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군대의 승리를 거부하는 우크라이나 시민들의 기억투쟁
2차대전 전승절을 둘러싼 러-우의 대립
2023년, 키이우는 5월 8일을 히틀러 독일의 패배를 기념하는 날로 채택했다. 이는 러시아가 5월 9일에 기념하는 전승절과의 단절을 상징하는 조치였다. 그러나 우크라이나는 오히려 이 역사적 유산의 상징적 가치를 적국(敵國) 러시아에 내어주는 듯하다. 소련군(붉은 군대)의 일원으로 나치즘과 맞서 싸운 우크라이나인들의 기억이 지워지고, 그들이 승리에 끼친 결정적 기여마저 의도적으로 가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5월 9일 전승절, 키이우는 5월 8일 히틀러 패배 기념일
1941년 독일군의 침공, 1943~1944년 소련군의 반격과 탈환. 그 두 차례의 대규모 작전에서 우크라이나는 독일과 소련의 수백만 병력이 오가며 치열한 전장(戰場)이 되었다. 그만큼 우크라이나는 제2차 세계대전의 핵심 격전지였다. 이 기간에 800만에서 1,000만 명의 우크라이나인이 목숨을 잃었다. 그중 300만~400만 명은 군인이었고, 500만 명 이상은 민간인이었다. 이들 가운데 150만 명은 유대인이었는데, 이는 홀로코스트 전체 희생자의 4분의 1에 해당한다.
일부 우크라이나인은 나치에 협력했다. 이들은 주로 1939년 몰로토프-리벤트로프 협정(독일과 소련이 체결한 불가침 조약으로, 비밀 의정서를 통해 폴란드, 발트 3국, 서부 우크라이나 등 동유럽을 양국이 분할 점령하기로 합의—역주)에 따라 소련에 병합되었다가, 1941년 독일군이 침공했던 서부 우크라이나 출신이었다. 협력자들은 독일 점령 아래 경찰과 행정기관에 복무하며 집단학살을 직접 도왔다. 지역 주민 일부도 이에 가담했다.(1) 1941년 9월 29일부터 30일까지 키이우 외곽 바비 야르에서는 독일 경찰과 우크라이나 보조 인력에 의해 3만3,771명의 유대인이 총살됐다. 1944년에는 약 1만 3,000명의 자원병이 제14 SS 사단을 편성했다.
한편, 스테판 반데라가 이끄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그룹은 독일의 보호 아래 국가 독립을 선언하려 했으나, 곧 독자적 노선으로 선회해 1942년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무장 게릴라 조직(UPA)’을 결성했다. 수만 명의 전투원으로 구성된 UPA는 볼히니아 지역에서 폴란드인에 대한 민족 청소를 자행했으며, 이후 1950년대 중반까지 소련군에 맞서 게릴라전을 지속했다.
반면 대부분의 우크라이나인은 히틀러에 맞선 연합국 측에서 싸웠다. 1941년부터 600만 명이 붉은 군대(소련군)에 입대했으며, 1939년 9월 나치 독일군과 맞서 싸운 폴란드군에도 12만 명의 우크라이나계 징집병이 포함됐다. 이 밖에도 미국, 캐나다, 영국군에서 복무한 우크라이나 출신 병사들이 있었고, 프랑스 레지스탕스에도 상당수가 참여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실리 포리크다. 그는 21세의 나이에 붉은 군대 소위로 참전했지만, 1941년 독일군에게 포로로 붙잡혔다. 프랑스 북부 보몽-앙-아르투아(오늘날의 에냉 보몽)에 있는 강제노동수용소에 수감되었으나, 1943년 탈출에 성공했다. 이후 프랑스 레지스탕스 조직인 프랑-티뢰르 및 파르티잔(FTP)에 합류해 ‘소비에트 대대’라는 저격병 부대를 창설하고 독일군에 큰 타격을 입혔다. 그러나 그는 1944년 아라스에서 독일군에 의해 총살됐다.(2) 오늘날 그의 이러한 활약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거나 왜곡되는 경우가 많다.
