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대혁명에서 현대예술 시장으로

2013-01-11     필리프 파토 셀레리에

오랫동안 혁명적 리얼리즘(민중을 단결시키고 교육하기 위한 무기로 사용되던 마오쩌둥식 예술)과 혁명 영웅들(농민·군인·노동자)을 이상화하는 데 그쳤던 중국의 사진예술이 1980년대 초를 기점으로 다양하게 발전했다. 일부 예술가들은 현실과 주류 담론 사이의 괴리를 보여주기 위해 고통받는 자들을 집중 조명했지만, 또 다른 예술가들은 그저 주류 관습에 기대거나, 장면을 작위적으로 연출하는 길을 선택하기도 했다.

고향 티베트 평원을 뒤덮은 가시덤불처럼 부스스한 머리를 한 모이가 늙은 현인 같은 유유자적한 태도로 길게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금세 그의 모습이 희뿌연 연기 속에 휘감겼다. 사실 흐릿하게 흔들린 희뿌연 영상은 모이의 작품 세계에 종종 등장하는 기술이다. 셔터 스피드(셔터가 작동하는 시간의 길이. 즉, 셔터가 열린 시간적 길이로 그 속도에 따라 노출 시간이 정해진다)로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급격한 사회 변화를 상징이라도 하는 것일까? 사진작가 모이는 "사물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종잡을 수 없을 때 흔히 흐릿한 영상을 사용한다"고 말했다. 정부의 냉담한 비판을 불러일으킬 만한 대상을 찍을 때는 더더욱 흐릿한 영상이 제격일 것이다. 가령 1980년대 중국 정부는 마오주의 거대 담론이 불어넣어야 할 활기찬 얼굴과는 정반대로 낙담한 표정의 얼굴들을 찍었다며 모이의 사진을 거세게 비판하지 않았던가? 아마 문화혁명기(1966~76)였다면 모이는 이런 이중적 이미지를 사진에 담은 대가로 혹독한 재교육을 받아야 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정부가 1989년 6월 4일 일어난 학생 민주화운동을 유혈 진압하기 몇 해 전 비교적 개방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모이는 스스로에게 좀더 원론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자아비판을 대신했다. 주관적인 시선을 배제하고 사진을 찍어야만 있는 그대로의 객관적 세계와 마주할 수 있지 않을까? 결국 모이는 자신의 시선이 닿지 않는 신체 부위, 이를테면 목·등·장딴지 따위에 카메라를 부착했다. 그리고 다섯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부지런히 셔터를 눌렀다. 무작위로 찍은 영상들은 구도가 괴이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 속에서 또다시 슬픈 얼굴들이 나타났다. 현실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했다.

1966~76년 중국에서 액자 크기에 구애를 받지 않는 유일한 피사체는 산뿐이었다. 가령 더욱 웅장하게 산을 묘사하는 것은 조국의 자연을 향해 뜨거운 경애심을 발현하는 길이었다. 보도사진이든 예술사진이든 이 시기 사진의 목적은 오로지 하나였다. 농민·군인·노동자, 이 세 혁명 영웅을 전면에 내세워 혁명적 리얼리즘의 활기찬 영상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1976년 4월 5일 톈안먼 시위(1989년 6월의 톈안먼 사건에 앞서 일어난 중국의 반정부 시위)와 '4인방'(1)의 유혈 진압을 기점으로 정부 통제를 벗어난 정치적 사건을 증언하려는 최초의 기록사진이 등장했다. 많은 사진작가들이 이 역사적 순간을 영원불멸한 한 장의 사진으로 남기기를 원했다. 리샤오빈을 비롯한 몇몇 사진작가들이 은밀히(당시 이 사건을 기록하는 행위는 사형감이었다) 편집위원회를 조직했다. 그리고 톈안먼 사건을 찍은 2만~3만 개의 사진을 수집해 그 가운데 550여 점을 선별해냈다. '4인방'을 감옥에 보내고 4월 5일 톈안먼 사건의 복권을 단행한 마오쩌둥의 후계자 화궈펑(1921~2008년)이 그들의 기획을 후원했다. 예술역사학자 우후는 "화궈펑의 선전에 힘입어 그동안 비관변 작가의 길을 걸어오던 이 사진작가들은 뜻밖의 큰 명예를 거머줬다"고 말했다.(2) 이 사진작가들이 결성한 사진 모임 '4월 사진회'(April Photo Society)가 1979년 4월 '자연, 사회 그리고 인간'이라는 제목으로 첫 전시회를 열었다. 사진전은 대성황을 이뤘다. 300점의 사진을 관람하기 위해 일요일 하루 동안만 무려 8천 명의 관객이 전시회를 다녀갔다. "예술이 정치 선전의 수단에 불과하던 나라에서 개인들의 사랑, 추상적 미, 사회 풍자 등을 담은 영상은 상당히 파격적으로 비쳤을 것"이라고 우후는 평했다.

