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다른 골목에 선 남아공 사회

2013-03-11     사빈 세수

제이컵 주마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은 부패설에 연루되었음에도 지난해 12월 18일 아프리카민족회의(ANC) 의장에 재선됐다. 그러나 분열의 조짐은 곳곳에서 감지된다. 반아파르트헤이트 운동에 앞장섰던 맘펠라 람펠레가 2014년 대선을 겨냥하여 ‘아강’(Agang·건설하자)이라는 정당을 결성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2012년 8월 16일 일어난 마리카나 광산의 유혈 사태는 다문화사회인 남아공이 겪고 있는 위기의 단면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 중심가. 작업복 차림의 인부들이 공사장 비계가 설치된 보도 위에 드러누워 있다. 휴식 시간이다. 그들은 휴식 시간까지 바쳐가며 일에 몰두할 생각이 없다. 한 벽돌공이 "보수가 보잘것없다"고 말하며 씩 웃자 금니가 드러난다. 요즘 한 달에 1100유로(약 156만원) 정도면 그나마 괜찮은 편에 속하지만, 2010년 남아공 월드컵 전보다 팍팍해진 건 사실이다. 건설노조가 공사를 제때 끝낼 수 없을 거라고 으름장을 놓아 실질임금을 13~16%까지 올려놓던 시절이 있었다.

요즘에는 엄두도 못 낼 일이다. 2012년 8월 16일 요하네스버그 인근의 마리카나 백금 광산에서 파업을 일으킨 광부들 중 34명이 경찰의 발포로 숨진 이후 사회적 긴장은 극에 달해 있다.(1) 남아공 사람들에게는 상징적 사건이 아닐 수 없다. 1994년부터 집권한 아프리카민족회의(ANC) 다인종 민주정부의 경찰이 아파르트헤이트(인종분리) 시절과 똑같이 시위대에 발포한 것이다. 더구나 희생자들은 ANC의 전통적 표밭인 남아공의 빈민에 속하는 다수의 흑인 노동자다. 지난해 11월 말 남아공 국가기관에서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사하라 이남에서 유일하게 산업화에 성공한 남아공에서 인구의 절반 정도에 해당하는 2550만 명이 빈민층에 속한다. 이 중 62%가 흑인, 33%가 혼혈이다.

마리카나 사태는 과거의 샤프빌 학살을 연상시킨다. 남아공이 아직 아파르트헤이트 체제(1948~91) 아래 있던 1960년 3월 21일, 요하네스버그에서 60여km 떨어진 타운십(흑인 거주 지역)에서 시위를 벌이던 흑인들 중 69명이 경찰의 발포로 목숨을 잃었다. '비(非)백인'에게 강요되던 도시 '출입증'(Pass) 제도에 반대하는 시위였다. 이 소식을 들은 케이프타운 랑가 타운십의 흑인들이 들고일어나 관청 건물들을 불태웠다.

이번 사태 역시 비슷한 양상으로 불길이 번져가고 있다. 마리카나 학살 이후 광산·교통·농업 노동자들은 강력한 파업 투쟁에 나섰다. 서케이프주(州)의 농업노동자들은 최저임금 일당 7유로를 그 2배 수준인 15유로(약 2만1300원)로 인상해줄 것을 요구했다. 포도밭이 불타고 상점들이 약탈되고 경찰과의 충돌이 발생했다. 파업 참가자들을 해고하고 노사 간 대화를 거부한 결과로 빚어진 사태다. 지난해 11월에는 케이프타운에서 180km 떨어진 드도언스에서 시위 중이던 농업노동자들 중 2명이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의 봉기"

론민 광산에서는 광부들이 6주간 파업한 끝에 임금 인상 22%, 수당 190유로(약 27만 원)를 쟁취했다. 임금을 400유로에서 1200유로(57만 원→170만 원)로 3배까지 인상하려던 당초 목표는 이루지 못한 셈이다. 드도언스의 농업노동자들은 11월 남아공 노총(COSATU)이 뒤늦게 합류해 연대 시위 참여를 호소했음에도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모두 동일한 암에서 전이된 것이다." 케이프타운의 한 시멘트 회사 노조 대표 앤딜 나마즈의 말이다. 그는 ANC 당원이지만 환상을 버린 지 오래다. "마리카나 학살 이전에 이미 도사리던 문제들이 이 사건을 계기로 더욱 심각한 양상으로 치닫고 있을 뿐이다. 기다림에 지친 이들이 더 나은 미래를 쟁취하기 위해 들고일어난 것이다."

