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문제로 어른들을 조명한 <소년의 시간>

넷플릭스 성공작의 연출방정식

2025-05-30     에밀리 비커턴

프랑스 중학교에서 〈소년의 시간(Adolescence)〉을 방영하자는 청원에 이미 수천 명이 서명했다. 하지만 이 화제의 시리즈는 실상, 성인 시청자를 주된 대상으로 하고 있다. 자녀를 둔 부모의 내면적 고뇌와 범람하는 영상 이미지들을 둘러싼 혼란스러운 감정과 관계를 조명하는 작품이다.

케이트

넷플릭스에서 4부작 시리즈 <소년의 시간(Adolescence)>이 공개되자마자, 평론가들은 호평을 쏟아내며 이 작품의 엄청난 성공을 반겼다. 평론가들은 13세 소년 제이미가 동갑내기 소녀를 찔러 살해하는 이야기를 통해 드러나는 여러 사회적 문제에 주목했다. 이 시리즈는 주로 청소년의 디지털 기기(스크린) 사용 문제, 소셜미디어에서의 괴롭힘, 인플루언서 앤드루 테이트에게서 영향을 받은 뒤틀린 남성성, 그리고 ‘인셀(Incel)’(연애·성관계를 원하지만 이루지 못하는 남성들의 여성혐오와 사회적 소외 성향—역주)의 위험성 등 다양한 주제들을 다룬다.(1) 

70개국 이상에서 1억 회 이상의 조회수를 기록한 이 시리즈는 넷플릭스 영어권에서 역대 가장 인기 있는 작품 10위 안에 들었다. 그 결과, 제작진의 기대를 뛰어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뿐만 아니라, 스마트폰과 소셜미디어가 청소년의 정신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한 사회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의 베스트셀러 『불안한 세대(The Anxious Generation)』(2025)에 공감한 독자들 역시 드라마가 그려낸 현대 사회의 불안과 혼란에 깊은 울림을 받았다. 

 

70개국 이상에서 1억 회 이상 조회

시리즈 공동 제작자인 필립 바란티니, 스티븐 그레이엄, 잭 손은 여러 매체를 통해 이 작품이 대중과 정부 당국에 경고를 보내기 위한 의도에서 출발했음을 명백히 밝혔다. 특히 잭 손은, 16세 미만 청소년의 소셜미디어 접근을 법으로 제한할 것을 영국 의회에 촉구하기도 했다. 이러한 문제 제기는 영국 총리의 주목을 끌어냈다.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는 10대 자녀들과 함께 이 시리즈를 시청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고 고백하며, 대중 여론에 공감을 표했다. 스타머 총리는 이 작품이 “종종 무력감만을 안기는 여러 문제를 비추는, 마치 탐조등 같은 역할을 한다”라고 평가했다. 

한편 넷플릭스는 자사의 이익 구조와 충돌하는 결정을 내렸다. 청소년 시청 시간을 극대화해 수익을 올리는 플랫폼임에도 불구하고, 이 시리즈를 영국 중등학교에 무료로 제공하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공익을 내세운 이 제스처는 ‘선한 사마리아인’을 자처하는 행보인 동시에, 자사 비즈니스 모델을 고려하면 아이러니하게 비쳐진다. 

지금까지 넷플릭스 오리지널 콘텐츠는 가상 세계를 다루되, 비교적 가벼운 시선으로 접근해 왔다. 디스토피아 시리즈 <블랙 미러>(2011)는 온라인 괴롭힘, 가상 친구 집착, 범죄 뉴스에 대한 병적인 열광을 뒤섞어 보여주었다. ‘트루 크라임’(실제 일어난 범죄 사건을 바탕으로 제작된 다큐멘터리 혹은 재구성 콘텐츠 장르—역주)은 여전히 넷플릭스에서 가장 인기 있는 콘텐츠 유형 중 하나다. 그런 점에서 <소년의 시간>은 사회 문제를 보다 엄정하게 다루며, 시각적으로도 기존과는 다른 접근을 보여주면서 전환점을 이룬다.

 

긴장감을 높이는 ‘플랑 세캉스’

특히 이 시리즈를 둘러싼 비평의 핵심에는 영화 역사 초창기부터 이어져 온 고전적 촬영기법인 ‘플랑 세캉스’(plan-séquence, 하나의 카메라로 편집 없이 장시간 촬영해 하나의 장면 전체를 한 호흡으로 담아내는 방식—역주)의 활용이 자리하고 있다. 제작진은 이 기법을 주요 홍보 전략으로 내세웠으며, 실제로 각 회차(약 1시간 분량)는 하나의 롱테이크로 구성하였다. 이는 강한 몰입감과 사실감을 강화하겠다는 연출 의도다.