비로소 현실과 마주하려는 사진작가들을 중심으로 두 가지 조류가 형성됐다. 먼저 '향토'를 모토로 내건, 근원으로의 회귀를 꿈꾸는 사진작가들, 예를 들어 주시안민, 위더수이 등이 등장했다. 그들은 형식에도 본질과 똑같이 중요한 가치를 부여하기를 원했다. 그들은 중국 문명의 요람을 찾아가 황하 강변을 삶의 터전으로 삼아 자연과 가장 가까운 모습으로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농민, 산골 주민, 소수민족 등)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사진으로 기록된 이 유토피아에서 종종 심미적 아름다움은 타자성을 낭만적으로 미화하려는 경향으로 구현됐다. 때로는 타자성을 이상화하는 과정에 작가의 우월적 시선이 담기기도 했다.

향토주의 작가와는 달리 사회 주변부에서 주류 관습과 단절된 미학적 언어를 찾아내려는 작가군도 등장했다. 이 두 번째 조류를 일컬어 '상처예술'(Scar Art)이라 부른다. 이 새로운 경향의 예술은 문화혁명이란 이름으로 자행된 온갖 폭력을 폭로하고자 1970년대 말 이후 분투해온 이른바 '상처문학'과 궤를 같이하며 은폐된 일상의 진실을 증언하는 데 힘썼다. 가령 리샤오빈을 비롯한 일부 사진작가들은 1977~80년 정부에 손해배상을 요구하기 위해 베이징으로 상경한 지역민들의 일상생활을 처음 사진으로 기록했다. 장신민은 도시로 이주한 농민공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저우하이는 경제개혁에 따른 노동자계급의 점진적 소외에 집중적으로 카메라를 들이댔다. 양양캉은 기독교 신앙에 의지해 필사적으로 자신들의 땅에 정착하려 몸부림치는 사람들의 모습을 응시했다. 반면 루난은 연고지를 상실한 사람들을 탐색했다. 가령 그는 정신병자 1만4천 명의 초상을 통해 그동안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중국의 이면을 폭로했다.

대다수 중국 작가들의 시선은 전통적 삶의 급격한 파괴 쪽으로 쏠렸다. 1980년대 말 이후 중국식 전통 골목 '후통'이 점차 사라질 것을 예감한 쉬융은 매우 체계적인 방식으로 이 골목길의 풍경을 기록해 그 유명한 <후통 101상(像)> 연작을 내놓았다. 쉬융은 모든 인간 활동이 배제된 오로지 베이징의 전통 골목길만을 사진에 담아 매우 객관적인 문화유산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반면 루위안민은 연작 <상하이인>(Shanghailanders)을 통해 경제개혁에 따른 도시의 급격한 변화 속에 꿋꿋이 살아가는 1990년대 상하이 주민들의 모습을 보여줬다.

두 작가는 각각 역사적 혹은 사회적 차원의 사진을 추구하면서도 모두 사진이 지닌 기록적 성격만큼은 중시했다. 비록 루위안민의 작품에서는 대상을 향한 작가의 감정이입이 지배적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말이다. 이같은 경향을 극단으로 밀어붙인 작가는 바로 장하이얼이었다. 그는 창녀를 바라보는 시선을 통해 대상과 긴밀한 공모 의식을 드러냈다. 이로써 주관적 인식은 현실에 대한 모든 사유를 걸러내는 일종의 여과장치로 자리하게 된다. 비로소 다큐멘터리 사진이 사실 기록의 기능을 탈피해 개념적 기획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이런 경향이 승화된 최고의 결정체가 바로 류쩡의 <중국인>(The Chinese)(3)이었다.

류쩡은 중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만난 수많은 사람들에게서 깊은 충격을 받았다. 재소자, 트랜스젠더, 승려, 절도범, 노동자, 사업가, 창녀, 장애인, 사고 희생자 등 숱한 이들이 10여 년(1994~2002) 동안 그의 핫셀블라드 카메라 앞을 스쳐지나갔다. 류쩡은 일상의 여기저기에 존재하는 흔남흔녀들이 중국의 상상계를 구축해온 공적 역사에서 부재함을 발견했다. 그래서 박물관, 기념관, 광장 등 국가의 신화가 창조되는 장소에서 역사 속 장면(난징 대학살, 모범 노동자 등)을 구현하는 밀랍인형을 그들 옆에 세웠다. 중국인이라면 누구나 학교에 들어가면서 한번쯤 만나게 되는 인형들 말이다. 류쩡은 공식 서사에서는 부재하는 현실의 인물과, 집단기억(Collective Memory)에서 비롯됐기에 그 누구도 진짜임을 의심하지 않는 허구의 인물들을 한데 뒤섞었다. 그리고 사람들과 나누고 싶은 새로운 집단 기억을 동일한 판형의 흑백 초상 120점으로 빚어냈다. 하지만 2004년 출간된 사진집 <중국인>은 중국 정부를 격노케 했다. 정부는 그의 작품에서 오로지 날조되고 왜곡된 중국의 이미지만을 보려 했다.