이처럼 끝없이 계속되는 사회적 분쟁은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의 유산이다. 1985년 궁지에 몰린 백인 정부는 COSATU 흑인 노동조합을 협상 상대로 인정했다. 넬슨 만델라는 수감 중이었고 ANC가 불법단체였던 당시, 노조 지도부는 광범위한 반체제 전선에 합류했다. 그리고 총파업을 통해 1985년부터 국제사회의 제재로 어려움을 겪던 남아공의 경제를 마비 상태에 이르게 했다.

오늘날 220만 조합원을 거느린 이 흑인 노총은 정부에 진정한 복지정책 실시와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 역시 권력을 구성하고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COSATU는 1990년부터 남아공 공산당, ANC와 함께 사회의 근본적 개혁을 위한 '혁명적' 3자동맹에 참여하고 있다. ANC는 당내 좌파인 공산주의자들과 노조 대표들에 대한 권력 배분을 통해 세력 견제에 나서고 있다. 그 결과 개각 때마다 몇 개의 장관직은 공산주의자들 차지가 되고, 당 전국집행위원회(NEC) 위원장직은 COSATU 출신에게 돌아간다. ANC의 자유주의적 경제정책에 대한 이들의 비판은 명분을 잃을 수밖에 없다.(2)

케이프타운에서 규모가 가장 큰 타운십 카옐리차의 기차역. 이른 아침부터 승차권을 사려는 사람들로 붐빈다. 도심까지 가는 편도 기차표의 가격은 8.5랜드(85유로센트, 약 1200원)다. 한 달 정기승차권은 10유로(약 1만4200원)다. 민간 경비회사 직원 평균 월급(200유로)의 5%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여성 승객들은 좌석에 기대어 부족한 잠을 보충한다. 과자, 음료, 양말, 귀고리 따위를 든 행상인들이 지나간다. 기차가 도착하자 많은 승객들이 케이프타운 중앙역 위로 올라간다. 버스터미널로 가기 위해서다. 승합택시들이 줄지어 단체로 승객들을 실어 나른다. 목적지는 그들의 일자리가 있는 교외의 백인 거주 지역이다. 이 택시들을 운영하는 민간 회사들은 여전히 허술한 대중교통망 덕분에 돈을 벌고 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 택시들은 자동차가 없는 남아공의 흑인을 부지런히 실어 나른다. 차가 출발하기 전 5랜드짜리 동전들이 승객들의 손을 거쳐 운전수나 조수에게 전달된다.

"이러다 바퀴가 빠져버리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폴로셔츠와 청바지 차림의 60대쯤 돼 보이는 시포 들라미니가 한숨을 쉰다. 택시가 아니라 남아공의 정치적 상황을 빗대어 한 말이다. 그는 자신을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에 맞서 싸운 무명의 영웅이라고 소개한다. 그는 ANC 군사조직의 일원으로, '생전에(in Our Lifetime) 변화를 쟁취하겠다'는 일념으로 젊음을 바쳐 싸웠다. 1980년대 남아공의 흑인들에게 '생전에'라는 말은 하나의 슬로건이었다. 1912년 ANC 설립 이후 투쟁하다 죽어간 이전 세대들을 잊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흑인 엘리트들의 부패'만 들라미니를 실망시키는 것은 아니다. 여기저기서 폭동을 일으키다보니 너무 흔해져서 사람들이 관심조차 갖지 않게 된 상황도 실망스럽기는 마찬가지다. 경찰 쪽 자료에 따르면, 2009~2012년 남아공에서는 매일 평균 3건의 폭동이 발생했다. 요하네스버그대학 사회학과 교수 피터 알렉잰더는 "2004~2009년에 비해 40% 증가한 수치"라고 지적한다.(3)

