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안에 또 다른 김지하는 없는가

-계몽적 이성의 본질과 한계

2013-02-08     강신주

어디에선가 헤겔은 "모든 거대한 세계사적 사건과 인물들은 두 번 나타난다"고 말했다. 그는 이렇게 덧붙이는 것을 잊었다. "처음에는 비극으로, 그다음에는 희극으로."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1852)

저항 시인의 울화, 변절도 착란도 아니다

절망적이다. 귀를 막고 고개를 돌리고만 싶다. "왜 그러세요, 선생님! 더는 어떤 것도 이야기하지 마세요, 제발!" 믿었고, 심지어 존경하기까지 했던 사람이 우리 기대를 좌절시키다니. 그가 방향을 잃은 우리 삶에 방향타 노릇을 했던 사람이기에, 우리는 실망을 넘어서 배신감마저 느끼게 될 것이다. 최근 시인 김지하(1941년생)의 언행이 그런 경우가 아니었을까. 독재에 맞서 싸우며 진보 편에 서 있다고 확신했던 시대의 아이콘이자, 독재정권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오적'이란 시를 쓴 인문정신 아닌가.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를 외친 자유의 시인, 그가 바로 김지하 아니었던가.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 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 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김지하가 있었기에 우리는 외롭지 않았다. 전두환 독재 시절에도 우리는 민주주의를 '타는 목마름으로' 그와 함께 부를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닌 사람들에게 김지하는 글자 그대로 '진보의 레전드(전설)'였다. 그렇지만 이제 그는 독재자의 딸을 지지하는 보수 세력과 구별되지 않는다. 아니 구별은커녕 가혹한 독설을 자랑하던 보수 논객도 그에게는 명함도 못 내밀 정도다. 김지하는 변절, 아니면 전향한 것인가. 그는 진보를 버리고 보수를 선택한 것인가. 나이가 들어서 노망 든 것인가, 아니면 오랜 투옥으로 생긴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는가? 그렇지만 돌아보면 당혹스러운 시인의 행보는 이미 1990년대 초반에 드러난 적이 있다. 분신 자살의 서러운 불빛으로 당시 학생들은 권력의 폭압을 만천하에 밝히려 할 때였다. 이때 <조선일보>에서 김지하 시인은 "죽음의 굿판을 당장 걷어치워라!"라는 사자후를 토로하게 된다. 생명을 존중하는 동학(東學)에 따른 주장일 수도 있지만, 그것만으로 학생과 시민들이 죽음으로 실현하려 했던 민주주의 열망을 싸늘하게 식히는 데 충분했다. 의도적이든 아니든 시인은 진보 편에 서지 않고, 보수 편에 섰던 것이다.

냉정하게 보면 김지하는 변절한 것도 미친 것도 아니다. 김지하를 진보라고 본 것도, 그가 이제 보수라고 규정하는 것은 우리일 뿐 김지하는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었을 뿐이다. 김지하는 애초에 부르주아 입장을 지닌 계몽주의적 시인이었을 뿐이다. 박정희 독재에 저항했을 때, 김지하는 1789년 프랑스혁명을 이끌던 부르주아 지식인이란 입장을 반복했던 것이다. 독재는 일종의 왕정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부르주아 인문주의 교육을 받은 김지하의 눈에 독재자는 야만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독재자를 맹목적으로 숭배하는 민중은 몽매한 것으로 비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시를 써서 독재자의 야만성을 폭로하고, 동시에 민중을 계몽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 순간이 김지하가 진보의 레전드로 탄생하는 순간이다. 그러니까 김지하가 살던 시대에는 독재의 어둠을 밝히는 계몽적 지성과 실천으로 무장했다면, 그 누구라도 진보적 지식인인 시절이었던 셈이다.

