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에게 '우파공존' 손짓하나

2013-01-12     권혁태

2012년 12월 16일, 제46회 중의원 선거에서 아베 신조가 이끄는 자민당이 예상대로 압승을 거두었다. 그리고 민주당은 예상 이상으로 참패했다. 자민당은 중의원 480석 중 294석을 차지해 118석에서 무려 176석을 늘렸다. 이념적으로 자민당보다 더 '오른쪽'에 있다는 신생 정당 '일본 유신의 회'는 11석에서 43석을 늘려 54석을 차지했다. 또 자민당의 '단골' 연립 파트너인 공명당은 21석에서 31석으로 의석수를 늘렸다. 이 3개 정당의 의석수는 모두 379석으로, 개헌 가능선인 321석을 훌쩍 넘겼다. 자민당의 의석수 점유율은 무려 61.3%로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이끈 선거에서 61.7%의 점유율을 차지한 2007년 대승을 빼면 1958년 61.5%, 1960년 63.4% 이래 가장 높은 수치이다. 의석 점유율로만 보면 55년 체제의 자민당이 다시 돌아온 듯하다.

'거대 1당 자민당'의 귀환

이에 비해 민주당은 겨우 57석으로, 선거 전 231석에서 무려 174석이나 줄었다. 선거 직전 결성된 '일본 미래의 당'은 탈원전,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ras-Pacific Partership·TPP) 반대, 감세 등을 내걸고 자민당·민주당 출신에 사회민주당 탈당파까지 긁어모았지만 61석에서 무려 52석이 줄어든 9석에 그쳤다. 일본 공산당은 9석에서 1석이 줄어든 8석, 사회민주당은 5석에서 3석이 줄어든 2석에 그쳤다. 만일 자민당, 일본 유신의 회, 공명당을 우파라 하고, 민주당과 일본 미래의 당을 중도 리버럴, 그리고 공산당과 사민당을 좌파라 한다면, 이번 선거는 우파의 압승과, 중도 리버럴 및 좌파의 참패라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일본에서 정치적 우경화를 견제할 수 있는 의회 세력은 거의 힘을 잃었다고 봐도 좋다. 자민당은 이제 적어도 의석 분포상으로는 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되었다. '닥치고 우향우'인 셈이다.

자민당의 승리를 이끈 아베의 복귀가 갖는 상징성도 작지 않다. 아베는 전후의 역대 총리 중 총리 자리에서 물러났다가 다시 복귀한 두 번째 사례이다. 1980년대 이후 배출된 총 19명의 총리 중에 무려 12명이 2세 정치인인데, 아베의 복귀는 이런 흐름의 연장선상에 있다. 게다가 아베는 메이지유신의 중심지인 야마구치(옛 조슈)가 지역구이다. 역대 총리를 가장 많이 배출한 지역이다.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가쓰라 다로, 데라우치 마사타케, 다나카 기이치, 기시 노부스케, 사토 에이사쿠에 이어 야마구치 출신으로는 8번째이다. 모두 이래저래 한반도와 '악연'을 지닌 정치가들이다. 현해탄을 사이에 두고 한국과 일본에서 각각 '유신의 후손'들이 최고 권력자에 오른 셈이다.

자민당의 압승, 아베의 복귀 외에도 이번 선거에 나타난 변화는 작지 않다. 첫째는 여성 의원의 감소이다. 선거 전 54명이던 여성 의원은 이번 선거로 16명이 줄어 38명이 되었다. 1990년대 이후 점차 비중을 높여 2009년 선거에서 사상 처음으로 10%대를 넘어서 11.3%을 기록한 여성 의원 비율의 상승세가 꺾여 10% 이하(7.9%)로 떨어졌다. 정당별로 보면 자민당이 8명에서 23명, 일본 유신의 회는 0명에서 5명으로 각각 늘어났지만, 민주당은 26명에서 3명으로, 일본 미래의 당은 13명에서 3명으로 대폭 줄었다. 전체적으로 여성 의원이 대폭 줄어드는 가운데 보수파 여성 의원이 대폭 늘어난 셈이다. 남녀평등 정책 등에 부정적인 자민당 여성 의원이 대거 국회에 포진한 셈이다.

