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사회 따라잡는 '사회의 자기 기술'

2013-01-12     정광진

최근 국내에서 독일 사회학자 니클라스 루만과 그의 이론에 관심이 커지고 있는 가운데, 루만 사회이론의 정수를 담은 책 <사회의 사회>(전 2권)가 우리말로 번역되어 주목받고 있다. 번역서 기준 1344쪽에 달하는 무게감, 그리고 추상적 개념과 이를 연결하는 진술의 건조함으로 충만한 이 단단한 이론서는 독자들의 접근을 쉽게 허락하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책은 루만 저작 중에서 비교적 쉬운 문체로 쓰인 편이고, 번역 또한 충실한 편이라 루만을 경원시한 독자들이라도 한번쯤 들춰보면서 이 경이적인 인물과 커뮤니케이션을 시도해봄직하다. 이 번역서가 갖는 미덕 중 하나는 루만이 독특하게 사용한 개념에 걸맞은 우리말 표현을 찾기 위해 고심한 흔적이 역력하게 드러난다는 점이다. 그동안 연구자에 따라 달리 번역·사용돼온 개념들이 있는데, 그것을 검토하려면 이 책을 출발점으로 삼으면 좋을 듯하다.

이 책에는 루만이 설정한 '30년 프로젝트'에서 발전시킨 사회이론이 가장 진화된 형태로 담겨 있다. 루만은 사회 전체를 일관된 틀로 기술하고 설명하는 사회이론 구성을 필생의 과제로 삼았다. 사회이론에 관한 한 사회학은 지난 100년간 이렇다 할 진보를 이루지 못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약 1세기 전 제도화에 성공한 사회학은 당시 급변하는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지식을 사회이론의 이름으로 제공함으로써 신생 학문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후 사회학에선 미시적 관계에 대한 연구, 특히 과학성을 주장하기 위해 통계학적 분석을 적용한 경험연구가 주류를 형성하면서 사회이론은 변방으로 밀려났다. 그렇지만 삶의 지향점과 정체성을 잃기 쉬운 현대인들에게서 '우리가 도대체 어떤 세상에 사는지'에 대해 알고 싶은 욕구마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이는 대개 사회이론이 아니라 다른 '사회의 자기 기술(記述)'에 의해 충족되었다.

이 사회가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해석, '사회 체계의 통일성에 대한 상상적 구성물'을 루만은 '사회의 자기 기술'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다양한 방식으로 등장하고 루만의 사회이론 역시 그에 속한다. 널리 수용되는 자기 기술은 전체 사회가 아닌 부분 체계나 특정 현상에 대한 기술을 사회 전체로 확장한 경우가 많다. 우선 특정 기능 체계를 중심으로 전체 사회를 기술하는 경우는 자본주의(경제 체계), 민주주의 혹은 국가(정치 체계), 지식 사회(과학 체계), 미디어 사회(대중매체 체계) 등이 있다. 이런 자기 기술은 고도로 복잡하고 분화된 현대사회를 전체적으로 보지 못하고, 특정 기능에 매몰되어 결정론적으로 사회를 이해하는 맹점이 있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적 질서를 모든 사회문제의 원인으로 돌리거나, 민주주의를 다른 영역 문제의 대안으로 제시하는 경우 등을 언급할 수 있다. 극적인 특징이나 역사적으로 새로운 것을 강조하는 자기 기술들도 각광받고 있다. 이는 무엇보다 대중매체가 새로운 문제들에 대해 집중적이고도 신속하게 반응하면서 자기 기술 커뮤니케이션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정보사회, 위험사회, 생태사회 같은 자기 기술이 대표적 사례인데, 이는 모두 대중매체의 고유 법칙에 충실한 사회기술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신'(Neo)이나 '탈'(Post)을 앞에 달고서 등장하는 '재활용된 이념들' 역시 전체 사회에 대한 분석 없이 '때마침 새로운 것'(혹은 새롭다고 여겨지는 것)을 사회 기술의 중심에 놓는다. 루만은 이를 '지적 고물 거래'라고 부르며 탈산업사회, 네오마르크스주의, 탈구조주의, 신기능주의, 신보수주의, 신사회운동, 신개인주의, 뉴미디어를 예로 들고 있다. 지금은 한풀 꺾였지만 한 시대를 풍미했던 '탈근대' 주장 역시 만족스러운 사회 기술은 아니다. 근대적 사회구조의 근본적 단절이 발견되지 않는 한, 탈근대사회란 결국 근대사회를 새롭게 기술하는 것일 따름이다.

