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아 알라위트족의 기이한 운명

2013-01-11     사브리나 메르뱅

시리아에서 전투가 격화되고 북대서양조약기구(OTAN)가 패트리엇 미사일을 터키에 배치하는 동안 바샤르 알-아사드 체제는 외국의 지원을 받는 민중봉기를 진압하려 애쓰고 있다. 그는 무자비한 폭력뿐만 아니라 지하드 수니파 이슬람교의 부상이 불러일으키는 두려움에도 의지한다.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 가문이 속해 있고 시리아 국민의 약 10%를 차지하는 알라위트족의 미래는 현재 이 나라에서 벌어지는 대립과 관련한 주요한 문제들 중 하나다. 이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그 역사적 발상지와 지중해 해안을 따라 이어진 산, 그리고 많은 이주노동자들이 정착한 다마스나 홈스 같은 도시들에 흩어져 살고 있다. 시아파 교리와 연관된 그들의 교리는 그들을 별개의 집단으로 만들었는데, 이들이 가진 확신의 일부는 불과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이슬람교와 먼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일부 이주노동자들은 도시화됐고, 자신의 종교적 실천 행위를 이슬람화했다. 또 다른 이주노동자들은 그들의 농촌 생활 방식과 비교(秘敎)신앙을 동시에 간직했다. 이 문제에 관해 신뢰할 만한 자료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아사드 가문이 권력을 장악하는 동안 이 문제는 항상 금기 사항이었다. 알라위트족에 대해서는 아무도 감히 공개적으로 말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독일인들'(Allemands)이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두 아랍어 단어, 알라위이인(Alawiyyin)과 알마니이인(Almaniyyin)의 음조 때문이었다.

오늘날 옵서버들은 질문을 던진다. 그들은 분열될 것인가? 체제와 결별할 것인가? 자신의 공동체에서 배척당할 위험을 안고 야당에 가담한 알라위트족은 거의 없었다. 무엇보다 보복에 대한 두려움과 그 누구도 믿을 만한 경제적·정치적 대안을 아사드 파벌에 제시할 수 없다는 확신 때문에 더 그랬다. 종교적 분리와 박해, 억압으로 이루어진 오랜 역사가 100년 전까지만 해도 노사이리족이라고 불렸던 알라위트족의 망설임을 부분적으로나마 설명해준다.

1903년 벨기에 출신의 예수회 수도사 앙리 라망스는 앙티오센(현재의 시리아 지역)의 노사이리족 종교 지도자를 방문했다. '그가 얘기를 하도록 만들기 위해서'였다. 이전의 다른 동양학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영혼의 윤회나 삼신(예언자 무함마드, 그의 사위 알리, 그와 함께 사는 남자들 중 한 명인 살만) 신앙 같은 의고주의(擬古主義)와 혼합주의의 흔적이 밴 종교 교리를 설파하는 이 애매모호한 기원의 민족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이 민족은 기독교 의식을 거행하는 한편, 더 이교적으로 보이는 축제를 벌였다. 이 민족은 지역의 성인들을 숭배했지만, 기도를 올릴 사원을 세우지는 않았다. 노사이리족이 신봉한 종교의 비밀들이 오직 입문자들에게만 전해졌기 때문에 동양학자와 선교사에게 그것은 머리를 쥐어짜가면서 알아내야 하는 미스터리가 되어버렸다.

처음에 라망스는 노사이리족이 옛날에 기독교도들이었다고 믿었으나, 자신이 분명히 시아파 이슬람교도라고 주장하는 족장과 얘기를 나눈 뒤 그 믿음을 버렸다. 이 족장은 수니파가 노사이리족을 흡수했다는 생각을 거부하고,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때까지 이 지역을 다스렸던 오스만제국이 자신들을 학대했다며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에 따르면 이 민족은 자위 수단을 갖고 있지 못했다. 왜냐하면 다른 종파들과 달리 외세의 보호를 받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자 라망스는 그에게 이렇게 제안했다. "그렇다면 족장께서 기독교도가 되시는 게 어떻습니까? 그렇게 하신다면 프랑스가 지금 당장이라도 개입해 족장님 편에 설 텐데…."(1)