대규모 해고를 바라는 미국인 경영진

마리카나 사태의 발단은 지나친 불평등이었다. 사 쪽은 갱내 광부들의 임금은 그대로 둔 채 감독들의 임금만 올려줬다. 그뿐만이 아니다. 노조의 힘을 와해하기 위해 민간 소개업자를 통해 임시직을 고용하는 관행이 자리잡았다. COSATU 지도부는 이런 현실을 비판하면서도 뒤로는 눈을 감아줬다. ANC 내에 포진해 있는 친구들의 이익과 직결되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한 예로, 대통령 아들 두두잔 주마는 JIC 광산회사 사장이다.

조합원 수 31만 명을 자랑하는 남아공 최대 노조인 COSATU 산하 전국광산노조(NUM)는 마리카나 사태에 직면해 처음으로 사회적 분쟁의 주변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광산건설노조연합(ACMU)이라는 새로운 독립단체가 300% 임금 인상을 내세우며 투쟁의 선두에 선 것이다(현실성 없는 목표를 내세웠음에도 우물쭈물하는 NUM보다 강력한 동원력을 발휘했다. 지난해 8월 16일 학살이 벌어지기 전 이미 노조 간 충돌로 사망자 10명이 발생한 터였다).

광산업계에서 노사 간 대화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는 것도 상황을 악화시키는 요인이다. 마리카나 학살 이후에도 론민 광산 경영진은 최후통첩과 해고 위협만 반복하고 있다. 이들의 거친 대응 방식을 아파르트헤이트 시대의 후유증으로만 볼 수는 없다. "광산을 운영하는 대기업들은 사회 분쟁이 정치화해 ANC와 그 지도부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질 것을 두려워한다." 광산 장비를 수입해 파는 회사를 운영하는 인도 출신의 젊은 사업가 태븐 고벤더가 설명한다. "사실상 파업 노동자, 노조, ANC 모두 이번 사태에서 패배자다. 남아공의 인건비가 싸기 때문에 대기업들은 광부들을 고용한다. 그러나 마리카나 사태의 재현을 방지하기 위해 그들은 기계화를 서두르면서 차례로 광부들을 해고할 것이다."

난처한 입장에 처한 제이컵 주마 대통령은 사태 발생 뒤 며칠이 지나서야 현장을 방문했다. 그러나 광부들이 아니라 론민 광산의 경영진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주마 대통령의 정적인 ANC 청년동맹 지도자 줄리우스 말레마(31)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현장에 대한 영향력 강화에 나섰다. 그는 지난해 4월 '당규 위반'을 이유로 ANC에서 제명됐다. ANC에 실망한 평당원들을 대변해온 말레마는 이번에는 파업 노동자들을 지지했고 법정에 서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남아공 법정은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에서 제정된 반(反)소요법에 의거해 노동자들에게 오히려 살인 혐의를 덧씌웠다. 이 법 덕분에 치안 병력을 자극해 인명 피해를 초래했다는 구실로 단순 시위 가담자들에게도 살인죄를 적용할 수 있었다. 항의가 격렬해지자 당국은 광부 270명에 대한 기소를 취하하고 조사위원회를 설치했다. 말레마는 이 기회를 이용해 광산 국유화를 주장하고 국가권력, 흑인 부르주아지, 노조, 대자본의 유착관계를 고발했다(상자 기사 참조).

평자들은 ANC와 COSATU 중 어느 쪽이 먼저 사회적 압력에 붕괴될지 궁금해한다. 그러나 단순한 좌우 갈등을 뛰어넘는 복잡한 역학관계가 이들 조직의 분열을 막고 있다.

