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반란의 유령들

2013-01-11     에블린 피에예

마야 달력에 세계 종말이 예언돼 있다는 가설은 엄청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물론 2012년 12월 21일을 기해 지구인 모두가 패닉 상태에 빠진 것은 아니다. 프랑스에서는 이 운명의 날에 대해 비아냥거리며 농담을 던지는 사람도 많았다. 예를 들어 "당신은 세계 종말이 오기 전에 무엇을 하고 싶은가?"라고 부드럽게 질문하는 광고가 있는가 하면, 게테리리크의 '낙관주의자의 밤'(Fuck les Mayas), 라빌레트의 '마지막 춤'(Last Dance) 같은 축제도 있었다. 여기저기서 이토록 세계 종말 예언이 호응을 얻고 있는 상황에 대해 우리는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도대체 왜일까?'

평범한 사람들의 반란

경제위기가 닥친 지역에 만연하는 걱정과 지구 종말의 예언에 대한 관심(비웃음도 포함해서) 사이에는 당연히 상관관계가 있을 것이다. 다른 시기였다면 이런 예언은 별 관심을 끌지 못했을 수도 있다. 사실 이런 예언은 거의 매년 출현했다. 2000년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일어났던 소동이 대표적이다.(1) 이른바 거대한 '버그'가 전세계 네트워크를 마비시킬지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사람들은 세계 종말을 알리는 신비로운 예언 앞에서 발전된 현대 세계 역시 밀레니엄의 공포 앞에서 무력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빠져들었다. 덕분에 우리는 노스트라다무스에 대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요즘 사람들이 마야 문명에 대해 새롭게 관심을 가지는 것과 하등 다를 게 없었다.

그러나 지복천년설(Millenarism)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고작해야 빈약한 수준에 머물거나 수많은 오해로 점철된 경우가 많다. 어쩌면 마야 달력의 날짜 계산보다 훨씬 중요할지 모를 지복천년설은 종말론이든 그에 대한 조롱이든 오늘날까지 끊이지 않고 계속되는 소동과 분명 관계가 있을 것이다. 공식적인 역사가 그것을 미신 혹은 시대착오로 못박았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첫 번째 밀레니엄이 끝나가던 시기 유럽을 사로잡은 '거대한 공포'는 어땠을까? 지금의 소동보다 훨씬 놀랍고, 강렬하고, 전복적이었다.

"지복천년설은 현재와 같은 세계가 언젠가는 종말을 고할 수 있으며- 혹은 종말할 것이며- 그 뒤에 완전히 새로운 세계가 도래할 것이라는 생각에서 나왔다."(2) 이런 생각의 모태는 종교적 신앙이다. 성서에 묘사된 종말(Apocalypse)에 기초한 기독교적 해석에 따르면, 이 땅에 신의 왕국이 도래한 뒤 1천 년간 평화가 지배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밀레니엄, 즉 천년왕국이다.

이 신앙은 중세의 다양한 '종파'들에서부터 오늘날의 대중까지 영향을 미치며 혁신적인 사회운동을 추동하기도 했다. 복음의 가치를 떠받드는 이들 중에는, 에릭 홉스봄식으로 말하면, 완전하고 급진적인 변화의 열망이 실현되기를 가만히 앉아 기다리는 대신 원시 기독교인들이 꿈꾸던 정의와 평등의 왕국을 당대의 현실에서 건설하기 위해 직접 행동에 나서기도 했다.

오늘날 밀레니엄이라는 말에서 연상되는 중세풍의 계시받은 자들, 광신도들에 대해 얘기하려는 게 아니다. 그보다는 '혁명적 낭만주의자'라고 부르는 게 타당할 것이다. 인본주의와 르네상스의 시대였던 16세기,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표현대로 하면 "스파르타쿠스 반란과 프랑스대혁명 사이에 발생했던 대규모 반란"(3)의 서막을 알리는 지복천년 운동이 있었으니, 바로 독일의 '농민전쟁'(1524~25)이다. 이는 '평범한 사람들의 반란'(Erhebung des Gemeinen Mannes)이라는 멋진 이름으로도 알려졌다.

이 사건의 중요성과 독특함을 이해하려면 그 기초가 된 정신적 틀을 재구성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가공할 만한 변화를 목도하던 당시 사람들은 세계가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며 그 이전까지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수많은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사실, 따라서 현존하는 질서가 부동의 자연 상태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요컨대 기존 질서는 전복 가능한 것이 되었다. 15세기 말 '신대륙'이 발견됐고, 마르틴 루터는 교황의 권위를 공격하다가 1521년 교황청으로부터 파문당했다. 엄청난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세계의 지평이 변화했고, 기독교인들은 수세기 전과 다른 방식으로 신을 믿기 시작했다.

