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주도권을 쥐다

트럼프의 관세 도박에 맞대응하는 중국

2025-05-30     르노 랑베르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자

지난 5월 12일 제네바에서 발표된 미국과 중국 간의 3개월 ‘관세 휴전’은 잠시 숨 돌릴 시간을 주었다. 미국은 트럼프가 중국산 수출품에 부과한 고율 관세를 115% 인하하여 145%에서 30%로 낮췄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중국 역시 125%였던 자국 국경의 보호 장벽을 10%로 인하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다. 트럼프는 미국 경제의 몇몇 취약점, 특히 탈산업화(및 그로 인한 사회적 참사), 무역적자, ‘메이드 인 차이나’ 중독(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저가 제품 포함), 심지어 국가 안보와 관련된 분야까지 지적하며 중국의 책임을 거론한다. 미국의 고발장은 중국의 약탈적 상업 관행, 보조금과 환율 조작, 사회·환경 기준 부재 등을 비판한다. 중국은 세계 최대의 산업기지를 건설했고, 끝없는 수출 확대를 최우선 과제로 삼아 성장해왔다.  30년 전만 해도 좀처럼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이제는 백악관이 아니라 중국 공산당(PCC)이 다자주의와 자유무역의 수호자를 자처하고 있다.

 

 

대 미국 대통령 취임 이후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트럼프 폭풍’의 한가운데서, 유럽의 지도자들은 마치 거센 파도에 휘청이는 유람선 승객들처럼 난처한 모습이다. 요동치는 배의 난간을 움켜쥔 채 방향을 잡지 못하는 모습이다. 반면, 중국 공산당(PCC)은 자신들을 전혀 다른 역할로 그리고자 한다. 먼 바다를 항해하며 지평선을 응시하는 노련한 선장의 모습으로 말이다.

2025년 4월 2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국가안보에 대한 위협’을 이유로 의회를 우회하고는, 전 세계 대부분의 국가를 대상으로 미국 관세 장벽을 강제로 부과했다. 그 전례 없는 규모의 조치는 세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PCC)은 다르다고 <인민일보> 2025년 4월 6일자 사설은 강조했다. 

“국제 시장에서는 미국의 관세 공세가 예상치를 넘어섰다고 평가하고 있지만, 당 중앙은 이미 이번 조치를 예상하고 있었다”라고 주장했다. 중국에 적용된 관세율 34%는 기존의 여러 관세에 더해져 평균 70%가 넘는 수준에 이르게 됐다. 사설은 미국의 결정이 “중국 경제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하지만 하늘이 우리 머리 위로 무너져 내리지는 않을 것”이라고 큰소리쳤다.

 

보복의 악순환, 미·중 무역전쟁 8년의 격돌

중국은 자국의 관세 장벽을 높이며 맞대응에 나섰다. 항공우주 산업 등 일부 핵심 산업에 필수적인 희토류 수출을 제한하고, 15개 이상의 미국 기업에는 군사적 용도로 전용될 수 있는 제품의 수입을 금지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로써 워싱턴과 베이징은 보복성 조치를 주고받으며 치열한 공방을 벌였고, 금융시장은 순식간에 공포에 빠져들었다. 4월 초, 미국의 500대 주요 기업 주가를 반영하는 ‘S&P 500 지수’는 불과 사흘 만에 10% 이상 폭락했다. 영국 BBC 방송은 이를 두고 “2008년 금융위기와 2020년 팬데믹 초기의 폭락에 필적하는 가파른 하락세”라고 보도했다. (1)

억만장자 친구들이 전략 재고를 압박하고, 평소 ‘가장 안전한 투자처’로 여겨지던 미국 국채의 금리가 치솟는 가운데서도 트럼프는 자신의 전략이 성과를 거뒀다고 선언했다. 그는 대부분의 나라들이 자신에게 전화를 걸어와 “구두를 핥으며 협상을 요청하고 있다”라고 뻐기듯 자랑도 했다.(2)

