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정치에 내일은 있는가

Corée 박근혜는 어떻게 승리했는가

2013-01-11     홍세화

"모든 사람이, 심지어 아주 어린 꼬마조차 마틴 루서 킹(미국의 목사, 흑인운동지도자)에 대해 알고 있고, 그의 인생에서 가장 유명한 순간은 '나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연설을 한 때라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 한 문장에서 더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우리가 아는 것이란 이 사람에게 꿈이 있었다는 사실뿐이다. 그것이 무슨 꿈이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슬라보이 지제크가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에서 인용한 이 이야기처럼(1), 이번 대선에서 우리의 처지를 잘 비유해주는 게 또 있을까? 많은 사람들이 정권 교체라는 꿈을 꾸었다. 하지만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문제는 이 꿈이 실패로 돌아가고 난 지금도 우리가 아는 것은 우리에게 꿈이 있었다는 사실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다. 그 꿈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 무엇이 있어야 하는지에 대해 우리는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지제크는 루서 킹의 예를 자유주의적 전유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인종 차별이 없는 평등에 머물렀을 때, 그는 미국의 정신적 지도자로 칭송되었다. 그러나 그가 거기서 빈곤과 군사주의 문제로 한참 더 나아가고 '평등의 공리'를 실천하려 했을 때, 그는 소수파가 되었고 제거되어야 할 위험인물이 되었다. 공공연히 베트남전쟁에 반대했고, 마침내 1968년 4월 미국 멤피스에서 살해되었을 때는 청소노동자들의 파업을 지지하기 위해 그곳을 방문 중이었다는 사실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지워지고 난 뒤에야, 그는 '나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명연설을 남긴 위대한 인물로 복귀할 수 있었다. 버락 오바마 시대에 이르러 백인과 흑인의 평등은 더욱 자명한 정치·윤리적 공리로 받아들이게 되었지만, 1920∼30년대만 해도 인종 사이의 완전한 평등을 주장한 정치 세력은 공산주의자뿐이었다는 사실도 그러므로 환기될 여지가 없었을 터다.

우리는 어떻게 퇴행의 길로 접어들었나

어디선가 '대선 힐링'이란 말을 읽은 것 같다. 상처가 생기자마자 힐링이 제공되는 이 놀라운 속도의 서비스 체계는 경탄을 자아내게 하지만, 치유의 길은 상처의 독을 제거한 뒤에야 비로소 열릴 것이다. '멘붕'(멘털 붕괴)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대선 이후의 집단적 패닉 상태는 (그것이 상당 부분 의도적으로 증폭되고 과장된 것임을 감안하더라도) 정치적 이성과 열정, 그리고 그 좌절이 가져온 것이라기보다는 어떤 종교적 현상이라는 느낌을 갖게 한다. '정치의 종교화'는 일찍이 냉전시대에도 존재했고, 미국 9·11 사태 이후 아들 부시의 미국에서 절정을 이룬 바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그것이 어느 때부턴가 지배적 정치 세력인 보수뿐만 아니라 정치적 자유와 평등을 지향한다는 쪽에서도 반복된다는 점이 다르다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손호철 교수의 지적처럼 '이명박의 저주'에 '노무현의 저주'(2)까지 겹친 덕에, 2012년 대선은 이를테면 1987년 대선 시점으로 되돌아갔다. 정권 교체가 그 자체로 절박했던 그때조차 그것 말고도 다른 꿈이 선택 항으로 존재했다는 점에서 본다면, 어쩌면 그 이전 시간으로 되돌아갔다고 할 수 있다. 정권 교체라는 하나의 목표가 다른 정치적 주장의 여지조차 남겨두지 않고 완벽히 삼켜버린, (실상 '좋았던 시절'에 대한 향수가 목표의 모호함까지 가려버린) 종교전쟁에 가까운 총력전 선거에서 패배하자 이번에는 인식의 진공 상태가 발생했다. 마치 종교적 열광 뒤에 다가오는 환멸과 같은 집단적 열패감은 그것대로 정체불명의 덩어리로 남겨진 채. 도대체 우리는 어떤 경로를 거쳐 여기까지 퇴행하기에 이른 것일까?