1890년대, 뤼미에르 형제는 약 1분 분량의 필름을 한 번에 촬영해 최초의 영화를 제작했다. 1분은 당시 카메라가 필름을 교체하지 않고 연속 촬영할 수 있었던 최대치였다. 이후 이와 같은 촬영 방식은 연출과 서사 전개에 큰 제약이 따르기 때문에 드물게 사용되었다. 그럼에도 주제에 따라 이 도전에 매력을 느낀 몇몇 감독들이 등장했다. 예컨대 <로프>(1948)는 진정한 플랑 세캉스 영화는 아니지만, 모든 사건이 하나의 방 안에서 끊김 없이 실시간으로 전개되는 것처럼 연출되었다. 

알프레드 히치콕은 배우의 움직임을 활용해 11분마다 필름을 교체하는 순간을 자연스럽게 감췄다. 오늘날에는 기술 발전으로 인해, 한 번의 촬영으로 장편 영화를 완성하는 것도 가능해졌다. 알렉산드르 소쿠로프의 <러시아 방주>(2002)가 그 대표적인 사례다. 카메라는 중단 없이 상트페테르부르크 겨울궁전을 떠도는 유령의 여정을 따라간다. 최근 들어 이 기법은 조금 더 절제된 방식으로 사용되며, 이야기의 긴장감을 높이고 메시지를 강조하는 데 활용되고 있다. 에리크 포페의 <우토야, 7월 22일>(2018)은 노르웨이 섬에서 발생한 학살 사건을 다루며 이 같은 촬영 방식을 택했고, 바란티니 감독의 <더 셰프>(2021) 역시 주방이라는 폐쇄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혼돈의 시간을 플랑 세캉스로 담아냈다.

 

작품의 메시지를 흐리는 형식적 모순

제작진은 <소년의 시간>에서도 이 기법을 다시 활용해 관객을 제이미의 가족, 경찰, 심리학자 등 이해하려 애쓰는 이들의 상황 속으로 몰입시킨다. 이들은 고통과 충격 속에서도 제이미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그의 내면에 무엇이 있었는지를 이해하려 한다. 하지만 겉으로는 온순해 보이면서도 내면에 분노를 품고 있는, 제이미의 이중적인 성격은 이들의 이해를 더욱 어렵게 만든다. 관객은 긴장, 혼란, 당혹감 등 이 모든 감정을 플랑 세캉스라는 하나의 촬영을 통해 온몸으로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소년의 시간>이 비록 플랑 세캉스라는 대담한 형식을 택했음에도, 전체적으로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콘텐츠에서 자주 반복되는 전형적인 감정 유도 방식과 몰입 구조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강렬함을 구축하려는 연출적 시도는 효율성을 중시하는 플랫폼 포맷과 충돌하고, 관객은 롱테이크의 밀도보다는 시리즈의 빠른 전개에 휩쓸린다. 이 형식적 모순은 작품의 메시지를 희미하게 만든다. 결국 이 시리즈는 오늘날 청소년에 대해 거의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그저 어른들이—그리고 이 시리즈가 취한 시선 역시—그들을 걱정하고, 그 걱정을 말하거나 누군가 대신 말해주는 일이 어른들 자신에게 일종의 위안을 준다는 사실만을 전달할 뿐이다.

 

작품 몰입을 훼손한 전형적인 넷플릭스식 연출

물론 플랑 세캉스가 가장 효과적으로 작동할 때는, 자극적인 효율성만을 좇는 연출의 충동을 절제하는 효과를 낸다. 이 기법은 이야기를 실시간으로 전개되도록 강제하며, 카메라는 인물의 움직임에 밀착해 함께 이동한다. 이러한 밀도 높은 근접성은 관객에게 강한 몰입감을 선사한다. 

제이미가 체포되어 경찰서로 호송될 때, 그의 변호사가 첫 심문을 준비할 때, 심리학자가 자판기에서 뽑은 핫초코에 자신의 투명한 도시락통에서 꺼낸 마시멜로를 넣을 때—그 이유는 나중에 밝혀진다—이처럼 특별한 사건이 벌어지지 않는 장면들이 삽입된다는 점은, 극적 전개를 중심으로 하는 청소년 범죄 드라마 장르에서는 오히려 이례적이다. 이 모든 장면은 정밀하게 선택된 디테일을 통해, 인물들이 처한 현실과 상황을 더 깊이 이해하게 해준다.

