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치용의 시네마 크리티크] 영화로 만든 신학 교과서
영화평 <인생은 아름다워>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기억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이지만, 사안이 사안인지라 창작자에게 어느 정도 엄중함이 요구되기 마련이다. 실제로 아무도 요구하지 않지만 당사자는 부담을 느낄 법하다.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La vita è bella)>(1997년)는 ‘홀로코스트 영화’이면서 코미디 영화이다. 한눈에 쉽지 않은 조합이다. 결말은, 해피엔딩이라고 하기엔 서글프고 비극적이라고 하기엔 해맑다. 영화 제목이 ‘인생은 아름다워’인 것 또한 생각할 거리다.
독특한 관점과 방법론으로 홀로코스트를 다룬 최근 영화로는 <사울의 아들>이 떠오른다. <사울의 아들>에서 어떤 식으로든 사건과 거리를 두려는 의도가 읽히듯, <인생은 아름다워>에서도 분명히 그러한 의도의 개입이 표명된다. 큰 슬픔을 예술적으로 지탱하며 효과적으로 그 슬픔을 전달하기 위한 영화적 장치이다. 두 영화의 방향이 아주 다르지만, 따지고 들면 유사점 또한 많이 눈에 띈다.
<인생은 아름다워>는 제51회 칸국제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받았고 이어 제71회 아카데미시상식에서 남우 주연상, 드라마 부문 음악상,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했다. 이 영화의 감독이기도 한 로베르토 베니니의 남우 주연상 수상은 비영어권 배우에게 돌아간 첫 번째 사례였다. 칸과 아카데미를 포함해 전 세계 72개 부문 수상 및 52개 부문 노미네이트로 작품성과 대중성을 입증했다.
사랑이란 당의정
아우슈비츠를 희극으로 접근한 <인생은 아름다워>는 크게 두 축으로 구성된다. 하나는 귀도(로베르토 베니니)와 도라(니콜레타 브라스키)의 사랑, 다른 하나는 귀도와 아들 ‘조슈에’의 사랑으로, 전자는 남녀의 사랑, 후자는 부자의 사랑이다.
▲'인생은 아름다워' 스틸사진 ⓒ (주)팝엔터테인먼트관련사진보기
그러므로 사랑이 있는 인생은 아름답구나, 언뜻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랑이 있는 인생은 아름답지만, 사랑이 있는 것만으로 인생이 아름다울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여기서 ‘사랑이 있는 인생’이 때로 아름답지 않을 수 있지만, 논의의 편의를 위해 그런 예외는 제외하자. 제기된 의문과 관련하여 확실히 하고 넘어가자면, 사랑이 있는 인생이 아름답게 존중될 수 있는 그런 인생 자체가 전제되어야, 사랑이 있는 인생은 아름답다. 너무 당연한 얘기라고? 그렇긴 하다. 사실 일종의 동일률을 나열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때로 ‘그런 인생’ 자체가 무너질 때가 드물게 출현한다. ‘그런 인생’은 인간다움이 존중되는 세상이고, 그것이 무너진 예컨대 수용소 같은 곳의 인생에서 인간다움이 소거된다.
여기서 또 다른 의문이 제기되어야 한다. 사랑이 있는 인생이 아름답게 존중될 수 있지 않은 그런 상황에서도 사랑이 있는 인생이 아름다울 수 있을까?
없다. 그런 예외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이란 게 삶의 산물이기에 삶이 무너진다면 사랑은 존재하지 못한다. 아마 신의 사랑이 유일하게 가능한 예외의 예외일 것이다. 이 영화는 현실에 존재할 수 없는 예외를 극화했다. 영화 제작엔 표현의 자유가 있으니까, 예외의 극화가 문제될 것이 없다. 하지만 그 소재가 아우슈비츠인데?
함부로 만든 영화가 아니라면, 이때 가능성은 신이 추방당한 것 같은 상황에서 신의 사랑을 표현하는 은유이거나, 사랑과 현실의 비극적 상충을 통해 현실의 고통과 사랑의 깊이를, 그 대비를 보여줌으로써 두 가지를 동시에 형상화하고자 하는 예술적 노력이다. 이 영화에 쏟아진 찬사는 주로 후자에 해당한다.
운명적인 사랑과 아모르 파티
부와 명예, 어느 하나 내세울 게 없지만 유머와 순수를 지닌 남자 귀도. 서점을 열 마음으로 친구와 함께 시골에서 도시로 이주한 귀도는 도라와 운명적으로 조우하여 극적인 결혼을 한다. 귀도의 좌충우돌 구애가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될 뻔한 도라의 마음을 움직여 두 사람이 부부의 연으로 맺어진다.
