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위기, 우리의 해법

Dossier 그리스라는 실험실

2013-02-08     알렉시스 치프라스

지난 1월 3일 국제통화기금(IMF)의 수석 경제학자가 그동안 IMF가 권장했던 긴축정책의부정적 영향을 과소평가했다며 '실책'을 인정했다. 뜻하지 않게 이 수석 경제학자는 본지에 실린 그리스 급진좌파연합 '시리자당'의 대변자 알렉시스 치프라스의 주장에 큰 힘을 실어줬다.

1953년 2월 27일, 독일연방공화국이 빚더미에 앉으면서 다른 나라까지 줄줄이 몰락할 위기에 처했다. 자국의 안위를 염려한 채권국들(여기에는 그리스도 포함돼 있었다)은 자유주의자가 아닌 이상 그리 놀랄 만한 사항도 아닌 뻔한 현실을 비로소 공식 석상에서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바로 임금 삭감 같은 '내적 평가절하'(Internal Devaluation) 정책이 채무 상환에 별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걸림돌이 된다는 지적이었다.

영국 런던에서 열린 긴급 정상회의에 참석한 21개국은 실제 상환 능력에 맞춰 독일의 국채 상환 조건을 재조정해주기로 결정했다. 먼저 독일의 명목가치 기준 누적 부채를 60%가량 탕감해줬다. 이어 이자 상환 기간을 5년 유예(1953~58)해주는 한편, 부채 상환 기간을 30년으로 조정했다. 또한 수출소득 가운데 20분의 1 이상에 해당하는 소득에 대해서는 반드시 부채를 상환하는 데 사용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른바 '성장 조항'을 신설했다. 한마디로 유럽은 베르사유조약(1919)을 뒤엎는 행보에 나섬으로써 전후 서독 발전의 기틀을 마련한 셈이다.

오늘날 시리자당(그리스 급진좌파연합)이 제안하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독일 앙겔라 메르켈 총리와 볼프강 쇼이블레 재무장관이 유럽 채무국들에 강제한 베르사유조약의 축소판에 해당하는 수많은 강화조약을 뒤집고, 유럽의 통찰력이 빛을 발했던 위대한 역사적 순간을 본받자는 것이다.

사실상 남유럽 국가에 대한 구제금융 프로그램은 모두 줄줄이 실패로 돌아갔다. 오히려 그 대가로 납세자들이 메워야 할 구멍만 더 커져버렸다. 그로 인해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집단적 차원의 총체적이고 결정적인 해결책을 도출하는 것이 시급한 상황이다. 만일 독일 총리가 재선을 위해 이런 목표를 등한시한다면 우리로서는 납득하기 힘들 것이다.

1953년 독일의 부채 탕감을 위한 런던 회의를 본떠 그리스의 부채 탕감을 위한 유럽 회의를 개최하자는 시리자당의 제안은 단연 현실적이면서도 모두에게 이로운 유일한 위기 해법이라 할 수 있다. 신용위기가 심화되는 한편, 유럽에 대한 모든 구제금융 정책이 실패로 돌아간 현 상황에서 유럽 부채 탕감 회의야말로 이 모든 문제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총체적 해법이라 하겠다.

시리자당이 그리스의 미래를 위해 제안하는 사항은 다음과 같다.

-누적 부채를 명목가치 기준에서 상당 수준 탕감할 것

-부채 상환을 유예함으로써 부채 상환에 소요되는 자금을 경제 재건에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할 것

-'성장 조약'을 신설해 부채 상환으로 인해 경제 재건의 길이 사전에 전면 차단되는 것을 방지할 것

-직접 은행에 자본을 투여하는 재자본화를 통해 지원금이 그리스 부채에 가산되지 않도록 할 것

이런 조처와 더불어 부의 공정한 분배를 위한 개혁도 함께 실시해야 할 필요가 있다. 진정으로 위기에서 벗어나려면 무엇보다 현 위기를 초래한 과거와 단절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사회정의를 실현하고, 만인에게 평등한 권리를 보장하며, 정치와 조세제도의 투명성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 한마디로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각고의 노력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이 목표를 실천에 옮길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금융 과두세력에게서 자유로운 정당뿐일 것이다. 국가를 볼모로 잡은 기업 총수, 세금 한 푼 안 내며 자기들끼리 이권을 위해 똘똘 뭉치는 선박 재벌, 언론사 사장, 여기저기 손대지 않은 사업이 없는 (그래서 파산한) 은행가 등 그리스의 소수 금융 과두세력은 현 위기를 초래한 원흉임에도 그 누구보다 기득권 유지에 혈안이 되어 그리스의 개혁을 방해하고 있다. 비정부기구 국제투명성기구(TI)가 발표한 2012년 연례보고서에서도 그리스는 유럽국 가운데 가장 부패한 나라로 지목되지 않았던가.

우리는 시리자당의 제안이 위기 탈출을 위한 유일한 해법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유럽의 부채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사태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사실상 유럽의 부채는 이미 국내총생산(GDP) 대비 평균 90% 수준을 넘어섰다. 이런 상황은 어쩌면 우리에게 낙관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우리의 제안이 거부당할 가능성이 그만큼 줄어들기 때문이다. 이미 위기는 유로존 핵심 국가로 서서히 확대되고 있다. 그러니 결단을 미룬다면 현 상황이 초래할 경제·사회적 비용만 더욱 가중하고 말 것이다. 그것도 그리스만이 아니라, 독일을 비롯한 나머지 유로화 사용 국가들까지 말이다.