4월 9일, 트럼프는 90일간의 휴전을 선언했다. 이 기간 동안 미국은 전 세계 모든 국가에 10%의 관세를 부과하되, 단 하나 중국만은 예외로 두었다. 백악관 주인은 “중국이 금융시장을 존중하지 않았다”며 이같은 결정을 정당화했다. 그리고 중국산 제품에 부과되는 관세를 무려 145%라는 터무니없는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중국 정부는 이번 사태의 격화를 유감스럽게 생각하지만, 결코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중국은 올해 4월 5일 발표한 공식 성명에서, “우리는 갈등을 일으키지 않지만, 그렇다고 위협에도 굴복하지 않는다”라고 선언했다.(3) 중국 공산당 기관지는 “미국과의 무역 전쟁이 이미 8년째 이어지고 있으며, 우리는 그 과정에서 풍부한 경험을 쌓았다”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중국은 경제에서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을 2005년 국내총생산(GDP)의 33%에서 2022년 약 20%로 줄였다. 이는 세계은행 최신 통계에 따른 것이다. 미국으로의 수출 의존도 역시 급감했다.

트럼프 대통령 1기 초반에는 중국의 수출에서 미국은 19.2%를 차지했지만, 현재는 14.7%까지 떨어졌다. 반면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과 일대일로(新실크로드) 파트너 국가로의 수출 비중은 각각 12.8%에서 16.4%, 38.7%에서 47.8%로 늘어났다. 중국 공산당 기관지인 <인민일보>는 “미국의 수입 축소가 중국 경제에 파괴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중국의 냉소, “미국의 디커플링은 자기 발등을 스스로 찍은 꼴”

베이징의 시각에서 보면 전혀 다른 그림이 펼쳐진다. 미국 경제는 중국산 소비재, 중간재, 희토류 수출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양국 간의 디커플링(공급망 분리 등) 시도는 매우 위험한 도박이 된다. “예를 들어 제약 산업을 보십시오. 중국이 원료의약품(API)과 필수 전구체의 글로벌 공급을 사실상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이 이들 제품의 생산을 자국으로 되돌린다는 게 과연 가능하겠습니까?”라고 지정학 분석가 아르노 베르트랑은 지적한다. 

“물론 생산을 되돌리는 시도를 할 수는 있겠지만, 그 과정에서는 다시 중국산 특수 장비가 필요할 겁니다. 그러면 이번엔 그 특수 장비를 자국에서 만들자고 할 텐데, 그조차도 중국이 전 세계적으로 가공을 주도하는 핵심 원자재가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2025년 4월 5일자 X(트위터) 게시글) 베이징에 본부를 둔 정부 친화적 싱크탱크 ‘중국과 세계화 센터’(CCG)의 왕후이야오 소장은 이를 두고 “미국이 스스로 자기 발등을 찍은 꼴”이라고 평했다(4). 미국 <월스트리트저널> 역시 같은 평을 내놓았다. 올해 4월 4일자 사설은 “트럼프 대통령의 전방위적 관세 부과로 이미 승자는 등장했다. 바로 중국 국가주석 시진핑이다”라고 지적했다.

중국 내 소셜미디어에서는 민족주의 성향의 네티즌들이, “베이징은 그저 ‘이정지도(以静制动, 손자병법에서 비롯된 중국 고대 병법의 핵심 원칙 중 하나)’라는 옛 속담만 지켜도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것 아니냐”라고 비꼰다. 이 표현은 문자 그대로는 “움직이지 않음으로써 움직임을 제압한다”는 뜻이지만, 다만 지금처럼 미국이 자충수를 두는 상황에서는 “가만히 있어도 이긴다”는 말이 더 현실적이라는 냉소도 나온다. 

물론 베이징도 “끝까지 싸우겠다(5)”는 결의를 표명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이번 지정학적 위기를 본질적으로 “미국 스스로 자초한 혼란”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올해 3월 19일자 <차이나데일리> 역시 같은 평가를 내렸다.

 

“미국은 지금 스스로 문화대혁명을 겪는 건 아닐까?”

“미국은 조용한 내전에 휘말려 있다.” 중국 외교부가 2023년에 발표한 한 문서는 이렇게 단언했다.(6) “미국은 하나의 나라처럼 보이지만, 공화당과 민주당은 각기 다른 두 개의 공동체를 대표하며, 느슨하게 연결된 연방처럼 따로따로 움직이고 있다.” 이러한 분석은 1991년 중국에서 출간된 책 『미국, 미국과 맞서다』(프랑스어로는 번역되지 않음)의 주장과도 맥을 같이 한다. 이 책은 당시 무명이던 한 연구자가 저술했으며, 이후 그는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중국 최고 권력기구) 7인 중 한 명이 된다. 

