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과 튀르키예, ‘가장 가까운’ 앙숙의 갈등 모드

중동에서 코카서스까지

2025-05-30     아리안 봉종 | 기자

지난 3월, 이스탄불 시장 에크렘 이마모을루가 수감되면서 대규모 시위가 촉발됐고, 그 여파는 현재까지 튀르키예 대학가에서 이어지고 있다. 유력 야권 지도자와 에르도안 대통령 사이의 갈등 요인 중 하나는, 앙카라 정부가 시리아의 새로운 정권을 지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선택은 한때 동맹이었던 튀르키예와 이스라엘 간 새로운 분쟁의 불씨가 될 수 있다.

 

우리는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잘 알고 있다. 신이 시온주의의 이스라엘을 저주하길 바란다.” 2025년 3월 30일, 라마단 금식 종료를 기념하는 이드 알피트르 기도 시간에 맞춰 소셜미디어 X에 게시된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의 이 발언은, 이스라엘 외무장관의 즉각적인 반발을 불러왔다. 

이스라엘 외무장관은 같은 플랫폼에 이렇게 적었다. “독재자 에르도안은 자신의 반유대주의적 본색을 드러냈다. 그는 이 지역과 자기 국민 모두에게 ‘위협’이다. 우리는 NATO 회원국들이 이 사실을 깨닫길 바란다.” 팔레스타인 문제는 오래전부터 앙카라와 텔아비브 사이의 긴장을 야기해온 핵심 쟁점이었다. 이제 그 갈등은 시리아로도 번지고 있다. 한때 오랜 동맹이었던 두 나라는, 2024년 12월 8일 아사드 정권 붕괴 이후 중동의 최대 수혜국으로 거론되고 있다.

시리아 문제와 인접국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확보하려는 튀르키예의 움직임은 이슬람 민족주의적 성격을 띤 에르도안 정권과 이에 반대하는 세력들 사이에서 갈등의 기폭제가 될 수 있다. 이러한 갈등은, 에르도안 대통령의 주요 경쟁자이자 이스탄불 시장인 에크렘 이마모을루의 구금 조치를 부분적으로 설명해주는 배경이 될 수도 있다. 

에크렘 이마모을루는 공화인민당(CHP) 소속으로, 대중적 인기가 매우 높은 정치인이다. 또한 제1야당인 공화인민당(CHP)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에 대한 접근 방식에서도 여당인 정의개발당(AKP)과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AKP는 세 가지 상충하는 압력 속에서 균형을 잡으려 하고 있다. 첫째, 영향력을 확대하는 야당의 온건 노선. 둘째, 내부에서 압박을 가하는 급진 이슬람 정치 세력. 셋째, 스스로의 모호한 입장과 끊이지 않는 내부 갈등이다. “튀르키예 정치에서 군부가 지배적이던 1960년부터 2007년까지 약 반세기 동안, 앙카라는 줄곧 텔아비브의 동맹국으로 남았다.” 군사 전문가 가레스 젠킨스의 설명이다. 1949년, 무슬림 국가 중 가장 먼저 신생 이스라엘을 승인한 튀르키예에는 오늘날까지도 규모 있는 유대인 공동체가 자리하고 있다. 냉전 시기, 서방 진영의 전초기지였던 튀르키예는 1952년 NATO에 가입하며, 중동에서 아랍권과 소련의 영향력을 견제하려 했다. 한편,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센터(CNRS)의 연구원 요안 모르방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아랍 국가들과의 직접적인 외교 대신, 튀르키예, 쿠르드족, 이란과의 관계를 중점적으로 강화하는 ‘우회 전략’을 펼쳤다.

 

