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격 없는 사상은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

기독교 기원에서 신자유주의까지 역사의 원동력은 사상

2025-05-30     페리 앤더슨 | 역사학자

어떤 이들은 현재의 반동적 물결을 제임스 데이비드 밴스, 피터 틸, 스티브 배넌 같은 이념가들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본다. 또 다른 이들은 세계화가 서구 노동자 계층에 끼친 영향을 지목한다. 사상이 사회적 세력과 맞닿아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이 필요한가? 기독교의 기원부터 신자유주의에 이르기까지, 역사학자 페리 앤더슨은 이념과 이해관계가 얽힌 거대한 흐름을 분석한다.

역사상 중대한 전환의 계기가 된 정치적 격변 속에서 사상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 사상은 그저 훨씬 더 깊은 물질적·사회적 과정들 옆에 덧붙여진 지적인 ‘부차적 현상’(epiphenomenon)일 뿐인가, 아니면 독자적인 동원력을 지닌 하나의 힘인가?

예상과 달리,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좌파와 우파를 뚜렷하게 가르는 경계를 보여주지 않는다. 도덕적 가치와 위대한 이상이 역사 속에서 초월적인 힘을 발휘해왔음을 찬미하는 보수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 가운데는, 사회 변화를 경제적 모순에서 찾으려는 급진주의자들을 천박한 유물론자로 폄하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우파의 이러한 관념론을 대표하는 인물로는 베네데토 크로체, 칼 포퍼, 프리드리히 마이네케가 있다. 

 

우파가 선호했던 ‘합리적 선택 이론’

마이네케는 “사상은 살아 있는 사람들에 의해 지탱되고 변화하며, 역사적 삶의 직물을 형성한다”고 말하며, 역사에서 사상이 실질적 동력이자 구조를 형성하는 핵심 요소임을 강조했다. 반면, 우파 내 또 다른 사상가들은 인위적인 교리나 이념에 대한 집착을 합리주의적 환상으로 보고, 그에 맞서 생물학적 본능이나 관습·전통과 같은, 더 오래 지속되는 요소들이 인간 사회의 본질이라고 주장한다. 

프리드리히 니체, 루이스 네이머, 게리 베커는 각각의 방식으로 물질적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인간 행동을 설명하는 이론가들이며, 윤리적·정치적 가치에 기반한 주장들을 기꺼이 폄하하곤 했다. 오늘날까지도 영미권 사회과학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합리적 선택 이론’은 바로 이처럼 이념이나 사상보다 이해관계와 본능을 우선시하는 흐름에서 출발한 대표적 현대 이론이다.

그러나 좌파 내부에서도, 우파에서 보였던 것과 유사한 이분법이 존재한다. 우선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도 사상에 대한 태도는 극단적으로 갈린다. 예컨대, 페르낭 브로델은 사상에 철저히 무관심했지만, 리처드 헨리 토니는 사상을 향한 거의 신앙에 가까운 헌신을 드러냈다. 이러한 차이는 영국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로자 룩셈부르크, “태초에 행동이 있었다”

에드워드 톰슨은 인간의 행동이나 사회변동의 원인을 경제 구조로만 이해하는 ‘경제적 환원주의’의 관점을 평생에 걸쳐 비판했으나, 에릭 홉스봄은 20세기 역사를 서술하면서 사상에 대해 별도의 비중을 두지 않았다. 정치 지도자들 사이에서는 그 간극이 더 뚜렷하게 드러난다.

“목표는 아무것도 아니다. 운동이 전부다.” 이것은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이 선언한 말이다. 이보다 더 노골적인 사상(또는 원칙)에 대한 평가절하가 있을 수 있을까? 그는 이 말을 하며 자신이 카를 마르크스의 사상에 충실하다고 믿었지만, 몇 년 뒤 레닌은 정반대의 함의를 담은 또 다른 유명한 격언을 제시했다. “혁명 이론 없이는 혁명 운동도 없다.”

