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욱의 시네마 크리티크] 히치콕 월드 네 번째 이야기, 히치콕 영화의 살인자들(1)
흔히 영화에서 살인자는 남성으로 설정되고 히치콕 영화도 그렇지만, 여성 인물이 살인을 저지르는 경우도 종종 볼 수 있다. 그 가운데 첫 번째 사례는 히치콕이 영국에서 연출한 영화 <사보타주>(1936)의 실비아이다. 실비아는 남편 벌록, 남동생 스티브와 함께 극장을 운영하며 살아가는 평범한 여성이다. 문제는 벌록이 런던에서 사보타지를 일삼는 범죄자라는 건데, 실비아는 전혀 모르고 있는 상태다. 테드 형사가 벌록을 의심해 잠복근무를 시작하자, 벌록의 사보타주 활동에 제약이 생긴다. 따라서 벌록은 처남 스티브에게 시한폭탄이 장착된 꾸러미를 피카디리 광장에 가져가 달라고 심부름시킨다. 꾸러미에 진짜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하는 소년 스티브는 심부름 가는 길에 이러저러한 일로 자꾸 지체하게 되고, 결국 폭탄이 터지면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이렇게 폭탄 터지는 장면에서 히치콕은 시한폭탄의 폭발 시간을 상기시키는 시계와 지체하는 소년을 번갈아 보여주면서 ‘서스펜스’를 고조시킨다. 히치콕의 지론은 만일 관객에게 시한폭탄의 정보를 제시하지 않고 폭탄 터지는 장면이 나왔다면 짧은 ‘놀람(surprise)’이 되었겠지만, 이 영화에서처럼 연출하면 관객을 몇 분 이상 긴장의 도가니로 몰아넣을 수 있으므로 훨씬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스티브의 죽음이 벌록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된 실비아는 반쯤 정신이 나간 채 어찌할 바를 모른다. 그런 가운데 실비아는 식탁을 차리기 시작한다. 뻔뻔하기 짝이 없는 벌록은 “어려움을 같이 이겨내자”고 한 다음 바로 음식이 맛없다며 힐난하는 말을 던진다. 말을 잊은 듯 대꾸하지 않는 실비아의 손에는 접시에 음식을 담기 위한 칼이 들려진 상태다. 실비아의 시선이 칼에 닿은 순간 그녀에게는 무서운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그리고 마침내 그 칼이 벌록의 배에 꽂히게 된다. 히치콕은 두 인물의 시선과 편집 그리고 클로즈업 쇼트로 구성된 이 명장면을 통해 서스펜스를 극대화하면서, 영화가 시각 매체라는 것을 유감없이 증명해냈다.
두 번째 사례는 <다이얼 M을 돌려라>(1954)의 마고(그레이스 켈리)다. 이 영화에서 마고는 마크와 사랑에 빠지면서 남편 토니와 이혼하려고 한다. 이를 눈치챈 토니는 마고를 청부 살해하고 그녀의 재산을 차지하려는 음모를 꾸민다. 토니의 계획은 빈틈이 없는 듯했지만, 인간의 일이 대개 그렇듯이, 목 졸려 죽을 위기에 처한 마고가 청부살인범을 재봉 가위로 찔러 죽임으로써 차질이 생긴다. 토니는 곧바로 머리를 굴려 마고가 계획적으로 청부살인범을 죽인 것으로 몰고 가려고 시도하는데, 결국 모두 수포가 된다. 연극을 각색한 이 영화는 거의 모든 장면이 마고의 아파트에서 전개된다. 그럼에도 마고가 토니의 함정에서 벗어나는 과정이 전혀 지루함 없이 서스펜스와 스릴 넘치게 펼쳐진다.