더미슨 고지는 이런 문제에 아무 관심도 없다. 그는 아파르트헤이트를 경험해보지 못한 세대에 속한다. 머리칼을 모두 밀어버리고 귀에는 가짜 다이아몬드 귀고리를 한 이 스무 살 젊은이의 얼굴에는 흉터가 있다. 그는 2014년 총선에서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할 마음이 전혀 없다. "우리의 자유는 법 문구에 불과하다. 선택지가 ANC뿐이라면 투표권을 행사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는 열여섯의 나이에 친구들과 작은 갱단을 만들어 가구점을 털다가 붙잡혀 4개월 징역을 살았다. 다시는 감옥에 발을 들여놓지 않겠다고 결심한 그는 다시 공부를 시작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케이프타운의 한 마케팅 학교에 입학했다. 학비는 주유소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다. 그는 사람들이 '살찐 고양이들'이라고 부르는 권력자에게 아무 기대도 하지 않는다. "주마 대통령은 자신의 고향 콰줄루나탈주 나칸디아에 2억4천만 랜드(약 326억 원)를 들여 궁전을 짓고 있다. 학교에서는 아이들이 교과서도 없이 공부하는 데 말이다!"

흑인 부르주아 '구치 혁명가들'

흑인 부르주아들은 타운십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산다. 부의 재분배는 이뤄지지 않는다. 그들의 사치스럽고 호화로운 생활은 타보 음베키 집권 기간(1999~2008)에 극에 달했다. 2000년대 남아공이 이룬 경제성장 덕분이다. 그러나 2009년 제이컵 주마가 집권한 이후부터 데즈먼드 투투 대주교(4)와 남아프리카 교회협의회는 '구치 혁명가들'(Gucci Revolutionaries)이라고 불리는 이들이 터무니없이 비싼 선글라스를 구입하는 것보다 '도덕적 타락' 현상이 훨씬 심각하다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관료들은 노골적으로 돈을 요구한다." 익명을 요구한 한 기업 변호사가 미소 띤 얼굴로 말한다. "성접대 얘기도 오간다. 일부다처제를 고수하는 대통령에 대한 얘기만 하는 게 아니다! 사방에 부패가 만연해 있다." 드비어스의 전 중역은 언론이 부패를 폭로하자 "세상에 공짜로 얻을 수 있는 건 없다"고 응수했다.

남아공에서는 빈민들의 봉기뿐 아니라 정치적 암살도 더 이상 대서특필감이 아니다. 콰줄루나탈, 림포포, 음푸말랑가에서는 뇌물을 많이 받는 요직이나 공공사업 수주 관련 직책을 노린 살인이 횡행한다. <뉴욕타임스> 기자 리디아 폴그린은 이 문제들을 들추다가 ANC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5)

폭력 사태가 빈발하면서 아프리카에서 모범으로 꼽히는 남아공의 민주주의가 위협받고 있다. 지난해 12월 마지막 전당대회 개최를 앞두고 자신의 후보를 당선시키려는 당원들의 싸움이 폭력 사태로 비화됐다. 동케이프주에서는 의자들이 날아다니고, 북서케이프에서는 주먹다짐이 오가고, 요하네스버그 인근 이스트랜드의 타운십에서 열린 ANC 회합에서는 총으로 무장한 갱까지 등장했다. 주마 대통령 지지자들은 ANC 의장 자리를 노리는 칼레마 모틀란테 부통령의 추종자들에 대한 폭력적 위협도 서슴지 않는다. 지난 몇 달간 ANC 당원 수가 급격히 늘어났다. 일각에서는 주마가 '유령 당원'을 이용해 청렴도 면에서뿐 아니라 여론조사 결과에서도 앞서던 모틀란테를 이길 수 있었다는 말까지 나온다.