이 논의는 단순히 개혁주의자들과 혁명주의자들로만 나뉘지 않는다. 혁명주의 진영 내부에서도 의견이 갈리기 때문이다. 독일 마르크스주의 사상가 로자 룩셈부르크는 역사적 대변혁은 사전에 구상된 어떤 사상에서 비롯되기보다는, 대중의 자발적인 행동 속에서 움튼다고 보았다. 그녀는 이를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요약했는데, 이 표현은 아나키스트들이 오래전부터 공감해온 구호이기도 하다. “태초에 행동이 있었다.” 

반면, 이탈리아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안토니오 그람시는 노동자 운동이 적대 세력을 포함한 사회 전체를 상대로 이데올로기적 우위를 점하지 못한다면, 즉 그가 말하는 ‘문화적·정치적 헤게모니’를 확보하지 못한다면, 지속적인 승리는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마지막으로, 요제프 스탈린과 마오쩌둥은 사회주의라는 공동의 목표를 공유하면서도, 이를 실현하는 방식에서는 견해를 달리했으며, 이는 사상의 역할을 보는 서로 다른 입장 차를 드러냈다. 스탈린은 사회주의 실현의 핵심을 물질적 생산력에서 찾았고, 마오쩌둥은 정신적·문화적 기반에서 찾았다.

 

T.S.엘리엇의 ‘문화’ 개념, 이데올로기를 정교하게 재정의

이 오랜 논쟁을 어떻게 결론지을 수 있을까? 모든 사상이 동일한 형태를 지니는 것도 아니고, 동일한 차원에서 작동하는 것도 아니다. 역사적 대변화를 이끄는 사상은 대개 사회 전체를 설명하고 바꾸려는 체계적인 이데올로기의 형태를 띤다. 이와 관련해 케임브리지대 사회학 교수 외란 테르보른은 의미심장한 제목의 저서, 『권력의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의 권력』(1980)에서 사상을 두 가지 축을 기준으로, 존재론적(Existentielles) vs 역사적(Histo-
riques) 그리고 포괄적(Inclusives) vs 차별적(Distinctives)으로 분류하는 탁월한 틀을 제시했다.

하지만 역사에 뚜렷한 흔적을 남긴 이데올로기들에 대한 가장 통찰력 있는 분석은 영국 보수주의 작가 T. S. 엘리엇에게서 찾을 수 있다. 그는 『문화의 정의를 향한 노트』(1948)에서, ‘문화’라는 말을 ‘이데올로기’로 바꿔 읽어도 무방할 만큼, 이데올로기 체계의 구조와 작동 방식을 정교하게 재정의했다. 엘리엇에 따르면, 거대한 신념 체계는 지적, 윤리적, 민속적 등 여러 층위가 결합된 개념적 건축물이다. 

그 상층부에는 고도로 정교한 지적 구조물이 자리하며, 이는 교육받은 엘리트만이 접근할 수 있다. 중간층에는 상층부의 복잡한 사상을 단순화한 대중적 설명들이 유통된다. 그리고 하층부에는 미신, 관습적 도덕규범, 속설 등 아주 단순화된 형태로 전해지는 믿음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러한 복잡한 구조를 하나로 통합하는 것은 고유한 언어(표현 방식)와 상징적 실천들이다. 엘리엇은 이러한 총체적 체계를 이룬 경우에만 비로소 ‘문화’라 부를 수 있으며, 그런 체계만이 탁월한 예술적 창조물을 낳을 수 있다고 보았다. 그가 염두에 두고 있던 것은 물론 기독교였다. 기독교는 난해한 신학적 사유, 일상적 도덕 규범, 소박한 민속적 미신이 뒤섞인 보편적 신앙 체계로, 성서라는 공통된 원천에서 비롯된 이미지와 이야기들로 끊임없이 자양분을 공급받아 왔다.

 

문화적·제도적 연속성 유지의 역할을 한 기독교

기원전 1천년대 이후 등장한 종교들은 역사적 변화 속에서 사상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최적의 관찰 대상이다. 그들이 지구상에 끼친 거대한 영향력을 부정할 이는 아무도 없다. 하지만 그러한 종교들이 등장하기 이전에 그만큼 거대한 물질적·사회적 격변이 존재했는지를 찾아보는 일은 쉽지 않다. 그들의 영향력이나 확산 규모에 비견될 만한 전조를 찾기 어렵다는 것이다. 겨우 몇 가지 설명을 덧붙일 수는 있겠다. 