1990년대 양국은 ‘허니문 시기’, 2002년 이후 관계 악화돼

1990년대는 튀르키예와 이스라엘 양국 군부 간 일종의 ‘허니문 시기’였다. 튀르키예는 분리주의 성향의 마르크스주의 조직인 쿠르드노동자당(PKK)과 이슬람 정치 세력의 부상이라는 이중 압박에 직면해 있었다. 특히, 1984년부터 독립 또는 자치권을 요구하며 무장 투쟁을 벌인 PKK에 대한 튀르키예 정부의 강경 진압과, 그 과정에서 발생한 쿠르드족 인권 탄압을 이유로 유럽연합과 미국은 튀르키예에 대한 무기 수출을 금지했다. 이로 인해 튀르키예는 텔아비브의 군사적 지원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튀르키예 군(軍)장성들은 이스라엘군을 매우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군사 전문가 가레스 젠킨스는, 튀르키예 국가안보회의 사무총장을 지낸 도안 베야지트 장군이 “이스라엘군이 국민과 밀접하게 소통하며 사회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다는 점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전했다. 1996년, 이슬람 성향의 네즈메틴 에르바칸 총리가 막 집권했을 당시, 그는 튀르키예 군부의 강력한 압박에 의해 이스라엘과 군사 협력 및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군사 협력과 경제 자유화를 병행하는 이러한 전략은 워싱턴의 입맛에도 맞는 일이었다. 그러나 2002년 정의개발당(AKP)이 집권한 이후, 양국 관계는 악화되기 시작했다. 하마스는 이스라엘과 서방 세력에게 팔레스타인 내 무슬림형제단의 대표 세력으로 간주되었고, 무슬림형제단은 AKP 내 일부 계파와 동일시되는 정치적 가족이었다. 2004년, 이스라엘은 이슬람 저항 운동의 창립자인 아흐메드 야신과 압델 아지즈 알란티시를 암살했다. 그로부터 2년 뒤, 가자지구 총선에서 이슬람주의자들이 승리하자, 앙카라는 이를 에르도안의 개인적 성공으로 받아들였다.  

당시 총리였지만 이미 국가의 실세였던 그는 하마스에 선거 전략을 조언한 인물이었다. 미국과 유럽연합이 이 선거 결과를 인정하지 않은 가운데, 튀르키예는 이 지역에서 민주주의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나섰다. 2008년 12월, 이스라엘 총리 에후드 올메르트는 앙카라를 방문해 튀르키예 총리와 회담을 가졌다. 당시 이스라엘은 하마스의 로켓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가자지구에 대한 대규모 공중 및 지상 작전(‘Plomb durci’ 작전이라 명명됨)을 준비 중이었다. 이 작전으로 팔레스타인 측에서는 약 1,400명이, 이스라엘 측에서는 13명이 숨졌다. 당시  한 튀르키예 외교관은 “우리는 모욕당했다. 올메르트 총리는 차라리 방문을 취소하거나, 최소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려줄 수 있었을 것이다”라고 전했다. 이듬해 1월, 다보스 세계경제포럼에서 에르도안은 이스라엘의 군사 작전을 강하게 비판하며 시몬 페레스 대통령을 향해 “아이들의 살인자”라고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튀르키예 중동 외교정책은 ‘전략적 심연’ 노선에 기초 

사회자가 에르도안의 발언을 끊자 그는 마무리 발언을 위해 “1분만 더 달라”고 요구했지만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자, 전 세계가 지켜보는 카메라 앞에서 자리를 박차고 무대를 떠났다. 이 사건은 마슈렉과 마그레브 지역에서 그의 정치적 위상을 크게 끌어올리는 계기가 되었다. 

 

실제로 튀르키예 외교 정책의 방향을 재설정한 인물은 에르도안보다 오히려 아흐메트 다우투오을루였다. 그는 ‘전략적 심연’이라는 외교 노선을 제시한 전략가이자 이념가로, 이후 대통령 외교 고문과 외무장관, 그리고 총리를 역임했다.(1) 그에 따르면, 튀르키예가 역내에서 주요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반이스라엘·친팔레스타인 노선을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3년 뒤, ‘마비 마르마라 사건’이 벌어졌다. 다우투오을루의 주도로 추진된 이 계획에 대해 에르도안은 사실상 그다지 내키지 않아 했지만, IHH(국제 인도주의 구호재단)가 전세 낸 이 튀르키예 선박은 이스라엘과 이집트가 가자지구에 설정한 봉쇄를 뚫으려 했다. 그러나 이스라엘 특수부대가 이 선박에 기습적으로 가한 공격으로 9명이 숨졌다. 튀르키예 대통령은 이에 대해 이스라엘을 ‘국가 테러 행위’의 주체로 규정하고, 국제사회에 호소했다. 그는 국회 연설을 했으며, 이 연설은 이례적으로 아랍어로도 동시 통역되었다.(2) 