'좌파' 전선은 어떻게 분열되었나

'모든 향수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에 대한 향수'라는 말은 이 경우에도 거의 그대로 들어맞는다. 우리 모두에게 마냥 좋았던 시절은 존재한 적이 없었다. 존재했던 것이 있다면, 어떤 소수의 집단에는 하염없이 좋았지만, 그들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다수의 사람들이 사회의 밑바닥으로 추락해야 했던 '민주정부 10년'이 있었다. 그래도 '진보적 정권 교체'(이는 시작부터 출마를 포기했거나 나중에 도중하차한 '진보정당' 후보가 썼던 말이다) 이후 시작될 민주정부 '시즌 3'가 그전과는 분명히 다를 것이라는 믿음을 온통 부정할 근거는 물론 없다. 일련의 사람들이 믿는 것이 있고, 이들이 '믿는 것을 믿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때로는 현실로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을 테니 말이다. '민·군 복합형 관광미항으로 운영'된다는 기발한 단서가 붙기는 했지만, 대선이 끝난 지 보름도 안 되어 제주 해군기지 예산을 전액 합의해준 민주통합당의 행태 한 가지만으로 있지도 않을 미래를 재단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경우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자신들의 믿음을 합리화하기 위해 있었던 사실을 지우려는 욕망이다. 독재자의 딸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는 사실은 차별과 해고의 고통을 견뎌온 노동자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유의 지극히 일부를 설명할 수 있을 뿐이다. '노무현 당선인' 시절 꼭 이맘때에도 죽음을 선택한 노동자가 있었다. 차이가 있다면, 그 시절에 죽은 노동자들은 '민주화된 시대'가 도래했다는 정황을 미처 숙고하지 못한 '빗나간 죽음' 취급을 당했다. 그런 언설을 가능하게 했던 윤리적 우월감은 그것의 반인간성, 즉 반윤리성으로 인해 스스로 사라지는 게 당연했지만 지금까지 남아 민주-반민주 구도의 토대가 되었다. 이 흔들림 없는 윤리적 우월감은 혹시 떨림과 흔들림이 없는 인간을 낳은 건 아닐까? 더 뻔뻔하고 나쁜 집단이 존재하는 한, 이 윤리적 우월감은 끝내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노동자들의 잇따른 죽음에 무감한, 차라리 감옥보다 교활하게 잔인한 손배 가압류의 시대는 그렇게 예고된 것인지 모른다.

물론 최장집 교수의 말처럼 '죽음'으로 상징되는, 노동하는 인간의 비극은 장기 지속되어온 '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필연적 귀결이다. 이 말은 곧장 이런 현실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정치 세력이 '노동정치'의 실현을 존재 이유로 삼는 좌파라는 걸 의미한다. 이쯤에서 밝혀두지만, 이 글은 다른 정치적 입장을 가진 사람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취하는 경우에도 좌파(나 자신까지도 포함된)임을 주장하는 집단의 자기성찰을 시도하려는 목적에 필요한 경우로 한정한다. '진보신당 전 대표'라는 이름을 얻게 된 오늘, 1년 가까운 현실정치인의 기간을 되돌아보면 떠오르는 두 개의 상이 있다. 하나는 움켜쥐고 있던 플래카드의 끝자락이라는 유형의 상이고, 다른 하나는 온통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높은 성벽이라는 무형의 상이다. 애당초 중앙이나 높은 자리와 인연이 없었던 나는 결국 플래카드의 끝자락조차 놓아버려 "사진에 나와야 합니다. 놓지 마세요"라고 당부하던 당직자를 실망시켰는데, 높은 성벽은 내가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활동가들에게 활동을 통해 의미와 보람을 느끼게 하기보다 끊임없이 힘들고 지치게 만드는, 바깥보다 내부에서 쌓아올린 배제의 성벽들은 참으로 강고하고 높았다. 가령 한 정파가 노조 집행부를 장악한 현장에 다른 정파 활동가는 아예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민주노총 소속 조합원들도 정파의 노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배타적 지지'의 관리 대상이었을 뿐 스스로 판단할 줄 아는 주체가 아니었다. '노동 없는 민주주의' 이전에 조직노동 스스로 민주주의 바깥에 있었고, 주체 형성은 각 정파의 성벽 안에 가둬져 있었다. 그렇지만 '아무것도 주도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으므로 아무것도 말할 것이 없다'는 식의 침묵이나 '내가 주도적으로 하지 않는 한 아무것도 하지 않는' 행태는 현실적 역량이 부족한 좌파라는 말로 모두 덮을 수 있는 것은 분명 아니다. 이번 대선에서 좌파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그건 사실과 다를 뿐 아니라, 의도적 묵살일 공산이 크다. 비정규직 출신 '노동자 대통령 후보'는 경찰의 주먹에 얻어맞기 전 진보 정당들에 의해, 무엇보다 정규직 노동조합을 기반으로 하는 조직노동에 의해 외면당했다. 여기에 '내가 주도적으로 하지 않는 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성벽이 작용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이는 '세계를 구축하는 차이'를 의미 있게 보여주지 못한 주체의 무능과 더불어 삭제되어서는 안 될 기억으로 남아야 할 것이다. 당연히 하나여야 했던 노동자 후보가 둘이 된 실패의 참담함과 함께.