‘라시즘’으로 러시아식 파시즘을 비판한 우크라이나
많은 서방 언론인과 지도자들처럼, 우크라이나 젤렌스키 대통령 역시 자신의 나라를 1938년 뮌헨 협정 이후 유럽 열강이 독일 나치에 넘겨준 체코슬로바키아의 운명에 자주 비유한다. 2025년 2월, 뮌헨에서 열린 안보 회의에서도 그는 이곳이 러시아와의 평화 협정을 체결할 장소로는 부적절하다고 말하며, 평화가 아니라 무기를 달라고 요구했다.
크렘린 역시 이 외교적 사건(뮌헨 협정)을 인용하며, 과거와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서방 집단’이 러시아의 적을 지지하고 있다고 주장한다.(3) 서방 열강이 1938년 뮌헨 협정을 통해 동유럽에서 히틀러의 팽창을 방조했듯이, 지금은 ‘나치 우크라이나’를 지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에 따라 러시아의 ‘특별군사작전’은 1941년부터 1945년까지 이어진 ‘대조국전쟁’(소련과 러시아가 제2차 세계대전을 부르는 명칭)의 연장선에 위치한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2022년 5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전승절 기념식 연설에서 러시아
군인들에게 “여러분은 아버지와 할아버지 세대가 싸운 바로 그 대의를 위해 싸우고 있다”라고 선언했다. 다시 말해, 조국을 지키고 나치즘을 물리친다는 것이다. 2025년 2월, 러시아 당국은 모스크바의 ‘대독일전승박물관’ 내부에 ‘특별군사작전 영웅 추모의 벽’을 설치했다.(4)
우크라이나에서는 러시아의 국가 이데올로기를 ‘라시즘(rachisme)’이라 부른다. 이 용어는 파시즘이라는 개념에 영어식 ‘Russia’ 발음을 결합한 말이다. 우크라이나 역사학자 라리사 야쿠보바는 ‘라시즘’이 러시아 제국주의, 소련식 공산주의, 독일 나치즘의 요소를 결합한 개념이라고 주장한다.(5) 그녀에 따르면, 러시아 정권은 단순히 우크라이나의 영토를 침범하고 전쟁범죄를 저지르는 수준을 넘어 집단학살적 전체주의 체제로 나아가고 있다고 한다.
2022년 2월 러시아의 침공 이후, 우크라이나 당국은 처음에는 제2차 세계대전의 기억을 애국적 목적으로 활용했다. 같은 해 5월 9일, 젤렌스키 대통령은 “적들은 우리가 5월 9일을 기념하지 않고, 나치즘에 대한 승리를 외면하기를 바랐다”라고 엄숙히 선언하면서, “그러나 우리는 그 누구에게도 이 승리를 빼앗기지 않을 것이고, 어느 누구도 자기 것인 양 가로채지 못하도록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러시아군의 침공으로 큰 피해를 입은 10개 지역에 소련 시절의 명칭인 ‘영웅 도시’ 칭호를 부여했으며, 민간인 학살이 벌어진 부차 역시 그중 하나였다.