그는 바로 왕후닝(王滬寧)이다. 왕후닝은 이 책에서 개인주의, 사회적 불평등, 인종차별 등으로 인해 내부에서부터 붕괴되고 있는 미국 자유민주주의를 날카롭게 비판했다. 이 저작은 이후 ‘신권위주의’로 불리는 사상의 기초가 되었으며, 트럼프의 당선을 미국 사회의 병리적 증상으로 해석하고, 중앙집권적 체제가 자유민주주의보다 우월하다는 주장의 근거로 자리 잡았다.

이는 아마도 지난 11월 7일 중국 공산당 노선에 가까운 <차이나 아카데미> 웹사이트에 실린 기사 제목을 설명해줄 것이다. 제목은 다음과 같다. “중국 학자들이 팝콘을 먹으며 미국 대선을 편안하게 지켜보는 법”. 중국 공산당(PCC) 인사들에게 권장되는 책들을 저술해온 장웨이웨이는 이 기사에서, 오늘날 중국 지식인들은 트럼프의 복귀를 “차분하게, 심지어는 약간의 재미를 느끼며 바라보고 있다”라고 비웃었다. 이 ‘약간의 재미’는 중국 소셜미디어에서도 널리 퍼지고 있다. 온라인에서는 이런 조롱 섞인 물음이 오간다. “미국은 지금 스스로 문화대혁명을 겪는 건 아닐까?”

 

‘트럼프 폭풍’ 속 미국, 다자주의 개혁 주장하는 중국

‘트럼프 폭풍’은 결국 미국 내부의 더 큰 위기, 즉 미국이 주도해온 세계화가 변곡점을 맞고 악화되는 가운데 나타난 현상이다. 1945년 이후 미국이 주도해온 세계화 질서에서 이제는 과거만큼의 이익을 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2025년 현직 미국 대통령이 이 위기를 유난히 거친 표현으로 부각시키고 있지만, 이런 진단 자체는 결코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미국의 고립주의적·보호무역주의적 전환은 이미 오래전부터 진행되어온 흐름을 더욱 뚜렷하게 부각시키는 것이며, 중국은 이에 대비해왔다.

그러나 다자주의 측면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의 집권이 오히려 베이징의 구상에 유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다. 트럼프의 경제 공세는 중국 모델의 취약성을 드러낼 위험을 동반하지만, 그만큼 미국 자신에게도 부메랑이 될 수 있는 양면성을 띠고 있다.

국제 관계 분야에서는 국제 질서를 바꾸려는 ‘수정주의 국가’와 기존 질서를 지키려는 ‘현상 유지 세력’을 대립하는 개념으로 설명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중국은 이 상반된 두 입장을 동시에 견지하면서도 일관성을 잃지 않고 있다. 베이징은 미국 중심의 일극 체제를 견제하기 위해 다자주의 개혁을 주장하면서, 궁극적으로는 강대국 간 균형을 이루던 냉전 이전의 질서로 돌아가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어떤 초강대 경쟁국도 인정할 수 없는 미국

1992년, 미국 국방부의 비밀 문서를 폭로한 <뉴욕타임스> 기사에 따르면, 이 문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었다. “냉전 이후 미국의 정치적·군사적 임무는 어떤 경쟁 초강대국도 부상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다.” 이 문서는 워싱턴이 “미국의 우위를 도전하려는 어떤 국가나 국가 집단도 억제할 수 있을 만큼의 군사력을 갖추어야 한다”라고 권고했다. 

당시 <뉴욕타임스> 기자는 이를 두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다섯 승전국’(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중국)이 결성한 유엔을 통해, 분쟁을 조정하고 무력 충돌을 억제하고자 했던 집단적 국제주의를 역대 가장 명확하게 거부한 사례”라고 지적했다.(7)

