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를 통한 지구적인 연대와 다극성(多極性)

2009-03-02     이냐시오 라모네 | 언론인

 용어 '프랑코포니'가 자리를 잡는 데는 오랫동안 어려움을 겪었다. 분명한 것은, 용어가 대중들에게 충분히 피부에 와 닿는 현실성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흔히 프랑스어를 말하는 개인을 '프랑코폰'이라고 여긴다. '프랑코폰'이 '프랑코포니'로 이동한 것은 형용사가 명사화 됐다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의미한다. 사실, 우리는 음성학적 개념에서 지정학적 이념을 향해 이동하며, 비록 소수의 기관들만이 공식화한 언어일지라도, 5대륙에 퍼져있는 프랑스어의 공동체의식과 공동소유권 의식을 깨우치고 싶어 한다.
 1880년 최초로 용어 '프랑코포니'를 정리한 유명 지리학자 엘리제 르클뤼의 동생 오네짐 르클뤼는 이런 저런 이유로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나라와 국민을 '프랑코포니'라고 지칭했다. 그러나 프랑스어가 모국어인 사람들을 지칭하는 '프랑코폰'은 1930년대부터 사전에 등재된데 반해서, '프랑코포니'란 용어는 금세 잊혀졌다. '프랑코포니'는 1962년 발간된 잡지 <에스프리>에 재등장, 이를 '프랑스화', '프랑코폰 공동체' 혹은 '프랑스식 공화국'을 발판으로 삼는 것이라고 명확하게 명기했다.
 언어사회학적 측면에서 보면, 프랑스어는 1억7천500만 명이 사용하는 세계 9위권 밖에 되지 않는다. 그 중 1억1천500만 명은 '프랑코폰'이고 6천만 명은 부분적인 '프랑코폰'이다. 일부 국가와 지역(프랑스, 퀘벡, 스위스 로망드, 벨기에 왈롱)에서는 전적으로 프랑스어만 쓰거나, 혹은 거의 그런 실정이다.
 또 다른 지역에서는 프랑스어가 '공식 언어'인데도 (인구 비율로 따지면 상당수에 해당하긴 하지만) 소수만이 사용하고 있다. '아프리카 프랑코폰'에서 프랑스어는 그들의 모국어와 병행해서 많이 보급되어 있는 영어나 아랍어 등과 함께 공존하고 있다. 기타 국가에선 프랑스어가 공식어는 아니지만, 인구의 상당수가 프랑스어를 사용하고 있다. 레바논(43%), 루마니아(28%), 몰다비아(25%), 알바니아와 불가리아(10%)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아프리카와 아시아에 프랑스어를 유입시키고 전파시킨 사람들은 식민지 개척자들이었다.  식민 치하의 주민들은 이 언어가 잘 유통된다는 미명하에 배워야 했지만, 그들은 프랑스어를 해방의 도구중 하나로 삼았다. 독립 후에는, 흔히 지도자들이 의도적으로 프랑스어를 그들 나라의 공식 언어로 채택해, 프랑스어가 국제 공동체의 결속력을 다져주길 기대했다.
 '프랑코폰 공동체 프로젝트'는 결코 프랑스가 주도한 것이 아니었다. 1960년부터 하비브 부르귀바, 하마니 디오리, 레오폴드 세다르 상고르, 노도롬 시아누크, 그리고 나중의 퀘벡인 르네 레베스크 등이 인사들이 주도한 것이며 그 모습을 갖추는데 10여년이 걸렸다. 
 1970년 3월 니제르의 니아메에서 27개국이 모여, 정부 간 '프랑코포니'의 구조를 처음으로 구성하게 된다. 요컨대 ACCT(문화와기술협력협회)를 창설하게 된다. ACCT는 1960년대에 프랑스어 교사들, 대학 교수들, 국회의원들을 규합한 NGO단체의 연장선이었다. 하지만 그 운동이 진정으로 제도화 된 시점은 1986년 파리에서 개최된 첫 정상회담 때, "프랑스어를 사용한다는 공통점이 있는 국가들"이라고 정리하면서부터다. 이 정리는 1993년 "프랑스어를 공유하는 국가들"로 바뀐다.
 1997년 11월 베트남 하노이에서 개최된 제 7차 정상회담에서 '프랑코포니'의 새로운 헌장이 채택되면서 질적인 측면에서 한층 업그레이드된다. 그 헌장에 따라 OIF(프랑코포니 국제 조직)의 초대 사무총장엔 전 유엔 사무총장, 부트로스 부트로스-갈리가 선출되었다. ACCT는 1998년 프랑코포니 정부 간의 협회, 즉 OIF의 핵심 기관으로 거듭난다. 프랑코포니의 여타 기관으로는 TV5Monde, AUF(프랑코포니 대학 협회), 알렉산드리아 상고르 대학, 국제 프랑코폰 시장협회, 프랑코포니 의회 등이 있다.
 나아가 독립적인 인사들(정치권력자들, 작가들, 교수들, 기자들, 법률가들, 경제학자들, 기업인들)로 구성된 아이디어 뱅크인 '프랑코포니 최고 자문위원회'는 2002년 프랑스 공화국의 대통령 자문기관에서 탈피, OIF 기관이 된다. 사무총장도 부트로스-갈리(최고위원회의 부의장직 겸직)에서 전 세네갈 대통령 아브두 디우프로 바뀌었다.
 이후 일련의 장치들이 작동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무엇을 위한 장치들인가? 디우프는 국제 공동체인 OIF가 한 언어를 공유한다는 것을 바탕으로 구축 된 만큼 "그 언어가 국경을 넘어 의식을 강화하고 확대하는데 기여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양성을 띤 우리의 언어와 문화는 우리의 가장 소중한 자산이다. 다양성을 활성화 시키는 것이 전 지구를 똑같이 만들겠다는 산업적이고 상업적인 세계화에 맞서 가장 튼튼한 방벽을 쌓는 것이다. 세계화가 가르치는 유일한 차이는 가난한자와 부유한자를 구분하는 것이다. 이들 간의 간극은 날로 커지고 있다. 프랑스어와 세계 문화의 다양성을 활성화 시키고, 선진국과 후진국의 연대감을 증대시켜 국제관계를 민주화 시켜야 한다. 왜냐 하면 이 전투에서, 프랑코포니가 최전방에 서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우리는 유럽 건설에 대해서 장 모네가 "만약 다시 해야 하는 일이라면, 문화를 통해 다시 시작할 것"이라고 언급한 것을 상기한다. 지구의 '다극성'이란 측면에서, 2005년 10월 유네스코가 문화적 표현의 다양성 촉진과 보호에 관한 협약을 채택했던 것처럼, OIF라는 조직이 아주 핵심적인 역할을 할 수도 있다. OIF에 가입하거나 옵서버 역할을 희망하는 정부들이 늘고 있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게다가 이들 정부의 공식 언어가 프랑스어가 아니라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깊다.   
  번역|조은섭 chosub@ilemonde.com

 


 

*파리7대학 커뮤니케이션학 교수 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전 발행인. 이 글은 <마이에르 드 브와>(Maniere de voir) 2008년 2~3월에 게재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