그로부터 한 달 동안 수천 명의 시위대가 이스탄불 주재 이스라엘 영사관과 텔아비브 주재 튀르키예 영사관 앞에 집결했다. 이 사건은, “튀르키예 군부의 정치적 영향력이 급격히 약화되고, 양국 간 군사 협력이 사실상 거의 중단된 시점에 벌어진 일”이라고 젠킨스는 평가했다.
하지만 한 서방 경제참사관은 이렇게 회상했다. “당시 이스라엘은 이스탄불 방산 전시회에서 가장 큰 부스를 차지하고 있었죠.” 그리고 양국 간의 무역 역시 전혀 줄지 않았다. “2008년 다보스 사태에도 불구하고, 결국 현실 정치가 우선이었다”라고 요안 모르방은 회고했다. 

이 시기 튀르키예의 경제적 성공—국내총생산(GDP) 기준으로 세계 17위에 올랐고, 같은 해 말 성장률이 6%에 달했으며(3)—은 아랍 세계에서의 위신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특히 이슬람과 민주주의를 병행할 수 있는 역량이 주목받았다. 2011년 ‘아랍의 봄’이 일어나자, 앙카라는 이를 외교적 자산으로 삼아 이집트 집권 세력인 무슬림 형제단과의 동맹을 바탕으로 중동의 판을 새로 짜려는 시도에 나섰다. 2005년부터 아사드 정권과 가까워졌던 튀르키예는, 이후 아사드 정권과의 결별을 선언하고 본격적으로 대립 국면에 들었다. 같은 해 10월, 튀르키예는 길라드 샬리트 이스라엘 병사의 석방 대가로 풀려난 하마스 고위 간부 중 일부를 자국에 수용하겠다고 제안했다. “앙카라는 하마스의 활동, 특히 자금 세탁과 제재 대상인 이란산 제품을 튀르키예를 경유해 가자지구로 반입하는 행위를 사실상 묵인했습니다. 튀르키예 정부는 하마스 지도부에 여권을 발급했고, 이후에는 시민권까지 부여했지요”라고 텔아비브 국가안보연구소(INSS)의 연구원인 갈리아 린덴스트라우스의 지적이다. 

 

오바마가 주선했던 이스라엘-튀르키예 화해

전 이스라엘 외교관 알론 리엘은 “튀르키예는 자국 내에 하마스가 본부를 설립하고, 요르단강 서안에서의 팔레스타인 투쟁에 전념할 수 있도록 사실상 허용하고 있다. 그것은 하마스를 정당화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주장했다. 이란, 무슬림형제단, 하마스와 연계된 활동이 이어지면서 튀르키예는 모사드의 주요 첩보 활동 지역으로 부상했다. 군사 전문가 가레스 젠킨스는 “특히 하마스와 접촉이 있을 것으로 보이는 튀르키예 정부 인사들이 주요 감시 대상이 된다.”고 말했다. 이에 격분한 당시 튀르키예  국가정보기관(MİT) 수장이었던 하칸 피단은 이스라엘을 위해 활동하던 이란 국적 스파이 10명의 신원을 고의로 노출시켰다. 그들은 몇 달 뒤 테헤란에서 처형되었다.

2013년 3월 22일, 미 대통령 전용기 아래에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이스라엘과 튀르키예 간의 관계 정상화를 희망한다는 뜻을 밝혔다. 이에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에르도안 튀르키예 총리에게 전화를 걸어, 마비 마르마라호 공격에 대해 사과하고, 희생자들에게 거액의 배상금을 지급하겠다고 약속했다. 

튀르키예 전역에는 에르도안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사진과, 그 뒤에서 찡그린 얼굴을 한 네타냐후의 모습이 담긴 대형 포스터들이 나붙었다. 그 포스터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큼지막하게 적혀 있었다. “존경하는 총리님, 우리 국민이 이런 자긍심을 누릴 수 있도록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튀르키예 측은 두 가지 중대한 양보를 했다. 이 사실이 국민들에게 알려졌다면, 대중의 분위기는 달라졌을 것이다. 첫째, 튀르키예는 이스라엘군의 작전상 실수로 인해 사망자가 발생했다는 텔아비브 측 입장에 동의하며, 사전에 이스라엘이 계획한 공격이었다는 튀르키예의 기존 주장을 철회했다. 둘째, 분석가 카드리 귀르셀이 지적하듯, AKP 정부는 가자지구에 대한 봉쇄 및 제재 해제를 요구하지 않기로 했다. 이는 다름 아닌 2010년 5월 마비 마르마라호가 출항하게 된 결정적 이유였는데도 말이다.