그러나 이 시리즈는 2화가 끝날 무렵, 그 생기 있는 절제미를 스스로 포기한다. 기이한 분위기의 에필로그는 형식적인 단절을 만들어내며, 거의 희극적으로 느껴진다. 제이미의 학교를 수색하며 흉기의 흔적을 찾는 수사관들을 따라가던 카메라는, 서사의 논리적 맥락도 없이 갑자기 하늘로 솟구친다. 이 순간, 인물들의 현실에 밀착돼 있던 시점은 이탈하고, 카메라는 공중으로 떠오른다. 

초록 들판에 둘러싸인 학교의 전경이 항공 뷰로 펼쳐지고, 그 위로 합창이 흐른다. 그런데 그것도 단순한 합창이 아니다. 무엇인가? 추락 이전의 순수함을 상징하듯, 아주 어린 소년들의 목소리다. 요컨대, 드론 촬영과 감성적인 음악이 결합된 이 장면에서 <소년의 시간>은 갑자기 전형적인 넷플릭스식 연출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한두 번 정도의 이탈이라면 용납될 수도 있다. 하지만 4회째 이어지는 내내, 카메라는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흔들리고 움직인다. 특히 그럴 필요가 없는 장면들에서조차 그러하니, 이는 오히려 강렬하고 몰입적인 경험을 전달하고자 했던 제작진의 의도와 어긋나는 연출로 보인다.
물론, 대사는 섬세하고, 배우들의 연기도 정확하다. 그러나 이 장점들은 연출로 인해 자주 훼손된다. 촬영감독은 인물들 주변을 부산하게 맴돌며,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잡고, 그 과정에서 몸 전체는 화면 밖으로 밀려난다. 이 방식이 때로는 효과적일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불필요하고 산만하며, 특히 세 번째 편에서는 그 단점이 유독 두드러진다.

 

사회적 리얼리즘과 관계없는 가족의 프리즘

이 회차는 재판을 앞둔 제이미가 구금된 보호시설에서 진행된다. 주된 내용은 그의 심리 프로파일 작성을 위해 진행하는 전문가와의 대화다. 시나리오는 탄탄하고, 제이미라는 인물은 단순화된 캐릭터가 아니라 입체적으로 그려진다. 심리학자와의 면담에서 제이미는 ‘고양이와 쥐’처럼 밀고 당기며 감정적 긴장을 고조시킨다. 이 장면에서 관객은 제이미라는 인물에 대해 가장 많은 것을 알게 된다. 그의 친구들, 부모와의 관계, 아버지 에디가 경기를 보러 왔을 때 축구를 못하는 자신에 대해 느끼는 수치심, 그리고 “일요일 로스트(beef roast)”나 만들 줄 아는 사람으로만 여기는 어머니에 대한 경멸—이 모든 것이 제이미의 복잡한 내면을 구성한다. 

그 과정에서 제이미의 낮은 자존감 역시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근데 선생님, 저… 저 좋아해요? 아니에요?” 면담 말미에 터져나온 이 외침은, 그가 품고 있는 정서적 취약성과 애정에 대한 갈망을 선명히 드러낸다. 어쩌면 바로 그 감정들이 그를 극단적인 행동으로 몰고 갔는지도 모른다. 사실, 이 장면은 카메라가 움직이지 않아도 관객을 한 시간 동안 충분히 몰입시킬 만한 요소들을 이미 풍부하게 품고 있다. 두 인물을 고정된 프레임 안에 함께 담았다면, 우리는 그들의 상호작용과 몸짓 언어, 심리 게임의 미세한 변화까지 더욱 면밀히 관찰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그 둘은 단순한 극 중 인물이 아니라, 우리 눈앞에서 살아 있는 존재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연출이 시선을 독점하고, 오히려 드라마에서 관객의 몰입을 방해한다. 그 결과, 모든 것이 인공적이고, 아무것도 실제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비록 가족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사회적 쟁점을 다루고는 있지만, 켄 로치(Ken Loach)나 마이크 리(Mike Leigh)의 ‘사회적 리얼리즘’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더 와이어>(Sur écoute, 2002)나 <삼브르>(Sambre, 2023) 같은 형식적으로 야심찬 다른 드라마들과도 다르다. 

<더 와이어>는 매 시즌, <삼브르>는 각 회차마다 하나의 제도(경찰, 교육, 사법 등)를 깊이 있게 다뤘다. 반면, <소년의 시간>은 4화에 걸쳐 각각 경찰, 교육, 정신 건강, 가족을 다루면서도, 시종일관 어른들의 시선에서 비판 없는 관점을 유지한다. 단 한 가지 예외는, 제이미가 다니는 중학교를 배경으로 한 다소 도식적인 회차다. 이 이야기에서는 인물들의 대사마저도 시리즈의 메시지를 직접 전달하는 설교의 도구처럼 작동한다.