이 이야기는 노사이리족이 20세기 초부터 쇠퇴해가는 오스만제국에 이어 프랑스가 신탁통치하는 시리아(1920년부터), 그리고 마지막으로 독립국 시리아(1946년) 내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구축하고 확인하면서 부딪쳤던 어려움을 보여준다. 노사이리족은 산악지방에서의 고립 상태에서 빠져나와 현대성을 배워야만 했다.

온갖 빈곤과 불운으로 점철된 역사

이들의 종교는 9∼10세기 시아파 내에서 창시자인 무하마드 이븐 노사이르의 이름으로 형성됐다. 그것은 그후라트, 즉 '극단주의자'라고 불리며 알리 숭배를 지나치게 강조해 결국 그를 신격화했다는 비난을 받는 집단들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2) 동양에서의 확장 단계 이후에 산악지방에 틀어박힌 이 종교의 신봉자들은 그 지역 신앙과 의식에서 활력을 끌어내며 닫힌 원 모양으로 발전했다. 노사이리족의 종교는 비밀에 싸인 채 이슬람교 바깥에서 자신들만의 율법과 의식의 비의적(秘義的)이고 신비론적인 길을 발전시켰다. 그리하여 이 종교는 특히 14세기의 유명한 법학자 이븐 타이미이야에 의해 불경하다는 비난을 받았으며, 노사이리족은 이슬람교에서 배척당했다.

오스만제국 말기에 노사이리족들은 얼토당토않은 편견에 희생돼 차별받았다. 노사이리족 역시 다른 시아파교도처럼 수니파교도를 모욕하는 내용의 종교적 계율(예를 들어 의식에서 무함마드의 후계자들을 모욕하는 일)을 여전히 실천했다.(3) 이스탄불은 행정 개혁을 시도하면서 사원을 건설하는 등 그들을 동화시키려 했으나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당시 노사이리족들은 주로 산악지방(자발 안사리에)의 마을들이나 산드자크 달렉산드레트(이곳의 노사이리족들은 도시화돼 있어 더 쉽게 교육받을 수 있었다),(4) 레바논 북부 지역(시리아에서 폭동을 일으킨 이후로 이곳의 트리폴리에서 노사이리족들은 매일같이 수니파교 집단들과 대립하고 있다)에서 살고 있었다.

글자를 모르고 지주들에게 착취당하는 산악지방 농민들의 일상은 가난으로 찌들어 있었다. 그렇지만 이 공동체의 일부 구성원들은 오스만제국 행정기관의 관직에 임명됐고, 4개의 부족 연방으로 조직된 이 농촌 사회는 외부 세계를 향해 살짝 열리려 하고 있었다. 1910년대부터 노사이리족 종교 지도자들은 현재의 남부 레바논과 이라크에 사는 이맘 시아파(5) 지도자들과 교류했다. 그중 일부는 알리라는 인물과 시아파 교리와 결합하는 한편, 경멸적 의미를 가지게 된 '노사이리'라는 단어와 거리를 두기 위해 자신을 '알라위트족'으로 소개했다.

시리아와 레바논에 대한 신탁통치(1920∼46)를 시작할 때 프랑스인들은 그들을 지칭하기 위해 '알라위트'라는 단어를 채택했다. 이 소수 종교집단을 보존하고 이 집단의 경제적·사회적 후진성을 극복하는 것만이 프랑스인들의 목적은 아니었다. 그들은 이 소수 종교집단을 이슬람교 수니파 민족주의자들로부터 분리시키려고도 했다. 말하자면 더 수월하게 통치하기 위해 분리시키려 한 것이다. 시리아는 분할됐고, 알라위트족의 자치령은 1922년 라타키아를 수도로 정하고 국가가 되었으며, 이 국가는 1939년 시리아에 다시 병합됐다.