2018년, 미국 대사관이 텔아비브에서 예루살렘으로 이전했다. 이에 항의하는 시위 행진이 강경 진압되면서 수십 명의 팔레스타인 시위대가 사망하고, 앙카라와 텔아비브 간의 관계는 다시 얼어붙었다. 이듬해, 이스라엘, 키프로스, 이집트, 그리스는 ‘동지중해 포럼’을 출범시켰다. 이는 동지중해의 천연가스 공급국, 수송국, 수요국이 함께 참여하는 공동 에너지 플랫폼이다. 튀르키예는 에너지 허브로 도약할 기회가 멀어지자 충격에 빠졌다. “그 시점에서 튀르키예 정부는 자신들이 고립되었음을 알고, 리비아의 동지중해 포럼 참여를 저지하기 위해 트리폴리 정부와 군사 협력 및 해양 경계 협정을 체결했다.” 이는 이스탄불 오지예인 대학교 국제관계학 교수 에브렌 발타의 분석이다.

 

에르도안 대통령, 하마스 공격을 대외적으로 지지

2022년 3월, 네게브 정상회의에서 바레인, 이집트, 아랍에미리트, 미국, 모로코, 이스라엘의 국기가 나란히 걸렸다. 한편,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부다비(아랍에미리트의 수도)는 튀르키예의 동맹국인 카타르(도하)와 외교 관계를 복원했다. 이로써 튀르키예가 배제될 수 있는 새로운 중동 질서가 그려지는 듯했다. 

전 이스라엘 외교관 알론 리엘은 “에르도안 대통령(2014년 취임)이 먼저 관계 정상화를 추진한 것은 바로 이런 배경 때문이다. 2020년 체결된 ‘아브라함 협정’(2020년 미국 중재로 이스라엘이 UAE, 바레인, 모로코 등과 수교한 협정—역주)이 그의 인식을 바꾸어 놓았다. 그는 이 협정이 이스라엘의 중동 내 입지를 실질적으로 강화시켰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라고 설명했다. 2023년 9월, 에르도안과 네타냐후는 유엔 총회를 계기로 회담을 가졌으며, 이스라엘 총리의 앙카라 방문도 검토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2023년 10월 7일 하마스의 기습공격이 발생했다. 이는 튀르키예와 이스라엘의 관계 정상화를 앞둔, 민감한 시점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런데 튀르키예 대통령은 하마스의 공격을 비난하지 않았다. 그는 ‘테러리스트’라는 표현 사용도 거부하며, 하마스를 “자신들의 땅을 지키는 해방 투사 집단”으로 주장했다.(4) 그럼에도 에르도안 대통령은 당사자들 간의 중재자 역할을 자임하며, 이후 몇 주에 걸쳐 안보 보장 방안을 제안했다. 그러나 미국을 비롯한 주요 당사국들은 이 제안을 외면했고, 이러한 거절은 앙카라에 깊은 불쾌감을 안겨주었다. 이는 이후 튀르키예가  강경 대응 기조로 선회하는 배경이 되었다. 독일로 망명한 튀르키예 언론인 메틴 지한은 작은 방에서 오직 컴퓨터 한 대만을 놓고, 튀르키예 권력의 ‘이중적 얼굴’을 조명하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겉으로는 거친 언사를 쏟아내며 강경한 자세를 취하지만, 이스라엘과의 거래만큼은 끝내 멈추지 않는 권력. 그것이 오늘날 튀르키예 권력의 이중성이다. 지한은 무역 통계 자료를 샅샅이 뒤진다. “공개된 자료다. 비밀은 없다. 다 적혀 있고, 찾기만 하면 된다”라고 그는 말했다. 그는 자신의 X계정을 통해 이스라엘과의 교역 규모와 내용을 매일같이 공개했다. 그의 활동은 “모든 야권 정치인을 합친 것보다 더 효과적이다”라는 평가를 받았고, “그가 우리 대신 싸워주고 있다”라는 반응도 나왔다. 한편, 하마스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튀르키예 여론이 45%에 달하는 가운데(5), 튀르키예 국민 다수는 정부에 이스라엘과의 무역 중단을 요구했다.