예를 들면, 로마 제국의 지중해 세계 통일이 보편적 일신교(기독교)의 확산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했다거나, 사막이라는 척박한 환경에서 인구 증가와 자원 부족에 직면한 아랍 부족들이 군사화된 유목 생활을 지속했고, 이러한 긴장과 갈등이 결국 이슬람이라는 종교적 형태로 표출되었다는 식의 설명이다. 

그러나 그런 설명만으로는 종교가 역사에 미친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확인 가능한 원인들과 눈에 보이는 결과들 사이의 압도적인 비대칭성, 즉 제한된 원인에 비해 지나치게 큰 결과는 당시 문명에서 사상이 지닌 자율적(독립적) 힘을 오히려 입증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이러한 종교들은 정치적으로 서로 다른 결과를 가져왔다. 기독교는 기존의 제국 질서 안에서 점진적으로 확산되었지만, 사회 구조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꾸지는 못했다. 그러나 기독교는 국가와 별개의 독립된 제도로서 교회를 구축함으로써, 훗날 국가가 붕괴한 이후에도 문화적·제도적 연속성을 유지하는 역할을 했다. 

이는 로마 제국 붕괴로 인해 중앙집권적 권력이 사라진 공백 속에서, 봉건적 권력 구조가 자리 잡을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다. 반면에, 이슬람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영향을 미쳤다. 번개같이 빠른 군사 정복을 통해 지중해와 중동 지역의 정치 지도를 근본적으로 재편했다. 이 두 신념 체계(기독교와 이슬람) 중 어느 쪽도,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장하기 위해 훗날 ‘이데올로기 전쟁’이라고 불릴 만한 사상의 전투를 치를 필요는 없었다. 

로마에서든 카이로에서든 신앙의 대전환은 일어났지만, 그로 인해 이교도와 기독교인, 혹은 기독교인과 무슬림 사이에서 지속적인 이념적 논쟁이나 교리 투쟁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대부분의 개종은 점진적 확산(모세혈관처럼 스며드는 방식)이나 물리적 강압(무력에 의한 강제)을 통해 이루어졌다.

 

근대 국민국가 형성과정 속 대규모 봉기들

근대에 접어들면서 모든 것이 달라진다. 예수나 무함마드의 가르침과는 달리,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은 처음부터 ‘문헌으로 정리된 교리 체계’로 출발했다. 정확히 말하면, 종교개혁은 마르틴 루터, 울리히 츠빙글리, 장 칼뱅 등이 남긴 논쟁적 저술들을 통해 발전한 다양한 교리 해석과 사상 체계들의 결집이었다. 종교개혁은 처음부터 사회적·제도적 권력으로 등장한 것이 아니라, 교리적 논쟁과 사상의 틀로서 먼저 자리 잡았고, 그 후에야 비로소 제도적·정치적 힘을 획득하게 되었다. 

르네상스 시대 카톨릭 교회의 부패, 민족적 자각의 확산, 유럽 국가들의 바티칸 접근성의 불평등, 그리고 인쇄술의 발명 같은 사회적·물질적 배경도 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진정한 혁신은 카톨릭 교회 내부에서 출현한 반(反)종교개혁이었다. 이는 곧 프로테스탄트와 카톨릭이라는 두 신념 체계 사이의 전면적인 이념 대결로 이어졌다. 형이상학적·지적 논쟁에서부터, 당시 새롭게 등장한 개념인 대중 선전에 이르기까지 전방위적 충돌이 벌어졌고, 그 결과 유럽 전역에서 대규모 반란, 무력 충돌, 내전이 잇따랐다.

