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라크는 어떻게 되었나

Dossier 이라크전쟁, 그후 10년

2013-03-11     페테르 하를링

최근 공개된 문서에서 확인되는 것처럼 미국의 이라크 침략은 석유를 통제하는 것이 목표였지만, 그것은 결국 완전한 실패로 판명이 났다. 전쟁은 수십만 명에 달하는 희생자를 냈고 이 나라를 불안정한 상황에 빠트렸다. 바그다드는 일견 완전히 정상을 되찾은 것처럼 보여 놀라움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실제로 이 도시에서는 정치적·종파적 긴장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누군가에게 털어놓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만큼 비극적인 사연 하나 안 가진 사람이 없을 정도로 수십만 명의 생명을 앗아간 무시무시한 폭력을 겪고 난 뒤에 이라크는 다시 정상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 나라는 여전히 확실한 방향을 잡지 못하고, 그 바람에 이라크 사람들은 아직까지 미래를 위한 계획을 세우지 못하고 있다. "지난 10년에 대해 어떻게 얘기할 것인가?" 한 소설가는 이라크의 지난 10년 세월에 대해 말하며 이렇게 자문한다. "문제는 출발점이 아니라 도착점이다. 알제리전쟁의 역사에 대해 얘기하려면 그것이 끝나기를 기다려야만 했다. 그런데 이라크에서는 그 끝을 알 수 없는 사건이 지금도 계속 일어나고 있다." 이 작가가 지금 쓰는 책의 구성을 살펴보면, 각 장이 특정한 연도의 사건들과 관련시켜가며 이야기를 설정하기 때문에 이야기는 긴박감을 끝까지 유지하는 어떤 정치체제에 종속된다.

미국이 침공해 사담 후세인 체제를 붕괴시킨 뒤 10년이 지났지만 이라크는 여전히 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바그다드에서는 이같은 사실을 깨닫기 쉽지 않다. 유혈테러(이 유혈테러가 없었다면 아마 이 나라는 언론에 등장하지도 않았을 것이다)는 부비트랩 폭발물이 장착된 자동차와 자살폭탄 공격, 그리고 온갖 종류의 폭탄을 사용해 점령군과 종파민병대에 저항하던 몇 년 전보다 훨씬 줄어들었다.

검문소와 콘크리트 벽이 급속히 증가하면서 악몽이나 다름없던 교통 상황도 많이 개선됐다. 특히 2006년 폭력 사태를 피해 쿠르디스탄이나 국경 밖으로 몸을 피했던 이라크인 중 많은 수가 다시 돌아왔다. 미국에 '협력했던' 사람들도 사회에서 정상적 위치를 되찾았다. 물가는 비싸지만, 하늘이 내린 선물이랄 수 있는 석유의 혜택을 새로이 받게 된 일부 이라크인들은 미친 듯이 소비에 열중한다. 그래서 주요 인사들이 이 상황에 익숙해진 사람들의 무관심과 마지막으로 갈등을 벌이는 듯한 정계의 막후보다는 상점가가 더 활기를 띠는 듯 보인다.

누리 알말리키 이라크 총리가 이 나라의 실력자로 인정받음에 따라 그를 비방하는 사람도 점점 더 늘어난다. 석유 수입의 분배라든지 분쟁 지역의 귀속 같은 문제를 놓고 이 나라의 북동부를 지배하는 쿠르드족 지도부에 강경한 태도를 취한 것은,(1) 그가 아랍 국민이 누리는 이익의 옹호자로, 더 일반적으로는 민족적 일체감의 옹호자로 자리잡는 결과를 낳음으로써 시아파와 수니파를 모두 포함하는 아랍인 국민의 지지를 끌어내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직위를 인종과 종교별로 배분한다는 원칙에 바탕을 둔 정치체제에서 원래는 시아파가 맡도록 된 총리서리직에 임명된 수니파 라피 알이사위 같은 정치인들을 제거하기 위해 '테러리즘'의 논거를 남용했다. 이후 수많은 수니파 군중이 동원돼 그에게 반대하는 격렬한 시위를 벌였고, 시위 횟수가 늘어나자 알말리키가 임명한 정치인들은 어쩔 수 없이 그에게서 거리를 둬야만 했다.

그로 인해 2006∼2008년 맹위를 떨친 종교 간 폭력의 충격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이 사회에서는 시아파의 자기정체성과 관련한 긴장이 거의 기계적으로 분출됐다. 그렇다고 해서 알말리키가 다원적 시아파(2)의 반경 속에 있는 지지자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의 개인 권력은 꼭 연통관처럼 경쟁자들의 영향력을 줄임으로써 커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알말리키 총리는 놀라울 정도로 고립돼 있다. 쿠르드족 앞에서는 약한 모습을 보이고, 다시 종파의 영향을 받게 되었으며, 동시에 그를 지지하던 시아파(그는 민족주의라는 카드를 활용해서 시아파로부터 거리를 두려 애썼다)도 그다지 믿을 수 없다. 그렇지만 그에게는 아직 패가 남아 있다. 그는 국가의 자원을 통제하고 있으며, 여러 종파와 민족으로 이뤄진 그의 반대자들은 힘을 합쳐 후계자를 지명할 만한 능력이 없다. 이상하게도 미국과 이란은 이 나라가 안정돼야 한다는 데 한목소리를 낸다(미국인들은 이라크에서 맛본 실패를 잊어버리고 싶어 하며, 이란인들은 시리아에서 더 큰 손실을 입을까봐 걱정한다). 어쩌면 그 어떤 요소보다 더 견고하게 정치체제를 구성하고 있는 시니컬한 기회주의의 법칙이 여전히 존재한다. 그리고 국민이 몹시 지친 상태라서 동원돼 시위를 벌일 여력이 없을 수도 있다.