세 번째 사례는 <패러다인 부인의 재판>(1947)의 안나 패러다인(알리다 발리)이다. 앞에서 살펴본 실비아와 마고의 살인은 우발적이거나 정당방위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다음에 살펴보겠지만 히치콕 영화의 남성 살인자들의 살인과 차이 나는 지점이다. 반면 안나의 경우는 의도적인 살인이다.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너무나 우아한 귀부인 안나가 시각장애인 남편을 독살한 혐의로 경찰에 체포된다. 패소한 적이 없는 유능한 변호사 안소니 킨(그레고리 펙)이 안나의 변호를 맡는다. 킨은 아내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음에도 안나를 보자마자 너무나 매혹된 나머지 어떻게 해서라도 무죄로 풀려나게 하려고 미친 듯 동분서주한다. 결국 진실은 법정에서 밝혀진다. 안나는 남편의 하인인 안드레를 사랑해 그와 같이하고 싶어서 남편을 살해했다. 영화에서는 모호하게 처리되었으나 게이로 추정되는 안드레는 패러다인을 흠모해 안나의 구애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그녀는 끝내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킨은 재판에서 패소했을 뿐만 아니라 안나가 자신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다는 것을 깨닫고 절망에 빠진다.
<패러다인 부인의 재판>을 보면서, ‘작가주의’를 신봉하는 비평가들이 “작가의 졸작이 장인의 걸작보다 의미 있다”라고 하는 주장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이 영화는 자신의 의뢰인에게 매혹되어 진실을 보지 못하는 변호사, 남편의 사랑을 의심하게 된 변호사의 아내, 헌신적인 아내로 널리 알려졌으나 다른 남자를 사랑해 남편을 살해한 귀부인, 사건의 열쇠를 쥔 인물로서 미스터리 한 게이 남성, 법정에서 밝혀지는 반전으로서의 진실 등 흥미로운 요소들이 없지 않음에도 초점이 이리저리 옮겨 다니다 이도 저도 아닌 결과물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이 영화의 실패에는 히치콕의 커리어에서 가장 큰 빌런으로 손꼽히는 데이비드 O. 셀즈닉이 있다. 셀즈닉은 이 영화의 상업적 성공을 통해 영화사의 재정 문제를 해결할 욕심으로 자신이 직접 시나리오를 수정해가며 적극적으로 제작에 매달렸다. 주연 배우 그레고리 펙은 셀즈닉이 고친 대사가 “나아지기는커녕 형편없었다”고 평가했고, 히치콕은 셀즈닉의 간섭에 지쳐 연출 자체를 지겨워할 지경까지 갔다. 영화에 대한 히치콕의 구상은 매번 셀즈닉의 반대에 부딪혔고, 히치콕이 심혈을 기울여 촬영한 장면은 전혀 셀즈닉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예를 들면 히치콕은 인물의 정체가 겉보기와 다른 경우, 얼굴 한쪽에 조명을 드리움으로써 관객에게 그러한 정보를 암시적으로 전달하곤 했다. 안나는 죄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완벽한 귀부인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지저분한 과거와 안드레를 향한 욕망을 채우기 위해 남편을 살해한 어두운 인물이다. 따라서 히치콕은 안나의 얼굴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싶어 했는데, 셀즈닉은 알리다 발리의 미모가 화면에 그대로 구현되기를 원했기 때문에 반대했다. 결국 안나는 어두운 뒷면을 감춘 복합적인 인물이 아니라 평면적인 인물로 재현되고 말았다. 이러한 불협화음 속에서 이 영화의 제작비는 눈덩이처럼 올라갔고(셀즈닉이 제작한 대작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거의 맞먹는 지경!), 최초의 편집 버전은 3시간에 육박했다. 결국 흥행에도 완전 실패함으로써, 셀즈닉-히치콕의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 “출연작 중에 불태워버리고 싶은 작품이 뭐냐”는 질문을 받은 그레고리 펙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패러다인 부인의 재판>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사진출처: 네이버
글·김경욱
영화평론가. 세종대에서 영화 관련 강의를 하면서 영화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