지역 변화도 예사롭지 않다. 오키나와의 4개 지역구에서 자민당이 3석, 민주당이 1석을 차지했지만 비례대표 의원을 자민당이 가져갔으니 오키나와도 자민당 천지가 되었다. 후텐마 미군기지를 오키나와현 밖으로 이전하겠다는 공약을 내걸고서도 집권 후 이를 뒤집은 민주당에 대한 실망과 분노가 민주당 지지 철회로 이어진 듯하다. 하지만 이번에 오키나와에서 당선된 자민당 의원들도 자민당 중앙의 방침과는 달리 후텐마 미군기지의 오키나와현 밖 이전을 공약으로 삼았으니 중앙당과의 '충돌'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민주당의 '밭'이던 홋카이도도 심각하다. 12개 선거구 중에 11석을 차지했던 민주당을 대신해 자민당이 11석, 공명당이 1석을 차지했다. 주변국과의 갈등이 '접경지대'에서의 자민당 압승으로 이어진 측면도 부정할 수 없다. 원전 사고의 여파가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후쿠시마의 경우, 5개 선거구 중 4개를 자민당이 가져갔다. 선거 전 민주당이 5석을 모두 차지했던 곳이다. 원전 건설에 여전히 의욕적인 자민당이 원전 감축을 내건 민주당이나 탈원전을 내건 일본 미래의 당을 압도했으니 일본의 탈원전운동은 일단은 고립무원이다. 3·11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각종 지방선거에서 탈원전을 내걸고 당선된 사례는 없으니 이런 흐름은 새삼스럽지 않다.

28% 득표로 의석 60% 차지

세습정치(부모, 조부모, 3촌 이내를 국회의원으로 두면서 부모 등과 같은 선거구에서 당선한 의원)는 변함없이 기승을 부렸다. 당선된 세습의원은 모두 111명으로 전 당선자의 23%에 달했는데 이 중 자민당이 78%, 일본 유신의 회가 16.7%를 차지했다. 특히 자민당은 당선자의 약 30%가 세습의원이었다. 세대 교체의 흐름도 만만치 않다. 당선자 중 초선이 187명으로 전체의 38.9%이다. 거의 4명 중 1명이다. 현행 선거제도가 실시된 이래 가장 많다. 이 중 120명이 자민당이고, 38명이 일본 유신의 회, 10명이 공명당이다. 민주당은 1명에 불과하다. 세대 교체를 이끈 것은 일단 자민당이다. 당선자의 평균 연령은 51.9살로 2009년 선거와 별 차이 없으나, 1996년 선거 당선자의 평균 연령 54.8살 이래 하락 추세의 연장선상에 있다. 당선자를 직업별로 보면 자민당은 지자체 의원, 의원 비서, 당료 출신이 52.4%이고, 관료 출신이 13.6%이다. 이를 보면 대체로 부모 등의 지역구를 이어받은 50대 초반의 남성이 자민당 등의 보수 정당에서 공천받아 처음으로 국회에 진출한 게 이번에 당선된 중의원 의원의 평균 모습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한국에선 아베가 이끄는 자민당의 강경한 외교안보 정책에만 눈을 돌리고 있지만, 사실은 경제문제가 크게 작용한 듯하다. 선거 3일 전인 2012년 12월 14일자 <아사히신문>에 실린 여론조사에 따르면, 자민당 지지자는 경기대책(61%)을 원전(16%)이나 외교안보(15%)보다 중시했다. 1990년대 이래 계속되는 장기불황에 대한 불안이 자민당 지지로 이어졌다고 보는 편이 정확하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역시 투표율이 중요하다. 이번 선거의 투표율은 59.32%이다. 현행 헌법하에서 실시된 중의원 선거 중 가장 낮다. 총유권자 중 자민당 득표 수가 차지하는 절대득표율은 27.67%에 불과하다. 총유권자 4명 중 1명의 지지를 얻은 정당이 국회의석의 60% 이상을 차지해 일본을 좌지우지하게 된 셈이다. 대의제민주주의라는 말이 무색하다.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대중적 인기를 누리던 2000년대의 일부를 제외하면, 1990년대 이후 중의원 선거 투표율은 항상 60%를 넘지 못했다. 낮은 투표율은 20~30대의 높은 기권율 때문이다. 특히 20대 투표율은 1990년대 후반부터 30%대에 머물러 있다. 이번 선거에서는 이보다 더 낮을 것이다. 저출산·고령화로 생긴 인구 구성상의 변화와 젊은 세대의 극단적으로 낮은 투표율을 생각하면 향후 전망도 그리 밝지 못하다. 세대 갈등이 정당 지지상의 뚜렷한 대비로 나타난 한국과 달리, 한국보다 세대 갈등이 구조적으로 훨씬 첨예한 일본은 장년·노년층의 적극적인 투표 행위와 청년층의 투표 기피 행위라는 세대 간 뚜렷한 대비가 특징이다.

