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주의 문화톡톡] 아담 II
최초의 사람인가 질료인가?
아담, 최초의 사람인가 질료인가?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은 최초의 인류다. 그런가 하면 최초의 남자이고 대표 인류이기도 하다. 성서에서 상징성이 가장 큰 인물 중 하나다. 그는 유대인이나 기독교인, 혹은 종교적 범주로 제한할 수 없다. 오직 창조자 하느님과 피조물 한 사람만 있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특정 인종이나 신분 계층으로 분류되지 않는다. 아담은 ‘처음’ 또는 ‘시작’에 관련된 첫 사람이기에 그렇다. 창세기에서 아담은 적어도 ‘우리’와 ‘너희’로 나눌 수 없다. 주로 창세기 1-5 장에 등장하는 아담이 고유명사인지 아니면 일반명사인지 구별하기 쉽지 않다. 정관사 없는 일반명사(~d'a')로 194 차례, 정관사(~d'a'h')와 함께 86 차례 언급되었다. 이 글은 아담이 활용된 용례를 살피고, 왜 흙으로 아담을 만들었는지 그 질료에 관한 논구이며, 마지막으로 그 어원적인 관점에서 분석하고자 한다.
1. 아담의 용례
흔히 아담을 언급할 때 ‘최초의 인류’(Urman)를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처음 사람에 대한 상징으로 강력하게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창세기 용례는 단순하지 않다. 한글 번역을 비롯한 대부분 외국어 성서는 주로 고유명사처럼 ‘아담’과 일반명사 ‘사람’으로 옮긴다. 심지어 한 문장에서 ‘아담’과 ‘사람’으로 번역되어 주의가 필요하다(창세기 5:1). 그러니 어떤 맥락에서 쓰였는지 문맥을 살펴야 한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크게 두 가지, 세분하면 네 가지 용례로 구분할 수 있다.
우선 아담은 처음 사람으로 모든 인류를 대표한다(창세기 2:5,7,8,15,16,18). 인간의 조상이며 사람의 전형이다(창세기 5:1; 누가복음 3:38). 첫 번째에 주어지는 상징성과 대표성을 가진 것이다.
둘째는 인류, 곧 일반적인 사람을 뜻한다(창세기 1:26; 6:1,5-7; 9:5,6; 시편 22:6; 잠언 8:4). 집합명사로 하느님과 대비되어(사무엘상 16:7; 이사야 31:3; 말라기 3:8), 짐승과 구별되어(창세기 6:7; 출애굽기 8:13-14; 예레미야 21:6), 연약하고 이 세상에 속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시편 82:6; 144:3-4; 욥기 5:7; 14:10; 전도서 12:5) 등으로 나뉜다. 더러 남자와 여자의 성별을 특정하지 않고 ‘사람’으로 지칭할 때도 있다(창세기 5:1,2).
셋째, 아담은 최초의 남성이다. 정관사 ‘아담’은 남성과 여성의 구별 없이 인류 전체를 대표하지만(창세기 1:27) 첫 남성은 정관사 없이 등장한다(창세기 2:7; 2:20; 3:8-12). 나중에 여성이 창조될 때 남성은 정관사로 지칭되었다(창세기 2:21-23). 첫 인류 ‘아담’과 처음 남자 ‘아담’은 겹친다.
넷째는 개인 아담을 뜻한다(창세기 5:3-5; 역대상 1:1). 고유명사로 아담은 창세기 2장 20절, 3장 17절, 21절, 4장 25절, 그리고 5장 3-5절 등에 쓰였다. 또한 족보에서 대체할 수 없는 고유한 인물로 나온다(창세기 5:1,3-5; 2:20; 3:17,21).
로마 시스티나 성당 천장에 그려진 ‘아담의 창조’는 창세기 모티브와 거리가 멀다. 윌리암 블레이크는 하느님이 ‘흙더미로부터’ 아담을 빚는 장면을 포착하였다. 자세히 보면 아담이 형체를 서서히 드러내자 뱀이 꿈틀거리는 모습도 보인다.
