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의 봄’ 다음 목표는 군주제?
튀니지·이집트·리비아·예멘 등에서는 혼란스러운 과도기 민주주의가 시작된 데 반해, 시리아에서는 전투가 계속되고 있다. 별로 눈에 띄진 않지만, 요르단이든 모로코든 그 밖의 중동 국가들이든 간에 시위의 발단은 군주제에 있다. ‘아랍의 봄’은 사건이 아니라 진화 과정이다.
정치 해방의 길목에서 최선을 다해 투쟁했던 국가들에 묻는 핵심적인 질문이 있다. 민주주의가 제도화될 수 있을까? 비록 진보가 깨지기 쉽고 사회와 정부 간 관계가 계속 충돌하더라도, 이 질문의 답변은 신중을 요하긴 하지만 '그렇다'이다. 이와 연관된 일부 국가에서 사람들은 민주주의 기관들이 가동되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개혁과 변화의 과정이 다시 중동의 다른 국가들로 확산될 수 있을지 여부는 전적으로 여러 가지 요소, 즉 종교적 긴장, 정치적 결집, 현 체제에 대한 적응 능력과 지정학적 문제 등에 달렸다.
북아프리카의 향후 전망이 가장 밝아 보인다. 민주주의의 제도화는 법치국가의 버팀목인 세 가지 축- 선거, 의회, 헌법- 주변으로 정계를 응집시킨다. 이 축들이 튼튼하고 지속 가능할 때, 정부는 통상적으로 급진적 그룹과 반동 세력 그리고 과거 독재체제로의 회귀 세력에게서 안전하다. 법과 공정한 선거를 소중히 여기는 민주주의는 경쟁 정당 간 정권 교체를 강력히 요구한다. 정국이 불안하긴 하지만(1) 튀니지를 비롯한 리비아와 이집트에서 이같은 제도화 프로세스가 가동 중이다. 이 세 국가는 각각 이전 정권하에선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인상적인 경쟁과 다원주의 속에서 총선을 치렀다. 튀니지에선 국민투표로 탄생한 제헌국회가 헌법 제정을 마무리 중이다. 튀니지의 위기는 두 가지 측면에서 봐야 한다. 하나는 신정부가 살라피스트(Salfiste·극단 이슬람주의자)의 폭력(주튀니지 미국대사관 공격 이후 종식됨)을 너무 오랫동안 방치했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때늦은 경제개혁, 특히 취약지구에서의 경제개혁 가동이 원인이다. 이런 긴장감과 다양한 정치적 이권 싸움에도 불구하고, 극소수를 제외한 어느 누구도 민주주의의 게임 규칙을 문제 삼지 않는다. 리비아의 상황은 이와 다르다. 리비아에서는 무아마르 카다피 정권이 무장세력에 의해 약화돼 붕괴되며 새로운 정권이 탄생됐다.(2)
이집트 대선에선 무슬림형제단의 무함마드 무르시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새로운 국가원수가 된 그는 취임하자마자 후세인 탄타위 군 총사령관을 해임하며 시민 정권의 권력이 군부 위에 있음을 확실히 했다. 시민과 군부 간 관계 재정립을 향해가는 이 첫걸음은 장구한 역사의 독재국가 도구인 군부, 친위대와의 결별을 의미한다.
