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강대국의 ‘투키디데스 함정’을 거부하는 브릭스
‘다자주의’를 주도하는 브라질
브라질리아는 갈수록 혼란스러워지는 국제 질서에 맞서 다양한 외교 전선에 나서고 있다. 이 글은 미국이 무역 전쟁을 시작하기 이전에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 대통령의 외교 고문 셀수 아모린이 작성한 것으로, 브라질 정부의 외교 노선과 새로운 세계 질서 구축을 위한 비전이 담겨 있다.
2025년 2월 14일, 뮌헨 안보회의에서 미국의 제임스 데이비드 밴스 부통령이 연설을 하자, 청중 사이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주도로 구축된 ‘다자주의 질서’를 이제 미국 스스로 흔들고 있다. 헨리 키신저는 이미 경고한 바 있다. 미국은 “양면성을 지닌 초강대국”이라는 것이다. (1) 미국 외교는 세계 질서를 바로잡겠다는 메시아적 이상주의와 자국 이익에 집중하는 고립주의적 유혹 사이에서 늘 갈등해 왔다. 그러나 2024년 도널드 트럼프의 재선 이후, 서방 동맹 내부에서 이처럼 분명한 형태로 전략적 단절이 표현된 적은 없었다. 이는 분명한 역사적 전환점이며, 우리는 이 상황을 신중하고, 냉정하게 바라보아야 한다.
‘다자주의’를 스스로 파괴한 미국
다자주의는 여러 한계에도 불구하고 인류 문명의 진보를 이끌어왔다. 탈식민화와 냉전의 여파로 분쟁이 지속되었지만, 핵확산 방지, 인권, 금융, 무역, 문화, 보건, 환경 등 여러 분야에서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제도적 기반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브라질은 이러한 체제에 대한 신뢰의 표시로, 1990년 자발적으로 핵무기 개발을 포기했다. 평화에 대한 확고한 신념은 남미 지역 통합의 핵심 가치였으며, 오늘날까지도 브라질 외교 정책의 중요한 축을 이룬다. 같은 맥락에서, 브라질은 1986년 ‘남대서양 평화 및 협력지대’(ZPCAS) 창설을 주도했다. 이는 핵무기 및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지 않은 남미와 아프리카의 24개국이 참여하는 지역 협력체다.
다자주의를 중심으로 한 제도적 진전과 국제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유엔의 정당성과 실효성은 심각하게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여전히 1945년 당시의 세계 권력 구조를 반영한 구성을 유지하고 있으며, 일부 상임이사국은 국제법을 정치적으로 악용해 일방적인 군사 개입을 감행해 왔다. 최근 등장한 ‘규칙 기반 국제 질서’(RBO, rules-based order)는 국제법 대신 변화무쌍한 규칙들의 집합을 앞세워, 강대국 중심의 일방주의에 법적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수단으로 작동하고 있다.(2)
트럼프 행정부는 이제 다자주의나 국제법에 대한 최소한의 형식적 존중조차 표명하지 않는다. 2003년 이라크 침공 당시,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은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유엔 안보리의 승인을 얻기 위해 적어도 절차적 정당성을 모색하려 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시도조차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브라질을 비롯한 대부분의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은 수십 년간 국제 질서를 지배해 온 ‘이중잣대’를 강하게 비판하며, 그 구조적 개혁을 촉구하고 있다. 2024년은 이러한 이중적 기준이 초래한 비극을 여실히 드러낸 해였다. 국제사법재판소(ICJ)는 팔레스타인에서 집단학살의 위험이 존재함을 인정했지만, 전쟁과 학살, 그리고 그에 대한 책임이 부과되지 않는 현실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우크라이나 사태와 관련하여, 브라질은 2022년 러시아의 침공을 즉각 규탄했으며, 이는 유엔 헌장과 국제법에 대한 자국의 일관된 존중 입장을 반영한 조치였다. 그러나 우리는 이 전쟁이 단순한 침략을 넘어, 세계 질서와 세력 균형을 둘러싼 지정학적 경쟁의 일부임을 인식하고 있다. 일부 서방 지도자들은 이 전쟁을 러시아에 전략적 패배를 안길 기회로 간주했고, 그 결과, 이 충돌은 단순히 모스크바와 키이우 간의 분쟁을 넘어, ‘러시아와 서방 세계 간의 대결’로 성격이 전환되었다. 이 표현은 영국 역사학자 아널드 토인비의 말을 인용한 것이다.(3)
올해 2월 유엔총회 결의안, 국제 정세에 중대한 변화 나타나
이러한 맥락에서, 이 전쟁은 2022년 2월부터 이미 국제 질서의 향방을 군사동맹 중심 체제로 이끌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우리는 현실적이고 수용 가능한 외교적 해법이 마련되지 않을 경우, 이 갈등이 군사적 긴장의 악순환을 심화시키고, 마침내 핵보유국들이 직접 개입하는 전면전 시나리오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깊이 우려해 왔다.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 대통령(일명 ‘룰라’)은 평화를 위한 외교적 노력에 나섰다. 그는 분쟁 당사국 간의 중재를 맡을 국가 그룹 구성을 제안하고, 자신이 직접 임명한 특사단을 모스크바, 키이우, 그리고 여러 서방 국가의 수도에 파견했다. 브라질은 무기 지원 요청도 거부하며, 군사적 대응이 아닌 외교적 해결 방식을 일관되게 고수해 왔다. 필자 역시 룰라 대통령의 외교 고문 자격으로 2023년 6월부터 2024년 6월 사이에 개최된 여러 차례 외교 고문 회의에 참석했다.