2. 아다마와 아담: 질료와 수사의 융합
‘아다마’로 빚어진 존재 ‘아담’ 곧 최초의 인류는 이름 자체로 이미 흙과 깊은 관련성을 내포한다. 그렇다면 고대 히브리인들에게 흙은 어떤 대상이며 물질이었을까? 모든 생명체에게 흙, 또는 땅은 삶의 터전이다. 심지어 하늘의 새들에게도 공중에서 유영할 때 잠시 떠나있을 뿐 이내 땅에서 먹이를 구하고 죽어 흙에 떨어진다. 창세기 화자는 사람에게 흙은 피하거나 땅에서 분리될 수 없는 물질이자 필수적인 요소라고 보았다. 곧 평생 땅에서 살고 결국 ‘흙’으로 돌아갈 인생을 보며 ‘아다마’에서 ‘아담’을 떠올린 것이다. 그는 사람이 흙에서 나와 땅을 경작하고 언젠가 흙으로 돌아간다는 둘 사이의 거대한 인과 및 긴밀한 관계를 통찰하고 ‘아담’과 ‘아다마’의 수사법을 완성하였다.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때까지, 너는 얼굴에 땀을 흘려야 낟알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창세기 3:19 새번역>
사실 흙 아다마(hm'd'a])에서 나왔으니 사람 아담(~d'a')이라는 명명에는 화자의 통찰과 유쾌한 재치가 수사법으로 버무려져 있다. 곧 흙과 사람의 상호관련성을 청각적으로 깨닫게 한 것이다. 비슷한 소리 아다마와 아담은 또한 흙으로부터 절연할 수 없는 사람의 숙명을 동시에 함축적으로 충족시킨다. 인도유럽어 흄(ghum), 라틴어 휴무스(humus)와 휴먼(human)의 관계 ‘흙’을 매개로 형성된 낱말들이다. 그러나 히브리어 아담과 아다마는 듣는 순간 둘 사이의 연관성은 물론 사람의 본성까지 꿰뚫는다. 창세기 기자의 천재적인 고안이며 놀라운 신학적 성찰이다.
창세기에서 사람이 흙으로 빚어졌다고 말할 때 흙의 본질은 무엇인가? 흙이란 과연 어떤 질료이며 어떤 특성을 의미하는 것일까?(cf. 고린도전서 15:47-49). 흙은 두 가지 특징이 있다. 하나는 수분을 적당히 머금으면 싹을 틔운다. 다른 하나는 땅이 건조하고 습기가 부족하면 사막이 되어 죽음의 땅으로 바뀐다. (흙으로 만든 도자기가 고온에 가열되면 흙의 성분은 완전히 사라지고 전혀 다른 물질이 된다) 사람도 흙처럼 수분을 적절히 함유하면 유연하여 생명을 품을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먼지를 날리고 씨앗을 싹틔울 수 없다. 다음은 <욥기>에 나온 엘리후의 말이다.
4하나님의 영이 나를 만드시고, 전능하신 분의 입김이 내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6보십시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어른이나 나나 똑같습니다. 우리는 모두 ‘진흙’(rm,xo)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욥기 33:4-6<새번역>)
창세기에서 아담은 그의 질료 아다마와 불가분의 관계를 내포한다. 아담은 그 질료와 인간의 본질에 대한 실용적인 숙고와 인식의 결과물로서 창세기 신학자의 깊은 사유와 성찰이 녹아들어 있다.
3. 어원으로 본 아담
어원을 추적하면 아담을 여러 각도에서 조명할 수 있고 의미가 더 풍성해진다. ① 아담은 흙 ‘아다마’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유음(類音) 현상으로 히브리 수사법 중의 하나다. 하지만 이처럼 재치 있는 표현은 다른 언어로 번역되는 경우 살려내기 어렵다. 중국 음식점 입구에 간혹 복(福)를 거꾸로 매달아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손님들이 오가며 ‘倒福’(daofu), 곧 ‘복이 뒤집혔군요’라고 말한다. 그런데 주인은 정작 ‘到福’(daofu), 즉 ‘이 집에 복이 들어갑니다’로 듣는다. 이것은 비슷한 발음을 활용한 우스개, 언어유희(pun)다. 한자의 유음현상을 알지 못하면 이해할 수 없는 말이며 화어(華語) 사용자가 아니라면 공감할 수 없는 표현이다.
‘아담’을 한글 ‘흙’이나 영어 ‘earth’ 등처럼 옮기는 순간 히브리어에 내재된 수사를 읽을 수 없다. 지금은 관용적 활용을 넘어 오랫동안 고착된 표현이기 때문에 히브리적 수사법을 살려서 번역하는 것도 쉽지 않다. 적어도 본래적 의미와 활용은 파악할 필요가 있다. 최근 히브리어 ‘아다마’에서 온 ‘아담’을 생동감 있게 표현하여 ‘earth’에서 나온 ‘earthling’으로 번역하기도 한다(Phillis Trible). 우리말로 옮긴다면 ‘흙’에서 나왔으니까 ‘흙투성이,’ ‘흙덩이’로 표현할 수 있을까!