과도정권 속에서 살라피스트 같은 일부 급진 그룹이나 과거 독재체제를 그리워하는 세력을 제외한 대부분의 정치인들은 새로운 정권을 법적으로 인정했다. 이들이 정권을 인정했다고 해서 제도화 과정을 겪고 있는 (아랍) 민주주의가 꼭 자유 민주주의가 되란 법은 없다. '아랍의 봄'을 주도한 민주주의자들이 혁명을 한 것은 자신의 사회를 서양의 시각에 합당한 사회로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아랍의 맥락에서, 서양의 시각이란 남녀 평등, 포르노 같은 '비도덕적 물품'에 대한 검열 해제, 표현과 신성모독의 자유 등을 일컫는다. 개인의 권리를 신성시하는 정치적 교리인 정치적 자유주의는 민주주의의 통합 이후 단계에서나 등장할 수 있다. 세속주의와 종교적 원리주의 간 갈등으로 얼룩진 현 단계가 '서양적인 규범'의 범주에 도달하거나 서양의 가치와 타협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과도정부의 최우선 순위는 이데올로기 투쟁이 아니라 체제 유지에 있다. 민주적 정상화가 시민과 각 정당의 지지를 똑같은 이데올로기 프레임에 끌어들이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법과 민주화 과정이 최종 게임의 법칙임을 전제한다. 심지어 이슬람주의자들조차 슬로건만으론 선거에서 이길 수 없음을 깨닫고 있다. 민주적으로 선출된 모든 정부와 마찬가지로, 이들은 황당한 지복이나 교리가 아닌 정치적 선택을 통해 유권자들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
미국과 유럽의 정계와 언론들은 혁명에 거의 공헌하지 않은 튀니지 엔나흐다당과 이집트 무슬림형제단 같은 이슬람주의 정당들이 혁명의 승자가 된 것에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여러 가지 요인이 대중의 이슬람화에 대한 우려를 해소해준다.
첫째, 서양의 옵서버들은 종종 망각하는데, 이슬람주의자들은 공공장소에서 코란을 해석할 수 있는 그 어떤 상징적인 독점권도 없다. 이집트의 전통 명문 알아즈하르대학과 수피교도(Soufi·이슬람의 신비주의자) 같은 종교단체들은 이슬람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많은 차이를 보이는 기준을 바탕으로 한 신앙과 정치의 유기적 결합을 구상하고 있다. 심지어 이슬람의 거대 정치세력 내에서도, 때때로 계파 간 격렬한 불협화음이 불거지고 있다. 예를 들어 무슬림형제단과 알누르당의 살라피스트들은 주로 복지와 종교적인 문제로 충돌하고 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종교인에게 부여된 코란 해석의 자유는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이슬람을 장악하려는 사람들의 야망을 꺾는 가장 확실한 제어장치가 되는 셈이다.
둘째, 이슬람주의가 사회 자선단체나 호전적인 이슬람의 지하디스트(Djihadiste·성전 지지자)를 무분별하게 다 규합하긴 했지만, 과도정부에서 정치적으로 가장 영향력 있는 이슬람주의의 화신은- 혁명의 전위대와 전혀 무관한- 무슬림형제단이다. 무슬림형제단은 처신을 잘했다. 그 예로, 1979년 중동의 세속 독재 속에서 이슬람 혁명을 주도한 이란을 지지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이들은 1990년대 오사마 빈라덴의 성전 호소에도 귀를 막았다.
셋째, 이슬람주의자들이 승리를 거둔 것은 명백하지만 이들이 압도적인 득표율로 이긴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슬람주의자들이 아랍 대중의 유일한 목소리로 간주될 수 없다. 물론 무슬림형제단과 그보다는 한 급 아래인 살라피스트들이 2011년 12월 포스트 무바라크 총선 때 의회 의석의 5분의 3을 차지했다. 하지만 이후 이들의 인기가 시들해졌다. 2012년 6월 대선 때, 무르시가 치욕스러운 옛 정권의 상징인 아흐마드 샤피끄를 상대로 겨우 이긴 것이 그 방증이다.
변화의 중심에서 배제된 젊은 층의 저항
마찬가지로, 튀니지 국회 의석의 40%를 통제하는 상대적인 여당 엔나흐다당도 어쩔 수 없이 세속적인 진보세력과 연합했다. 리비아에서는 2012년 6월 총선 때 정의와건설당(PJC)과 현지의 다양한 무슬림형제단의 추종 세력이 10%의 득표율을 얻는 데 그쳐 간신히 파국을 면했다.
