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의 길
Corée 새로운 시작
지난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 진보 진영의 패배와 관련해 그 원인을 찾는다고 갑론을박이 한창이다. 이른바 '아름다운 단일화'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 데 가장 큰 원인이 있다고 해야 할 터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묻는다. 정권 교체보다는 알량한 기득권 유지에만 골몰했던 민주당이 양보하고, 박근혜를 이길 가능성이 더 커 보인 안철수가 단일후보가 되었더라면 이를 막을 수 있지 않았겠느냐고.
안철수라면 이겼을까?
어쩌면 그랬을 수도 있다. 만약 그랬더라면 '참여정부'의 실정에 대한 반감도 덜했을 것이고, 민주당에 대한 불신 때문에 잃어버린 표도 더 적었을지 모른다. 좀더 많은 젊은이들이 투표에 임했을 수도 있고, 중도층도 더 잘 견인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안철수의 '성공한 경제인' 이미지가 긍정적 요인으로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누구 말마따나 이기고도 남을 선거를 했을 수 있다.
그러나 선거 결과가 보여주는 것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세대별 투표율을 볼 때, 안철수였더라도 투표 결과 확인된 '50대의 반란'을 충분히 제압할 수 있었을지는 충분히 확실치 않다. 새누리당 쪽에서도 예견하지 못했을 그 놀라운 반란은 어쩌면 정확히 '안철수 현상'에 대한 반작용일 수 있다. 이 세대는 애지중지 키우긴 했지만 저희들 처지도 이해 못하고 집값 걱정 같은 것도 안 하는 도무지 철없어 보이는 자식들이 안철수에게 열광하는 것이 못미덥고 불안했을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식들이 한다는 생소한 페이스북이나 트위트 대신 손쉬운 카카오톡으로 무장하고서 보수, 그것도 '독재자의 딸'을 위해 그처럼 열정적으로 투표장으로 향했는지 모른다.
차라리 민주 진보 진영은 전체적으로 실력에 비해서 좋은 성적을 얻었고, 그렇지만 패배했다고 여기자. 박근혜를 이길 가능성은 있어 보였어도 민주당은 이길 수 없었던 안철수의 한계도 분명했고, 민주당의 지리멸렬함과 구태도 하루아침에 극복될 일이 아니었다. 진보 정당들의 분열과 몰락도 이미 오래전부터 걸려 있던 고질병이 낳은 불가피한 결과였다. 그럼에도 단일후보 문재인은 1469만 표나 모아냈고, 또 그렇지만 졌던 것이다. 보수 진영이 더 강했고, 진보 진영으로서는 역부족이었다고 여기자. 물론 그렇다고 민주당에 면죄부를 주자는 이야기는 아니고, 져서는 안 될 선거에 패배한 이 통한을 억지로라도 위무하자는 이야기도 아니다. 특정 세력의 잘못이나 전략 실패에 대한 성찰을 넘어 안철수를 포함한 모두가 앞으로 절치부심(切齒腐心)하면서 실력을 더 키워야 한다는 진짜 중요한 과제를 놓치지 말자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문재인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안철수는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안철수 현상도 사라지지 않았다. 민주당이 앞으로 어떻게 스스로의 방향을 설정하든 민주 개혁 세력은 안철수와 더불어서만 미래를 준비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 구체적 경로와 방식을 예견하는 따위의 일은 지금 할 수 없다. 그러나 큰 방향에 대해서는, 기본 원칙에 대해서는 서둘러 정리해두는 것이 필요하지 싶다. 갈 길이 멀기 때문이다. 우선, 떠나온 길을 되짚어보면서 어디를 어떻게 가야 할지 실마리를 찾아보자.