사상이 역사적 변화를 촉발하고 형성한 가장 설득력 있는 사례를 이보다 더 잘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유럽에서 근대 국민국가를 형성하는 과정을 여는 세 가지 대규모 봉기, 즉 16세기 후반 네덜란드의 대(對)스페인 반란(1568~1648, 스페인 제국의 카톨릭 강요와 정치적 탄압에 맞서 네덜란드가 일으킨 독립전쟁), 17세기 영국의 청교도 혁명, 그리고 명예혁명은 모두 지적인(사상적인) 동기에 의해 직접 촉발된 사건들이었다. 이들 세 사건의 직접적 도화선은 모두 신학적 열정의 폭발이었다. 네덜란드에서는 성서의 순수성을 수호한다는 명분 아래 성상(聖像) 파괴 운동이 일어났고, 영국에서는 스코틀랜드에 새 기도서를 강제로 도입하려는 시도와 카톨릭 관용 확대가 불러온 카톨릭 부활의 공포가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이에 비해 18세기 미국 혁명과 프랑스 혁명의 불씨는 훨씬 더 세속적인 것이었다. 북아메리카 식민지에서 영국 왕정에 맞선 반란은 철저히 경제적 이해관계에서 비롯되었으며, 핵심 쟁점은 세금 부담이었다. 당시 영국은 식민지 주민을 아메리카 원주민과 프랑스군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방위비를 세금으로 징수하려 했고, 이에 대한 식민지 주민들의 반발은 결국 영국 왕정에 맞선 독립전쟁으로 이어졌다. 여기에 영국 정부가 식민지 주민들의 자유를 빼앗고 영원히 지배하려 한다는 음모론적 불신까지 더해지면서, 북아메리카 식민지의 저항은 더욱 확산됐다. 

한편 프랑스는 미국 독립전쟁에 개입하여 막대한 전쟁 비용을 지출한 결과 심각한 재정 위기에 빠졌고, 이를 수습하려는 시도가 프랑스 혁명의 촉발점이 되었다. 국왕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오랫동안 중단되었던 봉건적 회의체(삼부회)를 소집할 수밖에 없었고, 이 자리에서 논의된 개혁안들은 흉작과 곡물 가격 급등으로 인한 민중의 분노가 폭발하면서 좌초되었다. 불만은 프랑스 도시와 농촌 전역에서 들불처럼 번져갔다. 

영국의 식민 지배와 프랑스의 왕정 통치는, 처음부터 어떤 일관된 이데올로기적 계획에 의해 무너진 것이 아니라, 세금 부담과 경제적 고통이라는 물질적 불만에서 비롯된 저항의 결과였다. 그럼에도 당시 사회에는 계몽주의가 축적해온 비판적 사고방식과 사유의 문화가 이미 자리 잡고 있었고, 이것이 기존 질서를 흔드는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계몽주의’(17~18세기 유럽에서 전개된 사상 운동으로, 인간 이성과 합리성을 중시하여 자유, 평등, 인권, 민주주의 같은 근대적 가치의 토대를 마련했다—역주) 사상은 언제든 폭발할 수 있는 거대한 사상의 탄약고처럼 존재했으며, 극한 상황에서 활성화되어 구질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는 상상력을 제공했다. 

성상 파괴를 뜻하는 용어로 기존의 권위, 전통, 상징을 비판하고 파괴하려는 사고방식을 의미한 ‘아이코노클라즘’(iconoclasm)은 이미 자리하고 있었고, 그 덕분에 낡은 체제를 허물고, 새로운 세계관과 이데올로기적 상상력을 구축할 수 있었다. 그 유산은 오늘날까지도 우리 사회의 기반을 이루고 있다.

 

선택의 기로 : 자본주의인가, 사회주의인가

세계 주요 종교들은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는 보편적 가치”를 남겼고,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은 개인의 자율성을, 18세기 혁명은 국민주권과 시민권의 개념을 남겼다. 그러나 이들은 어디까지나 사회 조직을 자율적으로 결정하기 위한 이론적 도구들에 불과하다. 정작 중요한 질문은, 그 사회 조직이 어떤 형태를 띨 것인가, 그리고 모두가 잘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집단적 행복(공공선)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이 질문을 본격적으로 제기하게 만든 계기가 바로 19세기 산업혁명의 도전이었다.