미술가, 조각가를 비롯한 일군의 예술가들이 권력의 중심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베이징 동부 외곽 지대에 예술촌을 세워 정착했다. 이 시기의 예술가들은 자신의 분노와 결핍을 표현할 가장 적절한 수단이 다름 아닌 행위예술이라는 점을 깨달았다. 단순한 재료만으로 행위자가 적극적인 육체적 참여를 통해 표현하는 행위예술은 1989년 6월 4일 민주화 시위 유혈 진압 이후 예술가들을 괴롭히던 무력감을 해소할 배출구가 되어주었다. 사실상 행위예술에서 예술가는 자신이 직접 기획한 사건의 주역 노릇을 하지 않던가? 대표적인 예로 좡환은 벌거벗은 온몸에 꿀을 바른 채 공중화장실에 들어가 앉았다. 파리들이 벌떼처럼 달라붙었다. 정권의 억압으로 인해 질식할 듯 살아가는 개인을 은유한 메타포인 것일까? 롱롱은 오로지 행위예술만을 전문적으로 사진에 담기 시작했다. 가령 6월 4일 톈안먼 사건을 기념하며 성치가 왼쪽 새끼손가락을 절단한 뒤, 손바닥 위에 빛바랜 증명사진 한 장을 올려놓았다. 기억은 사라져도, 절단된 신체는 남았다. 롱롱이 찍은 이 사진은 지구를 한 바퀴 돌아 전세계에 소개됐다. 본질적으로 순간의 예술로 인식되던 행위예술은 이제 사진을 기록 수단으로 삼았다. 중국의 현대예술사에서 이처럼 연출된 현실을 복제한 영상들은 포스트 톈안먼 시대의 중국 사진 예술을 지배하는 중요한 경향으로 자리매김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사진작가와 대상 사이의 관계가 아닌, 행위예술가(혹은 그의 모습을 담은 사진)와 관객 사이의 관계였다. 어느덧 사진은 한 편의 연극으로 변신했다.

예술비평가 구정은 "왕친쏭은 중국 현대 사진 예술사에 중요한 전기를 마련한 작가였다. 그를 기점으로 현실을 있는 그대로 촬영하던 시대가 저물고, 이미지를 철저히 제조하는 시대가 시작됐다"고 말했다.(4) 가령 왕친쏭의 대표적인 작품 <라오리 야연도>(Night Revels of Lao Li·2000)는 중국의 옛 명화 <한희재 야연도>를 그대로 재현했다. 오대십국시대(907~960. 후량·후당·후진·후주·후한과 당나라의 각 절도사가 세운 10국이 난립한 혼란기)에 막강한 권세를 누리던 조신 한희재를 매우 경계한 황제는 당대 유명 화가 고굉중에게 그를 염탐하도록 시켰다. 고굉중은 병풍이라는 아주 교묘한 수단을 이용해 긴 종이 위에 다섯 장면으로 한희재의 행적을 낱낱이 기록했다. 고굉중의 붓은 한희재의 야연 풍경을 거의 사진에 가까울 정도로 실감나게 자세히 묘사했다. 그다지 의욕적인 모습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연회에 참석한 모습은 한희재가 음모에 가담한 것이 아님을 여실히 증명했다. 그로부터 11세기가 지난 오늘날 이번에는 왕친쏭이 저속함으로 가득한 현대성을 기록하기 위해 고굉중의 역할을 자처하고 나섰다. 사진에서 창녀 차림의 궁녀들은 한희재만큼이나 무기력한 한 중국의 고위 관리를 에워쌌다. "중국 왕조가 수세기에 걸쳐 이어져오는 가운데 예나 지금이나 지식인의 위상은 별로 변한 게 없다. 나라를 건설하는 데 개입할 만한 힘이 없는 무력한 지식인들은 언제나 그저 여흥이나 즐기는 처지가 아니던가?"라고 왕친쏭은 반문했다.(5) 그러면서 그는 "예술가와 지식인이 공유하는 점이 있다. 그들은 모두 다른 세계를 만드는 것보다 현 세계를 새롭게 재현하는 것이 훨씬 더 쉽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다"고 덧붙였다.

