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롬비아에는 “정의도, 평화도 없다”
후안 마누엘 산토스 대통령은 2012년 8월 27일 보고타에서 콜롬비아무장혁명군과 평화회담을 열 것이라고 발표했지만 경영자 쪽만 참석시키고 사회운동을 수용할 기미는 전무하다. 50년 넘게 지속된 내전의 근본적 원인을 무시한 채 과연 그 끝을 기대할 수 있을까?
모터카누 몇 대만이 녹색빛 시미타라 강변에 있는 푸에르토마틸데의 소박한 주거지에 접근할 수 있다. 저녁 어스름이 깔리자 전기가 공급되지 않는 작은 마을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밤새 폭우가 골함석 지붕을 두드렸다. 다음날 아침 8시, 새벽안개를 흩뜨리며 벌써 해가 작열했다. 습도도 높았다. 이동을 돕기 위해 진흙 위로 놓인 나무판에 발을 딛기도 전에 땀이 나기 시작했다. 의사나 간호사는커녕 최소한의 의약품도 없는 보건소로 향하는 길에 카를로스 엔리케 마르티네스 지방행동위원회장은 "콜롬비아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마그달레나메디오 지역은 외면받는데다 더할 수 없이 빈곤하다"고 전했다.
"폭력이 난무하고 교육 및 공공서비스, 통신수단은 전무하며 지방행정관 사이에 부패가 만연하는 등 각종 난관으로 점철돼 있어 농민들의 어깨가 무겁다"고 시미타라계곡농민협회(ACVC)의 생산프로젝트 담당자 루이스 카를로스 아리사니요가 말을 받았다. 다른 지방에서 온 그들은 이곳 처녀지에 자리잡았다. 힐베르토 게라 ACVC 총사무관은 "국가 테러주의로 인해 강제 이주를 해야만 했다"고 전했다. 형식적으로는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콜롬비아에서 60년 넘게 내전이 이어지고 있다. 구조적 폭력에 대항하기 위해 생겨난 무장투쟁 집단에 가해지는 억압은 남미 원추 지역(아르헨티나·칠레·우루과이를 일컬음)의 군사체제보다 훨씬 강도가 세다. 국제법률가회의(ICJ)는 2005년 "매년 군대와 준군사집단에 암살당하는 콜롬비아인 수가 칠레 군부독재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집권한 17년 동안 처형당한 칠레인 수보다 월등히 많다"고 지적했다.(1)
"극우세력의 야만적 행동이 판을 칩니다"
ACVC는 1996년 시미타라강 계곡에서 출범했다. 농민 1만5천 명으로 시작한 이 단체는 현재 회원이 2만8천 명으로 늘었다. 게라는 "정말 비옥했던 우리의 땅을 잃었다"며 "또다시 우리를 강제로 이주시키지 못하도록 힘을 합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마그달레나메디오 지역에서 공권력의 지원을 받은 준군사집단의 활동과 집단학살은 다른 지역보다 특히 더 심하다. 요주의 대상으로 낙인찍힌 ACVC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동체의 자급자족을 위해 농민보호지역을 만들었다. 게라는 "이 프로젝트는 영토를 위한 항쟁"이라고 말했다. 목소리에서 결의가 느껴졌다. 그는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각종 형사소송에 휘말려 몇 년 동안 베네수엘라로 망명을 떠나야만 했다.
짚더미를 밟고 지나 마을 근처에 있는 물소 번식 센터를 살피는 그의 표정은 만족스러워 보였다. "유엔의 '개발과 평화' 프로그램으로 제공된 거대한 물소 몇 쌍이 이제는 제법 수가 불어 현재 50가구가 혜택을 보고 있다." 혈기 넘치는 아리사니요가 "우리는 사람들에게 서로 뭉치면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는 점을 입증하는 중"이라고 덧붙였다.
카누로 더 이상 접근할 수 없는 지점에 도착하자 두 사람은 육상으로 마그달레나강에 위치한 석유항인 바랑카베르메하로 향했다. ACVC 본부가 그곳에 있다. 차가 '엘티그레'라고 불리는 욘도시(市)를 지나자 둘은 대화를 멈췄다.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여기는 2005년 '해산' 직전 준군사집단이 주기적으로 기습했던 곳이자 자신들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는 반군을 암살한 곳이다.
