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성희의 시네마 크리티크] <28년 후> 팬데믹 이후 시대의 좀비 영화란 이런 것

2025-06-23     서성희(영화평론가)

 

돌아온 오리지널, 그러나 낯선 세계

21세기 좀비 영화의 전환점을 만든 작품이 있다면 단연코 대니 보일 감독의 <28일 후>(2002)일 것이다. 이 작품은 느릿느릿 걷던 기존 좀비의 형식을 깨고, 광기에 찬 속도로 달려드는 '분노 바이러스' 감염자라는 새로운 이미지를 제시하며 장르를 혁신했다. 후속작인 <28주 후>(후안 카를로스 프레스나딜로, 2007)는 좀비보다 더 무서운 인간의 결정과 권력, 그리고 생존의 윤리에 초점을 맞추며 공포를 확대했다.

<28년 후>(2025)는 대니 보일 감독과 각본가로 <엑스 마키나>(2015), <시빌 워: 분열의 시대>(2024)의 감독인 알렉스 가랜드가 다시 손을 잡고 내놓은 오리지널 시리즈의 귀환이자, 새롭게 시작되는 트릴로지의 첫 편이다.(1) <28일 후>(2002), <28주 후>(2007)를 잇는 세 번째 작품이지만, 이 영화는 더 이상 좀비 영화 장르의 팬 서비스나 익숙한 패턴 속에 안주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들을 해체하고, 전혀 다른 세계로 나아간다.

<28일 후>가 '분노'라는 감정 바이러스로 인간 사회가 파괴되는 공포를 선보였다면, <28주 후>는 국가 통제의 한계와 군사 권력의 무분별한 개입을 비판하는 정치적 영화였다. 그리고 <28년 후>는 이제 감염도, 통제도 모두 지나간 세계 속에서 '기억의 공백'이라는 새로운 공포를 다룬다. 과거를 모른 채 태어난 세대가 윤리와 인간성을 어떻게 재구성할 수 있는지를 탐색하는 이 작품은, 좀비 장르의 외피를 두른 철학적 성장영화에 가깝다.

 

감염 이후의 세대, 본토를 향한 탯줄의 여정

주인공 스파이크(알피 윌리엄스)는 '홀리 아일랜드'라는 섬에서 태어난 10대 소년이다. 그는 바이러스를 경험한 적도, 감염자를 본 적도 없다. 이 섬은 철저히 고립된 무균의 공간이자, 출산의 메타포로 해석할 수 있는 '자궁'과 같은 장소다. 그가 섬을 떠나 본토로 향하는 여정은 단순히 사냥이나 치료제 탐색이 아니라, 세상과 맞닿는 '태어남의 통과의례'이자 윤리적 각성의 여정이다.

이때 홀리 아일랜드와 본토를 잇는 바닷길은 탯줄, 스파이크는 태아, 그리고 감염된 본토는 모체이자 세계 전체다. 그는 과거를 지닌 부모 세대와는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만나야 한다. 영화는 이 상징 구조를 따라, 외부의 공포보다 더 큰 공백인 '기억하지 못한 세대의 윤리'를 서서히 드러낸다.

특히 스파이크의 어머니 '아일라(Ayla)'는 스코틀랜드 이름이며, 아버지는 아일랜드계로 설정된다. 이 설정은 단지 캐릭터의 배경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영국 본토와 대립하고 타자화되었던 '주변부적 존재들’의 정체성을 상징한다. 그리고 그들이 사는 홀리 아일랜드에 게양된 아일랜드 국기는 이 세계가 이미 중심을 상실한, 주체 없는 경계의 공간임을 시사한다.

 

기술적 진화와 감정의 퇴행

<28년 후>는 제작비 6천만 달러(약 823억 원), 대니 보일 커리어 사상 최대 제작비를 들인 작품이다. 일부 장면은 아이폰 15 프로 맥스로 촬영되었고, 화면비는 2.76:1의 울트라 파나비전 70을 차용하여 광활한 시각 체험을 제공한다. 이는 단순히 형식적 실험이 아니라, 폐허가 된 세계의 압도적 풍경을 통해 인간 존재의 왜소함을 강조하는 연출 방식이기도 하다.

감염체 또한 진화했다. 벌레를 먹고 사는 슬로우 로우(slow-low) 유형의 좀비, 분노 바이러스로 어마어마한 완력을 지니게 된 삼손형 좀비 알파까지. 바이러스는 이제 생태적 다양성을 가진 ‘종’처럼 보인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인간은 전혀 진화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여전히 은폐하고, 통제하고, 두려움 앞에서 서로를 배신한다. 감염은 진화했지만, 인간의 윤리적 감수성은 퇴행하고 있다.

