책임지고 있는 아그네스로 하여금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한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자:

선출된 교황이 어찌 보면 여성인 동시에 남성이기 때문에 굉장히 온전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양성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그가 비정상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자궁과 남근을 다 가진 굉장히 완전한 사람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그것을 결핍이나 비정상이나 고쳐야 할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발제자:

, 그래서 베니테스는 여성의 성기를 떼어내려는 수술을 고려하다가 하지 않기로 생각을 바꾸었죠.

참가자2:

이것은 좀 아닌 것 같다는 맥락에서 보면, 가장 불가능한 상상력을 펼치고 있는 영화로 어떤 균열된 지점을 더 크게 부각시키는 것 같습니다. 사실 현실에서 카톨릭이 당면한 중요 문제는 동성애 인정과 그다음에 사제들의 결혼이거든요. 여성 사제는 저 뒤로 밀려 있어요. 그런데 그 문제를 가장 부각을 시켰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굉장히 전복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회자:

사실 더 놀라운 것은 <콘클라베>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 바로 현실에서 일어난다는 거죠. 최근에 독일 추기경이 프란치스코 교황을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그런 발표하지 않았습니까. 교황이 너무 진보적이라서, 교회가 다시 정통파로 돌아가야 한다는 취지의 성명을 독일 추기경이 내지 않았습니까?

발제자:

영화 속 바티칸과 추기경들 사이의 진보파와 보수파의 대결과 갈등과 반목은 단순히 픽션이 아니라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우리에게도 이제 너무나도 친숙하게 들리게 된 탄핵, 거부권, 등 이러한 용어들이 교황청에서, 교황청을 둘러싸고 일어나고 있는 여러 가지 사건들과 그것들에 관한 담론에서 그대로 발견됩니다. 오늘 영화 이야기에서는 이런 현실과 연결해서 언급하는 것을 자제하고 했지만, 사실 매우 리얼리스틱한 영화인 것은 분명합니다.

 

사회자:

, 역시 어디에나 정치는 있습니다. 선생님들 1~2분 더 질문 또는 코멘트 받고 마무리할까 합니다. 정병기 교수님, 황영미 교수님 혹시 질문하실 거 있습니까? 혹은 송영애 교수님은? 피프레쉬 회원분들, 혹시 하시고 싶은 이야기 있습니까?

참가자6:

지금 제 [참가]조건이 별로 안 좋지만, 정문영 선생님 발표 아주 새롭게 잘 들었습니다. 저는 이 영화가 우리의 편견에 허를 찌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우리는 여성이 교황이 된다는 것을 감히 상상도 못 했잖아요. 왜 우리는 기존에 그렇게 되어온 것을, 그런 편견과 통념을 벗어나지 못했는가? 저도 깜짝 놀랬어요. 내가 놀라는 것 자체가 나도 그런 편견을 가진 사람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고, 이에 저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삶 속에 누적되어 온 여러 가지 통념에서 벗어나기 어려운가를 이 마지막 엔딩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그렇게 될 수 있냐 없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 통념이 얼마나 벗어버리기 어려운 그런 관념인가 하는 거에 허를 찌르는, 굉장히 중요한 코드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게 흘러가는 것이 내 생각과는 다른 것 같다는 논의로 이 영화가 마지막에 진짜로 얘기하는 것을, 그것을 다르게 해석하는 것은 이 영화 전체를 좀 왜곡해서 보는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원작은 읽지 못했습니다만, 정문영 선생님 발표 들어보니까 원작을 꼭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참가자7:

저도 세미나에 참가하기 위해 급하게 영화를 보느라 발표를 듣고 이제 좀 생각을 정리했는데요. 이것은 언뜻 지나간 이야기인데, 좀 전 독일 이야기를 심영섭 선생님 하셨는데, 여기에서 나오는 보수적인 추기경의 이름 테데스코는 이탈리아어로 독일이라는 뜻이거든요. 아마도 의도적으로 그의 이름을 저먼으로 한 것 같아요. 프란체스코 교황 이전 독일인 교황 베네딕토 16세도 보수적인 인물이었잖아요.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이 영화를 보면서 떠오른 것은, 신앙은 정치와 다르죠 의심의 대상이 될 수도 없고, 그러나 교회는 정치와 상당히 유사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의심의 대상이 돼야 되고 특히 정치적 신념이나 정치적 확신은 반드시 의심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정치적 올바름만 편파적으로 편견을 가지고 추정하게 된다면 정말 심각한 문제가 생길 수 있잖아요. 이를 로렌스가 연설에서 굉장히 중요하게 천착을 하니까 받아들일 수 있는 메시지 같고요. 이것은 쭉 발표 듣고 다른 선생님들 얘기하시는 것들도 듣고 지금 생각을 한 건데, 마지막에 베니테스가 교황이 된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라는 문제에 대한 것입니다. 제 생각에도 가톨릭에 대한 비판이 분명히 있다고 봐요. 현실적으로 가톨릭 신앙을 제가 언급할 수는 없지만, 가톨릭 교회에 대한 비판은 분명히 있거든요. 여성이 사제가 되지 못하는 것은 제가 보기에는 신앙과는 관계없고 현실적인 적용이거든요. 성서를 그렇게 해석한 거죠. 그런 부분에 대한 비판이 분명히 들어가 있습니다. 이에 정치적으로 봤을 때 한 권력 조직이 패망하기 전에, 사람도 죽기 직전에 잠시 막 생기가 도는 것처럼, 조직이 패망하기 전에는 반짝 살아나거든요. 이런 맥락에서, 이 영화의 마지막은 결국 이런 베니테스 같은 사람한테까지 교황이 가지 않으면 가톨릭교회는 죽는다, 죽을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를 가진다고 저는 봅니다. 정말 황당한 결론이기는 하지만 그 정도까지 부패했다는 거죠. 가톨릭 교회 조직이 변화하는 현실 세계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 그 정도의 강력한 어떤 변화가 있어야 되는데, 왜 이렇게 될까, 이것은 신앙 문제이죠. 혹시 이런 생각이 안 떠오르나요? 드라마를 보면, 옛날에 왕조 국가일 경우에 후계자가 없습니다. 아무도 없어서 여러 신하들이나 대신들이 서로 하겠다고 막 하고 있는데, 갑자기 숨겨놓은 왕의 아들이 나타나는 거예요. 아까 정문영 선생님도 말씀하셨지만, 선종한 교황이 이 모든 판을 깔아놓은 것 같다고 하셨잖아요. 선종한 교황이 성령이나 신의 계시로 베니테스를 숨겨놓은 후계자로 우리가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종교적 신앙적 의미에서 수많은 추기경들에게 그런 계시가 내려갔겠죠. 저 사람이 완전히 멸망해 가는 교회를 살릴 수 있는 새로운 예수 같은 존재다, 그런 의미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감독도 그 정도로, 그야말로 획기적인 변화의 새로운 선지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가톨릭 교회는 패망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발제자:

역시 정치 전공이시라서 정치적인 해석을 잘 해주셨습니다. 사실 신앙 문제라기보다는 선종한 교황이 신앙이 아니라 교회에 대한 모든 확신을 잃어버리셨다고 합니다. 선생님의 의견을 참조해볼 때, 베니테스가 교회의 새로운 미래를 위해서 숨겨놓은 후계자라는 생각도 듭니다.

 

참가자7:

간단한 질문이 있습니다. 제가 가톨릭교를 잘 몰라서 그런데, 이 영화는 콘클라베 장소나 그 과정에 대한 고증을 얼마나 한 작품인가요?