천자강은 "연출은 허구다. 그 허구를 통해 나는 현실을 해독한다"고 말했다. 수년 동안 천자강은 '제3전선'이라 불리는 중국의 군수산업 시설물들을 카메라에 담아왔다.(6) 1960년대 소련과 관계가 소원해진 중국은 대만이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고 공격해올 것을 우려해 연안 지역에 자리한 거대 군산 시설물들을 산악지대로 옮겼다. 1966~70년 전체 정부 투자의 절반을 넘을 정도로 막대한 예산이 투입된 이 계획은 1971년 돌연 지정학적 상황이 중국에 유리하게 바뀌면서 결국 폐기됐다. 천자강은 군산 시설물들을 찍으면서 전통의상을 입은 젊은 여인들을 사진 속에 등장시켰다. 이는 마치 '생산 가능한 야수'와 '소비 가능한 미녀'의 조응으로 비쳤다. 천자강은 이것을 한마디로 정리했다. "어제 생산을 해야 했다면, 오늘은 소비를 해야 한다."

현대판 '제3전선'에 해당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싼샤댐과 양쯔강 인근에 황급히 조성된 '병든 마을들'(Diseased Cities, 천자강의 최근작)일 것이다. 하지만 중국 현대예술가 페이 다웨이(2010년 리안저우 국제사진페스티벌 총괄 기획자)는 그의 작품에 이렇게 딴죽을 걸었다. "군산 시설물에 굳이 전통의상을 입은 젊은 여성을 등장시키는 이유가 대체 무엇일까?" 현실을 좀더 매혹적으로, 좀더 스펙터클하게 보이도록 만들기 위한 꼼수는 아닐까? 사실 이는 오늘날 중국 사진 예술의 대세적 경향이기도 하다. 조작과 수정이 난무하는 디지털 영상 시대를 살아가는 신세대들에게 이제 '사진'은 너무 협소한 용어가 되어버렸다. 본질적으로 기록사진은 사람들에게 많은 환상을 불어넣기 힘들다. 그로 인해 "오늘날 중국에는 연출사진이 난무하고 있다. 하지만 주로 예술시장의 입맛에 맞춘 피상적이고 화려한 영상이 대부분"이라고 페이 다웨이는 지적했다. 상하이 '보제스트' 갤러리에서 일하는 장로도 비슷한 지적을 했다. 그는 "소프트웨어 도구들을 이용해 조작한 수많은 영상들이 실은 사진가를 예술가로 둔갑시킴으로써 미래가 더 밝은 예술 시장으로 진출하려는 속셈"이라고 지적했다.

이런 변화는 이미 서구 사진 역시 고스란히 밟아온 과정이기도 하다. 2012년 리안저우 국제사진페스티벌 기획자로 참여한 프랑수아 슈발 '니세포르 니옙스' 미술관 관장은 이렇게 말했다. "TV와 인터넷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실시간으로 보여준다. 그만큼 영상으로 세계 역사를 기록하기를 바라는 사진작가들은 이야기를 만들거나 들려주기 위해, 혹은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할 서사, 이미 알고 있는 역사적 사건들을 다시 한번 환기하도록 해주는 서사를 제공하기 위해 오랜 시간 더욱 공을 들이게 될 것이다. 그러니 더 이상 나는 사진을 순간성과 결부시켜 생각하기 힘들다."

오늘날 중국 사진 예술계에는 두 가지 진영이 대립하고 있다. 현실이란 그저 허구를 만들어내기 위한 소재에 불과하다고 인식하는 자들과, 그와는 정반대로 디지털 조작 없이 오로지 감수성으로만 승부를 보려는 작가들이 팽팽히 맞서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대결은 대개 풍요로운 작품을 탄생시키는 씨앗이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연극화된 영상이 범람하는 작금의 현실 앞에 우리는 이런 의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우리의 감각은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연출된 사진들에만 점차 익숙해지는 것은 아닌가?

 

/ 필리프 파토 셀레리에 Philippe Pataud Célérier 언론인

번역 / 허보미 jinougy@naver.com

(1) 문화혁명을 주모한 혐의로 체포된 마오쩌둥의 부인을 비롯한 중국 공산당 지도층 4인.
(2) Wu Hung et Christopher Phillips, <Between Past and Future: New Photography and Video From China>, 스마트미술관, 시카고대학, 2004.
(3) Liu Zheng, <The Chinese>, 슈타이들 출판사, 괴팅겐, 2004. 이 사진집에 실린 일부 작품은 2012년 11월 파리사진전 당시 베이징파인아트갤러리에서 전시됐다.
(4) Gu Zheng, <중국의 현대 사진>, 에롤 출판사, 파리, 2011.
(5) www.wangqingsong.com.
(6) Chen Jiagang, <The Great Third Front>, 타임존8/파리갤러리/베이징갤러리, 홍콩,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