이런 자기 기술들과 달리 사회이론은 "일상의 자명성들과의 거리를 감수하거나, 그런 거리를 의식적으로 산출하며", "보다 추상적인 수준에서 확립된 일관성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앞에서 언급한 자기 기술들은 대개 대중매체 등을 통해 손쉽게 유통되는 반면, 사회의 부분 체계로서 과학, 그것의 부분 체계인 사회이론의 경우 움직임이 무겁고, 따라서 여론을 얻기 위한 경쟁에서도 뒤처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사회 전체를 관찰할 수 있는 관점 제시를 소홀히 하는 것은 사회학의 고유한 과제를 외면하는 일일 뿐아니라, 그런 관점의 결여는 사회문제를 근본적으로 접근하는 통로를 막는다는 점에서 결국 사회의 손실로 남는다.

루만은 기존 자기 기술들이 성취하지 못한 근대사회의 다맥락적 구조에 대한 관찰과 기술에 어떻게 이를 수 있게 되었을까? 이는 지배적인 사회 이해에 대한 비판을 통해서인데, 루만은 그 사회 이해를 다음 네 가지 가정으로 요약한다. 첫째, 사회는 인간으로 구성된다. 둘째, 사회는 인간들 사이의 합의를 통해 구성되거나 통합된다. 셋째, 사회는 지역적·영토적으로 제한된 단위들이다. 넷째, 사회는 외부로부터의 관찰이 가능하다.

이런 가정은 루만에게 근대사회의 이해를 가로막는 '인식론적 장애물'이다. 루만은 '철저하게 반휴머니즘적이며 철저하게 반지역주의적인, 철저하게 구성주의적인' 사회 이해를 통해 근대사회를 재기술할 것을 요청한다. 새로운 사회 이해의 핵심 주장은 '사회는 인간이 아닌 커뮤니케이션이 재생산되는 체계이고, 인간은 사회가 아닌 사회 환경에 속한 것'이라는 것이다. 루만의 이런 견해는 인본주의적 전통이 여전히 지배적인 풍토 위에서 큰 반발을 일으키기도 했으나, 사실 이 주장이 전제하는 바는 인간은 사회 체계로 환원될 수 없는 고도로 복잡성을 지닌 존재라는 인식이다. 커뮤니케이션 재생산 체계로서 사회의 작동 메커니즘 규명을 위해 루만은 커뮤니케이션 작동의 매체인 의미를 사회적·시간적·사태적 차원으로 구분했다. 이 세 차원은 각기 커뮤니케이션 이론, 진화론, (체계)분화 이론이라는 틀 속에서 다뤄지는데, 이 책 2·3·4 장의 내용을 이룬다. 1장에선 연구 대상인 사회 체계가 사회적 체계들 중 하나라는 점을 밝히고 있고, 마지막 5장은 사회 체계의 다양한 자기 기술 양태를 보여주고 있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근대' 사회의 구조와 그에 대한 기술의 관계에 대한 기술이다. '탈근대' 주장은 근거가 희박하고, '근대의 기획'이 미완성이란 주장 역시 그 주장이 구유럽적 의미론에 기초한다는 점에서 만족스럽지 않다. 의미를 응축시키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 그리고 의미론적 변화는 상당한 거리를 두고 구조적 변화를 따른다는 점을 고려하면 근대사회는 우리의 인상으로 이제 시작이다.

익숙한 개념과 전통적인 사회 이해의 전제들을 벗어났기 때문에 루만이 전달하려는 정보를 이해하려면 상당한 인내심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근대에 유일하게 관찰되는 사회, 즉 세계사회를 전체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이론의 추상 수준 또한 매우 높을 수밖에 없다. 그런 이유로 경험적으로 관찰되는 구체적 현상에 대한 설명이나 사회문제에 대한 대안 등을 찾는 독자들은 실망할 수 있다. 하지만 루만의 사회이론은 큰 건축물의 뼈대에 해당한다. 그 건물의 빈 공간을 메우는 연구는 세계 전역에서 지금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물론 그 건물은 성공적으로 완성되는 순간 다시 지어야 할 역설적 운명에 처해 있다. 사회이론에 대한 커뮤니케이션이 커뮤니케이션으로서 성공할 경우, 그것은 그 대상에 대한 기술을 달라지게 하고, 그리하여 그 기술을 받아들이는 대상을 달라지게 하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제목이 '사회의 사회'인 것은 이 점을 처음부터 염두에 두기 위해서이다.

 

/ 정광진 독일 빌레펠트대학 사회학과 박사과정, 페이스북 '니클라스 루만 사회이론 토론방' 운영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