몇 년 뒤, 미국 외교협의회 소속의 길포드 존 아이켄베리 역시 비슷한 주장을 펼쳤다. 그는 당시 미국이 누리던 ‘일극적 순간’, 즉 미국이 세계 유일의 패권국으로 군림하던 시기를 활용해 1945년 체제를 대신할 새로운 국제 질서를 구축할 것을 주장했다. 구체적으로는 “미국과 서구의 세계 지배를 장기적으로 보장할 수 있는 규범 기반의 국제 질서”를 구축하자는 것이다. 이는 미국 패권이 언젠가 쇠퇴하더라도 그 지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드는 전략이었다고 존 벨러미 포스터는 분석했다.(8) 오늘날 ‘규범에 기반한 국제 질서’라는 표현은 서방 외교 담론에서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다.(9) 트럼프 행정부는 전후(戰後) 구상된 다자주의 체제를 허물어뜨리는 데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미국은 유엔(UN) 산하 여러 기구에서 탈퇴하며 이를 현실로 옮겼다. 

한편 중국 역시 2012년 시진핑이 공산당 총서기에 오르면서 덩샤오핑(1978~1989년 집권)이 내세운 “국제 정치에서 몸을 낮추라(韬光养晦 도광양회)”는 외교 노선을 완전히 벗어나게 된다. 2021년 3월, 중국 외교를 총괄하는 중앙외사공작위원회 주임 양제츠는 미국 국무장관 앤서니 블링컨과의 회담에서 전임자들과 달리 더는 말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중국은 유엔을 중심으로 한 국제 질서와 국제법에 기반한 질서를 수호한다. 소수 국가들이 주장하는 이른바 ‘규칙 기반 국제 질서’와는 분명히 다르다.”(10)

 

중국 지보도부가 몸을 낮추던 시절은 지나

“달라진 것은 중국 지도부가 이제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중국은 더 이상 기존 국제 질서의 틀 안에서 비판자나 반대 세력에 머무르지 않고, 자국의 비전을 적극적으로 옹호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됐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국제정치 전문가 나데주 롤랑의 분석이다.(11) 중국 정치학자 장웨이웨이도 같은 취지의 주장을 펼친다. 그는 중국국제금융포럼(CIFF) 부대 행사로 열린 한 토론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중국은 구매력 기준(PPP)으로 따졌을 때, 거의 10년째 세계 1위 경제대국 자리를 지키고 있지 않습니까?”

이에 대해 홍콩의 유력 금융인 찰스 리는 그런 식의 자화자찬은 전략적 오류라며 반박한다. “중국이 구매력 기준(PPP)으로 이미 세계 1위라는 말을 자꾸 반복하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 우리 중국인들은 차라리 2등이나 3등 자리에 머무는 걸 더 선호합니다.” 그러자 장웨이웨이는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지정학에서 스스로의 힘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를 불러올 수 있습니다. (…) 미국은 오랫동안 러시아 경제를 마치 스페인 정도 규모로 취급했지요. 그러다 결국 나토(NATO) 동진을 밀어붙였고, 이로 인해 전쟁 위험을 자초했습니다. 지금은 푸틴 스스로도 자국 경제를 구매력 기준(PPP)으로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어서 덧붙였다. “구매력 기준으로 따지면 러시아는 독일을 제치고 유럽 최대 경제대국입니다.” (12)

따라서 더 이상 몸을 낮추는 외교는 없다. 2021년부터 2023년 사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국가안보보좌관 제이크 설리번이 G7을 ‘자유세계의 운영위원회’(13)로 규정하던 그 시기에, 시진핑 주석은 다자주의를 강화하기 위한 세 가지 구상을 내놓았다. 바로 글로벌 개발 이니셔티브(GDI), 글로벌 안보 이니셔티브(GSI), 글로벌 문명 이니셔티브(GCI)다. 이 세 가지 구상이 오늘날 중국 외교 정책의 핵심 축으로 자리 잡고 있다. (GDI-남남협력과 지속가능발전을 강조하며 중국 주도의 개발질서를 지향하는 구상. GSI-서구 중심의 군사동맹을 견제하고 공동 안보, 상호 존중 원칙을 내세움. GCI-보편적 서구 가치 대신 문명 다양성과 상호 존중을 앞세우며 중국식 세계질서를 정당화하는 담론 전략—역주)

형용사로 가득한 화려한 수사로 포장된 이 구상들에 대해, 나데주 롤랑은 이렇게 꼬집었다. “마치 ‘친절하다’라는 단어의 온갖 유의어를 사전에서 끌어모아 나열한 듯한 수사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이러한 구상들은 기존과는 다른 대안적 국제 질서의 청사진을 제시하고 있다. 물론 중국의 패권적 야망을 위한 것이 아니라, 미국 패권에서 벗어난 세계 질서를 구축하려는 노력이라는 것이 베이징의 주장이다. 중국이 제시하는 핵심 원칙은 다음과 같다. 