1960년대부터 정치적 진출 시작

일부 유력자들과 족장들은 프랑스의 계획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였으나, 그들 중 한 명인 살레흐 알알리(1884∼1950)는 1918년 12월부터 다른 족장들과 힘을 합쳐 무력으로 저항했다가 1921년에 패배했다. 그는 시리아 전역에서 처음으로 반란을 일으킨 인물이었고, 1946년 최초의 독립정부에 의해 국민적 영웅으로 인정됐다. 또 다른 인물이 두각을 나타냈는데, 솔레이만 알무르치드는 기적을 행하는 목동으로서 자기가 예언자이며 나아가 신이라고 선언했다. 결국 그는 배신을 당하는 바람에 1946년 독립 시리아에 의해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의 신봉자들은 종파를 이루었다.(6)

알무르치드가 알라위트족의 자치를 지지했으므로 프랑스 당국은 그의 동맹자가 되었다. 1930년대 초 알라위트족 유력자들은 두 진영으로 나뉘어 있었다. 한쪽에는 이 공동체의 자치를, 그리고 그들이 이 공동체에서 누리는 권력 역시 보존하면서 시리아로부터 분리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또 다른 편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교육을 받은 젊은 사람들로서, 이들은 도시의 수니파교도들 편이 되어 통일 시리아로의 합병을 요구했다.(7)

1936년 프랑스와 시리아 간의 조약이 체결되기 전에 이루어진 토론에서 알라위트족이 이슬람교에 속하느냐의 문제가 제기됐다. 알라위트족 종교 지도자들은 자기네 공동체의 자치를 옹호하는 쪽과 시리아의 통일을 지지하는 쪽으로 나뉘었다. 후자는 솔레이만 알아흐마드(1866∼1942)를 내세우며 이슬람교를 신봉할 것을 주장했다. 1936년 이들은 자기들이 아랍인과 이슬람교도의 정체성을 갖고 있다고 확언하는 내용의 글을 발표하고 예루살렘의 교전연구가인 아민 알후세이니에게 청원했다. 알후세이니는 판정을 내렸다. 이슬람 당국이 처음으로 알라위트족을 움마(신앙 공동체)에 포함시킨 것이었다.

시리아가 독립할 당시 알라위트족은 전체 인구의 11%였고, 이들 중 80%는 산악지방에 살고 있었다. 프랑스 신탁통치하에서 그들은 큰 마을과 해안 도시들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이런 움직임은 계속됐고, 그들은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주로 홈스와 다마스에 정착해 하층 직업에 종사했다. 군대는 또 하나의 돌파구였다. 이미 근동지방의 프랑스 군대에 아주 많은 수가 복무하고 있던 알라위트족은 다른 소수민족과 마찬가지로 1940년대 말 군사학교에 입학했다. 그러고 나서 이들은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아랍 민족주의 정당인 바아스당의 인적 토대를 이루게 된 것이다.

이들은 이라크에 거주하는 이맘 시아파교단 종교 당국자들의 지원을 받아 종교기관을 설립하고, 사원을 건설했으며, 그들의 교리를 설명하는 책을 펴냈다. 또한 그들의 성직자들은 1952년 시리아의 교전 해석자에 의해 자파리트로, 즉 시아파교도들로 인정받았다. 시아파와의 접근 과정은 현 대통령의 아버지인 하페즈 알아사드 아래에서 한층 더 강화됐다. 레바논의 고위 종교 지도자인 무사 사드르가 1973년 그들에게 이슬람교도의 자격을 부여했으며, 시아파 종교학교들이 다마스 외곽의 사이이다 자이나브에 문을 열었던 것이다. 2000년대 들어 레바논 헤즈볼라 및 이란과 동맹을 맺자 이 나라가 시아파화된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1963년 일어난 바아스당의 군사 쿠데타 이후 알라위트족은 군의 주요 보직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1970년 자신의 라이벌들을 제거한 하페즈 알아사드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보내면서 이 정책을 계속 밀고 나갔다. "그대는 아사드와 함께 있다. 그대는 그대 자신과 함께 있는 것이다."(8) 이 협정은 여전히 유효하며, 동시에 하나의 약속이자 위협으로 들린다. 그렇지만 알라위트족의 위상이 군대와 바아스당 내에서 높아지고 그들이 각종 기관에 침투하고 자원을 몰수함으로써 국가와 수도를 정복하게 된 과정은 좀더 상세하게 기술될 만하다.(9)