쉼 없이 이어진 봉기

수면 위로 떠오른 열망은 현재를 비판하고 새로운 미래를 발명하고자 했다. 영국의 토머스 모어는 1516년 <유토피아>(Utopia)를 펴냈다. <돈키호테>가 나온 것은 1605~15년 사이다. 종교개혁자들은 각자가 스스로 성서를 읽도록 권했으며- 루터는 신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했다- 기존 질서가 정의롭지 못할 경우 그것을 존중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런 새로운 사고의 틀, 새로운 상상력 속에서 농민혁명이 발생한 것이다. 그런데 영주·성직자·지주에게 대항한 이 반란은 복음주의적 희망을 진지하게 받아들임으로써 더욱 급진화했다. 보덴호 주변에서 남부 독일, 스위스, 로렌과 알자스에 이르기까지 광부와 농민, 장인들이 들고일어났다. 이 봉기들을 앞장서서 이끌었던 상징적 인물은 토마스 뮌처(1490~1525)라는 신학자였다. 물론 사회·경제적 원인에 의해 추동된 사건들이었지만, 뮌처의 말과 행동이 큰 반향을 일으키면서 '종교적 혁명주의' 노선을 따라 전개됐다. 뮌처는 다음과 같이 역설했다. "여러분은 언제까지 잠들어 있을 셈인가? (중략) 신은 더 이상 기다려주지 않는다. 여러분이 들고일어나야 한다."

뮌처는 신이 미온적인 사람들을 혐오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기독교 교리를 급진적으로 실현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 수단 중에는 폭력을 동원한 반란도 포함돼 있었다. 당시 상황은 특정 맥락에서 종교와 정치가 어떻게 결합될 수 있는지 성찰할 기회를 제공한다. 당시 그들의 요구는 신자들이 사제를 선출하고, 모든 이에게 동등한 권리를 보장하고, 귀족들의 특권을 철폐하자는 데까지 나아갔다. 엥겔스에 이어 에른스트 블로흐가 주목했던(4) 지복천년설을 움직이는 힘은 예언된 이상사회의 도래를 실현시키려는 용기였다.

이런 것들보다 더 주목해야 할 점이 있다. 반란자들은 진압되고 살해됐으며, 뮌처는 체포돼 고문당하고 처형됐다. 그럼에도 지복천년을 향한 희망은 사라지지 않았다. 정의와 근본적인 평등에 대한 꿈은 모질게 살아남아 역사 속에 끊임없이 재등장했다. 모든 재산의 공동 소유를 주창한 뮌스터의 재침례파 신정 공화국(1535),(5) 영국의 시민전쟁(1642~48) 중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난 인간의 자연권으로서 투표권을 획득하고 귀족의 특권을 폐지하기 위해 싸웠던 영국의 평등파(Levellers) 등이 그 예다. 이 봉기들 역시 진압됐다. 그러나 그들의 열망과 선언은 그 뒤 유럽 전역으로 확산됐다.

새로운 세상의 희망이 있는 한…

우리는 평등의 가치를 중요시하는 현대 유럽 민주주의의 밑거름이 된 영웅적인 선각자들의 혁명적 투쟁에 기꺼이 경의를 표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유럽평의회(Council of Europe)는 1949년 출범 당시부터 '유럽의 문화적 정체성' 확립을 중요한 임무로 설정하고 입이 닳도록 "유럽의 정신을 널리 알리기 위해 유럽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최상의 지식을 보급하는 활동"(6)에 매진한다고 강조해왔다. 그러나 유럽 통합을 위한 수많은 프로그램 어디를 뒤져봐도 상기한 운동에 대한 언급은 없다. 대신 유럽연합은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 성지 순례길(유럽 최초의 '문화적 경로'로서)이나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등을 선택했다.

그러나 평등의 이상을 위한 반란을 망각 속에 묻어버리는 거대한 침묵에도(7) 오래된 꿈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때론 뉴에이지적 이미지로 탈선하거나 한 세계의 종언을 세계 종말과 혼동하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과거의 혁명들은 정말로 패배했는가? 그렇지 않다. 징후를 해석하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유토피아를 꿈꾸는 한, 새로운 세상에 대한 끈질긴 희망을 놓지 않는 한, 혁명은 완전히 패배한 것이 아니다.

 

/ 에블린 피에예 Evelyne Pieiller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자

번역 / 정기헌 guyheony@gmail.com 파리8대학 철학과 석사 수료.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주요 역서로 <프란츠의 레퀴엠> 등이 있다.

(1) Ignacio Ramonet, ‘2000년에 대한 공포’, <르몽드 디폴로마티크>, 2000년 12월호.
(2) Eric Hobsbawm, <반란의 원초적 형태>, 미발표 저자 서문, Pluriel, 파리, 2012.
(3) Friedrich Engels, <농민전쟁>, Editions Sociales, 파리, 1974.
(4) Ernst Bloch, <토마스 뮌처, 혁명의 신학자>, Les Prairies ordinaires, 파리, 2012.
(5) Marguerite Yourcenar, <L’OEuvre au noir>, Gallimard, Folio, 파리, 1976. Friedrich Dürrematt, <Les Anabaptistes, L’Age d’Homme>, Lausanne, 1994. Dieter Forte, <Martin Luther et Thomas Münzer ou les débuts de la comptabilit?>, L’Arche, Paris, 1973. Luther Blissett, <L’OEil de Carafa>, Seuil, Paris, 2001. Compagnie Jolie Mȏme, <Faust et l’homme ordinaire>.
(6) ‘유럽연합에 관한 슈투트가르트 유럽평의회 공식 선언’, 1983년 6월 19일.
(7) 반면 독일민주공화국(옛 동독)은 뮌처를 영웅으로 추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