좌파 엘리트들만의 '노동자 정치 세력화'

앞선 몇 차례의 대선에 비해 많은 사람들을 투표장으로 불러낸 것은 국민이 지닌 평균적 정치 수준의 향상에 기인한다기보다는 사회·경제적 위기의 심화에 따른 불안감과 미래의 불확실성이 영향을 미쳤다고 하는 편이 사실에 더 가까울 것이다. 만약 자본주의의 실패 자체가 자유민주주의적 가치를 그 근간에서부터 뒤흔들고, 사회가 걷잡을 수 없이 양극화될 뿐 아니라 이전의 노동과 복지 의제들이 사회적 고통을 해결하는 데 턱없이 못 미치는 현실이 닥치는 상황에서 예의 고전적 정당정치론은 무슨 말을 들려줄 수 있을까? 실패한 자본주의가 가져온 민주주의의 위기는 마침내 '대표성의 위기'가 아니라 '대표성의 착란'을 가져온다. 총자본의 이해를 대변할 것이 분명한 정치권력이 민생정부를 표방하고 '100% 대한민국'을 주창하는 것이야 승자의 수사라 치더라도, 계급의 이해를 초월하는 국민 통합을 보수주의에 청탁하는 기이한 현상이야말로 정당정치론의 '비상사태'를 뜻하는 것이 아닐까?

'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한계를 지적하며 '대표성의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던 대의제민주주의의 옹호자가 "노동자의 이익과 요구를 대변하는 정당의 성장을 기대할 수 없다"며 "노동 세력이 꼭 정당으로 발전해야 할 이유는 없다"(3)고 회의적인 진단을 내리면서도, 안철수의 '제3 정당'이 만들어진다면 "한국 정치사와 정당 체제의 중대한 변화"라고 이야기할 때, 그가 말하는 '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인간의 상처들'은 정치의 바깥으로 내던져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다시, 문제는 민주주의이다. 민주주의에 완성이라는 건 애당초 없으며, 그것은 우리가 다가갈수록 저 멀리 물러난다. 민주주의의 성숙이 '민'의 성숙, '민주' 의식의 형성 없이 가능하지 않다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의 정치적 주체 형성 없이 다다를 수 있는 민주주의의 층위란 어디쯤일까?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는 점은 누구나 상식적으로 알고 있지만, 초·중·고등학교 교육과정에서 두루 공부하는 사회 과목에서 자본주의에 관해 공부한 게 별로 없다는 점을 알아차리는 것조차, 선배를 '잘못' 만나거나 해고나 차별을 직접 당하고 싸운 경험 없이는 거의 불가능한 사회에서. 가야 할 길이 너무 멀기 때문에 아예 가지 말자고 하는 것일까? 사회적 갈등과 모순, 인간의 고통이나 요구, 이해. 이것들 모두가 정당으로 대표되는 것을 통해 극복되고 해결되는 것이 민주주의의 유일한 선택 가능성이 된다고 말하는 것은? 더구나 노동 세력이 반드시 스스로 정당으로 발전할 이유조차 없다고 말하는 민주주의는 99%의 인간들을 언제라도 쓸모없는 존재로 만들어버리는 자본주의에 어떤 의미 있는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까?

어떤 문제도 자유민주주의의 대의제 틀 안에서 '실현 가능한 이념과 정책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질 때 정치적으로 유의미하다는 주장은, 오로지 시장에서 교환될 수 있는 가치만 남기고 나머지 가치들은 균등화하는 자본주의 체제 논리에 정확히 조응하는 정치의 물신화와 다름없다. 문제는 이런 자유주의적 협박을 '진보를 대표한다'는 정치 세력들이 자발적으로 받아들였다는 데 있다. 그리하여 '노동자 정치 세력화'라는 애초의 목표는 의회에서 노동자를 대표하는(한다고 주장하는) 정치 엘리트와 조직노동의 상층 간부의 정치적 진출의 공간 확보를 의미하는 것으로 축소돼버렸다. 