이에 대한 세 가지 유형의 답이 제시됐다. 1848년 ‘공산당 선언’이 발표될 즈음, 그 시대를 규정하는 거대한 대립 구도는 이미 자리 잡고 있었다. 유럽은 이제 곧 전 세계가 직면하게 될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됐다. 바로, 자본주의인가 사회주의인가. 이 순간, 서로 근본적으로 대립하는 두 가지 사회 조직 원리가 처음으로 명확하게 선언됐다. 

하지만 그 방식은 대칭적이지 않았다. 사회주의는 스스로를 사회주의라 명명하며, 정치운동이자 역사적 프로젝트로서 수많은 이론적 논의와 체계화를 이뤄냈다. 반면, 자본주의는 애덤 스미스의 ‘상업사회’(개인들이 자유롭게 이익을 추구하며 교환·거래하는 사회—역주)와도 구분되는 체계적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19세기 전체와 20세기 대부분 동안 스스로를 ‘자본주의’라 부르는 것을 회피했다. 오히려 ‘자본주의’라는 이름은 원래 이를 비판하는 쪽에서 붙인 것이라 부정적 뉘앙스를 지니게 되었다.

이에 대해,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세력은 사유재산과 전통 질서를 강조하며 자유주의적·보수주의적 논리를 빌려 방어했지만, 이를 일관된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로 체계화하지는 않았다. 그 결과, 대중을 설득하는 데 있어서 명확한 논리적 우위를 확보하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냈다.

따라서 토머스 칼라일이나 샤를 모라스를 비롯한 많은 보수 사상가들이 자본주의에 강경하게 반대한 반면, 존 스튜어트 밀이나 레옹 발라스 같은 자유주의 이론가들은 가장 온건한 형태의 사회주의를 지지하기도 했다. 19세기 사회주의, 그 중에서도 가장 철저한 유물론적 성격을 지닌 마르크스주적 사회주의가 자본주의보다 훨씬 더 강한 정치적 결집력을 지녔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기득권 체제가 힘과 전통에 기대어 존속할 수는 있지만, 20세기 중반에 이르면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는 인류 역사상 그 어떤 종교도 도달하지 못했던 지리적 범위까지 지지자를 확보하게 된다.

 

민족주의, 파시즘과 제3세계 해방운동으로 변질

세 번째로 작용한 주요 동력은 성격이 다른 민족주의였다. 이 이념은 1848년 무렵부터 유럽 무대에서 사회주의보다 더 강력한 대중 동원력을 드러냈다. 전 세계로 확산되기 훨씬 이전부터, 민족주의는 정치적 관점에서 두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첫째, 교리적 체계로서 민족주의는 자본주의나 사회주의에 비해 압도적으로 빈약했으며, 중요한 사상가나 독창적인 이론가도 극히 소수에 불과했다.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1762~1814, 1808년 『독일 국민에게 고함』을 통해 독일 민족주의의 철학적 토대를 마련한 독일 관념론 철학자—역주) 정도가 드문 예외였다. 둘째, 이처럼 사상적 내용이 빈약했기 때문에 민족주의는 오히려 매우 유연하고 가변적인 이념으로 작동했다. 

민족주의가 자본주의와 결합하면서, 이는 2차 세계대전까지 이어지는 파시즘의 위험을 낳는 열광적 애국주의로 변질되었고, 사회주의와 결합하면서 제3세계의 혁명적 해방운동으로 이어졌다. 민족주의가 세계적 이념으로 자리잡으면서, 사상의 깊이나 체계성과는 상관없이 대중을 강하게 동원할 수 있다는 사실이 뚜렷하게 드러났다. 이로써 교리적 완성도와 현실 정치적 영향력 사이의 괴리가 명확히 확인되었다.