바샤르 알아사드의 뿌리

이처럼 사회를 통제하고 조직하기 위해 아버지 아사드는 다른 인기 전술과 다른 세력, 다른 공동체에 의지했다. 처음에는 다수 공동체인 수니파교도들에게(특히 군대와 경제에서), 그러고 나서는 소수 공동체(특히 기독교 공동체와 드루즈족 공동체 등)에 의지한 것이었다. 위기의 순간이나 상대적인 긴장 완화의 순간마다 이 체제는 인적 토대를 이루는 알라위트족에게 다시 의지하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접근하기도 했다. 바샤르 알아사드는 이런 정책을 투기욕으로 변질된 신자유주의의 범주 안에서 자기 방식대로 펼쳐나갔다.

그러나 알라위트족이라고 해서 모두 이 체제의 혜택을 받는 것은 아니다. 원래 그들이 살던 땅이 면밀하게 계획된 현대화의 혜택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국가가 베푼 후한 혜택을 받은 것은 오직 아사드 파벌과 그의 측근들뿐이었다. 대통령은 부족 조직과 종교 지도자들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전통적인 명문가들을 몰아냈으며, 체제 반대자들을 탄압했다. 하급 공무원과 군인들의 사회적 지위 상승은 매우 제한적이며, 이들은 다른 시리아인들과 마찬가지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

 

/ 사브리나 메르뱅 Sabrina Mervin 국립과학연구센터 종교문제 학제간 연구소 책임연구원. 저서로 <이슬람교의 역사: 토대와 교리>(플람마리옹 출판·파리·2003) 등이 있다.

번역 / 이재형

(1) 사브리나 메르뱅, <알라위트족의 실체, 프랑스의 창조물>, in 피에르-장 뤼자르(책임편집), ‘식민지의 충격과 이슬람교’, 라 데쿠베르트 출판사, 파리, p.343∼358, 2006.
(2) 시아파교도들은 예언자 무함마드의 사촌이자 사위인 알리를 신봉한다.
(3) 시아파교도들은 알리에게 돌아갔어야만 했을 칼리프 직위를 찬탈했다며 그들을 비난한다.
(4) 1939년 프랑스가 터키에 양도한 이 지역은 현재의 르하타이 지방과 일치하며, 이곳에 사는 알라위트족과 시리아 난민이 갈등을 빚은 곳이기도 하다.
(5) 이맘 시아파는 시아파에서 가장 큰 종파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시리아에서는 극소수파(1∼2%)로서 주로 다마스 및 알레프 근처의 마을들과 호란 지역에서 살고 있다.
(6) 라 무르치디이야의 신봉자들은 가혹한 탄압을 받은 뒤 아사드 치하에서 특별 혜택을 받았지만 국가 내에서는 존재감이 거의 없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분쟁에서 그들은 중립적이다.
(7) Ignace Leverrier, ‘시리아의 알라위트국,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기’, http://syrie.blog.lemonde.fr, 2012년 7월 27일.
(8) Michel Seurat, <국민, 국가, 사회>, in 앙드레 레이몽(책임편집), ‘오늘날의 시리아’, CNRS 출판부, 파리, 1980. Michel Seurat, <야만의 국가>, 프랑스대학출판, 근동(近東) 총서, 파리, 2012에 다시 실림.
(9) Philippe Droz-Vincent, <중동: 권위적 권력, 봉쇄된 사회>, 프랑스대학출판,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