안철수도 못 본 '안철수 현상'의 본질
먼저 안철수 현상은 도대체 어떤 것이었는지 다시 살펴보는 일부터 시작해보자. 다른 차원도 고려해야겠지만, 많은 이들이 이해한 대로 안철수 현상은 그 근본적 수준에서 시민들의 '새 정치'에 대한 깊은 열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것은 새누리당뿐만 아니라 민주당도 함께 보여왔던 기득권화된 정치계급의 낡은 정치 행태와 양식에 대한 시민들의 근본적인 회의와 불신의 표현이었다. 그리고 시민들이 기성 정당들을 우회해 스스로 직접적 참여를 통해 정치를 움직여보겠다는 열망을 표출하고 결집시켜 새로운 정치 세력과 정치 환경을 만들어보려 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이 점에서 무소속 안철수 후보는 그간의 대선에서 나타났던 제3 후보와는 근본 성격이 크게 다르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안철수 현상의 실체를 정확하게 해석해 수용하는 것은 결코 가벼운 과제가 아니다. 나는 심지어 안철수나 그의 캠프에 참여한 인사들도 그 의미를 충분히 제대로 이해했다고 보지 않는다. 숱한 장삼이사(張三李四) '철수들'의 부름을 외면하지 못하고 정치판으로 불려나오고 선거캠프도 꾸렸지만, 안철수와 그의 캠프는 그 철수들의 뜻과 열망에 대한 '해석의 정치'에서 실패했다는 게 내 판단이다. 안철수 현상은 의학적 용어로 말하면, 여러 차원의 증상이자 징후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것은 제대로 감지되고 심층적으로 해석되어야만 올바른 진단과 처방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의사 출신 안철수는 시민들의 몇몇 주관적 증상의 호소에만 반응했거나 중요한 객관적 징후는 놓친 것이 아닌가 싶다.
흔히 안철수 지지층은 양대 정당정치에 염증을 내는 '중도·무당파' 성향이라고 알려져 있다. 안철수는 출마 선언을 하면서 이런 지지층의 성향을 염두에 두면서 민주당과 새누리당의 '사이'에서 정치적 위상 설정을 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이 가장 근본적인 패착이었다. 중도·무당파 층의 정치적 요구는 민주당과 새누리당의 '사이'가 아니라 그 '너머'를 향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그런 패착은 안철수로 하여금 지난 대선 과정에서의 행적이나 공약을 제시하는 데서 애초 그의 '생각'으로부터 일정한 후퇴를 가져오게 했고, 불가피했던 단일화 과정의 험로를 제대로 헤쳐나가지 못하게 만들었다.
국회의원 정원 축소에 대한 그의 고집을 떠올려보라. 이미 많이 지적되었지만, 그런 안은 많은 대중의 정치 불신 정서에는 잘 부합했지만 포퓰리즘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행정부에 대한 의회의 견제력과 입법 능력을 약화시키는 등의 효과를 낳아 자칫 민주주의 정치 그 자체의 축소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안철수 현상을 대하는 안철수 자신의 오독과 한계를 극명하게 드러내준다. 그는 단지 국민의 정치 혐오에만 편승할 것이 아니라, 그 정치 혐오의 참된 초점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그것을 올바르게 담아내는 정치 개혁의 방향을 제시할 수 있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물론 민주주의 정치는 대중의 요구에 민감하게 반응해야만 하고, 또 그래서 얼마간 포퓰리즘적이지 않을 수 없다. 그런 반면 민주주의 정치에서는 지도자가 아무리 대단한 비전이나 철학을 지녔더라도 대중이 공유할 수 없으면 의미가 없다. 문제는 대중의 열망에 부합하려거나 안철수가 즐겨 썼던 표현대로 '국민만 보고 가겠다'는 자세나 태도가 아니다. 정치가 국민의 뜻과 열망을 따른다는 것은 일단 매우 바람직한 민주적 출발점이다. 그러나 박근혜 지지자들도 국민이다. 그 비율도 엄청나다. 그렇다면 문제는 국민의 '어떤' 뜻이나 열망을 '어떻게' 수용해 정치에 반영하느냐는 것이다.
민주주의 정치가 포퓰리즘의 덫에 빠지지 않으려면, 그것이 따르고자 하는 국민의 뜻과 열망을 그 국민이 민주공화국의 '시민'으로서 '서로서로', 그것도 '보편적으로' 나누어 가질 수 있다고 합리적으로 기대할 수 있는 지향으로 번역해내고 재구성할 수 있어야만 한다. 안철수는 바로 이런 시민적 상호성과 보편성의 원칙에 따라 양대 기성 정당 '너머'의 정치를 추구해야 했지만 그저 그 '사이'에서 머뭇거리고 말았다. 안철수 현상에 대한 이런 민주적 해석 정치의 실패, 안철수가 앞으로 가야 할 길은 이에 대한 올바른 성찰로부터만 보일 것이다.