마지막으로, 처음엔 선거판 입성에 망설였던 이슬람주의자들이 선거판에 변해서 나왔다. 장기적 안목에서 볼 때, 이집트에선 무슬림형제단과 이들의 사촌 격인 정적 살라피스트들이 언제 민주화 과정에 합류할 것인지가 관건이다. 어쨌든 확실한 것은 이들이 무력으로 권력을 잡을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무슬림형제단이 잘 조직된 사회단체이긴 하지만 강제적인 집행 능력이 취약하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제작된 이슬람 혐오주의 영화 한 편 때문에 최근 촉발된 성난 반미 시위는 이슬람주의 정치인들이 주도하는 민주적 정상화가 이슬람화돼가고 있음을 드러냈다. 이 영화는 실제로 주요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을 억압해 이슬람 급진세력과 확실히 거리를 두도록 했다. 게다가 많은 정치 지도자들은 '후두드'(Hudud)라 불리는 이슬람 형법 규정을 내세운 신성모독죄 대신 관습법을 적용한 명예훼손죄로 영화를 규탄했다.
사람들은 당연히 대부분의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핵심 요구 사항이 이슬람법(Sharia)에 따라 아랍 무슬림 사회에서 이슬람 축을 강화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무슬림형제단은 분명 자유주의 조직은 아니다. 그래서 세속 집단은 신정정치의 설립을 두려워한다. 하지만 무슬림형제단의 화신인 주요 이슬람 세력은 종교 정체성의 중요성과 경쟁 선거의 제도적 규범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민주주의의 규범을 채택하는 게 좋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이 세력들은 과도정부에서 자신이 맡은 정치적 역할에서 뽑아낼 수 있는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민주주의를 만들기 위해 서양의 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따를 필요는 없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1970년대의 민주화 때는 물론이고, 1980년대 남미가 새뮤얼 헌팅턴이 '민주화의 제3의 물결'(3)이라고 부른 민주화 물결에 휩쓸렸을 때도 그런 이데올로기 프레임은 없었다. 민주주의 논리는 불협화음, 다원주의, 그리고 해명의 필요성을 근간으로 하는 헌법의 생리 속에서 서로 대립시키는 불화를 수용하는 것이다. 헌법 생리상 대안은 불안정, 충돌, 막다른 골목을 뜻하기 때문이다.
일단 민주주의 작업이 결정적인 지점, 대부분의 세력이 선거 참여 원칙을 수락하는 지점에 도달했을 때, 시민과 정치 지도자들은 더 자유롭게 사회 변화에 대한 토론에 참여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리비아·튀니지·이집트 같은 국가들은 민주화 과정을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시키기 위해 서양인들이 좋아할 만큼 심도 있게 세속화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다. 서양 국가들에서도 세속주의가 항상 민주주의를 발현시킨 것이 아니라 그 반대였다.
대부분 도시 중산층 출신으로서 이슬람 단체에 소속되지 않아 뼛속까지 세속적인 젊은 시위대가 혁명 물결의 최전방에 있었다. 그러나 현재 이 젊은이들은 리비아·튀니지·이집트 사회에서 소외됐다. 이들과 함께 더 세속적이고 민주적인 이들의 미래 비전도 사라졌다. 왜냐하면 이들이 맞서 투쟁한 체제가 붕괴됐을 때 이들은 일관성 있는 정치 전선을 구축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이슬람주의자들은 정권 부재를 틈타 자신의 병력을 결집해 선거 측면에서 가변적인 성공을 거둔 데 비해, 젊은이들의 단체는 제도권 정치 무대 진입에 반대했다.
이들의 부재는 심각한 결과를 초래했다. 정치 표현의 공간으로서 거리를 선호하고, 미온적인 방법과 조직적인 선거정책 방법보다 직접적이고 자발적인 시위에 초점을 맞춘 혁명적인 젊은이들은 모든 권력, 국회와 시민의회 같은 새로운 민주주의 기관에서 배제됐다.
길거리 정치는 두 가지 효과를 냈다. 첫째, 길거리 정치는 시민에게 국가 감시 권한을 행사하게 했다. 2011년 1월 25일의 이집트 혁명은 학생·노동자·중산층이 도심에 결집해 중앙권력과 맞서 싸우며 자신의 권리를 요구했기에 가능했다. 둘째, 끝없는 거리 항쟁은 제도상의 소요, 선거와 정치 캠페인을 대신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거리 항쟁이 시스템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대다수 시민이 자신의 정당성을 인정해야만 건립될 수 있다.
