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한 발칸 전범 재판

2013-01-11     장아르노 데랑

2012년 12월 12일, 헤이그 국제형사재판소는 전 보스니아 세르비아계 장군 즈드라브코 톨리미르에게 스레브레니차 학살에 대한 책임을 물어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그러나 지난해 11월 같은 재판소는 코소보의 안테 고토비나와 믈라덴 마르카치 장군, 전 알바니아 게릴라 지도자들에게는 무죄를 선고했다. 편파적 판결이라는 비난을 피하기 어렵다.

2012년 11월 16~29일, 옛 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ICTY)가 크로아티아의 안테 고토비나와 믈라덴 마르카치 장군, 코소보해방군(KLA)을 이끌었던 라무시 하라디나즈, 이드리즈 발라즈, 라히 브라히마즈에게 차례로 무죄를 선고했다. 전세계는 충격에 휩싸였고, 재판소의 중립성을 의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세르비아인들에겐 별로 놀라운 일도 아니다. ICTY는 설립 직후부터 줄곧 세르비아인들에게만 유죄 선고를 내려오던 터였다. (보스니아 크로아티아인들에 대해 여전히 진행 중인 재판은 예외다.) 세르비아 정부는 ICTY의 편파적 재판을 비난하며 협조 중단을 고려하고 있다. ICTY에 대한 비판은 비공식적 채널에서도 나오고 있다. 민족주의에 반대하는 이들 사이에서 잘 알려진 역사학자 두브라바스카 스토야노비치는 "ICTY의 경솔한 행태가 유감스럽다. ICTY의 재판은 유고 내전 중 발생한 사건들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하지만 ICTY는 신뢰성을 잃음으로써 지역 화해의 기회는 사라지고 말았다"(1)며 아쉬움을 표한다. 국제앰네스티도 이번 판결에 우려감을 나타냈다.(2)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808호에 의해 1993년 2월 22일 설치된 ICTY는 객관적이고 공정한 국제 정의 실현의 첫발을 내딛는 상징적인 시도였다. 옛 유고연방이 해체되면서 발발한 전쟁에서 자행된 비인도적 살상 행위를 규명하고 책임자를 찾아내 처벌하는 것이 목적이었다.(3) 전쟁범죄를 저지르고도 버젓이 면죄부를 받거나 한 민족 혹은 국민 전체에 책임을 덮어씌우는 관행에 쐐기를 박고자 했다.

서방세계의 암묵적 침묵

ICTY는 최근의 분쟁을 되돌아보는 과정을 통해 발칸 지역 국가들의 화해를 유도하는 목적도 있다. 그러나 고토비나와 마르카치에게 무죄 판결을 내림으로써 민족주의적 대결을 부추긴 셈이 되고 말았다.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에서는 1990년대의 호전적 어투들이 언론지상에 다시 등장하고 있다. 무죄 선고로 모든 문제가 일단락됐다는 생각에 반대하는 이는 소수에 불과하다. 크로아티아군이 크라지나 지역을 탈환하는 과정에서 1995년 8월 세르비아 민간인들을 학살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4) 당시 크로아티아군을 지휘한 장군들이 무죄라면 도대체 누구에게 죄를 물어야 할까?