유엔(UN)의 기초가 된 베스트팔렌 체제(국가 주권 절대성, 영토 보전, 내정 불간섭)의 복원, 모든 국가의 안보 요구를 동등하게 고려할 것, 일방적 제재 조치의 금지, 다자주의의 핵심 의제를 개발협력과 경제적 번영으로 재설정할 것, 각국 국민이 자국의 사회 체제를 자율적으로 선택할 권리를 보장할 것, 서구적 가치나 선호가 본질적으로 우월하다는 전제를 거부할 것, 개발권(경제적 번영, 빈곤 해소, 사회 발전 등)을 인권의 필수 구성요소로 인정할 것, 국제기구 내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의 대표성을 확대할 것 등이다. 

베이징은 이러한 구상이 구체적 외교 성과로 이어지고 있다고 강조한다. 대표 사례로는 2023년 3월 10일,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 간 외교 정상화 합의, 2024년 7월, 가자지구에서 팔레스타인 분파 간 통합정부 구성을 위한 합의 중재 등을 꼽았다.(14)

 

트럼프가 무너뜨린 세계질서, 중국에게는 기회

시진핑 주석이 내놓은 세 가지 구상(GDI, GSI, GCI)은 유엔 사무총장 안토니우 구테흐스와 120여 개국 이상, 다수의 국제·지역기구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미국의 싱크탱크 애틀랜틱 카운슬은 “이들 구상은 현재까지는 주로 ‘아이디어 차원’에 머물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이 싱크탱크는 이렇게 덧붙였다. “중국이 세계 질서 재편 과정에서 의미 있는 역할을 하려면, 미국이 주도하는 ‘규칙 기반 질서’의 대안으로만 비칠 것이 아니라, 분쟁 해결, 글로벌 도전 과제 대응, 번영 촉진에 더 적합한 상위 원칙임을 스스로 입증해야 한다.”(15) 결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질서와 규범의 개념 자체를 무너뜨린 행보가, 도리어 중국식 세계질서 확산을 촉진하는 역설적 결과를 낳은 것은 아닐까?

무엇보다 먼저, 앞으로의 향방은 베이징과 워싱턴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또 다른 전선, 즉 경제 전쟁의 결과에 달려 있다. 향후 몇 주 동안, 국제사회는 다자주의보다 통상과 경제적 이해관계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될 것이다.

미국이 자유무역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보인 것은 올해가 처음이 아니다. 중국 국영 영자지 <차이나데일리>는 “역사적으로도 미국은 자유무역이 자국 이익에 부합할 때는 이를 지지하지만, 시장의 힘이 미국의 패권을 위협하는 순간 보호무역주의로 돌아선다”라고 주장했다. (2025년 3월 19일자)

2017년 트럼프 대통령이 상업적 이해관계에 기반해 시작한 미국의 보호무역주의 노선은 후임 행정부에서도 전혀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강화됐다. 2023년 4월 27일, 제이크 설리번 국가안보보좌관은 브루킹스 연구소 연설에서 신자유주의가 미국 사회에 끼친 폐해를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국가 산업 기반의 붕괴, 전후 미국을 이끌던 공공투자 논리의 소멸, 노동자들이 성장의 혜택에서 배제되는 현실을 조목조목 지적했다. 그리고 이를 ‘워싱턴 컨센서스의 종언’으로 선언하며, 중국의 첨단기술 접근을 차단하기 위한 보호무역 조치 도입을 정당화했다.

 

“미국이 세계화에서 물러난다면, 중국이 그 역할을 이어갈 것”

2023년, 미국은 일본과 핵심 광물에 한정된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했다. 이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보호무역주의 기조 속에서 나온 마지막 협정이었다. 같은 해, 중국은 세르비아, 에콰도르, 니카라과와 연이어 협정을 맺었고, 이후에도 온두라스, 이스라엘, 몰도바, 노르웨이, 스리랑카와는 본격 협상을, 방글라데시, 캐나다, 콜롬비아, 몽골과는 사전 협의를 진행하며 외연을 넓히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전 세계를 대상으로 관세 부과 방침을 발표하자, 중국은 오랫동안 미국이 주도해온 경제 질서의 계승자이자 수호자로 자신을 내세우며 국제사회의 지지를 모으고 있다. 미국의 일방주의적 후퇴가 초래한 공백을 중국이 채우겠다는 것이다. 

