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의 우경화
프랑스 정부가 대부분의 사회·경제 공약을 포기한 가운데 보수세력들이 ‘동성결혼’ 법안에 반대하며 결집하고 있다. 하지만 프랑스 사회가 우경화되었다고 단정지을 수 있을까? 그에 앞서 우경화 정의에 대한 합의부터 도출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복지 의존, 이민, 세금 망명 등에 대해 '문란해진 사회질서를 바로잡아야 한다, 권위주의를 지향해야 한다, 불평등은 어쩔 수 없다'라는 식의 반응이 늘어나고 있다. 정치 스펙트럼의 맨 왼쪽에서 오른쪽에 이르기까지, 프랑스가 우경화되고 있다는 진단에는 모두가 동의하는 듯하다. 비록 우경화를 바라보는 심정은 제각각일지언정 말이다. 어떤 이는 우경화 추세를 반갑게 인식할 터이다. 또 어떤 이는 불편한 감정을 억누르거나, 거리낌 없이 자유롭게 우경화라는 새로운 현실에 적응할 것이다. 그런가 하면 체념하거나 자책하는 마음으로 현실을 수용하는 이도 있고, 우경화 현상을 비통해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2007년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 선출 때도 우경화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하지만 당시 '인본주의 가치'가 팽팽히 맞서면서 우경화라는 확진을 피해갈 수 있었다.(1) 지금은 동성결혼을 비롯한 사회개혁에 대한 지지가 우경화 진단을 저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경제·사회·정치 등의 분야에서 우경화 추세는 분명한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이제 남은 일은 우경화 경향이 얼마나 거세고 가파르게 진행될지 살펴보는 것뿐이다. 그럼에도 틀에 박힌 해석만 반복하는 대신 우경화 현상을 다시 한번 올바르게 이해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5년 전과 마찬가지로 우경화 현상에 대해 많은 이들이 국민의 불신을 거론한다. 한편으로는 '대의민주주의 위기'라는 낡은 논리를 끌어다 붙인다. 이를테면 의원들이 민의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또 다른 이들은 포퓰리즘의 난무가 불신을 가중한다고 꼬집는다. 이런 시각은 극우와 극좌를 모두 한통속으로 싸잡아 비난한다는 특징이 있다. 전자인 대의민주주의 위기론은 이미 100년도 넘은 반의회주의나 20년 전에 나타난 저조한 투표 참여 및 국민전선(FN)의 부상과 관련한 논란을 재점화한다. 후자인 포퓰리즘 고조론은 전체주의에 대한 해묵은 비판을 출발점으로 결국 '이쪽도 저쪽도 아니다'라는 식의 케케묵은 수사법을 되살린다. 그러면서 1930년대 이후 도대체 몇 번째인지 헤아릴 수조차 없을 만큼 무수히 반복됐던 '제3의 길'이라 불리는 중도주의 길이 재등장한다. 한마디로 양 극단 사이에서 새로운 길을 찾겠다는 것이다.