재판소는 두 크로아티아 장군이 '집단 범죄 행위'에 개입하지 않았다고 판결 이유를 밝혔다. 2011년 4월 1심 판결 내용을 뒤집은 것이다. 크라지나에서 조직적으로 세르비아계 주민들을 추방하고 약탈과 살인을 자행한 것은, '인종청소'를 위한 의도된 전략과 별개 행위로 봐야 한다고 결론 내렸다. 프랑스의 필리프 롱도 장군의 수첩에 기록된 자료에 따르면, 외인부대 출신인 고토비나가 프랑스 정보부로부터 늘 신변을 보호받았다고 한다.(5) 또한 미국이 크라지나 탈환을 위한 '폭풍작전' 과정에서 크로아티아를 지원한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벌어진 범죄 행위에 서구 국가들이 연루되었는지 여부를 재판에서 다룰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하라디나즈와 공범자들에 대한 판결 역시 재판소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리기에 충분하다. 재판에 소환된 증인들 중 최소 9명이 '의혹을 불러일으키는' 상황 속에서 목숨을 잃었고, 나머지 증인들은 자신의 증언을 번복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ICTY는 결국 2008년 4월 3일 코소보해방군을 이끌었던 하라디나즈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소는 예외적으로 하라디나즈와 피고인들에 대한 첫 번째 판결을 취소하고 다시 재판을 열었다. 39건의 기소 사실 중 야블라니카 수용소에서 세르비아·롬·알바니아계 민간인을 고문하고 학살한 사건과 관련된 6건의 기소 사실에 대해서만 재심을 했다. 그러나 재판소가 이미 죽은 증인들을 다시 소환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두 번째 판결에서도 무죄 선고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영웅이 된 범죄자들

하라디나즈는 코소보로 돌아가 영웅 대접을 받았다. 아마 곧 총리 자리를 되찾을 것이다. 그의 무죄 석방은 코소보 문제를 하루빨리 매듭지으려는 서구 국가들의 전략과 잘 맞아떨어진다. 민족해방군 출신의 모든 정파가 참여하는 연립정부가 구성될 경우, 세르비아계 주민이 다수를 이루는 북부 코소보 분리 문제와 관련해 코소보인들의 합의를 끌어내는 게 더 수월하다는 게 이들의 계산이다. 결국 '현실정치'(Realpolitik) 논리가 정의에 대한 요구를 누른 것이다.

무죄 판결로도 만족을 못했던 걸까? 2012년 12월 2일, 알바니아와 코소보 정부는 1999~2007년 ICTY 수석검사를 역임한 카를라 델 폰테가 하라디나즈를 기소하는 과정에서 '편향적이고 불법적인 수사를 했다'며 조사를 요구했다. 며칠 후 고토비나의 변호사도 델 폰테 전 검사가 세르비아 일간지 <블리치>에 무죄 판결을 '공정하지 못한 판결'이라고 비판한 데 대해 재판소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처벌을 요구했다. 이들은 델 폰테가 코소보해방군의 과거 지도자들이 연루된 것으로 보이는 인간 장기 밀매사건을 폭로하자 그에 대한 반격에 나선 것이다. 이 사건은 이들과 서구 국가 간의 밀월 관계를 만천하에 드러낼 수 있는 민감한 사안이었다.(6) 그러나 ICTY는 이 사건을 다루지 못했다. 수사 과정에서 증거가 될 만한 자료를 확보했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모두 파기되었기 때문이다.

 

/ 장아르노 데랑 Jean-Arnault Dérens  <르 쿠리에 데 발캉> 편집장

번역 / 정기헌 guyheony@gmail.com

(1) ‘고토비나 무죄 판결: 분노하는 세르비아인들’, <Le Courrier des Balkans>, 2012년 11월 16일.
(2) ‘코소보, 그들이 범인이 아니라면 전쟁범죄는 누가 저지른 것인가?’, Amnesty International, 2012년 11월 29일. www.amnesty.fr.
(3) 옛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연방공화국 영토 내에서 1991년 1월 1일 이후 발생한 범죄행위에 대해서만 재판 권한을 갖는다.
(4) 10만~20만 명의 세르비아계 주민들이 크라지나를 떠났다. 탈출하지 않고 남은 수백 명의 민간인(대부분 노인)은 군사작전이 전개된 직후 학살됐다.
(5) Jean-Arnault Dérens & Laurent Geslin ‘옛 유고슬라비아: 프랑스는 수년간 전범들을 보호했다’, <Mediapart>, 2011년 3월 3일.
(6) ‘코소보해방군의 더러운 전쟁’,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1년 3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