20세기 초입, 제국주의 세계 질서의 주변부에 위치한 멕시코, 중국, 러시아, 튀르키예 등에서 혁명이 잇따라 일어났다. 이 혁명들은 비슷한 시기에 발생했지만, 각기 다른 양상을 보였다. 러시아와 중국에서는 사상적 요인이 혁명의 전개와 결과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고, 멕시코와 러시아에서는 대중의 동원 규모가 가장 컸다. 튀르키예에서는 민족주의적 경향이 가장 강하게 작용했다.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청 왕조를 무너뜨리고 아시아 최초의 공화국인 중화민국 수립을 이끈 1911년 중국의 신해혁명은 1949년 공산주의 혁명이 승리하는 데 밑거름이 되는 풍부한 지적 토대를 형성했다. 반면 튀르키예에서는 ‘국가 구원’을 내세운 케말주의 세력의 재집권이었을 뿐, 별다른 사상적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고, 이후 정권은 외국의 이데올로기를 빌려 이를 채워나갔다.

그러나 멕시코 혁명과 러시아 혁명 사이에서 가장 뚜렷한 대비가 나타난다. 멕시코에서는 10년 동안 이어지는 거대한 사회적 격변이 어떤 거대한 사상 체계에 의해 촉발된 것도 아니었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사상이 만들어진 것도 아니었다. 순수하게 이념적 측면에서 보면, 이 시기에 존재했던 유일하게 구조화된 이데올로기는 혁명 세력이 결국 전복하게 될 정권, 즉 포르피리오 독재 체제가 내세운 ‘과학적 실증주의’뿐이었다. 

이처럼 거대한 정치적 행위가 정의나 사회적 공정성 같은 기본적인 개념 외에는 별다른 사상적 토대 없이 이루어진 사례는, 역사적 격변을 지나치게 관념적으로만 설명하려는 지적 해석에 대한 강력한 반론을 제공한다. 결국 그 혁명이 얼마나 피상적이고 허구적인 것이었는지, 그 대가는 오직 멕시코인들만이 알고 있다.

 

러시아 혁명의 불길, 서유럽에서는 철저히 억압돼

러시아 혁명은 다른 궤적을 따른다. 초기에는 멕시코 혁명보다도 더 사상적으로 빈약한 상태에서 출발했다. 멕시코 혁명의 상징적 인물인 에밀리아노 사파타와 판초 비야가 외쳤던 “빵, 토지, 평화”처럼, 단순한 구호 아래 러시아 민중의 자발적 분노가 터져 나왔고, 그것이 차르 체제를 무너뜨리는 촉매가 되었다. 그러나 일단 권력을 장악한 후 볼셰비키는 당대 가장 체계적이고 포괄적인 정치 이데올로기를 기반으로 할 수 있었다. 이처럼 본질적으로는 물질적 원인에서 비롯된 혁명이, 지극히 이상주의적인 목표를 추구하게 되는 왜곡은 프랑스 혁명 당시 강경파였던 자코뱅파가 처했던 상황을 떠올리게 하지만, 러시아 혁명은 그보다 더 극단적이다. 이후 소련은 멕시코의 제도혁명당(PRI)이 남긴 업적과 범죄를 능가하는 성과와 비극을 남기게 된다. 그로부터 70여 년 후, 소련은 종말론적 몰락을 맞이하고, 마지막에는 거대한 이념적 의지로 스스로를 지탱해보려는 신화적 몸부림에 이르게 된다.

10월 혁명이 러시아 국경을 넘어 세계적으로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명백하다. 러시아가 본격적인 자본주의 발전 단계를 거치지 않고 민중 봉기를 통해 이를 건너뛰며, 그 여파로 유럽 전역에 연쇄적인 혁명을 촉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마르크스는 예상한 바 있다. 레닌의 전략도 거의 이러한 구상과 일치했다. 레닌은 러시아처럼 고립되고 후진적인 국가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해 회의적이었던 만큼 오히려 유럽 대륙에서 혁명이 확산되기를 기대했다. 당시 서유럽은 높은 산업 생산성과 물질적 조건을 바탕으로 무엇보다 생산자들의 자유로운 결합이 가능할 것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후 실제로 일어난 일은 정반대였다. 서유럽의 선진국들은 혁명의 싹을 철저히 억눌렀고, 혁명의 불길은 오히려 러시아보다 더 낙후된 동쪽으로 퍼졌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마르크스주의가 거둔 정치적 성공은 역설적으로 그 이론적 전제를 반박하는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상부구조(정치, 이데올로기, 문화)가 하부구조(경제적 기반)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며, 이는 이념 체계 역시 물질적 생산 관계의 반영이라는 점을 뜻한다. 