그렇다면 대의제에 갇힌 좌파 정치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었을까? '무상교육·무상의료'라는 보편적 복지 의제의 제출은 그 자체로 의미 있는 것이었지만, 체제가 허용하는 한도 안에서 가능한 사민주의적 정책 몇 가지를 제출하는 것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그리고 의회 진출 뒤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는 정치 활동을 통해 존재 이유를 지닐 수 있었던 좌파 정치는 의회 권력 안에서 생존하는 데 몰두하면서 "주요 엘리트들이 정치적 자원을 증대하기 위해 대의도 없는 편의적 통합"(최장집)을 하기에 이른다. 이 '진보의 허구적 존속'이 어떻게 급속히 파산에 이르렀는지는 우리가 이미 아는 바와 같다. '통합진보당'이라는 당명에서 '진보는 나로써 통합되었다'는 의미의 패권주의와 배타성을 읽은 것은 정치적 소수파의 눈이었겠지만, 최초 당대표 3인이 모두 서울대 출신이라는 점이 금세 눈에 들어왔던 건 진보 정당 대표나 대통령 선거 후보로 현장노동자 출신이 주로 나오는 유럽의 경험 때문일 것이다.

좌파 정당의 진정한 위기

자본주의 이데올로그들조차 자본주의가 더 이상 지속 가능한지 회의하는 마당에 좌파의 존재 이유이자 대의인 '자본주의 극복'에 대해 말하지 않는 좌파 정치가 할 수 있는 일은 실상 거의 없다. 대의제민주주의의 진정한 위기는 기존 대의제로는 대표가 불가능한 존재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벌거벗은 생명'들- 이 시대의 '레미제라블'(비참한 사람들)- 이 넘쳐나게 되었다는 현실에 있다. 자본은 이미 '고용 없는 성장'을 추구하는 단계로 이행한 지 오래이고, '노동의 유연화'라는 이름 아래 노동하는 삶을 항상적인 비정상 상태(비정규직화)에 몰아넣거나 노동 밖의 잉여적 존재로 만들어버렸다. '고용과 성장'이 순환적 관계에 있을 때나 가능했던, 이미 위기에 처한 유럽의 '관리사회형 복지 모델'을 베끼려고 시도하는 사이, 자본주의의 극복이라는 좌파의 정치적 임무는 유효기간이 끝난 석유 문명 이후를 고민하는 급진적 생태주의자들의 몫이 되어버렸다.

사회·경제적 위기가 심화되고 사람들의 삶이 불안에 휩싸인다고 해서 '혁명적 상황'이 도래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경제위기가 총자본 보호의 이데올로기로 기능하고 '민생'과 '복지'가 보수주의의 정치적 수사가 된 상황에서, 우리가 머잖아 목격하게 될 것은 성난 대중의 반란이 아니라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자애로운 보수 정치의 얼굴일 것이다. 설사 다른 손에는 '법과 원칙'이라는 몽둥이가 들려 있다 할지라도. 때맞춰 상영되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힐링 효과를 주고 있는 영화 <레미제라블>에서 이끌어내고 싶은 얘기는 빅토르 위고가 벌써 150년 전 했던 말이다. "왜 사람들은 온정, 시혜에 관해 말할 때 항상 주는 쪽에 서 있나?", "파리는 항상 이(齒)를 드러내고 있다. 웃지 않으면 화를 낸다"는 그의 말에서 주체는 보이되 객체는 보이지 않는다. 온정과 시혜, 그것을 주는 자에겐 말하는 입이 있지만, 받는 자에겐 고픈 배를 채울 입이 있을 뿐 말하는 입이 없다. 주체와 대상은 항용 그렇게 갈린다.

사람들의 삶이 파산되고 신음하는 장소를 그저 찾아다니기만 하는 '민생진보'는 존엄성이 이미 훼손된 존재의 현실을 변화시키는 데 조금도 기여하지 못할 것이다. 직접민주주의를 강조하면서 대의제민주주의를 부정하자는 게 아니라, '오로지 대의제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말이다. 대의제에 갇혀 고사당하는 정치를 해방시켜, 편재된 고통에서 정치의 장소를 재발견하고 그 장소에서 새로운 정치적 주체화를 통해 대의제를 포위하는 전략을 선택해야 한다. 좌파 정치는 '반드시' 정당으로 조직되어야겠지만, 민중이 삶과 노동의 장소에서 정치적으로 주체화되는 길을 사유·실천하지 못하고 민중을 통계의 형태로 환원시키는 선거정치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한 좌파 정당은 '기울어진 운동경기장'의 대기실에서 머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좌파의 적은 바로 자신의 자폐성

"오직 자본주의를 극복함으로써만 인간의 자유와 참된 만남의 공동체가 가능하다"(진보신당 강령 전문 중에서)는 명제를 실천하기 위해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4)를 묻고 노동자가 경영권을 갖는 주체가 되는- 기업이라는 폴리스(Polis)의 주인이 되는- 대안이 추구되지 않을 때, 국가권력을 주어로 하는 재벌 개혁은 오늘의 난폭한 자본주의를 과연 통제하는 데 얼마나 기여할 수 있을까? 사람들이 자기 삶의 주체가 되지 못하는 현실이 유지될 때 '해방된 주체'들을 자원으로 삼지 못하는 좌파 정치는 대의제 안에서 얼마나 생존할 수 있을까?