젊은이들이 '아랍의 봄'에 자신의 기여를 연장하고 싶으면 이들은 새로 들어서는 정부기관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들이 자신의 에너지와 투사 정신을 국회와 자문기관 등 공식 정치기관에 투자할 시기가 됐다. 그래야 이들은 종교 보수주의의 표명을 비롯해 민족주의 경향, 세속적 요구, 아랍 사회의 폭넓은 이데올로기 스펙트럼을 구성해 중도와 진보의 가치 표명을 독려하는 새로운 정치 무대에서 조커 역할을 할 수 있다. 걷잡을 수 없는 길거리 항쟁은 최선의 정치도 망칠 수 있다. 만약 젊은이들이 지탱하고 있는 민중의 관심사가 시스템 내에서 제도적 중계자(민중의 관심을 대변해줄 사람)를 찾지 못하면, 잘 조직된 소수가 권력을 장악해 과거의 독재를 부활시키지 말라는 법도 없다.
이같은 일이 '민주화의 제3의 물결' 동안 여러 번 있었다. 독재자들은 새로운 민주체제를 전복시키는 방법을 아주 쉽게 찾아낸다. 아랍 세계에서 가장 큰 위험은 기괴한 독재의 회귀가 아니라 민주주의 도구를 조작하는 과두정치 연합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독재 시스템의 등장이다.
모로코에서 사우디까지 왕정의 미래는?
주요한 역사적인 격변이 그랬듯, '아랍의 봄'은 승자와 패자를 양산했다. 게다가 젊은 시위대와 엘리트 지식인들은 당연히 후자에 속했다. 이들은 자신의 아카데믹한 이데올로기를 민중의 실질적인 문제와 결부시키지 못해, 선배들이 한 실수를 반복했다.
1920∼30년대 아랍 민족주의의 도래 이후, 교육받은 엘리트 세대들은 진보적인 입장을 취하며 언론의 조명과 중산층의 지지를 받았다. 야당의 원칙은 시오니즘·제국주의·오리엔탈리즘·자본주의·식민주의 등 외부 위협엔 반대하고 범아랍주의, 사회정의, 서방과의 평등 같은 더 긍정적인 요구를 지지했다. 그러는 사이 아랍 지식인들은 자신이 속한 사회보다는 훨씬 진보주의자들처럼 굴었지만, 민중과 정당 내에선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사회 부적격자들이었다.
이들의 소외는 갈수록 현지의 현실성과 동떨어지는 담론, 즉 아랍 땅에선 전혀 혁명을 욕망하거나 상상할 수 없다는 담론 탓도 있다. 마그레브와 중동을 짓누르는 모든 악의 근원으로 지목된 시오니즘과 미국 제국주의에 대한 이들의 습관적인 저주는, 아랍 민중이 정치 지도자의 독재 그리고 부패와 맞서 싸우길 원했을 때 그 대상이 없어진 것이다. 안타깝게도 일부 지식인들은 '아랍의 봄'을 이스라엘과 서양의 음모라 오판한 것을 반성했다. 이라크 바스당의 붕괴와 함께, 어쩌면 곧 시리아의 범아랍 민족주의의 마지막 보루(바스당)도 완전히 사라지게 될 것이다.
젊은이들의 단체와 엘리트 지식인들이 인기가 없는 또 다른 원인은 이들을 일종의 세속 근본주의 속에 가둔 각종 형태의 이슬람주의에 대한 이들의 뿌리 깊은 적대감에 있다. 이런 세속 근본주의는 온건한 이슬람주의자들이 정부 내에서 사소한 역할을 하는 것조차 용납하지 못했다.
