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우성의 시네마 크리티크] 과감한 불투명함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글램핑장 설명회에서 마을회장은 상류에서 한 일은 반드시 하류에 영향을 준다는 말을 한다. 대화의 상대가 글램핑장을 설립하려는 연예사무소 직원들이기에, 상류와 하류가 각각 지시하는 것이 기업과 마을이라는 것은 간단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관객은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의 후반부 속 하나(니시카와 료)의 실종과 폭력적인 사건의 원인을 자연과 인간이 균형을 이루며 살고 있는 지역 사회를 흔들어 놓은 기업에서 찾게 된다. 상류(연애기획사)인 글램핑장 건설 계획의 부조리함이 하류(마을과 자연)에 영향을 미쳤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 속에 진행된 이야기만 놓고 보면 기업은 글램핑장을 건설하지 않았다. 담장을 지어서 사슴들이 갈 곳을 잃게 만들거나, 하수처리시설을 마을 주민과 합의하지 않은 위치에 지어 물을 오염시키지 않았다. 단지 그럴 계획만 있을 뿐, 아무것도 진행된 것은 없다. 그리고 하나가 실종된 실질적인 이유는 타쿠미(오미카 히토시)에게 있었다. 그가 아이를 제시간에 데리러 가는 것을 잊었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와 타카하시(코사카 류지)가 죽은 것인지 산 것인지 알 수 없이 눈밭에 쓰러지게 된 이유도 타쿠미가 하나를 구하려는 타카하시를 제지하고 목을 졸랐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전반부의 갈등과 후반부의 결과가 연관이 있는 것처럼 느낀다. 왜 그런 것일까?
상류가 하류에 영향을 주어, 글램핑장 건설 계획의 부조리함이 마을과 자연에 영향을 미친 것이라 사람들이 생각하게 되는 이유는 이야기의 구조적 측면에서 비롯한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의 핵심 갈등은 글램핑장 건설로 인한 마을 주민과 연애기획사 간의 대립이다. 보통의 영화라면 이러한 대립이 심화되고 극적 사건을 통해 해결된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핵심 갈등이 심화되고 사건화되기 전에 이와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는 다른 사건이 발생한다. 그것은 하나의 실종이다. 이 둘은 분명히 별개의 사건이지만, 관객들은 이야기 속 핵심 갈등과 후반부의 다른 갈등을 인과관계로 파악하려 한다. 혹은 인과관계를 찾으려고 한다. 결말 속 타쿠미의 폭력 또한 마찬가지다. 갑작스럽게 타카하시를 저지하고 폭력으로 제압하는 행위에 납득할만한 이유는 없지만, 우리는 내적 개연성 외에 알레고리적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하고 그것을 찾으려 애쓴다.
타카하시를 향한 타쿠미의 폭력을 논리적으로 납득할 수는 없어도, 이렇게 불가해한 하류(이야기 후반부)의 사건에 영향을 준 상류(이야기 전반부)의 행위가 무엇인지는 짐작할 수 있다. 글램핑장 설명회에서 잔뜩 흥분하여 타카하시에게 달려가려 했던 젊은 마을 주민을 제지했던 타쿠미의 행동이 그것이다. 도시에서 온 외부인과 마을 사람의 대화를 망치려는 젊은 남성을 뒤에서 제압하는 것과 외부인인 하나와 사슴 간의 대화에 끼어드는 타카하시를 막는 것은 대구를 이룬다. 이는 나무를 자르고 물을 기르고 총소리를 듣는 과정, 하나를 픽업하기 위해 학교로 들어오는 차를 촬영하는 쇼트의 구성, 오프닝과 엔딩의 앙각 쇼트처럼 반복되며 전반부와 후반부, 상류와 하류의 연결성을 강화하는 연출적 장치이다. 즉 전반부의 글램핑장 건설을 둘러싼 마을과 기업 간의 대립과 후반부 하나의 실종 및 폭력 사태는 인과관계는 없지만, 구성적으로는 연결된 양면적인 관계인 것이다.
대구를 이루는 또 다른 구도를 보자. 결말에서 하나가 사슴에게 공격당하는 것(혹은 당한 것으로 보이는 것)과 타카하시가 타쿠미에게 공격받는 것은 비슷한 구도로 마주 보고 있어 무언가 의도를 가지고 연결한 것임은 틀림없어 보인다. 예컨대 자식이 치명상을 입으면 공격할 수 있는 사슴처럼 타쿠미도 타카하시를 공격한 것이고 더 나아가 지역 주민과 기업의 미래를 은유하는 것이라는 해석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엄밀하게 보면 새끼와 부모 중 어느 사슴이 다친 것인지 명확히 나오지 않고, 하나를 공격한 주체도 나와 있지 않다. 또한, 이미 치명상을 입은 상태에서 하나를 공격한 것으로 짐작되는 사슴과 달리, 타쿠미는 하나가 다치기 전에 타카하시를 공격한다. 이처럼 영화는 구성적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의미적으로 모호한 연출을 반복하고 있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하마구치 류스케의 이전 영화들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모호한 불투명함 속에서 관객들을 선명한 결말로 이끈 것과는 반대로 선명함 속에서 모호한 결말로 향한다. <아사코>(2018)나 <우연과 상상>(2021)의 세 번째 에피소드에서 전반부와 후반부에 대구를 이루며 반복되는 요소들이 결말에서 이야기와 합일을 이루며 의미화에 기여한다면,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에서 대구를 이루며 반복하는 요소들은 의미화에 기여를 하려 하지만 이야기와 합일을 이루지 못한다. 당연히 이러한 혼란과 부조화는 연출적으로 의도된 부분이며 영화가 이미지를 다루는 방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오프닝에서부터 그러한 부조화를 확인할 수 있는, 이야기의 전개와 무관한, 쇼트가 등장한다. 직앙각으로 촬영된 나무와 하늘의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중간에 삽입된 크레딧을 포함하면 4분이 넘어가고, 사실적인 현장음을 지우고 배경음을 전면에 내세운다는 점에서 내러티브적인 쇼트라기보다 이미지의 감각이 전면으로 나선 쇼트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다음 쇼트에서 숲에서 위쪽을 올려다보는 하나의 모습으로 넘어가며, 시점 쇼트는 아닐지라도, 쇼트 간의 논리적 연결성을 획득한다. 시청각적으로 아름다운 이미지나 음악을 내러티브의 통제 바깥으로 극단화하여 사용한 적 없는 하마구치의 전작들과 비교하면 매우 예외적인 오프닝 쇼트는, 이야기라는 외적 도움 없이 뮤직비디오와 같은 완결성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영화 내부에 속한 쇼트이기에 뒤에 연결된 하나의 시선으로 이야기와 연결된다. 한 쇼트로 완결성 있으면서 미완결이기도 한, 인간의 시선이 아니면서 시선이기도 한 이중적 상태를 지닌 이미지로 연출된 것이다.
