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치용의 시네마 크리티크] 웨스 앤더슨이 만든 웨스 앤더슨 같지 않은 영화

영화평 <페니키안 스킴(The Phoenician Scheme)>

2025-05-25     안치용(영화평론가)

 

영화를 좋아한다거나, 영화 좀 봤다거나, 그런 말을 하는 사람에게 “웨스 앤더슨” 하면 “아!”라는 반응이 나오기 마련이다. 웨스 앤더슨은 그 이름 자체가 하나의 브랜드로, 완벽한 대칭 구도 촬영, 아름다운 파스텔톤 색감 등으로 시각적 즐거움을 준다. 갤러리에 작품을 전시하는 듯한 웨스 앤더슨 영화의 감각적인 비주얼은 마니아층을 만들어냈다. 재치 넘치는 대사와 블랙 유머도 그의 특색으로 거론된다.

따라서 이 같은 명성을 이미 접한 상태에서는 잘 몰라도 일단 긍정적인 반응을 취할 태세를 갖추기 마련이다. “마음에 안 든다”거나 “어쩐지 썩 마음에 와닿지는 않네“라는 반응을 내놓기가 본능적으로 위축된다. 대표적인 믿보작(믿고 보는 작품) 혹은 믿보감(믿고 보는 감독)에 해당하기 때문이지 않을까. <페니키안 스킴(The Phoenician Scheme)>도 ‘믿보작’에 해당할까.

 

제목부터

앤더슨 감독의 <페니키안 스킴>은 한국인에게 와 닿는 제목이 아니다. 번역이 어려운 탓이었을 텐데, 원제로도 ‘페니키아 구상’이나 ‘페니키아 책략’ 정도여서 직관적 이해가 가능하지 않다. 왜 제목에 ‘페니키아’가 들어갔을까.

IE003468927_STD.jpg?20250525212024866▲ '페니키안 스킴' 스틸 사진 © 유니버설 픽쳐스

 

영화의 주인공으로 거물 사업가인 자자 코다(베니시오 델 토로)의 일생일대 숙원 사업이 ‘페니키안 스킴’으로 소개된다. 6번의 추락 사고와 숱한 암살 위협에서 살아남은 그는 ‘페니키안 스킴’이 곤경에 처한 순간에 수련수녀인 외동딸 리즐(미아 트리플턴)을 집으로 불러들여 상속자로 지명한다. 무너질 위기에 처한 ‘페니키안 스킴’을 지키기 위해 자자는 리즐과 가정교사 비욘(마이클 세라)을 데리고 동업자들을 만나러 간다. 동업자들과 만나는 무대 또한 페니키아로 추정된다.

페니키아는 고대 레바논, 시리아, 이스라엘 북부에서 번성한 문명으로 현재의 레바논 일대가 그 중심지였다. 해양 민족인 페니키아인은 도시 국가를 많이 세워 시돈, 티레가 유명하고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 또한 그들이 세운 도시로 로마와 쟁투로 역사에 큰 흔적을 남겼다. 현대 레바논인은 아랍어를 쓰는 아랍인으로 봐야 하지만, 스스로 페니키아인을 조상으로 여긴다고 한다. 이밖에 성서에 나오는 가나안 민족이 페니키아인이며 알파벳의 기원이 페니키아어인 것이 특기할 만한 내용이다. 알파에 해당하는 페니키아 문자 ‘알레프’가 황소에서 유래했다는 점 또한 주목할 만한 사항이다.

이 작품은 아버지와 딸이 새롭게 관계를 맺어가는 이야기다. 자자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수녀가 되기 직전인 딸 리즐을 자신의 인생에 다시 끌어들인다. 나머지 9명의 아들을 제치고 딸을 후계자로 정한 이유가 영화에 나오기는 하나 좀 애매하고 사실 중요하지도 않다. 영화의 문법을 따라가면 자자가 리즐을 대하는 태도가, 후계자를 대하는 사업가에서 딸을 대하는 아버지로 바뀌며, 이러한 변화가 영화에서 핵심이다.

앤더슨 감독은 “이 주제는 아마 내가 딸을 둔 아버지라는 사실과 관련이 있고, 아내와 장인의 관계 또한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다. 장인은 레바논 사업가로 그에 대한 아내의 경험과 사위인 앤더슨 감독의 경험이 영화에 녹아 있다. 앤더슨 감독은 “그(장인)는 이 영화의 첫 번째 영감이다. 자자 코다 속에는 그의 흔적이 깊이 박혀 있다”며 “자자의 세계를 구성하는 다채로운 인물도 장인의 세계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전했다.

‘페니키아’를 레바논으로 바꾸고 극중 자자와 리즐을 감독과 관련한 두 부녀 이야기로 바꾸면 대충 영화의 원천에 접근할 수 있게 된다. 아버지가 사업가이기에 ‘페니키안 스킴’이란 제목이 자연스럽게 도출됐다고 할 수 있다.

