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어, 유엔 무대에서 사라지나
유엔 공동 감찰단(2)이 제시한 이 준엄한 현실은 공직 임용에 관한 또 다른 보고서를 통해 확인되었다.(3) 이 보고서에 따르면, 사무국 내에서 사용되는 2개 업무 언어인 영어와 프랑스어가 각각 87%와 7%의 업무에서 사용됐다.
따라서 다자적 성격의 유엔 조직이 올바른 업무 수행에 필요한 다양성을 상실한 채, 특정 사회 모델에 유리한 단일 문화적 기술 관료제 조직으로 전락할 위험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조직을 구성하는 여러 국가를 위한 다원적 행정 조직의 성격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이미 국제통화기금이나 세계은행 같은 거대 금융 기구들이 그 선례가 되지 않았던가? 또한 국제형법재판소나 국제사법재판소 등 국제 사법 기구에는 어떤 영향이 미치겠는가? 사법 모델의 다원성이 소실되고, 판례와 구두 변론 중심의 영미권 방식이 지배적이지 않겠는가?
이처럼 상황이 우려할 만한 방향으로 전개되자, 프랑스어권 기구(Organisation Internationale de la Francophonie·OIF) 소속의 75개 회원국과 참관국이 모인 프랑스어권 진영에서는 수년 전부터 제도적 차원의 대응을 시도해왔다. 2006년 9월, 프랑스어권 각료 회담에 참석한 68개국 장관은 국제 조직 내 프랑스어 사용에 관한 안내서를 채택한다. 이후 이 문제는 퀘벡 정상회의(2008년 10월 17~19일) 및 몽트뢰 정상회의(2010년 10월 22~24일)에서 중심 의제로 자리잡는 등 프랑스어권 기구의 로드맵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렇다면 정치권 책임자들의 공식 참여와 프랑스어권 기구의 노력에도, 프랑스어권 국가들이 영어 사용의 대세적 분위기를 역전시키거나 이같은 흐름의 속도를 늦추지 못하는 이유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물론 그 이유는 여러 가지를 들 수 있다. 먼저 하나의 기구로서 프랑스어권 조직은 국제 조직의 정식 주체가 되지 못한다. 따라서 이 조직은 의사 결정 기구 내의 회원국 대표를 통해서만 활동할 수 있다. 그런데 회원국들 사이의 이해관계가 상충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고, 이는 프랑스어권 조직의 이해관계보다 우선한다. 그리고 여기에 사회학적 어려움이 더해진다. 오늘날 국제기구에서 일하는 사람들 사이에 영어의 주도권에 대한 패배 의식이 짙게 자리잡고 있으며, 다자 기구나 감찰 당국에서 고위직을 차지하는 프랑스어권 책임자들 역시 기대와는 달리 늘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일부 인사들은 프랑스어권 국가의 공식적인 권고 사항에 완전히 위배되는 행동을 취하거나 그와 반대되는 신념을 표명하기도 한다. 또한 급한 일부터 일단 해결하고 언어적인 문제는 부차적인 것으로 미루려는 문화도 문제의 원인으로 지적될 수 있다. 아울러 언론의 관심 부족, 그리고 집단의식 측면에서 언론이 미치는 영향력 역시 한몫한다. 사실 규칙이 지켜지지 않을 때 수혜자가 문제제기를 하지 않으면 규칙은 더욱 지켜지기 어렵다.
그렇다면 현 사태를 비관론적 시각으로 봐야 할까? 프랑스어의 쇠퇴는 피할 수 없는 일인가? 다행히 아직 노력의 여지는 남아 있다. 원론적 얘기만 반복하는 수준을 넘어서서, 프랑스어 사용에 관한 안내서를 참고한 자발적 정책의 수립 및 시행이 일차적 행동 노선이 될 수 있다. 게다가 사회는 현재 진행 중인 문화적 쇠퇴 현상을 도외시해서는 안 된다. 프랑스어권에 대한 낡은 시각에 사로잡혀 있는 언론이 언제까지 이 문제를 전담할 수 없다. 다자 조직 내에서 좀더 행동 반경이 넓은 단체에 이 문제를 넘기는 것도 고려해봐야 하며, 유엔 역시 두 언어의 자유로운 구사 능력을 채용 조건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수동적 태도를 보이는 프랑스어권 정치 책임자들은 유엔 내에서 언어 규정이 위배되고 있는 상황을 초래한 공범자들이다. 아울러 이들은 유엔이 인정하고 증진시키려는 문화적 권리가 침해되는 상황에도 한몫했다. 따라서 이런 태도의 변화가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 바깥으로 튀어나온 못은 무조건 눌러버리고 마는 국제 경쟁의 풍토에서, 프랑스어권 국가들은 더욱 단합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원한다면 전세계 네트워크와 수많은 단체가 홍보 활동을 하며 여러 가지 형태로 참여운동을 벌일 수도 있다. 이로써 다양성이 살아 있는 프랑스어권 진영이 다원적 세계를 만들기 위해 행동할 수 있다는 사실이 입증될 것이다. 아울러 프랑스어권 진영이 이를 위해 적극적인 참여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사실도 밝혀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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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도미니크 오프 Dominique Hoppe 국제 프랑스어권 공무원총회(Assemblé des Francophones Fonctionnaires des Organisations Internationales·AFFOI) 회장.
번역•배영란 runaway44@ilemonde.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미래를 심는 사람> 등의 역서가 있다.
(1) 아랍어·중국어·스페인어·프랑스어·러시아어의 5개 언어.
(2) Papa Louis Fall & Yishan Zhang, ‘유엔 조직 내의 다국어 이용 현황’(Situation du multilinguisme dans les organismes du systéme des Nations unies), 보고서 제JIU/REP/2011/4호, UN, Geneva, 2011.
(3) ‘유엔 채용에 관한 바레유 보고서’(Rapport Vareilles sur le Recrutement à l‘ONU’ , 국제 프랑스어권 공무원총회, 2012년 3월, www.affoi.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