콜롬비아무장혁명군(FARC)과 민족해방군(ELN)도 이 통탄의 땅을 활보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마르티네스는 "내전의 책임을 모두 게릴라군에게 돌리는 데 동의할 수 없다"며 "야만적인 행동을 일삼는 집단은 오히려 극우세력"이라고 털어놨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한다. 그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고 있다. 그는 1980~90년대에 애국연합(UP)을 대표해 세 차례나 욘도시 시의회의원을 지냈다. 그는 이렇게 회고했다. "그 시절은 너무 고되고 잔혹했다. 많은 사람들이 남편이나 부모를 잃었고 정든 땅을 버리고 떠났다."
UP는 1984년 3월 12일 벨리사리오 베탕쿠르 당시 대통령과 평화회담이 진행되고 정전이 2년 넘게 지속되는 상황에서 FARC의 제안으로 탄생했다. 이때 해산한 게릴라병과 공산당 및 기타 진보세력을 규합해 탄생한 UP는 정부가 약속한 사회개혁을 통해 평화가 정착되기만 하면 무장조직이 시민 생활로 돌아가도록 이끌어야 했다. 1986년 3월 총선에서 UP는 상원의원 5명, 하원의원 9명, 중간 규모의 도시 시장 23명, 수많은 시의회의원을 배출했다. 정황으로 미뤄볼 때 첫 번째 선거로는 눈부신 성과였다.
하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닫히는 쥐덫처럼 군대와 정보부의 은밀한 지원을 받은 준군사조직이 반군 지도자, 조직원, 야당 지지자들을 공격했다. 최소한으로 잡아도 4500명이 고문을 당하거나 살해되거나 납치됐다. 당시 카케타주(州)의 정글과 게릴라에서 나와 UP로 입당해 최근 하원의원으로 선출된 루시아노 마린 아랑고는 살기 위해 서둘러 발걸음을 돌렸고, 이반 마르케스의 이름을 걸고 무장항쟁을 재개했다. 지난해 10월 18일 FARC 대표단을 이끌고 후안 마누엘 산토스 정부와 평화회담에 나선 이가 바로 그다(에르난도 칼보 오스피나의 기사 참조).
푸에르토마틸데에서 만난 마르티네스는 "대화를 해야 서로 합의하고 전쟁을 끝낼 게 아니겠느냐"며 흥분했다. 이곳 사람들도 평화를 꿈꾼다. 하지만 아무 평화가 아니다. 산파블로에서 마주친 이노센시오 피노는 마그달레나강 부두를 감시하는 군부대를 흘깃 바라보며 "사회정의가 동반된 평화가 정착돼야 한다"고 분개했다. 칸타가요에 도착해 강변에서 만난, 고단해서 눈이 퀭한 노인 엘리아스 로드리게스는 "평화협상이 게릴라의 투항을 뜻한다고 여기는 사람이 있는데 잘못된 생각"이라며 "농지개혁을 필두로 한 변혁 없이 내전은 종식될 수 없다"고 쐐기를 박았다. 앞서 만난 모든 투사가 활동하는 콜롬비아의 가장 큰 좌파사회운동 '마르차 파트리오티카'(애국행진)의 대변인 사비에르 콰드로스를 보고타에서 만나니 "현재 진행 중인 평화회담은 그저 정부 쪽 대표와 반군 대표의 만남에 불과하지만 사회운동으로 확대될 수 있는 참여 방식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마르차당은 반정부 게릴라들을 향한 쇼윈도?
2010년 7월 20일 독립 200주년 기념일을 맞아 억압으로 와해된 듯 보이던 민중조직이 보고타에서 부르주아에게 단결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분연히 일어났다. 당시 '오픈 칼비도'(열린 의회)에서 처음으로 '마르차 파트리오티카'가 언급됐다. 2년이 지난 2012년 4월 21~23일, 각 지역의 군소 단결조직이 뭉친 '마르차'는 지방 및 전국 조직 1500곳을 대표하는 8만 명을 보고타의 볼리바르 광장으로 불러모았다. 콰드로스의 말을 빌리면 '정치·사회운동'을 표방하는 마르차는 "집회나 시위처럼 비제도적 참여 방식을 통해 세력을 키우며 종국에는 대안적 권력으로 탈바꿈하려 한다"고 한다.
산토스 대통령이 알바로 우리베 전임 대통령과 비교했을 때 스타일이 판연히 다르다고 하더라도(2) 그가 국방부 장관을 지낸 이전 정부보다 경제적으로 덜 개방적이지 않을뿐더러 콜롬비아를 원자재 공급국으로 거듭나게 하려는 야심도 있다. 그러려면 이미 대토지 농장인 라티푼디오(3)가 들어선 국토의 상당 부분을 다국적기업에 양도할 수밖에 없다. 공식적인 수치에 따르면, 국민 16%가 배를 곯고 45%(시골의 경우 62.1%)가 빈곤선 이하인 나라에서 말이다.(4) 역사적으로 늘 헐벗고 박탈당하는 시골 지역이 마르차의 핵심이지만 마르차는 공산당, 피에다드 코르도바(5)의 자유당(PL), 학생층(특히 대학 민영화에 반대하며 부상한 전국학생총연맹 MANE), 대안 미디어, 그리고 여성, 환경론자, 동성애자, 문화계 인사 등 '새로운 면모를 지닌 지지자'를 폭넓게 수용하면서 도시에서의 세력도 확대하고 있다.