그러나 스탈린식으로 변형된 형태든 아니든, 자본주의가 존재하지 않는 환경에서도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사회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모습을 보면, 이는 경제적 기반이 모든 것을 규정한다는 결정론적 도식을 벗어나는 사례처럼 보인다. 즉, 자본주의적 토대 없이도 이념(마르크스-레닌주의)이 사회를 지탱하는 상황이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결국 소련 붕괴 이후, 혁명이 일어나야 했던 서유럽과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이, 혁명이 실제로 일어났던 러시아와 동구권 보다 경제적 생산력에서 압도하는 역설적 결과가 나타났다.

 

민주주의,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결정적인 무기돼

그렇다면 반대 진영에서는 사상의 역할이 어떻게 작용했을까? 자본주의는 공산주의에 비해 이데올로기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했지만, 냉전의 개시와 함께 논리를 정교하게 다듬었다. 늘 그렇듯이, 서구는 대립 구도의 틀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재구성했다. 즉, 갈등의 본질을 자본주의 대 사회주의로 보지 않고, 민주주의 대 전체주의라는 식으로 바꿔버린 것이다. 즉, ‘자유세계’와 조지 오웰의 『1984』에 등장하는 전체주의 세계를 대비시키는 식이다. 이러한 구도 설정은 위선적이면서도—실제로 ‘자유세계’라 불리던 서방에도 수많은 군사독재와 경찰국가가 존재했기 때문이다—동시에 스탈린식 동구권에 비해 대서양 서구가 지녔던 몇 가지 실제적 강점을 반영한 측면도 있다.

양 진영의 대결 속에서 ‘민주주의’라는 수사는 가장 필요 없어 보이는 곳, 즉 이미 자신의 삶의 조건이 우월하다고 확신하는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오히려 결정적인 무기가 되었다. 반면, 과거 서구 제국주의의 식민 지배를 받았던 지역에서는 이러한 민주주의 담론이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에 비해 조지 오웰이 묘사한 전체주의적 이미지는 동유럽에서 강한 공감을 불러일으켰고, 소련 내부에서도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쳤다. 특히 <라디오 자유 유럽>과 <라디오 리버티> 같은 미국의 선전 방송은 서구 민주주의의 우월성을 강조하며, 냉전에서 서방 진영의 승리에 일정 부분 기여했다.

 

자유세계 승리는 쇼핑 욕망이 빚어낸 산물

자본주의가 승리한 주된 이유는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보다는 오히려 끝없는 물질적 소비가 가난한 대중, 그리고 어쩌면 공산권의 관료 엘리트들까지 사로잡은 저항할 수 없는 매력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자유세계’의 승리는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보다는 쇼핑에 대한 욕망 덕분이었던 셈이다.

냉전 이후 자본주의는 더 이상 자신을 숨기지 않고, 사회 발전의 마지막 단계라고 스스로를 선언했다. 신자유주의 질서, 즉 지난 반세기 동안 세계를 지배해 온 ‘시장 만능주의적 신념 체계’ 속에서 자유 시장은 더 이상 넘을 수 없는 최종 목표가 되었고, 그 너머를 상상하는 것조차 불가능해졌다. 오늘날 라파스에서 베이징까지, 오클랜드에서 뉴델리까지, 모스크바에서 프리토리아까지, 헬싱키에서 킹스턴까지 전 세계의 재정·경제 정책은 신자유주의 아버지로 불리는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와 자유주의 시장경제 옹호자인 밀턴 프리드먼의 신봉자들에 의해 장악되어 있다.

이 시기의 두 번째 중요한 흐름은 미국과 유럽연합이 주도한 인권 수호를 명분으로 한 십자군식 개입주의였다. 신자유주의자들은 재분배를 위한 경제 개입은 강하게 반대하면서도, 군사적 개입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열성적으로 실행하고 찬양했다. 걸프전쟁은 여전히 서방의 석유 이익 보호라는 노골적인 목표를 지닌 구시대적 개입의 연장선에 있었지만, 그 이후의 전개는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냈다. 