"적을 잃고 나는 쓰네, 저 민중의 무지를"

그렇지만 잊지 말자. 김지하는 박정희(1917~79)가 아닌 만큼이나 전태일(1948~70)도 아니었다는 사실을. 김지하와 전태일 사이의 간극은 1789년 프랑스에서 벌어진 부르주아 혁명과 1871년 프랑스 파리를 뒤흔든 파리코뮌(Paris Commune) 사이의 차이만큼 큰 것이다. 파리코뮌은 계몽의 대상으로 치부되던 파리의 민중과 노동자들이 정치의 주체로 떠오른 극적인 사건을 상징한다. 이것은 프랑스혁명으로 기득권을 잡은 부르주아 계층으로서는 불편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계몽의 대상이 없다면, 계몽을 담당한다고 자처한 그들의 사회적 위상은 휴지 조각에 불과한 것이 될 테니 말이다. 1871년 이미 기존 부르주아들은 진보적이지 않았다. 심지어 그들은 파리코뮌을 궤멸시켜 1789년 이래로 자신들이 구축해온 기득권을 지키려는 보수 세력이 돼버렸다. 당시 부르주아 세력은 민중과 노동자의 편을 들기보다는 외국 군대를 동원해서라도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했다. 여기서 왕정의 비이성적 지배를 극복하고,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지배를 도모하려던 부르주아 계층의 계몽주의적 이성은 단지 자신의 기득권을 옹호하려는 배타적 이성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여실히 폭로되고 만다.

'박정희-김지하-전태일'은 각각 '왕정-부르주아-민중'을 상징한다. '왕정-부르주아'라는 프레임에서 부르주아는 진보의 자리를 차지하지만, '부르주아-민중'이라는 프레임이 설정되자마자 부르주아는 보수 자리를 차지할 수밖에 없다. 김지하는 변절한 것도 아니고 단지 자신의 자리를 꿋꿋하게 지키고 있었다는 평가가 가능한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박정희 독재에 대해 김지하는 진보적이었지만, 전태일에 대해 김지하는 보수적일 수밖에 없었다. 김지하는 계몽적 지성을 상징하는 사람이다. 한마디로 그는 자신만이 세계를 환히 비춰줄 수 있는 등불을 들고 있다고 믿는 지식인이다. 오만도 이만한 오만도 없을 것이다. 그 등불을 들어 그는 독재자에게 '당신이 야만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보여주었고, 동시에 민중과 노동자에게는 자신이 비추고 있는 길로만 가라고 역설했던 것이다. 독재자가 사라지자마자, 김지하가 들고 있던 등불은 위태롭게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의 등불은 독재자라는 야만과 민중과 노동자의 몽매 사이에 존재해야만 안정적으로 불을 밝힐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한 일 아닌가. 독재자가 사라지자마자, 김지하가 들고 있는 등불은 꺼질 듯이 심하게 흔들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바람을 막아주던 두 벽 중 하나가 사라져버리니, 당연히 등불은 요동칠 수밖에 없었다. 이제 계몽적 지성 김지하는 무의식적으로 직감하게 된다. 민중과 노동자는 항상 몽매의 대상으로 있어야만 한다. 오직 그럴 때만 자신이 들고 있는 계몽의 등불이 존재 이유를 찾을 수 있으니까. 민중과 노동자들마저 자신의 등불을 벗어나 그들만의 등불을 만들어 길을 찾아간다면, 김지하는 자신이 들고 있던 등불이 단지 자신만을 비추는 등불이었다는 참담한 현실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바람을 막아주던 마지막 벽마저 완전히 사라진다면, 그가 평생 들고 있던 계몽의 등불도 허무하게 꺼질 수밖에 없을 테니까 말이다. 그렇기에 진보를 자처하는 민중과 노동자 세력이 오류와 실수에 빠질 때마다, 김지하는 박수를 치며 쾌재를 부르는 것이다. 아직도 자신과 자신이 들고 있는 등불이 유효하다는 사실만큼 계몽적 지성에게 만족스러운 상황이 또 있겠는가.