(신자유주의를 기반으로 탄생한) 유로존은 지난 12년 동안 정치·사회적 통합은 배제한 채 오로지 화폐공동체로서만 기능해왔다. 남유럽 국가들이 기록한 무역수지 적자는 북유럽 국가에 막대한 무역 흑자를 안겨주었다. 게다가 1990년 막대한 통일 비용 지출로 뜨겁게 과열됐던 독일의 경제는 단일화폐에 힘입어 다시금 냉각될 수 있었다.

하지만 국채위기는 애써 되찾은 균형을 도로 무너뜨려놓았다. 처음에 독일은 위기를 해결한답시고 과거 자신들이 효험을 봤던 긴축정책 비법을 위기국에 수출했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남유럽의 사회적 양극화만 더욱 부채질했고, 유로존 내에 경제적 긴장만 한층 고조시켰다. 오늘날 '채권국 북유럽-채무국 남유럽'이라는 새로운 등식이 등장하면서, 선진국들의 주도로 새로운 노동분업 지형이 형성되고 있다. 가령 남유럽은 바닥 수준에 가까운 값싼 노동력을 기반으로 노동집약적 서비스와 상품 생산에 집중하는 반면, 북유럽은 일부 노동자에게 고임금을 제공하며 고급화와 혁신을 향한 경쟁에 열을 올리고 있다.

최근 독일경제인연합회의 한스페터 카이텔 회장은 인터넷판 <슈피겔>과의 인터뷰에서 그리스를 '유로존 내 경제특구'(1)로 만들자고 했다. 카이텔 회장의 주장은 구제금융협약(Memorandum)(2)의 진정한 목적이 무엇인지 고스란히 보여준다. 최소 2020년에야 발효 기간이 만료되는 구제금융협약에 규정된 조처들은 엄청난 실패작임이 판명 났다. 심지어 국제통화기금(IMF)까지 실패를 인정할 정도다. 하지만 입안자들의 처지에서 이 협약은 여러모로 이점이 많다. 가령 그리스 경제를 관리·감독할 수 있는 명분을 제공해줌으로써 그리스를 유로존의 금융식민지로 삼을 수 있게 해준다. 그러니 구제금융협약 파기야말로 그리스가 진정으로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선행 조건이다. 이 협약은 그 자체로 치명적인 독약이다. 누군가 주장하듯, 과다 복용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재정위기를 초래한 다른 원인들도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아직까지 그리스는 재정 낭비 요인을 완전히 개선하지 못했다. 가령 그리스는 km당 도로 건설 비용이 유럽국 가운데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할 정도로 재정 낭비가 심각하다.

게다가 양극화 심화는 단순히 재정위기의 여파로 발생한 것만이 아니다. 가령 그리스 조세제도는 이 나라 정경유착의 심각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리스 조세제도는 한마디로 수많은 예외조항과 과두세력을 위한 맞춤용 특혜로 구멍이 숭숭 뚫린 여과망과 같다. 그런데도 이런 조세제도가 군사독재 시절 이후 재계와 머리 둘 달린 히드라로 대변되는 양대 정당(신민주당과 범그리스사회주의운동당(PASOK)) 사이에 맺어진 끈끈한 밀실협약에 힘입어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오늘날 정부가 증세로 재정을 충당하기보다는 오히려 지속적으로 임금과 연금만 줄기차게 삭감하는 것도 이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기득세력은 그리스의 유로존 탈퇴 가능성이라는 공포를 조장한 덕에 지난해 6월 17일 가까스로 선거에서 살아남았다.(3) 하지만 그들은 인공호흡 장치에 의지해 간신히 목숨만 연명하고 있을 뿐이다. '부패'라는 제2의 인공폐를 이식받은 것에 불과하다.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어내는 이 어려운 과제(비단 그리스만 겪고 있는 문제는 아니리라)는 앞으로 시리자당이 이끄는 민중정부(Popular Goverment)의 최우선 과제가 될 것이다.

요컨대 우리는 그리스의 변화를 위해 부채 상환을 유예해줄 것을 요구한다. 부채 상환을 유예받을 수 없다면 우리가 아무리 금융을 건전화하기 위해 노력해봐야 결국 영원토록 실패를 거듭하는 시시포스의 신세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 경우 비극은 단순히 고대도시 코린트(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시시포스가 고대도시 코린트를 건설한다. 제우스의 노여움을 산 시시포스는 산꼭대기에 이르면 다시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커다란 바위를 끊임없이 산꼭대기로 밀어올리는 고역을 영원히 되풀이하는 형벌을 받는다)에만 그치지 않고 유럽 전체로 확대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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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시스 치프라스 Alexis Tsipras 그리스 급진좌파연합 시리자당 대표

번역허보미 jinougy@naver.com

(1) ‘BDI-Chef will Griechenland zur Sonderwirtschaftszone machen’, <슈피겔> 온라인판, www.spiegel.de, 2012년 9월 10일.
(2) 2010년 금융구제를 해주는 조건으로 그리스에 강요된 긴축협정.
(3) 29.66%를 득표한 신민주당(우파)은 범그리스사회주의운동당(PASOK)(12.28% 득표), 민주좌파(6.26%)와 연정을 구성해야 했다. 2위를 차지한 시리자당은 16.89%(2012년 5월 총선 때보다 득표율 10%포인트 확대), 극우정당 황금새벽당은 6.92%(2012년 5월 총선 때보다 0.8% 득표율 후퇴)의 득표율을 기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