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갈등의 비종교적 분석

2013-02-08     조르주 코름

광활한 사하라사막에서 여전히 많은 부족들이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과연 우리가 말리 전쟁을 이해할 수 있을까? 설사 근본주의 이슬람교의 기치를 내건 반란이 일어난다 해도 레바논과 이라크, 혹은 팔레스타인에서와 마찬가지로 거기서도 대립과 위기의 토양을 이루는 비종교적·경제적·사회적·정치적 여건은 전혀 달라지지 않는다.

시대가 바뀌었다. 서양에서는 모스크바가 사주한 공산주의자들의 전복 행위를 비난하는가 하면, 동양에서는 계급투쟁과 반제국주의에 찬사를 보내던 시대가 끝나고 종교공동체나 민족공동체, 혹은 부족공동체의 투쟁을 선동하는 시대가 이어졌다. 미국 정치학자 새뮤얼 헌팅턴이 20여 년 전에 '문화충돌' 개념을 대중화하고 문화적·종교적·도덕적·정치적 가치의 차이가 수많은 위기의 근원이라고 설명한 뒤로, 이 새로운 해석은 예외적이라고 할 만큼 엄청난 힘을 얻었다. 헌팅턴은 문명화되고 세련됐다고 가정되는 아리아족의 세계와, 무질서하고 폭력적이라 간주되는 유대족의 세계를 구분하는 낡고 인종차별주의적인 이분법(19세기에 에르네스트 르낭에 의해 일반화됐다)이 다시 힘을 얻도록 해주었을 뿐이다.

이처럼 '가치'를 내세우다 보면 혈연에 의한 1차 정체성으로 회귀하게 된다. 이런 회귀는 연속적으로 밀려오는 거대한 현대화 물결에 밀려 주춤했다가 역설적으로 세계화와 생활 및 소비 방식의 동질화, 혹은 전세계에서 폭넓은 계층을 희생시키는 신자유주의로 촉발된 사회적 격변과 더불어 다시 시작됐다.

유럽식 비종교적 자유주의와 유럽 밖으로 널리 펴져나갔던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는 둘 다 자취를 감춘 것처럼 보이는 반면, 갈등은 인류학적·문화적 차원으로 축소돼 있다.

일반적으로 어떤 갈등을 소개할 때 그것을 유발한 다양한 요소들은 고려되지 않는다. 그냥 '좋은 사람들'과 '나쁜 사람들'을 구별하고, 쟁점을 단순화하거나 과장해 왜곡할 뿐이다. 중심인물들은 그들이 소속된 민족과 종교, 공동체의 이름으로 명명되고, 이 사실은 이렇게 명명된 집단 내부의 견해와 행동이 동질적이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같은 유형의 분석을 예고하는 징후는 냉전 후반기에 나타났다. 그리하여 1975∼90년 레바논에서 벌어진 오랜 분쟁에서 여러 당사자들이 '기독교도'와 '회교도'로 분류됐다. 기독교도들은 모두 '레바논 전선'이라고 이름 붙은 집단이나 팔랑헤당(기독교 공동체의 우파 조직)에 속한 것으로 간주됐다. 그리고 회교도들은 '혁신팔레스타인연맹'에 이어 '혁신이슬람연맹'이란 단체에 결집돼 있었다.

이처럼 과장된 설명은 많은 기독교도들이 반(反)제국주의연맹이나 반(反)이스라엘연맹에 소속돼 레바논에서 이스라엘의 공격 작전을 펼칠 수 있는 팔레스타인들의 권리를 지지하는 데 비해, 많은 회교도들이 거기에 반대한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은 결과였다. 게다가 팔레스타인 무장단체의 존재와 레바논 국민이 당했던 이스라엘의 잔혹한 보복으로 레바논에서 제기된 문제는 레바논인들의 공동체적 기원과 전혀 관련 없는 비종교적 본질을 가지고 있었다.

같은 시기에 종교적 정체성에 대한 조작이 이루어졌지만, 전문 분석가들과 주요 언론은 이런 조작에 대해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1979년 12월 소련군이 쳐들어와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일어나자 '회교'는 무신론자로 규정된 침략자들에 맞서 대규모로 결집했고, 이 저항의 민족적 차원은 은폐될 수밖에 없었다.