이 오프닝 쇼트와 같은 또 다른 사례는, 타쿠미가 하나를 픽업하러 왔다가 그녀를 만나지 못하고 돌아갈 때 등장하는 자동차 뒤로 바라보는 풍경 쇼트다. 이것 또한 시점이 아니지만, 일종의 백미러 이미지로 시점이기도 한 이중적 이미지다. 산와사비와 사슴 사체를 바라보는 타쿠미를 촬영한 쇼트도, 그가 카메라를 직접적으로 바라보고 있어 카메라의 존재를 자각시켜 환영성을 방해하는 쇼트이면서, 타쿠미의 시점 쇼트와 유사하게 작동하는 산와사비와 사슴 백골 쇼트와 연결되며 환영성을 유지하는 양면성으로 작동한다. 마찬가지로 기계적 리듬의 트래킹 쇼트도 카메라를 의식하게 하는 움직임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 경계에 있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를 하는 아이들이 등장하는 장면처럼 부자연스러움과 자연스러움이 교차하는 연출인 것이다.
하마구치는 상류가 하류에 반드시 영향을 준다고 의미심장하게 말하면서, 영화의 전반부와 후반부의 관계를 연결된 것도 끊어진 것도 아닌 모호하고 양면적인 상태로 만들어 혼란을 준다. 관객들은 이렇게 불투명하고 불가해한 결말에 전반부의 알레고리인 생태학적 의미나, 제목에 적힌 선악의 문제를 일종의 원인으로 제시한다. 예컨대 상류와 하류처럼 의미심장하게 등장한 대사인 정도가 지나치면 균형이 깨진다던 타쿠미에 말을 의미화해 그가 균형을 맞추기 위해 폭력을 행사한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그 균형이란 자연과 인간의 관계이기도 하고 사슴과 하나, 타쿠미, 타카하시가 만드는 구도의 균형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이 우스운 것은 애초에 이야기 전개상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폭력이 등장하지 않았으면 정도가 지나칠 일도, 균형이 깨질 일도 없었다는 것이다. 타쿠미가 한 행동이야말로 정도가 지나친 일이자 균형을 깨는 행위이다. 즉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종합해봤을 때 결말이 우리에게 직관적으로 감각하게 하는 것은 부조화이다. 좀 더 정확히는 조화와 부조화 경계로 밀어 넣는 것이다. 만약 단순히 균형을 부수거나 충격만을 주려는 의도의 결말이라면 그 또한 납작한 연출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하마구치가 늘 해왔던 것과는 다른 방향성을 지닌 영화다. <해피 아워>(2015)에서 다시 모두와 같이 여행하고 싶다고 말하는 것, <아사코>에서 더러운 강이지만 그래도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 <드라이브 마이 카>(2021)에서 길고 긴 낮과 긴긴밤의 연속을 그냥 살아가자고 말하는 것, <우연과 상상>에서 노조미라고 같이 외치는 것과는 달리 침묵과 무인의 풍경으로 마무리되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의 엔딩만 비교해도 그러하다. 인간의 삶이 지닌 모순적이고 양면적인 속성에 관해 두 인물이 나누는 대화의 깊은 공감과 조화로운 감흥으로 끝이 나던 이전과 다르게, 영화라는 매체의 이야기와 이미지가 지닌 모순적이고 양면적인 속성을 전면화하는 것이다. 이것을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낮과 밤의 경계와 안개가 감각하게 하는 불투명함으로 확인할 수 있다. 타카하시가 쓰러지고, 타쿠미와 하나가 이미지 저편으로 사라지며 인간뿐만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내는 갈등과 이야기도 모습을 감춘 불투명한 이미지의 감각과, 현악기 선율에 묻힐 듯 말 듯 들리는 타쿠미의 거친 숨소리를 따라 하늘을 비추는 카메라의, 인간을 따라 움직이지만, 인간의 시선이 아닌, 영화적 시선의 불투명함이 바로 그것이다. 하마구치는 자신이 잘하는 이야기 구성 방식을 비틀어 과감하고 모험적인 영화를 만들어냈다.
글·정우성
2021년 영평상 신인평론상을 받았다. 현재 예술강사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