(젊은 세대와 엘리트 지식인 그룹에 이어) 세 번째 패배 그룹은 아랍 군주들이다. '아랍의 봄'으로 실각당한 왕이 한 명도 없다는 것을 알기에 이런 진단이 처음엔 황당할 수도 있다. 유럽에서 통용되는 분석표에 따르면, 왕들의 이런 회복력은 두 가지 요소로 풀이된다. 첫째, 현 지배 왕조가 아랍 문화의 기층 속에 깊이 뿌리박힌 정당성에 힘입고 있다. 요컨대 민중은 자신의 왕과 왕자들을 반식민주의 투쟁 전이나 투쟁 중에 형성된 영광스러운 역사와 결부해 지지했다. 둘째, 절대 독재에 준하는 이 체제들은 단순한 억압을 넘어 자신의 방식으로 여론을 조작하기 위해 상황 적응 능력이 뛰어난 정부기관을 갖추고 있었기에 이들은 위기 상황에 적응을 더욱 잘할 수 있었다.
이같은 해석이 다 틀린 것은 아니지만, 현재 아랍 군주들이 고비를 맞았다는 것을 소홀히 한 해석이다. 이들의 자리는 10년 전보다 훨씬 약해졌다. 예를 들어 바레인의 대규모 민중시위는 걸프협력협의회(GCC)가 위임한 군대와 바레인 정부군이 합동 유혈 진압에 나서야 겨우 제압됐다.
모로코 또한 대규모 시위를 경험했다. 헌법 개정 약속이 일시적으로 국민의 분노를 가라앉혔지만, 심도 있는 개혁의 부재가 험난한 미래를 예고하고 있다. 국왕 모하메드 6세가 아무런 반대급부 없이 정부 내각을 꾸리겠다고 승인하며, PJD의 이슬람주의자들은 다른 정당의 이슬람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신뢰를 잃을 위기에 처했다. 설상가상으로 시골과 도시 간 분열이 예전처럼 눈에 띄지 않는다. 불만이 보편화되고 변화의 열망이 계층과 지역 간의 해묵은 분열보다 더 커지고 있다.
"급격한 개혁은 아직 위험"
사우디아라비아의 군주제 또한 사회를 짓누르고 있다. 지질 구조의 우연성이 주는 축복을 누리는 사우디아라비아는 넘치는 석유 달러와 개발 프로그램으로 벌어들인 자신의 막대한 부를 야당의 모든 생각을 잠재우는 데 사용해, 군주제는 필요한 구조 개혁을 내년 음력 초하룻날로 미루는 데 성공했다. 오래전부터 시범적으로 국회를 운영하고 있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이웃 국가 쿠웨이트는 반대 절차를 밟고 있다. 반부패 및 반정부 시위대는 알 사바 가문의 정권을 전복시켰고, 야당은 2012년 12월 총선을 보이콧했다. 군주와 야당 간 분쟁이 근본적인 선택을 놓고 극에 달했다. 국왕은 왕족 출신이 아닌 사람을 총리로 임명하든지 혹은 심각한 출혈을 감수하고 국회를 해산한 뒤 독재체제로 회귀하든지, 선택의 기로에 섰다.
상호보완적인 두 동력(반정부 세력)의 통합하에서, 요르단의 군주제는 고사 직전이다. 그러나 이슬람주의자들은 군주체제를 유지하고 싶어 한다. 왜냐하면 요르단 왕국의 붕괴가 이스라엘에 동부 요르단 지역을 마치 모든 팔레스타인들의 원래 영토였다고 주장케 하는 단초를 제공해 종국에는 서부 요르단까지 팔레스타인 영토라 주장할까봐 두렵기 때문이다. 그렇긴 해도 이들은 입헌군주제와 더 많은 정치적 자유를 주장하고 있다. 암만의 베두인 군주제는 높은 실업률과 부패 사건으로 촉발된 국민의 강한 분노에 직면해 있다.
따라서 군주들이 직접 나서서 복잡한 이권 네트워크에서 발을 뺄 때가 왔다. 왜냐하면 아랍 왕조들이 사회계, 정치계, 재계, 기업인, 농부, 부족, 이슬람 학자들에게 혜택과 후원금을 미끼로 이들과 폭넓은 관계를 형성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군주제를 의회제로 대체시키는 급격한 개혁은 왕족 가문뿐 아니라 농민들에게도 해가 된다. 게다가 아랍 지역의 역사- 탈식민지주의 역사이든 탈냉전 시대의 역사이든 간에- 는 군주제가 자신의 행정부를 도덕적인 당국으로 바꿀 의향이 거의 없음을 확인시켰다. 민중의 강력한 압박 없이는 왕자들이 자진해서 진지한 개혁을 시도할 의향이 전혀 없는 셈이다. 오랫동안 중용 노선과 적응성으로 칭찬을 받았던 아랍의 군주들이 소중한 기회를 망칠 위기에 처했다. 보수주의 정신이 이들에게 미래의 분쟁과 불안정을 걷어내기 위해, 그리고 위험에 처한 사회를 통합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라고 요구하지만, 이들은 민주주의 체제로의 전환에 참여하길 거부한다.