1994년 최초로 민주적 선거가 개최된 이래 ANC는 전체 의석의 3분의 2를 차지하면서 단독으로 여당이자 야당 구실을 하고 있다. ANC에 맞설 만한 규모의 야당이 없는 탓이다. 과거 케이프타운 시장을 지냈고, 현재 서케이프주 총리인 61살의 백인 여성 헬렌 질리가 당수를 맡고 있는 민주연합(AD)이 그나마 야당 노릇을 한다. 그러나 지지층이 백인과 혼혈인들로 국한됐다는 게 한계다. 민주연합은 2009년 총선에서 16.6% 득표율을 기록해 전체 의석 400석 중에서 67석을 확보하는 데 그쳤다. 반면 ANC는 264석을 차지했다.

고질적인 후진 정치문화의 악순환

아파르트헤이트 체제하에서 경찰 특수부의 공작에 맞서 오랫동안 지하활동을 하면서 ANC는 특별한 정치문화를 지니게 됐다. 정치학자 윌리엄 구메데는 "핵심적 사안들은 공적 토론이 아니라 막후에서 결정된다"고 말했다. 어제의 적인 국민당의 아프리카너(Afrikaner·네덜란드계 백인 이민자)들은 정치 무대에서 퇴장했음에도 신성불가침 동맹은 여전히 건재한 셈이다. 따라서 내부의 분열을 외부로 드러내는 것은 언제나 터부시된다. 언론과 사이가 좋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당내 좌파가 배신자들을 고발할 때조차 완곡어법을 쓴다. 그러나 주마 대통령에 대해 가장 비판적 태도를 보이는 즈웰린지마 바비 COSATU 사무총장은 말을 가리지 않는다. 그는 트위터에서 현 정부의 '부패·유치함·악정'을 비판하면서 언어유희를 통해 ANC를 "아이들은 교과서도 없이 공부하는데 도둑질과 부패를 일삼는 참으로 한심한 당"이라고 조롱했다. 권력 상층부의 도덕불감증을 꼬집은 것이다. 그 뒤 그는 살해 위협까지 받았고, 신당 창당을 계획 중이라는 의심을 받았다.

집권당 ANC 내부에서 벌어지는 권력투쟁은 은밀하면서도 폭력적이다. 가령 음베키 전 대통령은 1990년대 자신의 라이벌인 시릴 라마포사를 몰아낸 뒤 주마 부통령을 해임했다. 그는 성폭행과 부패 혐의로 기소됐다. 주마는 자신에게 덧씌워진 혐의를- 신빙성이 있었음에도- 이미 모사꾼으로 알려진 음베키의 음모로 몰아붙이는 기지를 발휘해 광범위한 지지 세력을 규합하는 데 성공했다.

음베키는 영국에서 교육받은 기술관료이자 망명인사 출신으로, 대중에게서 유리된 채 비판을 수용하지 못한다는 평을 받았다. 반면 주마는 자신이 줄루족 출신임을 내세우며 콰줄루나탈주의 (대도시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몇몇 촌장들처럼 일부다처제를 고수했다. 지지자들은 그를 '진짜 아프리카인', 학교가 아니라 투쟁 속에서 성장한 '정치적 거인'으로 소개했다. 2007년 12월 폴로크웨인 전당대회에서 주마가 승리한 이후 ANC는 심각한 분열의 길로 접어들었다. 첫 번째 사건은 2008년 10월에 발생했다. 음베키의 측근으로 장관직을 지낸 테로 레코타가 국민회의(COPE)를 창당한 것이다. ANC는 그를 '배신자'라고 비난했다. 국민회의는 2009년 총선에서 7.42%를 득표했다.

주마 대통령은 마리카나 학살 이후 "남아공에 리더십의 위기는 없다"고 반복해서 강조한다. 그는 여론의 비판에 직면해 부정과 자기방어에 급급하다. 그는 <기관총을 가져오라>(Umshini Wam), <우리는 루툴리를 따르리>(Somlandela Luthuli·루툴리는 ANC 역대 의장 중 주마처럼 유일한 줄루족 출신) 등 아파르트헤이트 반대 투쟁 가요들을 방패막이로 삼거나 통계 수치를 내세운다. 그러나 집을 몇 채 지었는지, 수도와 전기를 얼마나 연결해주었는지 떠벌리면서, 일자리가 얼마나 늘었는지, 흑인 젊은이 몇 명이 대학을 마쳤는지에 대해서는 입을 다문다.