 

북유럽도 순응시킨 신자유주의 헤게모니

이라크에 대한 경제 봉쇄와, 빌 클린턴과 토니 블레어 집권 시기에 강화된 대규모 폭격은 ‘인도주의적 개입’이라는 명목하에 자행된 일방적 군사 압박이었다.
발칸반도에서의 전면전과 유고슬라비아 폭격 역시 유엔의 승인 없이 이루어졌고, 경우에 따라서는 NATO의 일방적 군사 행동이 유엔의 사후적으로 승인으로 정당화되기도 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인권 보호라는 명분 아래, 미국과 유럽연합의 이익을 해칠 우려가 있는 소국들의 국가 주권은 일방적으로 무시되고, 국제법이 그 위에 군림하는 논리가 강요되었다.

굳건히 자리 잡은 신자유주의 헤게모니는 사실상 한계를 모른다. 북반구의 모든 정부들은 정치적 성향과 무관하게, 대서양권 밖에서 강대국들이 결정하는 봉쇄, 점령, 군사개입에 순순히 따르고 있다. 이를테면, 과거에는 비교적 독자적인 외교 노선을 유지하던 스칸디나비아의 사회민주주의 국가들조차 이제는 점점 더 서구의 거대 포식자들에게 빌붙어 함께 날뛰는 하이에나처럼 처신하고 있다. 노르웨이는 팔레스타인에서 이스라엘 지배를 공고히 하는 데 일조하고, 핀란드는 유고슬라비아 공습을 지원했으며, 스웨덴은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명분 아래 인도 요구를 받아들이며 협력했다. 이들 모두는 우크라이나에서도 서방 진영의 무리에 합류했다.

 

‘사상의 힘’, 정치적 실천과 역사적 변화에 중요

좌파는 이 역사를 통해 어떤 교훈을 얻어야 할까? 무엇보다도 정치적 실천과 역사적 변화를 위해서는 ‘사상의 힘’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달아야 한다. 계몽주의, 마르크스주의, 신자유주의라는 근대의 세 가지 주요 이데올로기 모두 비슷한 전개 양상을 보였다. 먼저, 하나의 사상 체계가 기존 정치 환경과는 거리를 두고(때로는 정면으로 맞서며) 형성되고 다듬어진다. 이 단계에서는 단기간 내 사회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기대는 거의 없다. 그러나 그 사상과 무관하게 외부에서 거대한 객관적 위기가 발생하면, 그동안 주변부에서 축적된 지적 자원이 갑자기 저항할 수 없는 힘을 얻고, 현실에 직접 개입하는 동원 이데올로기로 변모한다. 역사는 지금까지 늘 그런 식으로 흘러왔다. 1790년대, 1910년대, 1980년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오늘날 지구 대부분은 여전히 단 하나의 이데올로기에 지배되고 있다. 저항과 반대는 여전히 살아있지만, 그 표현은 아직도 산발적이고 타협적이다. 이 싸움은 길고 지난할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보수의 오만한 선언들, 중도파의 순응적 신화들, 그리고 스스로를 정의롭다고 믿으며 안주하는 좌파 내부의 도덕적 자만과 자기만족을 깨뜨리고,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는 철저하고도 날카로운 비판이 반드시 필요하다. 세계를 충격에 빠뜨리지 못하는 사상은 결코 세계를 뒤흔들 수 없다. 

 

글·페리 앤더슨 Perry Anderson
영국 역사학자, 캘리포니아 대학교 교수. 서구 마르크스주의를 대표하는 사상가란 평가를 받고 있다. 저명한 정치 학술 저널인 <New Left Review>의 편집장을 오랫동안 맡았다. 저서로는 『Le Nouveau Vieux Monde 새로운 구세계』(아곤, 마르세유, 2011), 『Considerations on Western Marxism』(2003), 『The Origins of Postmodernity』(1998) 등이 있다. 


※ 이 글은 <뉴 레프트 리뷰> 제151호(2025년 1~2월)에 실린 것으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도 동시 게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