이를 상징하듯, 시진핑 국가주석은 올해 3월 인민대회당에서 40여 명의 글로벌 기업 대표들과 회동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국제무역과 글로벌 공급망 체계를 적극 옹호하며, <파이낸셜 타임스>로부터 “가장 열정적인 연설 중 하나”라는 평가를 받았다(2025년 3월 29일자). “중국은 이미 140개국 이상의 최대 교역국입니다. 만약 도널드 트럼프와 미국이 세계화에서 물러난다면, 우리는 그 역할을 이어가겠습니다.” 정치학자 장웨이웨이는 이렇게 선언하며 중국의 의지를 대변했다. 

중국은 상징적 여론전도 병행하고 있다. 4월 7일, 미국 백악관이 아닌 주미 중국대사관이 직접 소셜미디어 X(구 트위터)를 통해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이 보호무역주의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영상을 게시한 것이다. 이는 ‘자유무역의 수호자’라는 미국의 전통적 이미지를 중국이 역으로 차용하며, 국제 사회에 새로운 메시지를 던지는 시도였다. 미국이 자국 중심의 보호무역을 강화하는 동안, 중국은 세계화의 지속을 외교적 무기로 삼으며 글로벌 리더십을 재편하고 있다.
하지만 중국이 내세우는 ‘국제무역의 수호자’라는 명분이 실제로 각국 경제계와 산업계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지는 불확실하다. <파이낸셜 타임스>는 2025년 4월 8일자 기사에서 이를 지적하며, 미국의 요구에 순응하는 국가들만이 그 ‘순종의 대가’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그럼에도 이번 무역 전쟁에서 중국이 결코 무기력한 상대는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워싱턴이 접근을 차단하려 했던 첨단 기술 분야에서도 중국은 사실상 그 격차를 대부분 해소했으며, 이제는 보복 조치라는 막강한 카드들을 내세워 맞설 태세를 갖추고 있다. 올해 4월 8일, 권력층과 가까운 지식인으로 알려진 런이(任毅)는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중국이 고려 중인 보복 조치들을 상세히 소개했다.

여기에는 미국과의 펜타닐 협력 중단(펜타닐은 미국 도시들을 황폐화시키는 합성 마약으로, 일부 성분은 중국에서 생산됨), 대두와 수수 등 미국산 농산물 수출 제한, 미국산 가금류 제품 수입 제한, 서비스 분야에서의 맞대응 조치(서비스 무역에서 미국은 중국에 대해 흑자를 기록 중) 등이 포함됐다. 중국은 이처럼 다각적인 보복 수단을 통해 미국의 압박에 정면으로 대응할 준비를 마쳤음을 시사하고 있다.

이미 미국 대통령이 자국 경제 엘리트들의 압박에 밀려 이미 관세 정책에 수많은 예외 조항을 부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아시아소사이어티 정책연구소 안보·외교 담당 부회장 다니엘 러셀은 이렇게 진단한다. 그는 시진핑 주석이 “트럼프가 밀어붙이는 이 복잡한 관세 정책이 결국 금융시장의 압력에 무너질 것이라는 데에 조용히 베팅하고 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16) 그 결과, 세계 최대 공산당의 수장이 글로벌 금융 시장의 투기 자본에 기대어 미국과의 무역 대결에서 승부수를 띄우는 역설적인 장면이 연출되고 있다.