영화의 주요 카피 중 하나는 "시간은 결국 독이었다."이다. 이는 시간이 흐르면 다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비틀며, 시간이 지나도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인간의 무지를 비판한다. 좀비는 그 무지를 환기시키는 기념비이며, 잊혀진 윤리를 되살리라는 경고이기도 하다.

 

좀비 영화인가, 철학적 기행인가

많은 관객이 <28일 후> 18년 만에 돌아온 <28년 후>를 기대하며 극장을 찾았지만, 이 작품은 전통적인 좀비 영화 문법을 따르지 않는다. 오히려 후반부에 접어들며 죽음, 기억, 용서, 분노라는 감정의 스펙트럼 속에서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의 철학적 성찰로 나아간다. 이는 각본을 맡은 알렉스 가랜드의 영향이 크다. 그는 <엑스 마키나>(2015), <시빌 워: 분열의 시대>(2024) 등을 통해 이미 인간성과 인공지능, 종말과 구원의 문제를 심오하게 탐구한 바 있다.

<28년 후>의 중후반부는 익숙한 서사적 리듬을 비틀며, 거의 아방가르드적인 감각으로 진행된다. 대니 보일 특유의 실험적인 조명, 리듬감 있는 편집, 90년대 영국 록 뮤직비디오에서 차용된 감각적 연출이 종종 낯설고 혼란스러울 정도로 시청각적 공격성을 유도한다. 이는 관객에게 단지 '재미'를 주기보다는, '생각'을 강제하는 방식이다.

스파이크가 본토에서 통과의례를 마치고 귀환 후 마을에서 열리는 파티에서 부르는 톰 존스의 'Delilah'는 극의 정서적 반전을 상징하는 장면이다. 밝은 리듬 속에 숨겨진 분노와 배신의 노래는, 아버지에 대한 의심과 분노가 시작되는 복선이 된다. 영화는 이처럼 감정과 서사를 직선이 아닌 파편화된 방식으로 직조하며, 좀비라는 소재보다 더 불편한 인간 내부의 윤리적 파열을 드러낸다.

 

메멘토 모리: 우리는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

결국 <28년 후>는 좀비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기억'에 대한 이야기다. <28일 후>가 감정의 폭주로서의 분노, <28주 후>가 통제의 파괴를 그렸다면, <28년 후>는 기억의 공백, 즉 '알지 못하는 세계에서의 윤리'를 묻는다.

스파이크는 감염된 세계를 처음 경험하는 세대이며, 그 공포는 생물학적이 아니라 도덕적 방향감각의 상실에서 비롯된다. 그는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은 윤리를, 폐허 위에서 스스로 선택해야 한다. 좀비는 죽은 자의 재현이 아니라, 우리가 망각해 버린 과거의 잔재이며, 매번 반복되는 실패의 징후다. 영화는 그 반복을 막기 위한 단 하나의 조건으로 '기억'을 제시한다.

<28년 후>는 보기 드문 좀비 영화다. 그것은 좀비라는 장르의 문법을 빌리되, 철학적이고 윤리적인 질문을 전면에 내세운다. 이는 단지 작품의 스타일 때문만이 아니라, 팬데믹을 겪은 우리 모두의 경험이 이미 그런 물음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시간은 독이 되었다. 우리는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고, 윤리는 유예되고, 인간성은 무력해진다. 하지만 기억하는 자가 있다면, 그리고 그 기억을 기반으로 새로운 윤리를 세울 수 있다면, 어쩌면 인간은 다시 한번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28년 후>는 바로 그 희망을 가장 어두운 폐허 속에서 묻고 있다.

 

(1) 트롤로지 첫 번째인 <28년 후>(2025)을 시작으로 <28년 후: 뼈의 사원>(2026), <28년 후: 파트3>(미정)이 개봉 예정 중이다.

 

* 사진 출처 : 네이버 영화 <28년 후> 포토


글·서성희
영화평론가, 영화학박사. 오오극장 대표, 대구영상미디어센터 센터장을 지냈으며, 대구경북영화영상사회적협동조합 전 이사장으로 활동했다. 현재 TBC 라디오 ‘서성희의 영화세상’(월요일 오후 7시)에서 영화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