계몽의 몰락, 비극은 한 번으로 족하다

1966년 12월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은 것'이라는 시평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린 적이 있다. "단순히 외부 정치세력의 변경만으로 현대인의 영혼이 구제될 수 없다는 것은 세계의 상식으로 되어 있다. 현대의 예술이나 현대시의 출발점이 여기에 있다. 그런데 우리의 젊은 시가 상대로 하고 있는 민중-혹은 민중이란 개념- 은 위태롭기 짝이 없다. 이것은 세계의 일환으로서의 한국인이 아니라 우물 속에 빠진 한국인 같다. 시대착오의 한국인, 혹은 시대착오의 렌즈로 들여다본 미생물적 한국인이다. 이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바라보는- 즉 작가가 바라보는- 군중이고, 작가의 안에서 살고 있는 군중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작가와 함께 앞을 향해 세차게 달리고 있는 군중이 아니라, 작가는 달리지 않고 군중만 달리게 하는 유리(遊離)에서 생기는 현상인 것이다." 우리 현대사가 가진 가장 탁월한 인문정신 김수영(1921~68)이 당시 참여시를 즐겨 쓴 후배 시인들에게 던진 경고다. 놀랍지 않은가. 김수영은 이미 직감했던 것이다. 참여시를 쓰는 후배 시인들이 언제든지 진보를 배신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김수영은 제대로 된 참여시, 그러니까 진보의 편에 확고히 서려는 시인은 군중, 혹은 민중을 가슴에 품고 있어야만 한다고 본 것이다. 오직 그럴 때에만 군중과 함께 시인은 앞을 향해 세차게 달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진보적 지성인 아닌가. 이럴 때 시인, 혹은 진보적 지성인은 사실 민중과 구별되지 않는다. 진보의 길에서 민중이 달리는지, 아니면 시인이 달리는지 모르는 형국이니까 말이다. 가난한 자, 상처받은 자, 그리고 비참한 자, 그러니까 민중을 가슴에 품고 달리는 것과 민중을 관조하면서 그들을 뛰도록 독려하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바로 후자가 계몽적 지성이 선택한 입장 아닌가. '당신들은 우매하고 게으르니 내가 뛰라는 곳으로 열심히 뛰어야 한다.' 이것만큼 계몽적 지성의 정신적 태도를 정확히 규정하는 것도 없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계몽적 지성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독재자와 별로 다르지 않은 강력한 권력욕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짐작하게 된다. 계몽적 지성은 민중이 자신의 삶을 자각해 스스로 불을 밝히는 것을 극도로 무서워하기 마련이다. 그러니 그는 민중이 애써 밝힌 작은 불마저 바로 끄려는 것이다.

독재자와 싸울 때 김지하는 전태일과 구분되지 않았다. 그는 진보적 지성인으로 보였다. 하긴 적의 적은 동지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렇지만 독재자가 사라지자마자 김지하는 전태일을 지배하려고, 아니 최소한 전태일의 자각을 몽매로 만들려고 했다. 여기서 그는 자신이 부르주아 입장, 그러니까 계몽적 지성만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드러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지금 '변절자'라고 불릴 정도로 보수적인 인사가 됐다. 이제야 1990년대 초 김지하가 "죽음의 굿판"이란 발언으로 민주화의 열기에 찬물을 끼얹은 것이, 그리고 2010년대인 지금 비정규직과 실업의 위기 속에서 절규하는 민중을 배신하고 독재자의 딸을 지지한 이유가 분명해지지 않은가. 이제 더 이상 독재자는 없다. 그러니 김지하는 자신의 계몽적 이성을 사수하기 위해 진보 세력과의 싸움에 소매를 걷어붙인 것이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은 그가 선배 시인 김수영의 경고를 무시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긴 이미 민중을 가슴에 품고 함께 앞으로 달려갈 수 없었던 김지하라면, 어떻게 김수영의 말이 귀에 들어올 수 있었겠는가. 이제 김지하는 신경 쓰지 말자. 정치권, 학계 그리고 시민단체에도 여전히 제2의 김지하가 너무나 많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잊지 말자. 비극은 한 번으로 족한 법이다. 피눈물이 나는 희극이 또 발생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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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 1967년 경남 함양 출생. 연세대에서 '장자 연구'로 철학박사를 받았다. 문사철기획위원회 위원. 현재 <경향신문>('철학자 강신주의 비상경보기')과 <중앙일보>('강신주의 감정수업')에 칼럼을 쓰고 있다. <철학, 삶을 만나다>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 <철학 vs 철학> <김수영을 위하여>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