 

중국 지도부의 경계, “폭풍 속에 반란이 일어날 수 있어”

사실, 중국은 협상을 전제로 강경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베이징 당국은 경제 성장률이 예상보다 낮아지는 상황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다. 2024년 청년(비학생 기준) 실업률이 15%를 넘어섰고, 근로 현장에서의 갈등 역시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로 확산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런 입장은 당연해 보인다. 중국공산당(PCC)은 경제의 활력을 사회·정치적 저항을 억제할 유일한 수단으로 보고 있다. 수차례 내부 분열로 큰 상처를 입었던 중국 현대사에서 이는 반복된 교훈이기도 하다. “중국이 가장 중시하는 핵심 과제는 사회적·정치적 안정이다.”(17)
이는 1989년 2월 26일, 덩샤오핑이 미국 대통령 조지 H. W. 부시에게 직접 설명했던 입장이기도 하다. 그해 몇 달 뒤 톈안먼 사건이 벌어지면서, 가장 본질적인 과제인 ‘안정’은 체제 유지에 있어 최우선적이고 절대적인 목표로 자리 잡았다. 1990년 6월 4일, 사건 1주기를 맞아 인민일보는 “안정이 최우선이다”라는 제목으로 이를 재확인했다. 이후로도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시진핑 주석 역시 ‘아랍의 봄’ 이후 집권하며, 이 같은 내부 동요에 대한 깊은 우려를 숨기지 않았다. 중국 지도부는 여전히 “폭풍 속에서 반란이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을 경계하며, 경제적·사회적 안정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다.

 

중국 노동시장의 양극화 심화, 심각해지는 정치적 불안정성

결국 중국은 성장을 멈출 수 없다. 하지만 내수 진작을 위한 중국의 최근 여러 시도에도 불구하고, 중국 소비자들의 지출은 2021년 이후 눈에 띄게 감소하고 있다. 당시 부동산 시장의 붕괴로 상당한 규모의 가계 저축이 증발한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중국 정부는 예상대로 소비 진작을 재차 약속하는 한편, 수출 중심의 생산 능력을 더욱 강화하는 익숙한 해법을 꺼내들었다. 특히 자동화 도입이 핵심 해법으로 부상하고 있다. 자동화는 경쟁력 강화를 위한 필수 수단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동시에 두 가지 커다란 문제를 낳고 있다. 하나는 국내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지정학적 문제다.

국내적으로는 저숙련 노동자들이 자동화된 산업에서 밀려나면서 임금이 정체되거나 하락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로 인해 소비 수요가 줄고, 결과적으로 성장 자체가 지체된다. <파이낸셜 타임스>가 2025년 3월 25일자 기사에서 인용한 연구진들은 이렇게 지적한다. “너무 많은 비숙련 노동자들이 산업의 현대화 과정에서 배제될 경우, 임금은 정체되거나 하락하고, 이는 수요를 위축시키며 결국 성장을 가로막는다.” 연구진들은 다음과 같은 예상을 덧붙였다. “노동시장의 양극화가 심화된 국가일수록 정치적 불안정성 역시 심각해진다.” 

결국 중국공산당(PCC)이 지상 과제로 삼고 있는 ‘안정’이라는 목표가, 역설적으로 바로 그 안정의 기반을 위협할 수 있다는 점이 드러나고 있다. 성장 경쟁의 악순환에 빠질 위험을 중국 스스로 안고 있는 셈이다. 체제를 지키기 위한 성장의 질주가, 오히려 그 체제 자체의 불안정을 자초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펼쳐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중국은 체제 안정을 위해 성장 가속화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중국 지도부, 새로운 외풍 부를 수도

이로 인해 중국은 또 다른 난관과 마주하게 된다. 중국의 세계 산업 생산 비중은 2000년 6%에서 오늘날에는 무려 32%를 넘어섰다.(18) 그러나 세계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8%인 반면, 세계 소비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겨우 15%에 그친다. <파이낸셜 타임스>는 올해 4월 9일자 기사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이는 중국이 자국 내에서 소화할 수 없는 막대한 과잉 생산량을 해소하기 위해 다른 나라들의 수요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사실, 이 문제는 영국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이미 오래전에 지적했던 구조적 문제이기도 하다. 2024년, 중국의 무역수지 흑자는 사상 처음으로 1조 달러를 넘어섰다.

하지만 중국의 이 같은 ‘수출 대국’ 전략은 이미 동남아시아 일부 국가들의 산업 공동화를 부추긴 주요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여기에 더해, 미국이 부과한 고율 관세는 중국 기업들로 하여금 수출품의 방향을 동남아시아 지역으로 돌리게 만들고 있다. 미국 시장에서 밀려난 물량이 동남아로 향하면서 해당 국가들의 산업 기반이 더욱 압박받는 것이다. 이제 유럽 역시 같은 악순환을 예상하고 있다. 미국이 더 이상 받아주지 않는 중국산 제품들이 대거 유럽 시장으로 밀려 들어올 것이란 경고가 곳곳에서 나오고 있는 것이다.