 

발제자: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이 영화는 모든 콘클라베 절차를 요한 바오르 2세의 <교황령>을 철저하게 따라서 전개되었다고 합니다. 원작자뿐만 아니라 각본을 쓴 작가도 바티칸 답사 그리고 연구를 통해 가능한한 꼼꼼하게 썼다고 합니다. 바티칸에서는 영화촬영이 되지 않으니까 물론 세트를 사용했지만, 고증을 거쳐 리얼리스틱한 영화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사회자:

, 혹시 송영애 교수님 하실 말씀 없으십니까? 그러면 마지막으로 플로어에서 혹시 하실 말씀 없으십니까? , 알겠습니다. 이 영화는 미장센적으로 보면 로렌스를 문 앞에 세워둡니다. 그 점이 언급이 안 돼서 좀 아쉬웠는데요. 다시 자세히 보시면 그를 항상 문 앞에 세워두는 걸 보실 수 있을 겁니다.
로렌스는 문 앞에 있는 사내고, 그 문은 결국 제가 볼 땐, 경계 그리고 닫힘, 열림 같은 굉장히 많은 선택의 가능성 앞에서, 자기 자신을 뽑을 것인가? 남을 뽑을 것인가? 교황이 될 것인가? 말 것인가? 또 교회를, 교회라는 곳에서 누구를 믿을 것인가? 의심할 것인가? 마치 로렌스가 추리 탐정 같은 역할을 여기서 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그 수많은 가능성의 문 앞에서 선택을 해야 되는 그 로렌스의 입장을 항상 그를 문 앞에 세워두는 것, 그것은 감독의 암묵적인 미장센이죠. 앞에 세워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번 댁에 가셔서 이 영화를 다시 본다면 어떻게 감독이 미장센을 짜는지도 한번 보셨으면 되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고요.
결국 거북이는 살아있는 고해성사의 동물이죠. 안 그렇습니까? 입을 열지 않고 진실을 안고 다니는 존재, 틈이 나면 자기 안으로 숨어버리는(수륙양용이고, 틈틈이 탈출하고 그러다가 다시 돌아오고).

모든 것을 놓아버린 로렌스는 오히려 더 홀가분하고 행복해 보였습니다.
어찌 보면 <콘클라베> 속 교회는 권력과 의심과 여러 가지 개인적인 과오로 얼룩져 있지만 그러나 신이 만든 세상은 여전히 아름답고 신이 만든 거북이, 까르륵거리며 흰색 수녀복을 펄럭이며 지나가는 해맑은 수녀들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우리가 종교를 통해서 봐야 하는 것은 결국 가장 가난하고 소외되고 어찌 보면 불완전하지만 그러나 인권으로서 온전한 사람, 그것이 마지막 교황의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오늘 <컨클라베>는 여기서 마치려고 합니다. 정문영 교수님 끝으로 소감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발제자:

제가 발표를 확신에 차서 하지는 못했습니다. 이 월요시네마에 전 거의 대부분 들어왔는데, 정말 좋은 말씀들을 서로 나누는 가운데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오늘도 선생님들께서 많은 좋은 이야기를 해주셔서, 많이 배운 것 같습니다. 다음 달 이화정 선생님의 월요시네마를 통해서도 재미있는 영화에 대한 의견들을 공유하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기를 고대합니다. 제가 3개의 텍스트의 상호텍스트적 읽기를 한다니까, 번거롭게 뭘 그렇게 하느냐고도 하지만, 세 배의 즐거움이 있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많은 분들과 함께 공유하면, 그 즐거움은 몇배나 더 커지는 것 같습니다. 오늘 즐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사회자:

오늘 <콘클라베>를 가지고 원작, 각색, 그리고 영화를 삼각으로 비교하는 정문영 교수님만의 아주 멋진 발제 감사드리고, 함께해 주신 선생님들께도 감사드립니다. 좋은 의견 또 다양한 의견 언제나 환영합니다. 저의 월요 시네마는 우리 영화를 사랑하는 모든 분에게 열려 있습니다. 그러면 또 실록의 계절 5월에 다시 뵙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