“스탈린의 총알받이‘로 비난받은
붉은 군대의 우크라이나 병사들
그러나 또 다른 시각도 점점 힘을 얻고 있다. 오늘날의 러시아군을 과거의 붉은 군대와 동일시하면서, 붉은 군대 역시 점령군이었다고 보는 관점이다. 이미 2014년, 작가 안드리이 코코튜하는 독일 패전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한 점령이 다른 점령으로 대체되었을 뿐”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6) 그보다 8년 전, 미국 시민이자 우크라이나 세계회의(우크라이나 정체성과 디아스포라의 이익을 옹호하는 조직) 의장이었던 아스콜드 로진스키는 붉은 군대에 복무한 우크라이나 병사들을 “스탈린의 총알받이”로 규정한 반면 “진정한 우크라이나의 영웅들은 UPA에서 싸웠다”라고 주장했다.(7) 2025년 1월, 키이우의 명문 타라스 셰브첸코 국립대학교는 그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했다.(8)
2023년 우크라이나 의회는 ‘지명 탈식민화법’을 제정하며, 나치 점령군에 맞서 싸운 역사를 기념하던 지명들에 부여된 보호 지위를 없앴다.(우크라이나는 나치 점령군에 맞선 투쟁조차도 소련식 ‘해방군 서사’로 포장된 역사의식을 비판하며, 이러한 기념 지명과 상징물들을 러시아 제국주의의 연장선으로 보고 청산하고 있다. 이는 러시아가 독점해온 ‘반나치 영웅서사’에서 벗어나려는 기억 투쟁의 일환이다—역주) 2024년 12월, 키이우 중심부의 ‘영광의 공원’에서는, 파르티잔(항일 무장투쟁) 지도자 시디르 코프파크와 올렉시 페도로프, 우크라이나 최연소 육군대장이었던 이반 체르냐홉스키, 전차부대 출신으로 원수까지 오른 파블로 리발코 등의 흉상이 철거됐다. 그러나 이 조형물들은 소련 시절이 아닌 1991년 우크라이나 독립 이후 세워진 것들이었다.(9)
2024년 1월 말, 우크라이나 서부 리비우 지역 당국은 소련군 병사들에게 헌정된 기념비 312기를 철거한 데 대한 자부심을 드러냈다. 무덤의 경우, 유해는 유족들의 동의 없이 다른 공동묘지로 이장되었으나, 항상 사제가 입회한 가운데 진행됐다. 하지만 붉은 군대 소속 많은 병사들은 신앙을 갖지 않았고, 종교적 장례를 원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무자비하게 지워진 이름들 가운데는 안토니나 베레시차기나도 포함됐다.
그녀는 21세의 무선통신사로 적진 후방에 낙하산 투입됐다가 체포되어 고문당한 끝에, 1944년 이바노프란키우스크 지역 사자우카에서 처형됐다. 오늘날 지역 당국은 그녀를 ‘소련 스파이’로 규정하고 있다. 이외에도 같은 지역 칼루슈에서 활동하다 희생된 간호사 나제즈다 구세바와 나제즈다 클류예바, 그리고 리비우 지역 스히드니차와 포드부이 마을에서 철거된 소련군 병사 93명도 그 희생자 명단에 포함됐다.(10)
“당신들은 파시즘에 맞서 싸운 이들의 기억을 파괴”
이른바 ‘기억 운동가’들은 종종 기념비 파괴에 직접 개입한다. 이들은 지방 당국에 압력을 가하고, 때로는 ‘역사적 진실을 바로 잡는다’라는 명목으로 무단 철거와 훼손 행위를 감행하기도 한다. 바딤 포즈드냐코프가 대표적인 사례다. 그는 2017년 시작된 ‘우크라이나 탈식민화’ 프로젝트의 대변인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과거에는 민족주의 청년조직 ‘소킬’의 지역 대표를 지냈고, 극우 정당 ‘오른쪽 섹터(프라비 세크토르)’에서도 활동했다.
우크라이나 제2의 도시인 하르키우에서는 러시아의 미사일과 드론 공격이 매일같이 이어지는 가운데, 2025년 2월 제2차 세계대전 참전 용사들을 기리는 기념판 10여 개가 철거됐다. 이 작업의 책임을 자처한 것은 발크누트(Valknut)라는 단체였다. 북유럽 이교도 상징에서 이름을 따온 이 그룹은 극우 세력 사이에서 인기를 끌고 있으며, 우크라이나 군사정보국 소속 특수부대의 일원이기도 하다.
그러나 현지 경찰은 이에 대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발크누트는 철거 장면을 촬영한 사진을 텔레그램을 통해 유포했는데, 그 중에는 1942년 게슈타포에게 처형된 25세 교수 갈리나 니키티나의 흉상을 파괴하는 모습도 포함돼 있었다. 이 외에도 라파일 밀네르 중령(유대계 하르키우인, 1941년 7월 군사학교를 졸업하고 참전)과, 폴타바 출신의 전투기 조종사 아나톨리 네페도프를 기리는 기념판도 파괴됐다.