놀라우리만치 모두가 우경화 현상에 공감하면서도 우경화라는 확진을 내리기 주저하는 것은 우리가 지금 도대체 어떤 종류의 우경화를 말하는지 정확히 규정하고 넘어가지 않는 데서 비롯된다. 어떤 이들에게 우경화는 민심이 급격히 극우 쪽으로 쏠리는 경향을 의미한다. 또 다른 이에게 우경화는 사회당을 포함한 모든 정치적 경향이 단순히 우클릭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경화에 대한 인식 차이는 극도로 상반된 결과를 초래한다. 전자에겐 외국인 혐오, 인종차별 등 거친 극우적 논쟁을 촉발한다. 반면 후자에겐 좀더 폭넓은 합의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이를테면 모두가 자유주의를 수용하거나, 이데올로기가 종말을 맞이하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는 두 현상이 공존한다. 먼저 국민전선이 선거판에서 득세하며 위험하지 않은 보통 정당으로 인정받는 한편, 다른 많은 정당들이 치안 불안, 이슬람의 위협, 재산 몰수 처사에 가까운 부유세 징수, 사회복지 부당 수급, 자국민 우선 고용 등 기존에 국민전선이 전유하던 주제를 놓고 경쟁을 벌인다. 또 한편으로는 유력 정당들이 저마다 시장, 자유무역, 사기업, 재정 감축 등에 동조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계층 하락 공포, 극우의 자양분
정치적 급진화를 의미하는 우경화는 훨씬 더 많은 관심을 불러모은다. 더 큰 소란과 혼란을 초래하는 탓이다. 오늘날 세계화, 국채 위기, 실업 급증, 신흥국의 부상, 부익부 현상, 중산층의 빈곤화, 빈곤층의 극빈곤화 등 우리의 정신을 아찔하게 하는 심대한 변화가 무수하게 일어나고 있다. 이런 급격한 변화는 현 정치 지형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을 것이다. 더욱이 1930년대 대공황에 대한 기억은 시민들의 불안감을 더욱 증폭한다. 하지만 당시의 위기는 파시즘과 전쟁이라는 정치적 재앙을 초래하며 20세기 역사에 큰 변혁을 몰고 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프랑스·벨기에·헝가리·네덜란드 등에서 극우정당이 선전하는 모습에 많은 이들이 우려를 표했다. 하지만 오늘날 극우당의 부상은 예전보다 더 느리게, 약하게 진행되고 있다. 가령 극우당은 정권을 잡는 것은 고사하고(오스트리아를 집권한 고 외르크 하이더의 정당(자유당)은 제외), 지방자치단체에 진출하는 일(벨기에의 '블라암스 블록'(VB)당처럼)조차 드물다. '티파티'처럼 제도화된 정치기관(티파티의 경우 공화당)에 압력을 행사하는 극우단체들의 활약도 두드러졌다. 특히 백인 서민층의 계급 추락에 대한 공포가 극우 압력단체의 등장에 자양분이 됐다. 그들은 서민층임에도 부익부 현상보다는 오히려 빈곤층이나 외국인 같은 하층계급에서 비롯되는 위험을 더 두려워했다. 요컨대 계급보다는 '인종'에 더 민감한 것이다. 하지만 극우 압력단체의 활약이 극우 세력에 적극적인 구애의 제스처를 보내던 공화당 의원이 대선에서 승리하도록 이끌지는 못했다. 오히려 극우에 너무 기댄 것이 주요 패인이라고 분석하기도 한다.
2007년 선거에서 사르코지는 좀더 우로 기운 공약들을 내놓은 덕에 많은 극우 표를 흡수할 수 있었다. 하지만 5년 뒤 똑같은 전략에도 그는 재선에 실패했다. 하지만 패배의 격차가 크지 않다는 이유로 대중운동연합(UMP)은 여전히 강경 노선에 대한 신념을 버리지 못한 듯하다. 오늘날 UMP 당원들은 이민이나 치안 등의 문제에 대해 국민전선에 가까운 급진적 성향을 보인다. 심지어 보호주의나 유로존 등 경제·재정 문제와 관련해서는 지도부와 대립각을 세우기까지 한다.
급진화가 심각한 문제라는 듯 2013년 1월, 3개 이상의 기관이 한꺼번에 극우적 가치관 증가에 대한 여론조사를 쏟아냈다. 그중 한 조사에 따르면, 프랑스인의 87%는 '질서를 회복할 진정한 지도자'를 갈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2013년 1월 25일자 <르몽드>). 금방이라도 어디선가 군홧발 소리가 들릴 것 같은 쿠데타를 연상시키는 이 문장은 오늘날 극우 담론을 살찌우는 자양분이 되고 있다. 현재 이민자, 범죄자, 복지 수혜자 등을 타깃으로 한 거친 극우적 담론이 여기저기 넘쳐나고 있다. 리처드 호프스태터는 "음모론적 사고가 세금·관료·지식인·외국인 등에 대한 증오와 만나 편집증적 스타일을 만들어낸다"고 말했다. 그의 이론은 비단 미국에서만 영감을 일으킨 것은 아닌 듯하다.(2) 여러 곳에서 사형, 국가 개입을 배제한 자유 경영, 노동시간 증가 등에 찬성하는 여론이 거세지고 있으니 말이다.