이 회의에는 각국의 국가 원수 및 정부 수반의 외교 고문들이 참여했다. 이는 서방 국가들, 글로벌 사우스, 그리고 우크라이나가 외교적 해법이라는 공통의 목표 아래 처음으로 함께한 유일한 시도였다. 코펜하겐, 제다, 몰타, 다보스에서의 논의는 2024년 6월 15~16일 스위스에서 열린 우크라이나 평화 회의로 이어졌다. 그러나 러시아의 배제와 우크라이나 측이 제시한 일방적인 평화안으로 인해, 실질적인 진전은 이뤄지지 못했다.
한편, 룰라 대통령은 2023년 4월 중국 국빈 방문 중, 시진핑 국가주석과 함께 우크라이나 사태에 대한 공동 입장을 발표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천명했다. “우크라이나 위기의 유일한 실행 가능한 해법은 대화와 협상이며, 사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모든 노력이 장려되고 지지되어야 한다.” 이 같은 정신에 따라, 나는 2024년 5월 왕이 중국 외교부장(공산당 정치국 위원)과 함께 우크라이나 위기의 정치적 해결을 위한 중·브라질 공동 입장문을 체결했다. 이 입장문은 즉각적인 휴전을 촉구하고, 대화와 협상 절차를 위한 기반을 제시했으며, 나아가 모든 당사국이 핵무기의 사용을 배제할 것을 강력히 권고했다.(4)
2024년 9월 유엔 총회를 계기로, 브라질과 중국은 공동 성명에 기반해 ‘평화의 친구들’ 그룹을 창설했다. 이 그룹은 유엔 본부에 설치되었으며, 글로벌 사우스에 속한 13개국이 참여하고 있다.(5) 그 목적은 우크라이나 전쟁의 추이를 주시하고, 다자주의 원칙에 따라 외교적 해결을 독려하고 지원하는 것이다.
전쟁 발발 3년이 지난 2025년 2월 24일, 우크라이나가 유엔 총회에 상정한 결의안에 대한 표결은 국제 정세의 중대한 변화를 보여주는 이정표가 되었다. 93개국이 찬성했으며, 18개국이 반대, 65개국이 기권했다. 2022년 이후 총 48개국이 지지를 철회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미국과 러시아가 동일하게 반대 입장을 보였으며, 유럽은 여전히 우크라이나 지지 입장을 유지했다. 반면, 브라질, 중국, 사우디아라비아, 인도,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글로벌 사우스의 주요 국가들은 기권을 선택했다.
워싱턴이, 비록 수사적 차원일지라도, 모스크바에 전략적 패배를 안기려는 목표를 포기한 것은 결코 과소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러시아가 국제법을 지키고, 국제사회도 러시아를 법에 따라 공정하게 대우할 때, 러시아는 여전히 유럽과 세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이러한 인식은 주요 강대국들이 전략적 현안에서 다시 주도적 역할을 회복하는 데 필수적인 전제 조건이다. 더 나아가, 핵 균형의 유지는 더 이상 미국과 러시아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가 공동으로 책임져야 할 과제다. 지속가능한 평화는 군비 지출을 줄이고, 국제 협력을 통해 불평등과 기아를 해소하며, 지속 가능한 개발을 촉진하는 길을 열어줄 것이다. 이는 곧 인류 공동의 복지와 번영을 위한 협력의 기반이 될 수 있다.
수많은 도전에 직면한 오늘날, 유럽은 반드시 다양한 책무를 감당해야 한다. 세계 안정의 핵심 축으로서, 전략적 자율성을 강화하려는 유럽의 의지는 정당할 뿐 아니라 필수적이다. 수세기에 걸친 내부 갈등을 극복해 온 유럽은 러시아를 포함한 주요 강대국들과 신뢰를 바탕으로 새로운 관계를 구축할 충분한 자격이 있다. 이러한 지정학적 환경 속에서 브라질은 유럽과의 전략적 협력 관계를 더욱 강화하고자 한다. 우리는 분쟁의 평화적 해결, 기후 변화 대응, 무역 규범 수호 등 다자주의가 이뤄낸 주요 성과들을 지키기 위해 힘을 모아야 한다.