이보다 더 결정적인 요인은 선거구제의 영향이다. 일본의 중의원은 1996년부터 소선거구 비례대표 병립제를 실시하는데 지역구(소선거구제)에서 300의석, 비례대표로 180석을 뽑는다. 그런데 지역구에서 상대 득표율과 의석점유율 간 격차가 지나치게 크다. 예를 들면 이번 총선의 지역구 선거(소선거구)에서 자민당의 득표율은 47.8%인데 의석점유율은 78%이다. 이에 반해 민주당의 득표율은 36.4%인데 의석점유율은 17.3%에 불과하다. 득표율에서 약 10%의 차이가 의석점유율에서 약 60%의 차이로 나타난다. 2009년 선거의 득표율과 의석점유율이 민주당은 47.4%와 73.7%, 자민당은 38.7%와 21.3%였으니 이번 선거와 정반대인 셈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선거 때마다 이런 식의 '쏠림'이 반복될 수 있다. 왜 이런 제도가 작동하게 되었을까?

소선구제는 냉전 해체 후 도입된 제도이다. 일반적으로는 자민당 장기 집권에 따른 부정부패를 막기 위한 것이라는 설명이 대세이지만, 미국식 보수-리버럴 2대 정당제의 도입과 정착이 그 목표였음을 부인하기 힘들다. 중·대 선거구제하에서 자민당은 장기 집권의 혜택을, 그리고 사회당은 항상 제1 야당의 지위를 각각 누릴 수 있었다. 이것이 55년 체제였다. 하지만 제1야당이던 사회당의 집권 가능성은 일본 정부와 미국에 항상 골칫거리였다. 왜냐하면 사회당은 자위대와 미-일 안보조약의 폐기가 당의 정체성인 정당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친미동맹의 일관성을 전제로 한 양당 체제를 구축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게다가 냉전 해체 후 주변 아시아 정세도 심상치 않았다. 민주화 바람이 불어닥치면서 주변국의 반공 군사독재 정권이 무너졌다. 일본을 지켜주던 군사적 방파제가 없어진 것이다.

'극우 대 보수' 양당 체제 구축의 서막

사회당은 냉전 해체 후 집권 가능성을 높인다는 명분으로 현실화 정책을 취했다. 자위대 해체와 미-일 안보조약 폐기라는 전통적 사회당 노선을 버린 것이다. 그리고 자민당 등과의 연립정권에 참여한다. 사회당의 무라야마 도미이치 연립정권은 이렇게 해서 태어났다. 하지만 결과는 사회당의 분열과 선거 참패였다. 1996년 소선거구제 도입으로 사회당의 부활 가능성은 원천적으로 차단되었다. 그리고 자민당과 민주당의 보수-리버럴 양당 체제가 구축되었다. 2009년 민주당 정권의 성립과 2012년 자민당의 정권 탈환은 보수-리버럴 양당 체제의 구축이라는 1990년대 이래의 거대 프로젝트가 성공을 거두었음을 의미한다. 보수-리버럴 양당 체제 구축은 자민당의 거물 정치가 출신으로 수많은 정당을 만들고 해체시키면서 결국은 2009년 민주당 집권을 이끈 풍운아 오자와 이치로의 구상이기도 했다. 2012년 민주당을 탈당해 일본 미래의 당에 합류한 그는 이번 선거에서 겨우 살아남았지만, 정치적으로는 자신이 구상한 프로젝트가 자신의 정치적 앞날을 가로막는 장면을 목격한 꼴이 되었다. 이를 보면 이번 선거가 자민당의 압승으로 끝났다 해도 앞날이 탄탄대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언제든지 뒤집힐 수 있다.