그리하여 오늘 초라한 모습으로 남겨진 좌파들에게는 어떤 길이 남아 있을까?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체제라는 1차 파국과 함께 시작된 총자본의 공세- '구조조정'이라는 이름의 노동시장 유연화 공세- 가 '포섭과 배제' 전략에 따라 진행되면서 노동 사회 내부는 분열되고 수직적 분업 체계로 재편되었다. 노동자이자 주식투자자인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과 "노동하다가 일시적으로 노동하지 않게 되는 존재가 아니라, 비노동 상태로 살면서 일시적으로 노동하는 존재인"(5) 비정규직 노동자는 하나일 수 없다. 노동자계급의 단결을 호소하거나 노동이 중심이 된 좌파 정당의 출현이 이루어지리라 기대하는 것은 무망해 보인다. '좌파의 황금기'에 대한 향수에 기댄 '노동자계급 정당' 건설의 꿈 또한 마찬가지 아닐까?

이런 엄연한 현실에서 자본주의의 극복을 지향하는 좌파 정치는 노동자들을 '과잉인구'로 만들어버리는 '고용 없는 자본주의'에 노동자 경영권을 통해 민주적 통제를 실행하는 길을 모색하거나, 기본소득제의 실현을 통해 권력의 자원으로 봉사하는, 아니 권력 그 자체가 되어버린 금융자본을 공공화해 민중의 인간다운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삶의 자원으로 전환시키는 길을 동시에 모색하는 길을 공세적으로 펴야 하지 않는가. 민주주의 성숙의 길이 각자 몸이 있는 자리마다 주인이 될 때, 다시 말해 집안과 배움터와 일터에서 주체로 살 때 그만큼 열릴 것이다. 또한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영혼이 잠식되는 것을 막지 못할 때 발가벗은 존재의 입들은 오로지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서만 열릴 것이다.

이를 위해서 좌파는 먼저 사라진 '노동의 세계'에 대한 향수와 왜곡된 선민의식에 갇힌 심각한 자폐증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고통으로 가득 찬 세계라 할지라도 오늘의 자본주의를 어제의 자본주의로 되돌릴 수는 없다. 오늘 비정규직이 노동자의 절반을 넘어선 현실을 두고, 이미 잉여가 되어버린 광범한 실업인구를 두고, '완전고용' 사회가 가능할 것처럼 말하는 것은 설령 그것이 선의에서 나온 것이라 하더라도 허위이다. "정규직화된 고용조차 불가능한 오늘의 자본주의가 지닌 한계 지점을 드러내는 의미에서만" 비정규직의 완전한 철폐는 정치적 요구로서 유의미하다. "그것이 차라리 불가능한 요구이고, 그 불가능성이야말로 그 요구를 의미 있게"(6) 하기 때문에 그러하다.

삶은 살아져야 할 뿐 아니라 영위되어야 한다. 그것은 생산을 멈춰 세우게 하는 파업으로만 달성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모든 이에게 100만 원씩 줘보라, 세상이 안 바뀌나!"(7) 오늘 비참함과 고통을 겪는 사람들을 국가복지의 수도꼭지 앞에 줄 서게 하는 수치의 감수자가 아니라, 자기 삶을 영위하는 당당한 주체로 사는 방법을 모색하지 않는 한 좌파 정치의 내일은 없을 것이다.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을 선취해 그것을 보여주지 않는 좌파를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 홍세화 진보신당 전 대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전 편집인.

(1) 슬라보이 지제크,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 김성호 옮김, 창비, 79쪽.
(2) <경향신문> 손호철의 정치시평, 2012년 12월 24일.
(3) 최장집, ‘신년기획: 2013년을 말하다(2)’, <경향신문>, 2013년 1월 1일.
(4) 김상봉,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 꾸리에, 2012.
(5) 이진경, ‘노동자는 하나다?… 흘러간 옛노래’, <프레시안> 2012년 1월 2일.
(6) 이진경, 위의 글.
(7) 김종철 대담, ‘모든 시민에게 100만 원씩! 세상이 안 바뀌나보자’, <프레시안>, 2011년  11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