 

이스라엘과 무역 단절 이후, 경제적 부담 커진 튀르키예

텔아비브에 대한 제재, 이스라엘이 활용 중인 쿠레지크 주둔 미국 레이더 기지 폐쇄, 심지어 가자지구로의 병력 파병까지 요구하는 ‘신번영당(YRP)’은, 에르도안 대통령의 정치적 스승이었던 네즈메틴 에르바칸의 아들 파티흐 에르바칸이 이끄는 정당이다. 이 정당은 심지어 여당인 정의개발당(AKP) 지지층 내에서도 점점 더 많은 지지를 얻고 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YRP와의 연정을 거부하고 있으며, 2024년 3월 지방선거에서 약 7%의 득표율을 기록해 AKP가 보유하던 두 개 도시를 빼앗아 간 이 이슬람주의 정당의 부상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며칠 뒤, 앙카라는 이스라엘에 대한 54개 품목의 수출 중단을 발표하고, 그 다음 달에는 이스라엘과의 모든 무역 관계를 전면 중단했다. 이러한 제재는 이스라엘에 대한 튀르키예의 연간 수출액이 50억 달러가 넘는 상황에서 발생해, 튀르키예 경제에는 상당한 부담이 됐다.(6) 거의 같은 시기, 에르도안 대통령은 이스마일 하니예가 이끄는 하마스 대표단을 포옹하며 환대했고, 에르도안의 미국 워싱턴 방문은 취소되었다. 튀르키예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이스라엘을 국제형사재판소(ICC)에 제소하려는 절차에 동참하겠다고 공식 발표했다.

2024년 10월 6일 일요일, 이스탄불 아시아 해안에는 햇살이 내리쬐었다. 하마스의 ‘군사 책임자’ 야흐야 신와르의 모습이 담긴 이미지에는, 그가 한쪽 팔에는 아이를, 다른 쪽 팔에는 기관총을 안은 채로 서 있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그 이미지는 우스퀴다르에 모인 소규모 군중 위로 높이 걸려 있었다. 남성과 여성으로 나뉘어 선 수백 명의 시위대는, ‘시온주의 적에 맞선 저항’의 상징을 향해 환호하며 하마스와 팔레스타인 깃발을 흔들었다. 또 다른 이미지 속 인물은 하마스의 ‘정치적 얼굴’이자, 튀르키예의 최고지도자가 “형제”라 불렀던 이스마일 하니예였다. 그는 두 달 전, 이란에서 이스라엘 정보요원에 의해 암살당했고, 튀르키예는 그를 추모해 국가 애도일을 선포했었다. 시위대는 검지를 들어 올리며, 연단에서 설교하는 이맘의 말에 화답했다. 그들이 든 피켓에는 나토(NATO)를 규탄하고, 이스라엘군이 가자지구에서 ‘집단학살’을 벌이고 있다고 비난하는 문구들이 적혀 있었다.

그 시기에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너 유럽 쪽 타크심 광장에서는, 미국 제국주의와 시온주의에 반대하는 10여 개 좌파 단체들의 호소에 따라 시위가 벌어졌고, 이곳에서도 NATO는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시위대는 “지중해에서 요르단강까지 하나의 국가”(이스라엘 전체 영토)를 요구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신와르나 하니예의 초상 대신, 팔레스타인 해방을 위한 민주전선(FDLP) 소속으로, 1969년 암만 공항에서 항공기를 납치한 최초의 여성으로 알려진 레일라 칼레드의 초상이 내걸렸다. 

칼라시니코프 소총을 들고 케피예(팔레스타인 전통 스카프)를 두른 여성의 모습이었다. 히잡을 쓴 몇몇 젊은 여성들은 해협 반대편의 이슬람주의자들과 자신들을 동일시하지 않았다. 그들은 좌파 성향의 단체인 ‘팔레스타인을 위한 청년들’에 참여하고 있었으며, 스스로를 ‘에르도안에 맞서는 무슬림 여성들’이라고 정의했다. 그들은 몇 달 전, 이스라엘 제재를 요구하며 이스탄불 도심에서 시위하다가 강제로 연행된 ‘자매’ 베이자 벵기수 악위즈의 체포 장면에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그녀는 수갑이 채워진 채 경찰에 의해 끌려갔으며, 그의 아버지는 마비 마르마라호에 대한 이스라엘 특수부대의 습격 당시 사망했다.