'시민적 대의'를 통한 공공성의 정치 추구해야
지금 국면에서 안철수가 그 '너머'의 정치를 어떤 방식으로 추구해야 할지는 지극히 불투명하다. 지금으로서는 그가 구체적으로 어떤 길을 가는 것이 바람직할지 전혀 가늠할 수 없다. 민주당이 어떤 방식으로 이번 대선 패배 후의 혼란을 수습하는지도 지켜보아야 할 것이고, 박근혜 정부의 향후 국가 운영 기조나 정치 환경의 변화도 두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애초 안철수 현상에서 그를 매개로 표출되었던 시민들의 새 정치에 대한 열망은 아직도 강력하게 살아 있다. 그래서 안철수의 정치적 미래가 여전히 그가 그 열망에 어떻게 부응하는지에 달려 있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나는 그 '너머'의 새 정치가 한마디로 시민정치의 토대 위에서 이루어지는 '공공성의 정치'여야 한다고 본다.
그것은 우리 정치권이 특권계급화되어 시민들의 참된 열망과 이해관계를 왜곡하고 정치가 실현해내야 할 공공성의 원칙을 저버린 데 대한 안티테제다. 그 때문에 지난 대선 과정에서 그가 강조한 정치계급의 기득권 축소 요구는 일단 올바른 출발점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정치로 불러낸 안철수 현상의 근저에 있던 '시민적 권력' 강화 요구라는 참된 초점을 충분히 분명하게 포착하지 못했다. 그것은 전체적으로 정치에 대한 시민의 주도성과 정치권에 대한 견제력을 좀더 강화해야 한다는 요구였다. 이제 다시 한번 추구되어야 할 새 정치는 이와 같은 시민정치의 토대를 더 분명하고 굳건히 하는 방향을 잡는 데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시민적 권력 강화 추구가 정당정치나 대의제와 모순된다고 볼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민의를 더 잘 대의하고 시민적 상호성과 보편성의 원칙에 따라 모든 시민의 이해관계에 공평하게 복무하는 공공성의 정치를 실현하는 것이지, 단순히 의원 수 축소 같은 것이 아니다. 그래서 정치계급의 기득권 축소를 추구하되, 그것은 오히려 '시민적 대의'의 강화라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직접민주주의와 대의민주주의를 일차원적으로 대립시키는 식의 접근은 오늘날 복잡한 사회에서는, 그리고 국가와 사회의 분리라는 조건에서는 전혀 문제의 본질이 아니다. 직접적이든 대의적이든 민주적 의사결정 장치들을 가능한 한 효과적으로 결합해서 시민주권을 제대로 실현해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정치가 제대로 된 공공성을 추구하고 실현할 수 있는 좀더 나은 민주적 심의 절차를 마련하는 것이 더 중요한 핵심이 되어야 한다.
이런 시민정치의 토대 위에서 추구되어야 할 공공성의 정치는 단순히 정치 양식의 변화만을 추구하는 것일 수 없다. 그것이 중요한 이유는 그런 정치 양식의 변화가 정치의 새로운 실질을 담보할 수 있다고 기대되기 때문이다. 결국 가능한 한 최대한의 시민적 존엄의 평등을 보호하고 실현하는 것, 그리하여 모든 시민이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필요를 별다른 장애 없이 충족시키면서 다른 시민들과 떳떳하고 당당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이 새로운 공공성의 정치가 추구하는 어떤 '규제적 이상'이 되어야 한다. 그런 정치는 무엇보다도 시장과 국가의 부당한 지배와 횡포에서 사회적 약자들의 존엄성을 보호하고, 그 훼손에 맞설 수 있는 시민적 역량을 강화하는 정책들을 추구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한다. 바로 이것이 안철수 현상에 담겨 있던 시민적 요구의 참된 초점이 아니겠는가?
글 / 장은주 영산대 법대 교수. <시민과 세계> 편집주간. 서울대 철학과, 독일 프랑크푸르트 요한볼프강괴테대학 철학박사. 저서로 <생존에서 존엄으로: 비판이론의 민주주의 이론적 전개와 우리 현실>(2007), <인권의 철학: 자유주의를 넘어 동서양 이분법을 넘어>(2010)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