② 아담은 또한 생명을 상징하는 ‘피’(~D')에서 파생한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창세기 9장 4절에 ‘그러나 고기를 먹을 때에, 피가 있는 채로 먹지는 말아라. 피에는 생명이 있다’<새번역>고 기록한 대로 모든 생명체에는 피가 들어있다(레위기 17:11,14; 신명기 12:23). 따라서 아담은 그의 몸에 흐르는 ‘피’의 의미를 강조하여 붙인 이름으로도 간주할 수 있다. 이 경우 아담은 ‘피’ 곧 생명을 간직한 상징적인 이름이 된다.
한편 ‘아다마’가 붉은 흙이나 피부를 뜻하는 ‘에돔’과 관련되었을 가능성이다. 앗시리아어, 우가리트어 등에서 흙은 붉은색으로 인식되었다. 성서에서 에돔(~Ada/)은 살갗이 붉은 종족을 지칭한다(창세기 25:30). 에서가 에돔 사람의 조상인 것은 털이 많아서만 아니고 붉은 피부 때문에 생겨난 이름이다. 모음이 살짝 차이가 있을 뿐, 아담과 에돔의 세 자음은 똑같다.
③ 아담은 ‘하느님의 형상을 따라 하느님의 모양대로’ 창조되었다. 창조 신학의 가장 놀라운 선언이다. 기원전 6세기 히브리 신학자는 사람으로부터 하느님의 특징적 면모를 알아채고 ‘하느님의 모양대로’ 빚어졌다고 고백한 것이다. 히브리어 ‘모양’(hm'D')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동사적 의미다. 여기서 ‘닮다, 비슷하다, 같다’는 뜻이고(시편 144:4; 아가 2:17), 하느님과 대등한 존재라는 뜻이다(이사야 14:14).
④ 마지막으로 아담은 ‘안개’(dae)와 연관성을 찾을 수 있다.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창 2:6)에서 안개는 사람의 출현 전에 지표면을 감싸고 있었다. 특히 사막 기후에서 안개/이슬은 하늘의 비를 대신하여 식물이 자라 열매 맺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뿐만 아니라 아침에 있다가 금방 사라지는 안개는 인생의 무상을 상징하기도 한다(욥기 36:27; cf. 야고보서 4:14). 안개는 신속하게 사라지는 물질이다(이사야 44:22). 아담을 안개의 원시적 복수 형태(~d'a')와 흡사하다는 이론에 근거한 것이다. (복수 용례를 찾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다)
사람이 ‘살아 있는 생명체’가 된 것은 그의 영이 하느님으로부터 비롯되었으나 ‘아담’이라고 부른 것은 그의 몸이 흙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흙이라는 물질과 ‘하느님의 숨’이라는 비물질로 이뤄진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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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의 힘은 크다. 더구나 태초에 일어난 일이라면 더 강력하게 감지되고 각인된다. 아담은 처음 창조된 사람으로 아직 분화되지 않은 개인(individual)이며 대표 인류다. 흙, 아다마에서 창조되어 아담으로 불린다. 아담과 아다마는 유음을 활용한 수사이며 언어유희다. 그러나 양자의 관계를 수사법으로 그치면 곤란하다. 아담과 아다마 사이에 함축된 지성적 통찰과 신학적 의미를 간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대 히브리 화자는 사람이 흙에서 태어나 땅에서 살다가 다시 흙으로 회귀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아다마’와 유관성을 ‘아담’에 새긴 것이다.
흙에서 태어난 아담은 또한 아다마처럼 흙의 성질을 유지한다. 일정한 수분을 간직하면 생명을 품고 꽃 피울 잠재력을 가진다. 피가 아담의 몸속을 흐르는 것은 습기가 땅에 포함된 것과 같은 이치다. 아담은 창조자의 ‘모습’으로 태어났으나 그의 삶은 마치 아침 ‘안개’처럼 잠깐이다. 사람이 날마다 딛고 서 있는 ‘흙’에서 비롯되었다는 히브리 신학자의 놀라운 성찰과 깊은 사유다. 우리 모두 흙에서 빚어진 아담이다. 언젠가 아다마의 품에 안길 것이다.
한신대 신학부 교수. 히브리 유산을 인문학으로 푸는 글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