하지만 이번 선거를 통해 확인된 것은, 1990년대 이래 보수-리버럴 양당 체제 구축이라는 구상이 사실은 극우-보수 양당 체제의 구축으로 귀결될 가능성이다. 민주당은 내 예상대로 2009년 집권 이래 끊임없이 '우선회'를 거듭해 리버럴 정당이라는 세간의 기대를 저버렸다. 이번 선거로 민주당은 거의 회복 불가능한 타격을 입었지만, 만일 몸을 추스른다 해도 리버럴 정당이라는 세간의 기대와는 다른 방향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제3당으로 올라선 일본 유신의 회가 오사카를 중심으로 세력을 키우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민주당이 설 자리는 그리 넓지 않아 보인다. 일본 유신의 회는 이시하라의 지역 기반인 도쿄에서 1석도 건지지 못했다. 반면 하시모토의 지역 기반인 오사카의 19석 중 12석을 차지했다. 향후 '젊은 파시스트' 하시모토 중심으로 재편될 가능성이 커졌다. 따라서 자민당이 아니더라도 향후 일본 정부의 정책은 이전보다 훨씬 오른쪽으로 치우칠 가능성이 커졌다. 의회 내에서 자민당의 우선회를 견제할 수 있는 세력이 미약해졌기 때문이다. 시민사회의 힘도 이런 흐름을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향후 주변 아시아 국가의 관계에서는 두 가지 상반되는 상식적 전망이 가능하다. 영토 문제와 역사 인식(위안부 , 교과서, 야스쿠니 문제)에서는 일본을 포위하는 남북한-중국의 '연휴'의 가능성이 커져 일본 고립이 심각해질 것이고, 외교안보 분야에서는 중국-북한에 대치하는 한국과 일본의 '연휴' 가능성이 더 강해질 것이다. 헌법 개정이나, 헌법 개정까지는 아니더라도 안전보장기본법 같은 특별법을 제정해 자위대의 집단적 자위권에 법적 근거를 부여하려는 아베 정권에 영토 및 역사 갈등은 단기적으로 피하고 싶은 선택이다. 그렇다면 한국과의 역사 및 영토 갈등은 되도록 피하면서 안보 분야에서 한국의 협력을 끌어내려는 전략을 취할 가능성이 크다. 이른바 영토 및 역사 문제와 외교안보 문제의 분리 방식이다. 박근혜 정권의 등장은 이런 가능성에 힘을 실어주었다. 하지만 중·장기적으로는 이런 분리 방식이 효과를 거두기 힘들다. 왜냐하면 분리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또 아베의 '성공'을 영토 및 역사 갈등으로 촉발된 일본 내셔널리즘의 고양과 분리할 수 없다.

경제정책도 전망은 밝지 않다. 아베의 '성공'은 선거 전 내건 고환율·저금리·적극재정 등을 통한 경기부양 공약 덕이었다. 이 때문에 동북아시아는 올해 일본발 '환율전쟁'에 시달릴 가능성이 커졌고, 이미 그 징조가 나타나고 있다. 이래저래 갈등의 '씨앗'만 커진 셈이니 미국의 역할이 향후에 더욱 커질 것이라는 점은 충분히 예상되는 일이다. 19세기 이래 동북아 문제는 여전히 일본 문제이다.

 

/ 권혁태 일본 히토츠바시대 박사. <황해문화> 편집위원. 야마구치대 교수와 규슈대 대학원 초빙교수를 역임. <한겨레21>에 '권혁태의 또 하나의 일본'을 연재 중이다. 저서로 <일본의 불안을 읽는다>, 공저로 <아시아의 시민사회(1·2)>, 역서로 <언어의 감옥>(서경식 지음)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