베이징이 트럼프가 제공한 이번 기회를 활용해 무역 불균형을 바로 잡지 않는다면, 결국 불균형 심화로 오히려 중국의 교역 상대국들 사이에서 보호무역주의 목소리가 더욱 거세질 수 있다. 그런 움직임은 ‘트럼프식 고립주의’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워 자국 산업 보호를 위해 관세를 무기처럼 사용하고, 다자질서보다는 힘의 논리를 앞세운 공격적 무역정책—역주)와는 결이 다른, 보다 일관되고 체계적이며, 심지어 진보적 색채를 띤 보호무역주의로 나타날 수도 있다. 결국, 내부 반란을 피하기 위해 방향타를 잡으려던 중국 지도부의 선택이, 새로운 외풍과 거센 폭풍을 스스로 불러오는 결과를 낳을 수 있는 것이다. 

 

글·르노 랑베르 Renaud Lambert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자


(1) Emma Haslett·Natalie Sherman, 「관세 여파로 요동치는 시장, 흔들리는 미국 경제」, 2025년 4월 8일, <BBC>, www.bbc.com
(2) Julia Manchester, 「트럼프 ‘관세가 중간선거 앞둔 하원 공화당에 도움 될 것’」, 2025년 4월 8일, <더힐>, https://thehill.com
(3) “미국의 관세 남용에 반대하는 중국 정부의 입장”, 중국 외교부, 2025년 4월 5일, www.fmprc.gov.cn
(4) 일레인 커튼바흐(Elaine Kurtenbach), 「고율 관세 앞에서 세계가 고민하는 사이, 중국의 반격」, <AP통신>, 2025년 4월 4일.
(5) 가와세 겐지(Kenji Kawase), 「중국 왕이 외교부장, 러시아 치켜세우고 미국의 ‘이중적 외교’ 비판」, <니케이 아시아>, 도쿄, 2025년 3월 7일.
(6) “미국 민주주의의 현황 : 2022”, 중국 외교부, 2023년 3월 20일, www.mfa.gov.cn
(7) Patrick Tyler, 「미국 전략계획, '경쟁국 부상 차단' 명문화」, <뉴욕타임스>, 1992년 3월 7일.
(8) John Bellamy Foster, 「중국을 겨냥한 새로운 냉전」, <Monthly Review>, 제73권 3호, 뉴욕, 2021년 7~8월.
(9) 안세실 로베르, 「규범에 기반한 국제질서에 대하여」,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24년 11월.
(10) 「알래스카 미중 고위급 회담 서두 발언 전문」, <니케이 아시아>, 2021년 3월 19일.
(11) 나데주 롤랑, 「중국이 구상하는 새로운 세계질서」, NBR 특별보고서 제83호, 미국 아시아연구국, 워싱턴 DC, 2020년 1월 7일.
(12) “트럼프 2기 대응을 위한 중국의 전략”, 2025년 1월 26일, https://thechinaacademy.org
(13) 제이크 설리번 미국 국가안보보좌관, “글로벌 신흥기술 정상회의 연설”, 백악관 발표, 2022년 9월 16일, https://bidenwhitehouse.archives.gov
(14) 키쇼어 마부바니, 「브뤼셀의 무능, 베이징의 성공」,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25년 1월.
(15) Jonathan Fulton, Tuvia Gering, Michael Schuman, “베이징의 최신 글로벌 구상이 세계 질서를 재편하는 방식”, 애틀랜틱 카운슬(Atlantic Council), 워싱턴 DC, 2023년 6월 21일.
(16) “미중 무역전쟁 격화에 대한 아시아소사이어티 정책연구소(ASPI) 전문가 논평”, ASPI 메일링 리스트 발송, 2025년 4월 11일.
(17) Qian Gang, 「‘안정을 유지하라’는 표현은 언제부터 일상어가 되었나?」(중국어판), 2012년 9월 19일, https://cn.nytimes.com
(18) Keith Bradsher, 「중국, 1조 9천억 달러 추가 투입으로 수출 드라이브 가속」, <뉴욕타임스>, 2025년 4월 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