▲'인생은 아름다워' 스틸사진 ⓒ (주)팝엔터테인먼트관련사진보기
전반부가 그렇게 페이드 아웃하고 그들의 아들 조슈에의 다섯 번째 생일이 페이드인한다. 전반부에 후반부를 겨냥한 복선이 깔려 있고, 후반부 초반에 수용소로 향한 전개를 가속한다. 조슈에의 생일에 갑자기 들이닥친 나치들이 목적지를 알 수 없는 기차에 귀도와 조슈에, 귀도의 삼촌을 태운다. 유대인이기 때문이다. 뒤늦게 남편과 아들의 수용소행을 알게 된 도라는 유대인이 아닌데도 같은 기차에 올라탄다.
그렇게 수용소 생활이 시작하자, 기차에 탑승할 때부터 귀도는 이 여행이 특별히 준비한 게임이라며 아들을 안심시킨다. 아이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서 또 수용소에서 살아남게 하려고 귀도는 온갖 꾀를 짜내어 거짓말의 향연을 펼친다. 모든 것을 점수를 따기 위한 놀이로 변용해 “1,000점을 먼저 딴 사람에게 진짜 탱크를 준다”라고 하며 조슈에의 수용소 생활을 인도한다.
조슈에가 “사람을 비누로 만든다고 하더라”고 하자 귀도는 아들에게 사람을 비누로 만드는 게 가능한 일이냐고 웃음으로 다그친다. 비인간적 현상을 대할 때 그것을 인정함으로써 자신 또한 비인간적이 되기 마련인데, 귀도는 자신은 인정하는 그 비인간적 현상을 아들에겐 부인함으로써 아들이 비인간화하는 위험을 막았다고 할 수 있다. 영화에서 풍자가 가장 뾰족하게 드러난 대목이었다.
아무래도 압권은 귀도가 죽음으로 향하는 장면일 텐데, 간결하게 총성만으로 처리한 것이 좋은 연출이었다. 방송장비와 축음기를 활용해 도라에게 사랑을 전한 애틋한 장면은 <쇼생크 탈출>을 생각나게 한다. 개봉 순서로는 <쇼생크 탈출>이 몇 년 빠르다.
조슈에가 아빠의 약속대로 마지막에 진짜 탱크를 받은 건 아니지만 진짜 미군 탱크에 탄다. 조슈에가 엄마 도라를 만나는 대미는 귀도 희생의 값을 영화적으로 받아낸 장면이다.
무능한 하나님
아우슈비츠 이후 유대인은 자신들을 그런 곳에다 방치한 하나님에 분노를 표했다. “우리가 아우슈비츠에 있을 때 야웨는 어디에 계셨는가?” 이런 질문에 대한 답변 중 하나가 “아우슈비츠 이후에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Nach Auschwitz ein Gedicht zu schreiben, ist barbarisch)”이란 테오도어 아도르노의 말이다. 나치에 의해 유대인으로 분류되었지만 유대교 신자가 아니었던 아도르노의 답변은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한스 요나스의 ‘무능한 신(Der ohnmächtige Gott)’ 개념으로 이어진다.
▲'인생은 아름다워' 스틸사진 ⓒ (주)팝엔터테인먼트관련사진보기
여기서 자세하게 ‘무능한 신’을 논의하지 못하지만, 수용소에 끌려와서 아들 조슈에를 위해 거짓말하고 위로하고 보호하다가 끝내 자신은 기꺼이 총살당하는 모습에서 요나스의 신을 떠올리게 된다. 자신의 힘으로 수용소에서 아들을 꺼내주지 못하지만, 아들을 위해 모든 것을 거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신학적 성찰이 담겼다고 해서 과한 설명은 아닐 것이다. 스스로 수용소행 기차에 올라타 가족과 함께하는 도라의 모습 또한 사랑으로 충만한 ‘무능한 신’의 형상이다.
사실 이 영화를 신학적 메타퍼라고 한다면 현대의 신을 잘 그렸다고 할 수 있다. 전지전능을 부르짖는 한국의 보수적인 교회에선 신성모독이라고 하겠지만, 하나님이 귀도 같은 하나님이라면 더없이 좋은 일이지 않을까.
로베르토 베니니의 아버지 루이지 베니니는 나치 수용소에서 2년을 보낸 실제 홀로코스트 생존자이다. 도라 역의 니콜레타 브라스키는 로베르토 베니니의 실제 아내이다. 두 사람은 1983년 로마에서 만나 1991년 결혼했다.
글 안치용, 사진 (주)팝엔터테인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