IE003468928_STD.jpg?20250525212024866▲ '페니키안 스킴' 포스터 © 유니버설 픽쳐스

 

전개

제78회 칸영화제 경쟁 부문에 공식 초청받은 이 영화는 첩보 스릴러라는 장르를 추구했지만, 그런 분류로 뭉뚱그리기엔 많이 색다르다. 칸영화제에서 상영 후 6분 30초의 박수갈채가 있었다는 후문은 색다름의 입증이라고 할 수 있다.

앤더슨 감독의 첩보 스릴러 장르의 첫 도전이어서 관객이 낯설어할 법도 하지만, 거의 모든 관객이 감독 이름을 지우고 영화를 봐도 그의 영화라고 느낄 가능성이 크다. 색다름으로 표현한 그의 특징이 너무 뚜렷하기 때문이다.

다만 페니키아 곳곳을 누비는 모험이 내용상 첩보 스릴러이긴 하지만 엉성하기 그지없다. 이 엉성함을 앤더슨 감독의 연출과 그의 브랜드로 상쇄한다고 할 수 있는데, 상쇄에 그치는지 혹은 새로운 영화적 볼거리로 승화하는지가 논쟁거리이다. 혹은 상쇄에도 못 미쳤다고 생각할 가능성은?

재미는 있다. 빌 머레이가 연기한 신이란 존재를 비롯하여 흑백 화면으로 처리한 저편 세계를 이쪽 세계와 병치한 흐름은 발랄하다. 이러한 이분법과 싸움의 이유, 암살 시도의 이유 등 곳곳에 진지한 전언을 담았고, 자본가의 탐욕을 포기하고 요리사 아버지로서 일상의 행복을 추구하는 결말은 재미 외에 의미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시도이다.

의미와 재미의 유기적 연결을 달성할 수 있다면 일류 감독이란 칭송을 받는다. 칸영화제 관객과 다르게 내 생각은 이 영화에선 그 칭송을 유보하는 게 좋겠다. 재료에 맞지 않는 소스를 쳤다고 할까, 의미가 겉돈다는 느낌이 들었다. 저쪽 세계의 역할 또한 불확실해 보였다. 이쪽 세계에서 자신의 장기를 활용한 첩보 스릴러물을 추구하되 의미를 덜어내며 재미와 부녀 관계에 더 집중하면 어땠을까. 부녀 관계 자체가 하나의 묵직한 의미이기에 굳이 의미를 분산할 필요가 없었다.

9명의 아들과 한 명의 딸로 10번째 자식이 된다든지, 부녀 상봉이 6년 만이고 추락이 6번이어서 이후 7년과 7번째 추락으로 연결되는 건 쉽게 떠올릴 법한 상징이다. 페니키아의 신은 기독교의 신과 맞서 싸운, 황소로 표상되는 ‘바알’인데 극중 신이 가나안인과 히브리인 중에 어느 쪽에 속한 신으로 설정됐는지 궁금하긴 하다. 이 궁금증이 중요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IE003468929_STD.jpg?20250525212024866▲ '페니키안 스킴' 스틸 사진 © 유니버설 픽쳐스

 

배우의 연기는 좋았다. 자자 역의 베니시오 델 토로의 연기는 나무랄 데가 없었다. 리즐 역의 미아 트리플턴도 신인을 넘어서는 호연을 보여주어 강한 인상을 남겼다.

중요한 정보인지 아닌지 알 수 없으나 극중 자자의 집에 걸린 명화들은 모조품이 아니라 진품이다. “진짜를 써 보자”는 감독의 아이디어에 따라 미술 큐레이터 재스퍼 샤프가 작품 대여를 성사시키는 데 공을 들였다. 샤퍼는 “접촉한 몇몇 사람은 전화를 받자마자 웃으면서 끊기도 했지만, 결국 호기심과 모험심이 이겼다”고 말했다. 영화에 사용된 소품에도 진품 회화처럼 흥미로운 후일담이 따라붙었다.

앤더슨은 “이 영화는 마치 산 같은 한 남자에 관한 이야기다. 그 자신이 서사적 규모를 지닌 인물이고, 그의 인생도 서사적 규모로 펼쳐진다”고 말해 타이쿤 영화를 암시했다. 그렇다면 산 같은 남자인 어느 타이쿤이 자본주의 정신의 정수인 일생일대 사업을 성사시키기 위해 페니키아를 딸과 함께 동분서주하다가 부녀라는 가족 관계에서 행복을 얻는다는 얘기라고 정리할 수도 있겠다. 까르띠에 소품을 사용한 영화인지 까르띠에 같은 영화인지, 혹은 타이쿤을 다룬 잘 만든 영화인지 스스로 타이쿤이라고 생각하는 감독의 옛 명성에 기댄 영화인지 판단이 필요해 보인다.

 

안치용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