타크심에서는 좌파 단체들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CHP(사회민주·케말주의 정당) 지지자들의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연구자 오렐리앙 드니조는 이러한 괴리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CHP는 이스라엘의 존재를 정당한 것으로 인정하고, 하마스를 대화 상대로 보지 않으며, 제재 조치에도 반대하는 정당이다.” 2024년 4월 28일, 약 1년 뒤 수감되는 당 대표 에크렘 이마모을루는 <CNN>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강조했다. 

“하마스가 이스라엘에 공격을 감행한 것은 사실이며, 이는 우리에게 깊은 슬픔을 안겨준다. 우리는 테러 공격을 자행하고 대량 학살을 일으키는 모든 조직적인 구조를 테러 조직으로 간주한다.” 이러한 입장 속에서, CHP 지지자 가운데 거의 절반은 이번 분쟁에서 튀르키예 정부가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보는 반면, AKP 지지자 중에서는 약 4분의 1만이 중립 입장을 원했다.

팔레스타인 연대 시위 현장에서 눈에 띄지 않은 또 다른 주체는 쿠르드 자치주의 운동이었다. 최근 몇 년 사이, 이 운동의 활동가들은 팔레스타인 문제에서 점점 멀어졌다. “10월 7일 이후, 그들은 하마스의 작전 방식과 이슬람국가(IS)의 방식 사이에서 유사성이 있다고 봤다. 쿠르드 측은 IS와의 전투에서 무려 만 명의 전사자를 잃었기 때문이다”라고 언론인 이르판 악탄은 설명했다. 한 쿠르드 활동가는 “2014년 9월 코바니 전투 당시, 팔레스타인인들은 우리를 위해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단 한 번도 우리를 지지한 적이 없다“라고 회상했다. 에디르네 교도소 독방에 수감 중인 전 국민민주당(HDP) 공동대표 셀라하틴 데미르타쉬는 2024년 7월 하니예가 암살당한 직후, X를 통해 팔레스타인에 대한 연대를 표명했다. 그러나 그 게시물은 쿠르드 내부에서 쏟아지는 욕설과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네타냐후 눈에는 이제 튀르키예가 적” 

앙카라는 이스라엘이 하야트 타흐리르 알샴(HTS)의 무장 공세를 지원함으로써 아사드 정권의 약화에 기여했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에르도안 정부도 HTS를 지원하고 있어 결과적으로 두 나라는 알아사드 정권 붕괴에 간접적으로 공조한 셈이다. 이스라엘의 폭격은 헤즈볼라를 궤멸시키고, 이란의 역내 영향력을 약화시켰는데, 두 세력 모두 시리아 정권의 주요 지원 세력이었다. 튀르키예는 이 시아파 무장세력이 겪는 고난에 개입하지 않았다. 헤즈볼라는 튀르키예가 지원하는 반군 세력(지하디스트 포함)을 상대로 싸워온 집단이기 때문이다. 

르하이 대학 국제관계학 명예교수 앙리 바르키는 “사실상 이스라엘과 튀르키예는 시리아에서 유사한 입장에 놓여 있다. 양국 모두 시리아 영토의 일부를 점유하고 있으며, 유사한 안보 위협에 직면해 있다. 튀르키예는 쿠르드 세력에, 이스라엘은 헤즈볼라와 기타 무장단체에 맞서고 있다. 두 나라 모두 이란의 재개입을 원치 않지만, 그것이 현실화될 가능성은 높지 않다”라고 설명했다. 오랜 경쟁자인 이란의 세력 약화는 튀르키예로서는 환영할 만한 일이다. 

튀르키예와 이스라엘이 ‘사실상의 동맹국’이 될 수도 있을까? 두 나라는 2020년 제2차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에서 아제르바이잔에 무기를 제공하고 군사적으로 지원했으며, 그 결과 아르메니아가 패배했다. “10월 7일 이전, 아제르바이잔은 튀르키예와 이스라엘 간 관계를 가까워지게 하려고 시도했었다”라고 바쿠에 위치한 톱추바쇼프 센터 소장 루시프 후세이노프는 주장했다. 현재까지도 아제르바이잔은 튀르키예와는 동맹을, 이스라엘과는 전략적 파트너십을 유지하고 있다. 