현재 남아공 경제활동 인구의 25.5%가 실업자다. 사회 불평등 개선은 매우 더디다. 경제학자들은 2000년대 초 등장해 '검은 다이아몬드'라고 불리는 흑인 중산계급에 희망을 걸기도 했지만, 이들이 산업용 가짜 다이아몬드(Zircon)에 불과하다고 비판하는 사람도 많다. 아프리카너 좌파 경제학자 샘피 테어블랑슈는 "ANC는 200만 명의 흑인 엘리트, 600만 명의 중산층을 양산했다. 이들을 합친 800만 명과 2천만~2500만 명의 빈민층 사이의 간극은 위험한 수준까지 벌어졌다."

아파르트헤이트 체제가 철폐되고 20년이 흘렀지만 백인은 여전히 흑인보다 소득이 높다. 2011년 통계 자료에 따르면, 백인의 연평균 수입은 3만6500유로(약 5200만 원)로 흑인 가계의 평균 6천 유로(약 850만 원)보다 6배나 많다. 남아공에는 국가가 정한 최저임금이 없다. 가사도우미, 농업, 청소, 민간 경비회사, 택시 운전, 유통 등 정부가 취약하다고 규정한 분야들에 각각 다른 기준이 적용된다. 이 분야의 노동자들은 노조가 제대로 조직돼 있지 않다보니 고용주가 원하는 대로 할 수밖에 없다. 가령 가사도우미의 최저임금은 2011년 12월 주당 27시간 이상 일하는 경우 월 1625.7랜드(약 22만7천 원), 27시간 이하인 경우 월 1152.32랜드(약 16만3천 원)로 인상된 이후 지금까지 그대로다.

지난해 11월 27일 정부 발표 통계에 따르면, 빈민층 가구의 54.7%가 가족수당·노령연금 등의 사회보조금만으로 생계를 꾸려간다. 같은 조사에 따르면, 남아공 사람 4명 중 1명은 제때 끼니를 때우지 못한다. ANC의 여러 장관들은 실업 여부와 무관하게 자격을 갖춘 성인에게 제공되는 일종의 최저소득인 기본소득지원(BIG·Basic Income Grant)에 반대했다. 그 돈으로 술과 복권 따위를 살 것이라는 게 이유다. BIG은 최초로 제안된 지 10년이 넘도록 계획 상태에 머물러 있다.

남아공의 절망은 곳곳에서 눈에 띈다. 카옐리차에서는 요즘 어딜 가도 가스펠 부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울적함을 달래주는 건 노래뿐만이 아니다. 대마초, 크리스털 메탐피타민도 타운십 전체로 확산되고 있다. 에이즈 환자들은 2003년부터 'ARV클리닉'에서 무료로 나눠주는 항레트로바이러스제를 되팔아 음식이나 술을 사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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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빈 세수 Sabine Cessou  언론인

번역 / 정기헌 guyheony@gmail.com 파리8대학 철학과 석사 수료.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주요 역서로 <프란츠의 레퀴엠> 등이 있다.

(1) 그레그 마리노비치, ‘아파르트헤이트 시대로 돌아간 대학살’,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2년 10월호.
(2) Achille Mbembe, ‘주마 대통령의 룸펜-급진주의’, <Manière de voir>, n°108, ‘Indispensable Afrique’, 2009년 12월~2010년 1월.
(3) Peter Alexander, ‘A massive rebellion of the poor’, <Mail and Guardian>, 요하네스버그, 2012년 4월 13일.
(4) 케이프타운의 최초 흑인 대주교 데즈먼드 투투는 아파르트헤이트 반대 운동에 대한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1996년 구체제하에서 자행된 범죄행위 규명을 위한 진실과 화해 위원회 위원장에 임명됐다.
(5) ‘In South Africa, Lethal Battels for Even Smallest of Political Posts’, <New York Times>, 2012년 12월 1일.
(6) André Clément, ‘남아공, 드디어 에이즈에 맞서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2년 1월호. 