게다가 민족회의(토착조직), 밍가(역시 토착조직), 콜롬비아사회운동동맹(COMOSOC), 평화를 위한 교회 등(6) 어느 정도 서로 닮은 듯한 단체들의 지원도 든든하다. 이 조직들은 '평화를 위한 공동사회의 길'이라는 이름으로 모여 2012년 10월 12일 '국가 결집의 날'을 맞아 35만 명의 성난 국민을 거리로 내보냈다. 그들은 "일자리 없이는 평화도 없다, 보건서비스 없이는 평화도 없다, 교육 없이는 평화도 없다"고 소리 높여 외쳤다.
적법하지만 까다로운 주장이다. 지난해 10월 18일 평화회담 첫 번째 회의 기조연설을 통해 마르케스 지휘관도 FARC의 정치적 특성을 언급하며 '국가의 구조적 변혁'을 주장했다. 그의 이런 자신감은 사회적 재난이나 내전의 영향을 받지 않고 삶의 질을 개선한 중산층과 도시의 변혁을 '결정'한 콜롬비아에 파란을 일으켰다. 정부대표단을 이끄는 움베르토 데 라 카예는 협상 테이블에 앉자마자 "국가 경제모델은 논의의 대상이 아니다"(7)라고 단호하게 응수했다. 국방부와 미디어에서는 전성기에 UP가 그랬듯이 마르차가 게릴라 '테러리스트'의 정치적 실력자 노릇을 한다는 비난이 봇물처럼 쏟아졌다.
마르차 관계자는 1985년 FARC가 주도해 출범시킨 UP에는 FARC의 대표들이 포함돼 있었지만 "마르차는 적법하게 설립돼 공명정대하고 평화롭게 활동하는 조직이 규합된 결과"라며 이런 주장이 잘못됐다고 반박한다. 바랑카베르메하에서 만난 미겔 앙젤 곤살레스 ACVC 서기장은 "볼리바르 광장에 모인 8만 명이 모두 게릴라였느냐"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칸타가요에서 만난 로드리게스는 이 질문에 웃음을 터뜨리며 "한쪽에서는 국민이 게릴라에게 등을 돌리게 만들어 그들을 고립·무력화시켜야 한다고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우리가 정치적 실력자라고 한다. 도대체 뭔 소리를 하는 거냐?"고 말했다.
콜롬비아에는 사회적 분쟁이 실재한다. 납치와 암살을 자행하고 마약밀매 조직에 관여하는 등 게릴라의 악독한 대응 방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를 떠나 무장항쟁은 이유 없는 선택이 아니라 필연적 결과다. "민주주의가 박탈당한 상황에서 FARC의 주장은 좌파 성향의 당이나 노조, 반체제 조직의 입장과 크게 다를 바 없다"고 보고타에서 만난 공산주의 주간지 <보스>의 편집장 카를로스 로사노는 분석했다.
야권 성향의 마르차도레스와 파리아노스(8)가 유사한 요구사항을 내미는 것도 그리 놀랍지 않다. 물론 마르차의 강경 노선을 구축하는 일부 조직이 카우카·마그달레나메디오·카타툼보·노르테데산탄데르·오리엔테 등 분쟁 지역 출신이고, 완고하고 폭동이라는 방법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은 저항을 추구하고 있다. FARC는 1999~2002년 마지막 협상이 결렬된 이후 공산당과 볼리바르운동 지하조직을 만들면서 정치적 행보를 계속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 누구도 내전으로 심각한 타격을 입고 고통받으며, 현상 유지는 물론 무장항쟁에도 동조할 수 없는 콜롬비아인이 마르차 파트리오티카의 핵심 구성원임을 부인하지는 못할 것이다.