두 종류의 우경화 사이에는 연결고리가 존재한다. 우파가 극우파로 옮겨간 것은 정치적 논쟁의 중심축이 오른쪽으로 이동한 데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가 아니다. 오히려 각 계파들이 서로 분열하면서 타 계파와 차별화를 위해 더욱 급진적 정책을 앞다퉈 채택한 것이 원인이다. 정치인들은 흔히 가능성 영역과 불가능성 영역의 경계에 있는 극단적 생각을 말로 표현하기 위해 곡언법(표현하려는 것을 빙 둘러서 말해 뜻을 강조하는 효과)을 활용한다. 가령 '강경 우파'의 선봉을 자처한 장프랑수아 코페 UMP 대표는 이렇게 말한다. "중학교에 다니는 자녀가 방과 후 간식을 사들고 나오다 이란윤리경찰대를 자처하는 청소년들에게 간식거리를 빼앗긴 사건은 학부모들을 큰 충격에 빠뜨린다." "우리 동네에 백인을 상대로 한 인종차별이 활개를 치고 있다." "이제 100% 의료보험 혜택을 누리는 것은 오로지 불법 체류자뿐이다." "기업가, 수공업자, 상인 등이 (중략) 탈세조사관이나 최악의 경우 노동감독관이 찾아오는 것은 아닌지 두려움에 떨고 있다."(3) 언술은 가능성의 한계를 확장한다. '정치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의 영역이 확대되는 순간, '정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의 영역도 함께 확대된다.
미국에서는 방송채널 <폭스뉴스>를 비롯한 유력 매체의 전파에 힘입어 음모론이 유럽에서보다 더 노골적으로 성행하고 있다. 하지만 유럽 사회는 부의 축재를 긍정적으로 인식하는 미국의 청교도적 시각에 그리 동조하지 않는다. 그 결과 유럽에서는 우경화가 은밀한 방식으로 진행되는 경향이 있다. 가령 사전에 서로 협의한 것도 아닐 텐데 각종 매체들이 같은 주에 줄줄이 비밀결사조직 프리메이슨에 관한 머리기사를 쏟아내는 것이다. 이 매체들은 '우리를 지배하는 프리메이슨'(2013년 1월 3일자 <르누벨옵세르바퇴르>), '올랑드와 그의 프리메이슨'(2013년 1월 7일자 <르포앵>)과 같은 표제를 이용해 은밀한 방식으로 음모론적 시각을 조장했다.(4)
'나만 잘 살면 된다'주의의 함정
잡지사 사장들은 이런 선정적인 표지 사진을 실은 것이 결코 장삿속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이런 사진들이 난무하는 것은 혹 경제위기로 인해 독자들과 똑같이 계급 추락의 위협에 처한 언론인들의 새로운 언론관을 반영이라도 하는 것인가? 저널리즘 비평이 지녀야 할 가장 기본적인 덕목은 바로 '비밀'과 '음모'를 밝혀내는 것이다. 하지만 관대함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낚시성 기사만 줄줄이 쏟아지는 오늘날, 대체 그런 비평의 덕목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도무지 이런 현상에 주의를 기울이거나 경각심을 가진 언론인이 아무도 없으니 말이다.