합법화된 부패 시스템

타보 음베키의 집권 이래 재계와 흑인 지배계급 사이의 유착은 공공연한 일이 되었다. 제이컵 주마 대통령에 의해 후보로 지명된 뒤 지난해 12월 아프리카민족회의(ANC) 부의장으로 선출된 시릴 라마포사는 이 유착관계의 화신이라 할 만하다. 마리카나 학살 전날, 라마포사는 론민 경영진에게 보낸 전자우편에서 파업 노동자들을 범죄자 취급하면서 그들에게 굴복하지 말 것을 권고했다.

남아공 맥도널드 소유주, 남아공 통신회사 MTN 회장 등의 직함을 가진 라마포사는 과거 ANC 사무총장(1991~97), 전국광산노조(NUM) 사무총장(1982~91)을 역임했다. 1991~93년 민주주의 이행 과정에 주요 협상 주체로 참여한 그는, 넬슨 만델라의 후계 자리를 다투는 과정에서 타보 음베키에게 배척당했다. 1994년 라마포사는 요하네스버그 주식시장에 최초로 상장된 흑인 회사 뉴아프리카투자회사(NAIL) 사장으로 재계에 입문해 '새로운' 남아공에서 최초의 흑인 백만장자가 되었다. 현재는 광업·농식품업·보험·부동산 등의 분야에 진출한 샨두카 그룹을 소유하고 있다.

라마포사의 사례를 보면 남아공 정계에서 일가를 이룬다는 것의 의미를 알 수 있다. 법무부 장관 제프 라데베, 아프리칸레인보우미네랄(ARM) 사장인 광업계 거물 파트리스 모체페는 라마포사의 매형들이다. 모체페는 ANC가 추진한 흑인경제육성정책(BEE)의 덕을 많이 봤다. ANC는 이 정책에 대해 '역사적 소외계층'에게 이익을 되돌려준다는 식의 미사여구를 동원하지만 사실상 이 '급성장하는 흑인 경제'는 권력에 유착된 부르주아지의 재산만 불려주고 있다. 영상프로덕션 엔데몰의 남아공 지사를 경영하는 음베키 전 대통령의 동생 모엘레치 음베키는 심지어 '합법화된 부패'라는 표현까지 쓰며 현 체제를 비판한다. 그는 BEE의 폐해를 지적한다. 백인 소유의 대기업에서 '형식적으로' 능력이 부족한 흑인 간부들을 승진시켜주고 엄청난 연봉을 제공하는 관행도 그중 하나다. 억울함을 느낀 일부 백인 간부들은 오스트레일리아, 영국, 캐나다 등으로의 이민을 고려하고 있다.

2002년 광산업에 BEE 헌장이 채택되면서 전체 광산 소유의 26%가 흑인에게 넘어갔다. 그 과정에서 광산회사 요직의 상당수가 ANC의 거물급 정치인들에게 돌아갔다. 가령 전 북케이프 주지사 만 디피코는 현재 드비어스 그룹의 부회장이다. BEE는 아파르트헤이트 반대 투쟁으로 명성을 얻고 권력의 중심부로 진출한 이들에게도 혜택을 나눠주었다. 음벨라판다 홀딩스 사장 토쿄 세콸레는 2009년 주택부 장관에 임명됐다.

라마포사의 매형 파트리스 모체페는 2012년 <포브스> 선정 남아공 부자 순위 4위를 차지했다(재산 27억 달러). 그는 자신의 재산을 공공연히 뽐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한편으로는 남아공 노총(COSATU)에 가장 많은 지원금을 제공해왔다. 2009년 이후 누적 지원금만 최소 275만 랜드(약 3억3천만 원)가 넘는다. 역으로 COSATU는 ANC와 공산당에 일부 자금을 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