새로운 다자주의 질서를 구축하는 방향으로
우크라이나 전쟁의 장기화가 전면적인 대규모 충돌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면, 중동 지역은 그보다 더 심각한 대규모 격변을 초래할 수 있는 모든 요소를 이미 갖추고 있다. 이 지역의 안정 열쇠는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정당한 미래를 보장하는 데 있으며, 그 출발점은 주권이 보장된 독립적이고 실현가능한 팔레스타인 국가를 인정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이스라엘 국가와 그 국민의 평화를 보장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한편, 미국과 중국 간의 정치·경제적 경쟁도 초강대국 간 충돌 위험을 높이고 있다. 우리는 정치학자 그레이엄 앨리슨이 설명한 ‘투키디데스의 함정’(“아테네의 부상이 스파르타를 두렵게 했고, 그 두려움이 전쟁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투키디데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6) 기존 패권국이 신흥 강국의 부상을 위협으로 인식하여 결국 전쟁을 벌이게 된다는 역사적 패턴—역주)에서 벗어나야 할 뿐만 아니라, 군사강국들 간의 이해관계를 기반으로 한 세계 ‘디렉토리 체제’(directoire mondial, 특정 국가들이 주도적으로 세계 질서를 설계하고 유지하는 과두적 국제 체제를 가리키며, 다자주의나 포괄적 국제 협력과는 배치되는 개념—역주)의 형성이라는 또 다른 시나리오 또한 경계해야 한다.
이러한 쟁점들은 21세기 지도자들에게 오늘날 세계가 다극적이라는 현실을 인정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보수주의 전통에 속한 인물인 미국의 신임 국무장관 마코 루비오조차 최근 이러한 인식을 공개적으로 드러냈다. “세계가 단지 하나의 패권국에 의해 지배되는 것은 더 이상 정상적인 일이 아니다. (…) 우리는 여러 강대국들이 각기 다른 지역에 자리한 다극적 세계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7)
브릭스(BRICS)—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남아프리카공화국—는 오늘날 이러한 신흥 권역 중심의 질서 재편을 가장 뚜렷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이들 국가는 경제·사회·정치 분야에서의 협력을 강화함으로써, 현실 세계의 다원성을 반영한 새로운 다자주의 질서의 구축에 기여하고자 한다.
G20의 창설은 2007~2008년 국제 금융 위기 당시, 보다 포괄적이고 대표성 있는 국가들이 공동 대응할 수 있는 틀을 마련했다. 당시 G7은 이 위기를 단독으로 감당하지 못했고, 브릭스(BRICS) 국가들은 G20 체제를 강화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럼에도, G7은 여전히 주요 글로벌 의제에서 독점적 권한을 되찾으려는 유혹에 빠져 있다. 예컨대, 모스크바와 베이징 없이 기후 문제를 전 지구적 차원에서 논의할 수 있을까? 실제로 2023년과 2024년, 중국과 러시아는 G7 회의에 초청되지 않았다.
2024년 브라질이 G20 의장국을 맡는 동안, G20은 사상 처음으로 유엔 본부에서 외교장관 회의를 개최했다. 이 회의에서는 세계 거버넌스 개혁을 위한 행동 촉구문이 채택되었으며, 그 안에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개혁에 대한 명시적 언급도 포함되어 있었다.(8) 우리 세대가 직면한 가장 큰 과제는, 새로운 글로벌 과제들에 대응할 수 있는 국제 제도 체계를 구축하는 일이다. 모두를 위한 평화와 공정한 발전은, 다자주의를 더욱 정당하고 효과적인 체계로 강화하려는 우리의 집단적 역량에 달려 있다.
글·셀수 아모린 Celso Amorim
룰라 브라질 대통령 외교 고문으로, 과거 외교부 장관과 국방부 장관을 역임했다.
(1) 헨리 키신저, 『세계 질서: 세계적 혼돈을 피하려면』, 파야르, 파리, 2023년 (초판: 2016년)
(2) 안느-세실 로베르, 「‘규칙 기반 질서’를 넘어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24년 11월
(3) 아널드 조지프 토인비, 「러시아와 서방」, <Harper’s Magazine>, 뉴욕, 1953년 3월.
(4) “브라질 연방공화국과 중국 인민공화국 간 글로벌 전략적 동반자 관계 심화에 관한 공동 성명” 및 “우크라이나 위기에 대한 정치적 해결을 위한 브라질-중국 간 공동 입장”, 브라질 외교부 홈페이지, 각각 2023년 4월 14일 및 2024년 5월 23일자, www.gov.br.
(5) 남반구 평화 우호 그룹(Amis de la paix) 참여국: 남아프리카공화국, 알제리, 볼리비아, 브라질, 중국, 콜롬비아, 이집트, 인도네시아, 카자흐스탄, 케냐, 멕시코, 튀르키예, 잠비아. 스위스, 프랑스, 헝가리, 슬로바키아는 첫 회의에 옵서버로 참석.
(6) 그레이엄 앨리슨, 『전쟁으로 향하는 길: 미국과 중국, 투키디데스의 함정』, Odile Jacob, 파리, 2019년.
(7) “국무장관 마코 루비오와 메긴 켈리와의 인터뷰”, 미 국무부, 2025년 1월 30일, state.gov.
(8) “세계 거버넌스 개혁을 위한 G20 행동 촉구문(Call to Action)”, 브라질 G20 의장국 공식 사이트, 2024년 9월 25일자, g20.gov.b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