지나친 일반화와 상투적인 정형화

다양한 국적(그렇지만 주로 아랍권인)을 가진 수천 명의 젊은 회교도들이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 파키스탄의 지도하에 훈련받고 과격화됨으로써 회교성전 국제조직이 발전해 아직까지 존재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됐다. 게다가 1979년 1월과 2월에 일어난 이란혁명은 주요한 지정학적 오해를 불러일으켜 서구 강국들은 팔레비의 뒤를 잇는 한편 민족주의적이거나(1950년대 초반 모하마드 모사데크가 주도했던 실험을 모델로 하여) 반제국주의적이고 사회주의적 성향인 부르주아 색채의 정부가 들어서는 것을 피하는 방법은 종교 지도자들이 권력을 잡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서구 강국들은 매우 종교적이며 미국과 돈독한 동맹관계를 맺고 있는 두 국가(사우디아라비아와 파키스탄)의 예를 보며, 이란 역시 공산주의에 단호하게 맞서는 충실한 파트너가 될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그러고 나서 분석 방법이 바뀌었다. 테헤란의 반제국주의적이고 친팔레스타인적인 정책은, 온건하다고 규정된 수니파의 정책과는 반대로, 시아파적이고 반서구적이며 전복적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2003년 이라크 침략이 실패로 끝나고 결국 이란의 영향력이 커지자 더욱 수니파와 시아파 간에, 그와 더불어 아랍인들과 페르시아인들 간에(사담 후세인은 1980년 9월 이란을 공격함으로써 앞뒤 안 가리고 함정 속으로 돌진한 셈이 되었다) 적대관계를 조성하는 것이 미국의 주요한 관심사가 되었다.(1)

이후 정치와 미디어에 관련된 모든 참고 문헌은 이란과 이라크, 시리아, 레바논 헤즈볼라로 이루어지는 이른바 '시아파의 초생달'이 의미하는 위험을 언급하고 있다. 이 국가들이 수니파 이슬람교를 불안정하게 만들고, 테러 행위를 저지르며,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려 한다는 것이다. 일부 이란인들이 시아파 이슬람교로 개종하기 시작한 것이 겨우 16세기부터고, 사파비왕조가 오스만제국의 영토확장주의에 맞서기 위해 그같은 개종을 부추겼다는 사실을 상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2) 또한 사람들은 이란이 항상 이 지역의 주요 강국이었고, 이 체제가 계속 '걸프만의 경찰'이 되고자 했으며,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핵무장하려던 통치자의 강대국 정책을 이어간다는 사실을 모르는 척한다.

2011년 초 아랍 세계에서 민중봉기가 일어난 뒤 정치 상황을 단순화하는 분석법이 계속 사용되고 있다. 바레인에서는 시위자들이 수니파 통치자들에게 반대하는 이란의 조종을 받는 '시아파들'로 묘사됐다. 이것은 현 정권을 지지하며 시아파 신앙을 가진 시민들과 반체제 인사들의 대의에 공감하는 수니파 시민들의 존재를 애써 무시하는 일이다. 예멘에서는 오랫동안 이 나라를 지배한 왕조를 지지하는 후티트족의 봉기가(3) 오직 이란의 영향만을 받은 '시아파 현상'으로 간주됐을 따름이다.

레바논에서 헤즈볼라는 야망을 가진 이란이 조종하는 단순한 도구로 간주된다(헤즈볼라가 시아파 공동체 내부에 야기할 수 있는 대립에도 불구하고, 그 반대로 그것이 수니파가 포함된 여러 종파에 속한 수많은 기독교도들과 회교도들에게서 얻은 인기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시아파교도인 주민들이 살고 있던 이 나라의 넓은 남부 지역을 1978∼2000년 이스라엘이 점령하면서 이 정당조직이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헤즈볼라가 악착같이 저항하지 않았다면 이스라엘은 분명 아직까지 이 지역을 점령하고 있었을 것이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온건파 수니파를 옹호하는 분석가들은 가자의 하마스가 팔레스타인 이슬람형제단의 세력권에서 배출된 순수한 수니파의 후예라는 사실에 그리 혼란스러워하지 않는다. 즉, 이 운동은 제공된 무기들이 이란에서 오고 이스라엘에 의한 영토 봉쇄를 뚫는 데 쓰일 것이기 때문에 비난받아야 한다.

요컨대 미묘한 차이는 그 어디에도 없다. 억압이나 주변화 같은 사회·경제적 상황은 언급되지 않으며, 갈등 당사자들의 패권주의적 야심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로운 강대국들이 있고, 해로운 또 다른 강대국들이 있는 것이다. 여론과 행동이 다양화된 공동체들을 심지어 그것들이 몇 세기 동안 강력한 사회·경제적, 문화적으로 밀접하게 교류하며 살았을 때조차 의미 없는 인류학적 일반론과 상투적인 문화적 본질주의의 방법론을 적용해 특징지어버린다.

