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치용의 시네마 크리티크] 죽음을 유쾌하고 익사이팅하게 연출하다
영화평 <파이널 데스티네이션 블러드라인>
<파이널 데스티네이션 블러드라인>은 “악몽이 현실이 되는 순간 기상천외한 죽음이 시작되는 익사이팅 킬링 무비”라고 한다. 킬링 무비인데 익사이팅하다니 너무 몰지각한 것 아닌가. 하지만 익사이팅은 제대로 된 형용사다. 관객은 실제로 익사이팅한 느낌을 받을 것이다. 문맥을 따져보면 익사이팅했다고 부끄러워할 필요도 없다. ‘익사이팅’은 안타깝게 번역어도 대체어도 찾기 어렵다.
공포냐 실소냐?
장르는 일단 호러이다. 유혈이 낭자하니 고어물이라고 불러도 된다. 시종일관 사람이 죽고 피가 터지는데, 사실 그렇게 공포스럽지는 않다. 심하게 말해 “익사이팅”할 뿐이다.
연이은 참혹한 죽음에 기대한 공포나 긴장을 느끼지 않고 또 가능할 법한 반응인 불쾌함이나 역겨움을 느끼지 않고 “익사이팅”한 이유는 무엇일까. 고어물에 익숙해져서 그런 것은 아닐 터이다. “익사이팅”을 설명하려면 익숙함 말고 다른 이유를 찾아야 한다.
고어물과 연관된 장르로 '슬래셔(slasher)' 영화라는 게 있다. 고전의 반열에 오른 <텍사스 전기톱 살인사건>(1974년)에서처럼 '난도질'이 등장하며 고어물에 다가가야 ‘슬래셔’라고 할 수 있다. 원제에 살인이 아니라 학살에 해당하는 ‘massacre’가 들어 있어 이후 시리즈물이 진행돼 번역될 땐 ‘텍사스 전기톱 학살’로 표기한다.
‘슬래셔(slasher)'엔 사람에 해당하는 ’er’이 들어 있다. 난도질은 그 주체를 자동기술처럼 상상할 수 있지만 엄격히 말해 단어 자체는 주체를 명시하지 않는다. 반대로 ‘슬래셔’엔 주체가 명시된다. ‘슬래셔’ 무비는 따라서 학살자이든 누구이든 난도질을 하는 주체가 공포 또한 유발한다. 스웨덴 영화 <더 컨퍼런스>(2023년)의 ‘슬래셔’처럼 학살의 동기나 명분이 있어도 좋고, 동기나 명분이 없어도 그만이다. 살인마의 치명적 압박이 ‘슬래셔’ 무비의 핵심이다. 흉기보다는 발자국 소리가 더 무서운 이유다.
그러므로 살인마가 총을 쏘아 간단하게 사람을 죽이는 연출은 ‘슬래셔’물에서 일반적일 수가 없다. 되도록 많은 장면으로 난도질을 천천히 보여줄 수 있고 참혹함이 잘 드러나는 칼이나 도끼, 둔기 등과 같은 냉병기가 선호된다.
‘스플래터’는 ‘슬래셔’, ‘고어’, ‘호러’ 등과 인접한 장르로, 특별히 따로 장르로 구별하지 않아도 무방하지만, 논의를 위해 구별해 설명하자면 ‘스플래터’(splatter)란 단어 자체에 차별점이 들어 있다. 이 단어는 “후드득 떨어지다, (물・페인트・흙탕물 등이) 튀다”란 뜻으로 고어에서도 최상의 고어를 지향한다. 화면에서 피와 살이 비현실적으로 또 과장되게 튄다. 이 비현실성이 관객에게 공포를 극대화하는가 하면 역으로 공포에서 멀어지게 만들 수도 있다. 때로 과도한 비현실성이 실소를 유발한다. 실소 여부를 스플래터의 경계로 보기도 한다.
‘스플래터’는 ‘슬래셔’와 달리 주체보다는 난도질이 초점이라고 할 수 있다. <텍사스 전기톱 살인사건>이 나름으로 공포를 극대화하는 데 주력했지만, 막상 요즘 기준으로는 사실 그렇게 유혈이 낭자하지는 않다. 유혈낭자보다는 공포 유발자라는 주체를 부각하는 데에 더 신경 썼기 때문이다. 반면 ‘스플래터’에서는 현상에 집중하게 만들기에 과도한 유혈은 비현실성으로 인해 피식 웃음이 나올 수 있다.
<파이널 데스티네이션 블러드라인>이 호러물을 지향함에도 공포보다는 “익사이팅”이 강한 이유는 주체의 부재와 현상의 비현실성에서 발견된다. 죽음이라는 주체는 보편적 주체여서 전기톱을 든 살인마처럼 구체적이지 않다. 어떤 보편성은 없다는 말과 등가가 되기도 한다. 예컨대 이신론이 무신론으로 수렴하듯, 결국 주체의 부재로 귀결한다.