협상은 계속한다… 억압도 계속하면서
마르차의 또 다른 대변인 다비드 플로레스는 "분노한 민중에게 변혁을 이끌어갈 정치조직을 설립할 수 있는 조건을 부정한다면 그들은 민중운동 전체를 대표할 수 없다"며 "우리는 모든 사회가 참여해야 평화가 구축된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협상 테이블에서 자리가 마련될까? 마르차가 주장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어떤 식으로 할 것인지는 명확하게 규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난해 9월 FARC와 정부가 체결한 '안정적이고 영구적인 평화 구축과 내전 종식을 위한 전반적인 협약'에서 사회 참여는 애초에 명시되지 않았다.
이 주장을 수용한 시위대는 아바나에서 그들이 직접 협상장에 참석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경영자 쪽, 산업 및 군사 분야 인사가 대표단에 있으니 그들이 국가 전체를 대표할 것이라고 여긴 정부는 '다른 목소리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소극적 의견 표명 방식인 인터넷을 이용하라고 했다.(9) 정부는 마침내 지난해 12월 17~19일, 유엔과 국립대학의 후원 아래 '통합적 농지 개발을 위한 정치포럼'을 열었다. 1314명(대부분 마르차에 속하는 조직 122곳도 참석했다)이 모인 포럼은 '고르디우스의 매듭'(풀기 어려운 일이나 문제를 일컫음)인 더 균형 잡힌 농지 개발 모델을 구축할 필요성을 중점적으로 다뤘다. 이 자리에서 400여 개 제안이 협상단 양쪽에 전달됐다. 하지만 우리베 전임 대통령의 강경하게 '협상에 반대하는' 입장에 동조하는 전국목축업연맹(FEDEGAN)이 포럼 참석을 거부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몇 주 전에 FARC와 입장 차이를 보이는 마르차의 한 지도자는 우리에게 "FARC가 어떤 형태로 활동하는지 동의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다"며 "아직 우리나라에서 어떤 사회조직이나 정당이 제대로 자리잡지 못한 상황에서 그래도 중요한 점은 이 단체를 자리잡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털어놨다. 그토록 염원하는 '사회적 정의를 동반한 평화'가 정착되기에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 로사노는 현명하게 "협상장에서 혁명을 이끌어내자는 게 아니다"라면서 "하지만 정부도 게릴라와 마찬가지로 양보해야 한다. 정부는 어디까지 갈 준비가 됐느냐"라고 반문했다. 무엇보다 콜롬비아 정부는 민주적이지만 단호하게 의견을 개진하겠다는 유일한 요구사항을 내세우는 반정부 세력에게 기득권을 내줄 준비가 됐는가? 메데인에서 만난 누군가는 "'그들'이 협상장에 있는 한 우리는 거리로 나설 것"이라고 했다.
2005년 명목상 해산한 준군사조직은 새로운 형태의 범죄조직으로 변모해 동일한 행태를 반복하고 있다. 지난 2년간 노조원 57명이 살해되는 등 사회운동에 대한 억압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마르차 파트리오티카는 벌써 부당 체포, 암살, 납치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마그달레나메디오 지역의 사바나데토레스에서 만난 한 여성은 긴장된 미소를 지으며 "사회운동에 뛰어드는 것이 겁나지 않다. 그저 다른 사람들처럼 신의 가호가 있길 빌 뿐이다"라고 나지막이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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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모리스 르무안 Maurice Lemoine 저서로 <검은 강물 위에, 콜롬비아의 암흑의 중심에서>(돈키호테 출판사·파리·2013년 3월 출간 예정)가 있다.
번역•서희정 mysthj@gmail.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역서로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일들>이 있다.
(1) ‘콜롬비아: 무력화된 법제로 인해 처벌을 피하는 사례가 증가하고 있다’, 보고타, 2005.
(2) Gregory Wilpert, ‘콜롬비아, 평화는 오는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2년 10월호 참조.
(3) 유엔에 따르면 국토의 52%를 인구의 1.15%가 소유하고 있다(<엘티엠포>, 보고타, 2012년 11월 11일).
(4) <카라콜 라디오>, 보고타, 2011년 3월 15일.
(5) 자유당(PL) 소속인 코르도바는 정부의 동의를 받아 FARC에 납치된 인질 석방을 위한 중재자 역할을 했다가 ‘게릴라와의 관계’를 이유로 상원의원직을 박탈당하고 18년간 공직 진출이 금지됐다.
(6) 오랜 시간 좌파의 바람을 전달하던 대안민주중심(PDA)은 새로운 조직에 합류하기를 거부해 많은 이들을 안타깝게 했다. PDA는 공산당이 마르차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그들 조직에서 제명했다.
(7) <엘티엠포>, 2012년 10월 21일.
(8) FARC 산하 조직.
(9) 그나마 유엔의 지원과 참여를 통해 2012년 10월 24일∼11월 23일 지역실행회의가 13차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