— “젠장, 완전 가축우리잖아.” 중학교를 나서며 경찰이 중얼거린다. (메시지: 청소년은 망가졌고, 법으로 개입해야 한다.)
— “맞아, 여전히 구토와 자위 냄새가 진동하지…하지만 나도 한 선생님은 아직 기억나. 그분은 내게 정말 의미 있는 분이었어…” 동료가 그렇게 답한다. (메시지: 교사들은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한다. 문제는 교사가 아니라 시스템이다.)

 

작가들이 놓쳐 버린, 흥미로운 탈선들

이러한 대사들은 서사의 흐름을 끊고, 장면에 과도한 설명을 덧붙여 긴장감을 떨어뜨린다. 그 결과,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는 플랑 세캉스의 진정성은 사라지고 만다. 이러한 한계는 마지막 회차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이 회차의 서사는 오직 하나의 목적에 집중된다. 바로 제이미의 가족을 ‘비극적으로 평범한 존재’로 제시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작가들이 끝내 놓쳐버린 몇몇 흥미로운 탈선도 존재한다 (역설적으로, 이 장면에서야말로 플랑 세캉스가 제대로 작동한다—역주). 

예컨대, 대사 속에 암시되었던 아버지의 분노 성향이 실제 행동을 통해 분출되는 장면이 그렇다. 주차장에서 에디는 자신의 밴에 낙서를 한 십대 소년 두 명에게 격분하고, 그중 한 소년을 뒤쫓아가 자전거를 내던진다. 카메라는 그의 뒤를 밀착해 따라가고, 관객은 마치 그 분노가 자신에게도 튀어오는 듯한 감각을 경험하게 된다. 아버지의 그 분노는 이미 아들에게도 전이되어 있었다. 이 장면이 중요한 이유는 설명적 대사나 “소셜미디어의 악영향” 같은 도시적 해설 없이도, 폭력의 대물림이라는 본질적 문제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시리즈는 이 장면에서 상투적인 해답 대신, 제이미의 행동을 그가 가정 내에서 목격하고 체험한 것들과 연결 지으려 한다. 이는 더 험난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접근 방식이다. 설명적 대사가 없는 덕분에, 우리는 이 장면을 스스로 해석할 수 있고, 그만큼 이 끔찍한 사건에 대한 우리의 시야도 넓어진다. 그러나 이런 열린 가능성은 마지막 장면에서 닫혀버린다. 집으로 돌아온 부모는 2층 방에서 나눈 마지막 대화를 통해 스스로를 면책하면서도, 죄책감 속에 갇힌 존재로 마무리된다. 그들의 대사는—마치 관객이 아직 깨닫지 못했을까 봐 굳이 확인시키려는 듯, 그들은 자신들이 자식을 사랑했지만 너무 바빴고, 그래서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지 못한 부모였음을 고백한다. 두 사람은 밤늦도록 불이 켜져 있던 아들의 방을 떠올리며,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여전히 모른다고 말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린 최선을 다했잖아”라고 서로를 위로한다. 이 장면은 결과적으로 불안한 성인 관객들에게 안도감을 주는 감정적 자기 위안의 대사처럼 들린다.

마지막 장면은 슬픔으로 흠뻑 젖어 있다. 에디는 제이미의 방으로 들어와 둘러본 뒤, 침대 위에 주저앉아 얼굴을 베개에 묻고 오열한다. “미안해, 아들아. 내가 더 잘했어야 했어.” 그는 이렇게 말하며 봉제곰 인형에 입을 맞추고 이불 속에 조심스레 밀어 넣는다. 카메라는 배우의 얼굴을 끝까지 클로즈업해 잡고, 그 위로 감정을 짜내는 듯한 음악이 흐른다. 배우는 모든 감정을 쏟아낸다. 그리고 우리 역시 마음이 산산이 부서진 채, 정신은 텅 빈 상태로 남는다. 탈진한 채로 말이다. 부모로 산다는 것, 참 힘든 일이다. 청소년기의 문제? 그건 다음 기회에 이야기하자. 넷플릭스는 또 하나의 성공을 거두었고, 다음 시즌은 벌써 논의 중이다. 

 

글·에밀리 비커턴 Emilie Bickerton
비평가이자 시나리오 작가, <뉴 레프트 리뷰> 편집위원


(1) involuntary celibates(비자발적 독신자)의 축약형. 즉, ‘비자발적 독신자’를 뜻한다. 참고: 안 주르댕, 「소셜미디어 위의 진짜 남자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24년 7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