죽음이란 존재는 보기에 따라 신과 동등한 위치이기에 살인의 설계에 아무런 제약이 없다. 화기, 냉병기는 물론이고 벼락 열차 재난 등 모든 것이 가능하다. 주체의 부재를 전제한 이러한 극단의 비현실성이 ‘스플래터’로 전개되면서 익사이팅과 웃음을 끌어내는 요인이 된다. 따라서 이 영화의 성패는 공포가 아니라 흥미로운 스토리와 상상력이 왕창 들어간 죽음의 방식이 된다. 그러므로 죽음을 즐겁게 즐겨도 된다.
익사이팅 난장판?
<파이널 데스티네이션 블러드라인>은 <파이널 데스티네이션>의 6번째 작품이다. 첫 작품은 2000년 개봉한 <데스티네이션>으로 파리로 수학여행을 떠나던 고등학생이 죽음의 운명을 예견하고 비행기 추락 사고에서 가까스로 벗어나는 오프닝 시퀀스에 이어, 일상 속 예측 불가한 죽음의 함정을 정교하게 배치해 흥행에 성공했다. 이어 2011년 <파이널 데스티네이션5>까지 모두 다섯 편이 제작되었다.
<파이널 데스티네이션 블러드라인>은 14년 만에 이 시리즈 여섯 번째 작품으로 개봉했다. 한 가족에게 피를 타고 이어진 죽음의 그림자를 그렸다. 잭 리포브스키와 함께 공동연출을 맡은 애덤 스타인은 “각본가이자 제작자인 존 왓츠가 죽음이 가계도를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며 희생자를 추적하는, 가족과 혈통이 소재인 이야기를 구상했다. 이전까지는 주로 친구들이나 일면식이 없던 사람들이 죽음을 피하려는 이야기였지만, 이번엔 함께 살아남으려는 가족의 이야기로 구성했다”고 말했다.
반복되는 악몽을 꾸며 죽음의 위협을 인지한 주인공 스테파니 역의 케이틀린 산타 후아나는 “영화의 시작이 앞으로 일어날 일의 예지가 아니라 50년 전 있었던 사건이라는 점이 전작들과는 완전히 다르다”고 전했다. 꿈을 통해 죽음의 시원으로 거슬러 올라갔다가 다가올 죽음의 흐름을 헤쳐나가는 방식이다.
가계도가 필요한 이유는 그것이 예정한 죽음을 모면함으로써 생성된 부재의 확장 순서이기 때문이다. 죽음은 자신을 능욕한 인간과 그 후손을 차례로 거둬간다. 영화에서 순서의 예외가 한번 등장하는데, 그 사람이 혼외정사로 태어나 혈연으로는 가계도에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또한 가족을 지키기 위해 죽음에 맞서다 화를 당하지만 뜬금없는 불륜의 돌출은 일종의 유머 코드인 셈이다.
마지막 반전은 죽음의 정의에서 비롯한다. 죽음은 죽음을 통해서만 모면할 수 있는데, 죽음을 모면할 수 있는 죽음이 무엇인지를 관객에게 헷갈리게 해놓고 뒤집는 방법이다. 영화가 빠르게 전개되기에 관객은 이 속임수를 알아채지 못한다. 영리한 관객을 속여서 반전을 만들어내기는 점점 더 어려워진다.
이 영화가 그리는 공포가 덜 무서운 또 다른 까닭은 영화가 다룬 모든 죽음이 원래 예정한 죽음을 죽음이 복원하는 과정이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말하자면 운명에 의한 부당이익 환수엔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말한 감정이 개입할 여지가 적은 것 아닐까. 죽음의 익사이팅한 복수극으로 보는 관점도 가능하겠다.
현실 같은 환상
리포브스키 감독은 “관객이 화면 속에서 보는 장면이 현실처럼 느껴져야 진정한 공포가 시작된다”고 말했다. 그는 “완전히 CG로 만든 장면은 관객의 뇌가 무의식적으로 ‘이건 현실이 아니야’라고 판단하게 되기에 관객의 몰입을 깨뜨리지 않기 위해 우리는 실사 기반의 효과 위에 VFX를 얹는 방식을 택했다”고 설명했다. 실제와 환상의 경계를 허문 시각 효과를 통해 영화라는 환상의 현실감을 높였다는 얘기다.
영화의 주요 무대인 스카이뷰 레스토랑을 보여주기 위해 지름 24m, 높이 9m에 달하는 실제 세트를 건설했다. 여기에 360도 시야를 구현하는 LED 볼륨 월 기술이 접목돼 창문 밖 전경이 실제처럼 표현됐다. 제작진은 모두 9개의 스카이뷰 레스토랑 세트를 제작했고, 이 중 하나는 바닥이 30도 각도로 기울어진 구조였다. 이 장면을 촬영할 땐, 바닥을 구르다 아래쪽 창문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배우와 스태프 모두가 밧줄에 묶인 채 촬영을 진행했다고 한다.
장의사 블러드워스 역의 토니 토드는 총 6편의 <파이널 데스티네이션> 시리즈 중 다섯 편에 출연했다. 1954년생으로 2024년 11월 사망함으로써 이 영화가 생애 마지막 작품이 됐다.
안치용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