2024년 11월, 이스라엘 대통령 이사악 헤르조그가 바쿠를 방문할 당시, 튀르키예는 그의 전용기가 자국 영공을 통과하는 것을 금지했다. 그러나 이 조치는 이스라엘을 직접 겨냥했다기보다는 아제르바이잔산(産)석유가 튀르키예 남부 제이한 항을 통해 이스라엘로 운송되는 데 반대하는 튀르키예 내 활동가들의 분노를 달래기 위한 제스처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튀르키예와 이스라엘 간에는 아직 실현되지 않은 에너지 인프라 프로젝트들이 남아 있다. 그중 하나는, 이스라엘의 해상 가스전 ‘레비아탄’과 튀르키예의 ‘제이한’을 연결하는 가스관 건설 계획으로, 러시아에 대한 에너지 의존도를 줄이려는 유럽의 압박 속에서 추진되었다. 가자지구 전쟁 발발로 이 프로젝트에 대한 논의는 중단되었지만, 튀르키예는 휴전이 성사될 경우, 논의 재개를 배제하지 않고 있다.

 

나토 회원국 튀르키예, 미국 동맹국 이스라엘과 충돌할까?

알아사드 정권이 붕괴된 가운데, 양국 사이는 이해관계의 일치에도 불구하고 긴장은 점점 고조되고 있다. “시리아는 곧 튀르키예와 이스라엘 사이의 새로운 갈등 요인이 될 것이다”라고 바르키 교수는 전망했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새로 들어설 시리아 정권에 대한 튀르키예의 영향력을 경계하고 있으며, 약하고 분권화된 시리아가 자국의 전략적 이익에 부합한다고 보고 있다. 이스라엘은 이미 1973년 욤키푸르 전쟁 이후 설정된 완충지대를 넘어 골란 고원 일부를 점령하고 있으며, 시리아 내 드루즈(Druze) 공동체 ‘방어’를 명분으로 점령 정당화를 시도하고 있다. 드루즈는 시리아, 레바논, 이스라엘 등에 분포한 이슬람 소수 종파로, 이스라엘 내에서는 군 복무 의무가 있는 유일한 비유대계 공동체다. 한편, 이스라엘 외무장관은 쿠르드족을 “이스라엘의 자연스러운 동맹”으로 규정했다.(2024년 11월 10일 <이스라엘 타임스> 보도) 시리아 북동부의 쿠르드 자치구 ‘로자바’가 독립할 경우, 이 지역이 아나톨리아·메소포타미아·레반트가 교차하는 전략적 요충지에서 이스라엘의 ‘신뢰할 수 있는 거점’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그는 최근 이스라엘이 쿠르드족과의 외교적 접근을 본격화한 배경 역시 이와 같은 전략적 구상에 있다고 분석했다. 이러한 흐름은 2025년 2월, 압둘라 오잘란이 PKK의 무장 해제를 촉구한 선언 이후 본격화되었다.

“레바논 다음으로 이스라엘이 눈독을 들일 곳은 바로 우리의 조국일 것이다.” 지난 10월 1일 튀르키예 국회 개회 연설에서 에르도안 대통령이 이렇게 경고했다. 여러 관측통, 특히 이스라엘 측 전문가들은 이스라엘이 현재 튀르키예와 추가적인 전선을 열 여유가 없다고 판단하고 있다. 이는 무엇보다도 이스라엘 총리의 관심이 현재 이란과의 대립에 쏠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리아 내 협상에 참여 중인 한 인사는 튀르키예와의 무력 충돌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본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네타냐후의 눈에는 이제 튀르키예가 가장 가까운 적으로 보인다. 만약 앙카라가 시리아 북부에 비행금지구역을 요구하거나 공중 통제권을 확보하게 된다면, 이는 네타냐후 총리에게 ‘전쟁 명분’이 될 것이다. 네타냐후는 이스라엘이 시리아나 이란에 대해 언제든 공습을 감행할 수 있는 완전한 영공 자유가 지속되기를 바라고 있다.”

하나는 미국의 동맹국, 다른 하나는 나토 회원국인 이 지역의 두 군사 강국 사이에서 무력 충돌이 발생한다면? 그 순간, “팔레스타인 문제만 없다면 이스라엘과의 관계는 순조로울 것”이라는 튀르키예 외교가들의 오래된 격언은 완전히 의미를 잃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