'아랍의 봄'의 지정학적 차원은 이상한 역설을 명징하게 보여준다. 사건이 어떻게 시작됐는지 생각해보자. 사건은 지역 차원에서 시작했다. 시위는 먼저 국가 차원에서 잔인한 체제에 대한 정의, 존엄성, 저항 요구처럼 시작됐다. 몇 달 만에 전국을 강타한 '아랍의 봄'은 공통의 요구와 가치를 담은 코퍼스(Ccorpus·말뭉치)를 들고 국경을 넘어갔다. 이같은 확산은 자주 거론되는 '알자지라 효과'를 뛰어넘었다. 왜냐하면 이것이 단지 현대적인 의사소통 형태뿐만 아니라 급진적인 정치적 투쟁의 새로운 개념도 함께 전파시켰기 때문이다. 사회 네트워크와 전통적인 언론매체들이 시위를 확산시켰고, 시위대는 자신의 개념을 지탱해주는 일부 동력을 범아랍 단체들로부터 취했다. 하지만 이들은 독재체제에 대한 좌절감을 더 단단히 응집시키고, 강력한 힘으로 시민권을 주장하기 위해 모든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시위대에서 배제했다.
현재 '아랍의 봄'은 세 번째 단계인 제도화 단계에 들어섰다. '아랍의 봄'은 더 이상 국가적·초국가적 요구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국제적인 대립의 장을 만들어냈다. 2011년 봄, 바레인의 반란은 이 과정의 시작이었다. 시아파 종교계가 주도해 반란이 일어나자 수니파 왕국은 이웃 나라의 수니파 종교계를 비롯한 사우디아라비아, 미국, 터키에 의해 움직이면서 은밀히 이스라엘까지 개입하는 전략적 정치기구에 속한 서구 열강들과 동맹을 강화했다. 그래서 결국 바레인의 반(反)왕권 민중 투쟁은 이란·시리아·헤즈볼라의 분신인 급진 시아파 지지 시위라는 오명을 쓰고 폐기처분됐다. 시리아의 내전도 이 과정을 심화했다. 하지만 바레인과는 정반대 현상이 벌어졌다. 이번엔 민중시위대가 온건 수니파 세력과 이들의 서구 동맹국들과 손을 맞잡았다. 반대로 바샤르 알아사드 시리아 독재정권은 시아파 세력과 동맹을 강화했다.
지정학적 올가미에 걸린 '아랍의 봄'
종교적·지정학적 차원이 서로에게 자양분이 됐다. 사우디아라비아·터키·미국·이스라엘은 이란·시리아·헤즈볼라의 영향력을 제한해야 하는 똑같은 고민을 가지고 있다. 이런 경쟁이 세가 약한 종파(시아파)를 폭발 가능성이 다분한 전쟁 세력으로 변질시켰다. 실제로 서구 언론들은 수니파 정부, 특히 수니파 왕국들은 온건과 안식의 피난처처럼 소개하고 있는 반면, 시아파는 마치 극렬 이슬람주의나 사회 불안 요인으로 소개하며 고도의 흑백논리를 펴고 있다. 따라서 이같은 분쟁은 사회적 혼란 위협에 직면한 일부 정권에 현 정권을 유지할 구실을 제공하는 셈이다.