더욱이 여론조사기관(입소스-<르몽드>, 2013년 1월 25일)이 우파 성향의 자원자를 모집해 그들에게 보수를 지급하고 표본집단을 구성하는 경우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그것도 '백인에 대한 인종차별'(백인에 대한 인종차별이란 것이 정말 존재하는 것처럼)이나 이주민들의 '통합 노력'(결국 통합은 '노력'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따위를 묻기 위해서 말이다. 질문지는 교묘하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을 신뢰한다'는 문항 옆에 '타인(타인이란 대체 누구를 의미하는가?)을 경계하는 편'이라는 문항만 제시하고 다른 선택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다. 그런가 하면 응답자에게 '전처럼 내 집 같은 편안한 느낌으로 사는지'(내 집처럼 편안한 곳이 프랑스라는 것은 알겠는데, 대체 이전이라는 것은 무엇을 기준으로 하는 것인가?)를 대답하라고 요구한다. 이 설문조사들은 '프랑스에서 권위주의 가치가 지나치게 비판적으로 인식'되는 것은 아닌지 친절하게 묻는 듯하지만, 실상 동조의 답변을 교묘하게 유도하고 있다. 어떻게 전문가란 이들이 이렇게 명백한 방법상의 오류를 범할 수 있을까?
신자유주의 교리에 대한 숭배와 세속적이기 그지없는 상식을 바탕으로 형성된 수많은 고정관념이 에고이즘을 고양하며 정신의 우경화를 강화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시민들에게 정치 지도자들이 공익을 위해 봉사한다고 생각하길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정치인들에게 이타적 행동을 기대하는 것은 참으로 비상식적인 처사가 아닌가. 오랜 시간 공론장을 통해 '각자 자기를 위해 살라'는 가치관이 확산돼왔다. 특히 이런 주의·주장은 대중의 불신과 만나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흔히 서민은 쉽게 속아 넘어가지 않는 성향이 있다.(5) 그렇다고 그들의 불신을 잘못된 판단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실상 냉소주의는 기만적 성격을 지닌 공적 담론들이 흔히 사용하는 수법이다. 대개 그런 담론의 이면에는 자리, 표심, 돈, 석유 등을 둘러싼 은밀한 이권 투쟁이 감춰져 있다. 현재 언론매체에 자주 얼굴을 내비치는 관념론자들은 파시스트화를 조장하고 있다. 물론 그들이 조장하는 파시스트화는 아직까지 정신적 차원에 머물러 있긴 하다. '각자 자기를 위해 살라는 주의'가 대중의 결집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마냥 안심만 할 수 있을까?
*
글 / 알랭 가리구 Alain Garrigou 리샤르 부르스와 함께 <반여론조사 매뉴얼: 민주주의란 팔아치울 수 있는 게 아니다!>(라빌브륄 출판사·몽트뢰이수부아·2011)를 저술했다.
번역 / 허보미 jinougy@naver.com 서울대 불문학 석사 수료.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1) 당시 우경화는 ‘눈속임’일 수 있다. 질서를 옹호하는 가치관이 등장했음에도 “인본주의적 가치관이 쇠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에티엔 슈바이스구스, ‘우경화라는 눈속임’, <Revue française de science politique>, 제57권, 3~4호, 파리, 2007).
(2) Richard Hofstadter, <편집증적 스타일: 미국 강경우파와 공모이론>, 부랭 출판사, 파리, 2012. <르몽드 디플로마티크>가 2012년 9월호에서 ‘정치의 편집증적 스타일’이라는 제목으로 이 책을 소개한 바 있다.
(3) Jean-François Copé, <금기에서 자유로운 강경우파를 위한 선언>, 파야르 출판사, 파리, 2012.
(4) 온라인판 <리베라시옹>(2012년 2월 28일)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2009~2012년 프리메이슨을 표지 기사로 사용한 건수는 <렉스프레스>와 <르포앵>이 5건, <르누벨옵세르바퇴르>가 4건에 달했다.
(5) Richard Hoggart, <빈자의 문화>, 미뉘 출판사, 파리, 19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