주민들이 기념물 철거에 반대하는 경우도 있다. 리비우 지역 스미키우 마을의 시장은 한 동상 철거에 동의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비탈리 레비츠키 시장은 철거를 시도하던 활동가들에게 “당신들은 사람들의 기억을, 그것도 파시즘에 맞서 싸우다 죽은 이들의 기억을 파괴하러 온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철거를 막기 위해 자신의 할아버지 이름이 새겨진 기념비 위로 올라가 몸으로 막기도 했다.(11) 그러나 소용없었다. 그는 곧 시장직에서 해임됐고, 해당 기념물 역시 사라지고 말았다. 모스크바는 우크라이나 국민에게서 나치에 맞서 싸운 기억을 빼앗고, 그 영광을 모두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고자 한다.
한편, 우크라이나 ‘탈식민화 운동가’들의 활동은 역설적으로 러시아가 히틀러에 대한 승리를 독점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 이들은 붉은 군대에서 싸운 우크라이나인들의 기여를 지우고 있기 때문이다. 반데라와 UPA(우크라이나 반란군)를 미화하는 민족주의적 서사가 부각되면서, 나치에 맞서 싸운 연합군의 일원으로서 우크라이나가 거둔 역사적 기여는 국제사회에서 훨씬 더 설득력 있게 전달될 수 있는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점점 가려지고 있다.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필요한 것은 러시아의 전승절 행사에 맞서는 군사 시위가 아니라, 나치즘의 희생자들과 이에 맞서 싸운 모든 이들의 기억을 기리는 성찰적 행위가 되어야 할 것이다.
에릭 오노블 | 제네바대학교 역사학자
유리 라티쉬 | 역사학 박사, 브라질 론드리나 주립대학교 초빙교수
(1) Marie Moutier-Bitan, 『반유대주의 협정: 1941년 6~7월 동부 갈리치아에서 시작된 쇼아』, Passés/Composés, 파리, 2023.
(2) Christian Lescureux, Gilles Pichavant, 「바실리 포리크」, https://maitron.fr
(3) 알렉산드르 볼가레프 러시아연방 유럽안보협력기구(OSCE) 상임대표대행 연설, OSCE 상임이사회, 2024년 9월 26일, https://mid.ru
(4) “모스크바 전승기념관 벽에 ‘특별군사작전’ 영웅들 이름 새겨져”(러시아어), 모스크바 정부 정보센터, 2025년 2월 25일, https://icmos.ru
(5) 「라시즘(rachisme)이란 무엇인가?」(우크라이나어), 안톤 드로보비치 우크라이나 국립기억연구소 소장 인터뷰, 우크라이나 국립기억연구소 유튜브 채널, 2022년 8월 17일, www.youtube.com
(6) 「안드리이 코코튜하: ‘쓰레기통에 버릴지, 감옥에 보낼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우크라이나어), <BBC 우크라이나>, 2014년 10월 28일.
(7) <뉴스레터>(우크라이나어), 우크라이나 세계회의(UWC), 제7권 2호, 토론토, 2006년 겨울, www.ukrainianworldcongress.org
(8) “타라스 셰브첸코 국립대학 명예박사: 아스콜드 로진스키, 훈장과 학위 수여”(우크라이나어), 키이우 타라스 셰브첸코 국립대학교, 2005년 1월 27일, https://knu.ua
(9) Tamila Baranivska, 「코프파크 없는 공원: 키이우 영광공원에서 소련 인물 흉상 철거」 (우크라이나어), 2024년 12월 4일, https://suspilne.media
(10) Natalia Dymnich, Oksana Vasilik, 「소련 정보요원 베레시차기나 유해, 이바노프란키우스크 지역 사자우카 마을에서 발굴」(우크라이나어), 2024년 9월 20일, https://suspilne.media ; 「칼루슈 소련군 간호사 묘지 현장에서 유해 미발견」(우크라이나어), 2024년 11월 4일, https://zaxid.net ; 「스히드니차 소련군 집단묘지 93구 유해 이장」(우크라이나어), 2024년 11월 1일, https://drogmedia.net.ua
(11) 「소칼 지역 탈공산화: 소련 기념비 철거 저지 위해 기념비에 올라선 마을장」(우크라이나어), 2024년 12월 12일, www.lmn.in.u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