정치적 견해가 새로운 개념들로 가득 채워졌다. 서양에서는 '그리스와 로마'의 근원이 가진 비종교적 성격이 내세워지다가 '유대교·기독교적 가치'가 그 뒤를 이었다. 마찬가지로 종교의 영향을 받지 않은 아랍민족주의가 오랫동안 이 지역의 정치 무대를 지배하며 사회주의적·산업적 성향의 반제국주의적 요구를 했으나 지금은 이슬람교의 가치와 특수성, 관습을 장려하고 있다.

지금은 서구가 구현한다고 주장하는 개인주의적·민주주의적 가치가 동양의 전체론적이고 '가부장적이며 부족적'이라고 가정되는 가치와 대립하고 있다. 이미 옛날에 유럽의 저명한 사회학자들은 불교사회가 '프로테스탄트' 자본주의의 특수한 가치를 기반으로 하는 산업자본주의에 결코 접근하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팔레스타인 문제는 더 이상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가 오랫동안 요구한 것처럼 유대교도와 기독교도, 이슬람교도가 동등하게 살아가는 단일국가를 세움으로써 해결될 수 있는 민족해방 전쟁으로 인식되지 않는다.(4) 그것은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 있는 것을 아랍권 이슬람교도들이 반대해 거부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유대인 배척주의가 상존함을 보여주는 징후로 간주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상식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팔레스타인이 불교도들의 침략을 받거나 오스만제국 이후의 터키가 팔레스타인을 정복하려고 했더라도 역시 마찬가지로 지속적이며 격렬한 저항이 일어났을 것임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현실 은폐적 분석은 이제 그만

초강대국과 소강대국이 벌이는 힘겨루기에서 정체성을 도구로 사용하는 것은 이 세상만큼이나 오래된 방법이다. 사람들은 정치적 현대성과 프랑스혁명 이후로 전 지구에 전파된 공화주의적 원칙이 국제 생활이나 국가 관계 속에 비종교성을 지속적으로 정착시켰다고 믿을 수 있었다. 그런데 전혀 그렇지 않다. 특히 초국가적 종교, 특히 세 단일 종교(유대교·기독교·이슬람교)의 대변인이 되겠다는 몇몇 국가의 요구가 점점 더 거세지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이 국가들은 자신의 세력을 키우고 영향력을 확대하며 확장 정책을 펴는 데 종교를 이용함으로써 유엔이 정한 인권 원칙들을 준수하지 않는 것을 정당화한다. 그리하여 서구 국가들은 1967년 이후로 팔레스타인 영토가 지속적으로 점령되는 것을 묵인했으며, 일부 이슬람교 강대국들은 태형과 투석 형벌, 절도범 손 자르기 등을 인정한다. 국제법을 위반한 사람들에 대한 제재도 각각 다르다. 어떤 경우에는 국제사회가 엄격한 벌을 내리는 반면(이라크와 이란, 리비아, 세르비아 등), 어떤 경우에는 그냥 비난만 한다(이스라엘의 점령 행위, 미국의 구금제도 등). 특히 중동이라는 분쟁 지역을 진정시키고 싶다면 한시라도 빨리 갈등의 비종교적 현실을 은폐하는 데 목적이 있는 이같은 도구화와 지나칠 정도로 단순화하는 분석을 중단시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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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주 코름 Georges Corm 저서로 <갈등의 비종교적 분석을 위하여>(라데쿠베르트 출판사·파리·2012) 등이 있다.

번역이재형 한국외국어대 불어과 박사과정 수료. 역서로 <간디와 마틴 루터 킹에게서 배우는 비폭력> <거리낌 없는 철학> <프로이트 평전> 등이 있다.

(1) Seymour M. Hersch, <방향 전환: 전략의 수정>, 더 뉴요커, www.newyorker.com, 2007년 3월 5일자 참조.
(2) 사파비왕조는 1502∼1736년 페르시아를 지배했다. 이스마일 1세(1487∼1524)가 국민을 시아파 이슬람교로 개종시키기 시작했다.
(3) Pierre Bernin, ‘은폐된 예멘 전쟁’,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9년 10월호 참조.
(4) 야세르 아라파트가 1974년 유엔총회에서 했던 유명한 연설이 특히 그렇다. 이 연설에서 아라파트는 유대교도와 기독교도, 이슬람교도가 평등하게 살아가는 국가의 대의를 옹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