일단 세계 무대에 던져진 '아랍의 봄'은 변화가 진행 중인 혁명의 진원지, 아랍 국가들로 부메랑처럼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이란·시리아·헤즈볼라 등은 튀니지·리비아·이집트의 새로운 정치 지도자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그러는 동안 친서방계 수니파 동맹도 똑같은 시도를 했다. 하지만 이같은 압박(시아파와 수니파의 압박)이 누적돼 튀니스, 트리폴리, 카이로는 완전 중립적인 이상한 정책을 채택해 각자 자신의 영토에서 제도화 과정에 박차를 가했다. 아랍 지역의 불안 공포에 더욱 단단해진 이 국가들은 자국의 내정 안정을 최우선시했다. 2012년 8월 테헤란에서 개최된 비동맹 국가 정상회담 때 무르시 대통령은 균형자 역할의 원칙을 강조했다.
튀니지·리비아·이집트의 새로운 정부는 종파, 편협한 종교적 해석, 지정학적 동맹과 가까이하지 않기 위해 유연성과 실용성 간 억제된 정책을 펼치고 있다. 자국 내에서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애쓰는 이 정부들은 시리아 내전에서 유혈 사태를 빚고 있는 두 호전 세력(시아파와 수니파)을 마치 새로운 민주주의의 질서 확립을 가로막는 장애물처럼 간주한다.
이같은 역설, 국제 분쟁이 자국 무대에서 민주화 과정의 안정화에 기여하길 바라는 역설이 중동 현대사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최근까지도 서구와 이들의 아랍 동맹국들은 토론에서 전복적이고 파괴적으로 간주되는 이데올로기, 예를 들어 공산주의 위협의 상징인 브레즈네프(옛 소련)와 나세르(이집트 세족주의) 간 동맹, 아야톨라 호메이니의 이슬람 혁명, 오사마 빈라덴이 구현하는 '악의 축' 등과 같은 이데올로기 통합을 놓고 툭하면 반목하고 있다. 현재 진행 중인 아랍 지역의 재편성은 어쩌면 각국의 입장을 예상보다 빨리 드러낼 수도 있다. 심지어 '아랍의 봄'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도 그 어떤 정부 관계자도 '아랍의 봄'에 이데올로기 딱지를 붙여 제국, 초능력, 급진적 조직과 동일시하려 하지 않았다. 오로지 자신의 힘만 믿고 따르던 '아랍의 봄'은 결국 지정학적 올가미에 걸려들고 말았다.
종교적 충돌이 미래를 결정지을 것이다. 외부에서 시아파와 수니파 간 갈등을 부추기고 도구화한다지만, 이들의 갈등은 '아랍의 봄'의 앞날에 지속적으로 수많은 골절상을 입혀 이를 약화시킬 것이다.
글 / 히참 벤 압달라 엘 알라우 Hicham Ben Abdallah El Alaou 국제정치(중동 지역) 학자.
번역 / 조은섭 chosub@ilemonde.com
(1) <아랍의 봄의 잉걸불 위에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2년 11월호.
(2) Patrick Haimzadeh, ‘민병대의 손에 넘어간 리비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2년 10월호.
(3) Samuel P. Huntington, <The Third Wave, Democratization in the Late Twentieth Century>, University of Oklahoma Press, Norman, 1991.
2011년 ‘아랍의 봄’ 일지
1월 14일: 튀니지 대통령 진 엘아비딘 벤 알리 사우디아라비아 망명
1월 25일: 이집트 대통령 호스니 무바라크 첫 반대시위
1월 26일: 요르단의 물가 상승 반대시위
1월 27일: 알리 압둘라 살레 예멘 대통령 반대집회
1~2월: 알제리 집회 실패
2월 11일: 무바라크 정권 퇴진
2월 14일: 바레인의 첫 시위. 동부 사우디아리비아 지역의 시위
2월 15일: 리비아 벵가지에서 폭동 발발
2월 20일: 모로코의 첫 시위
3월 14일: 바레인의 시위 진압에 사우디아라비아의 개입
3월 15일: 시리아 내전 발발
3월 17일: 리비아에 대한 유엔 안보리의 결정
4월: 아랍에미리트연합 내에서 다수의 블로거들 체포
10월 23일: 카다피 장군 체제 붕괴. 튀니지 제헌의회 선거. 엔나흐다당이 최다 득표
11월∼2012년 1월: 이집트 총선에서 무슬림형제단 승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