"10년 만에 이라크는 미국의 패러디가 돼버렸다"

반대로, 대결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수니파 세계에 욕구불만이 팽배해 있고, 종파의 집중 현상이 다시 나타나고 있으며, 치안을 담당하는 기관은 실제적·도덕적 결함이 있어서 폭동을 막을 수도 없고 국가를 대표하는 합법성을 갖출 수도 없기 때문이다. 정치적 공백기가 찾아와 알말리키가 누구를 후계자로 선출할지 합의하지 못한 상태에서 총리직을 더 이상 수행하지 못하거나, 아니면 타의에 의해 총리직을 그만둬야 하는 시나리오가 실현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정치체제의 본질 역시 정의하기가 불가능하다. 총리는 그의 반대자들이 권위적이라고 비난하는 논리를 적용하고 있는데, 단순한 비자 신청이 그의 사무실을 경유할 수 있을 정도로 행정권을 집중시키기 때문이다. 그의 남성적인 구세주 스타일은 이라크인들이 여전히 민감하게 반응하는 오랜 전통에 뿌리박고 있다. 그의 책임하에 이뤄지는 인권침해는 구체제의 끔찍한 통사론에서 빌려쓰는 문법을 반복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지금 단단히 뿌리를 박아 독재를 하겠다는 일체의 야망을 거의 헛된 것으로 만드는 다원주의에 맞서고 있다.

알말리키의 권력은 진정한 의회주의 출현에도 반대하며, 끊임없는 갈등 분위기에서 원활한 자원과 인맥 재분배의 토대로 작용하는 정치적 게임의 규칙이 분명하게 정해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상당히 의지하고 있다. 아델 압둘 마흐디 전 대통령은 이렇게 말한다. "어느 한 종파나 정당, 혹은 체제가 지배하는 체제는 더 이상 상상할 수 없다. 수니파는 이미 그런 시도를 했고 시아파는 그렇게 하려고 하겠지만, 그런 일이 실현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 단계에서는 탈종교화된 시민권에 토대를 둔 체제에도 기대를 걸 수 없다. 현 단계에서는 다원주의와 지방분권화, 나아가 연방주의가 필연적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의회 체제가 필요하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어떤 별도의 체제 속에 있지 않다. 제도는 제대로 기능하지 않고, 헌법은 실제로 적용되지 않는다."

이런 상황은 미국이 이라크에 남긴 유산에 큰 영향을 미친 두 차원 중 하나다. 부차적 책임이 따르지 않는 '외과적 타격'으로 해석되는 침략과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원했던 조기 철군(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이 투입한 병력을 최대한 빨리 빼내기 위한) 사이의 몇 년 동안 사람들은 잘해봤자 엉성하다는 소리밖에 들을 수 없을 정치공학을 목격했다. 이제 원죄로 넘어가보자. 구체제 조직은 불법화돼 완전히 철폐됐고, 정치체제는 종파적 개념을 가지게 되었으며, 사회로부터 분리돼 망명한 정치인들의 위치가 예외적으로 격상됐다. 또한 수니파를 배제한 채 이뤄진 시아파와 쿠르드족 간 합의가 막후 협상에 반영됐고, 연이어 선거가 실시되면서 수니파가 주변화됐다.

이 모든 오류는 서서히 수정될 수도 있었지만, 미국은 그 과정을 생략해버리는 잘못을 저질렀다. 그들의 철군은 앞으로 오랫동안 이라크를 사로잡게 될 온갖 문제(헌법 개정, 분쟁 지역 할당, 자원 분배, 중앙권력과 지방권력의 관계, 총리의 특권, 견제세력의 제도화, 의회의 내부적 기능화, 처벌기관 구성 등)에 대해 아무 합의 없이, 즉 그들 스스로 정해놓은 목적과 반대로 이루어졌다. 정치적 위기가 찾아올 때마다 모든 것을 협상해야 한다. 관련 인물들은 이처럼 불투명한 상황을 마음속에 완전히 담아두고 있을 뿐이다. 알말리키의 한 측근은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우리가 겪는 이 혼란은 비정상적 상황의 정상적 표현이랄 수 있다. 우리는 나름의 이행 절차를 계속해나가고 있다."

미국이 남긴 두 번째 유산은 이라크인들이 그것에 잠정적으로 얽매여 있는 허술하고 불완전한 자기정체성 구조와 관련돼 있다. 초보적인 사회 관점을 투영하고 바아시즘(아랍권의 사회주의 정당 바트당의 이론)과 '사담주의', 테러리즘, 종파주의, 혹은 부족주의같이 조악한 개념을 이라크 사람들에게 갖다 붙이고, 이처럼 상투적인 생각을 토대로 정치적 구조물을 쌓아올림으로써 미국은 이라크를 자신의 패러디로 만들어놓았다.(3) 이같은 현상은 비록 미국의 침공이 결코 이라크를 엄격한 의미에서의 '식민지로 만들겠다'는 목적을 가지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식민지 상상계가 현실화된 것 같은 효과를 발휘한다.

점령군은 수니파 교도 모두가 사담 후세인을 지지하는 것처럼 그들을 다룸으로써 그들이 결집해 자신에게 저항하도록 만들었다. 또한 수니파 교도를 정치체제에서 소외시킴으로써 그들 역시 고통받던 시절을 그리워하도록 만들었다. 미국인들은 시아파 교도들이 분노를 표출하는 현장에서 그들을 '좋은 시아파'와 '나쁜 시아파'로 나누려 했고, 부당하게도 '테헤란의 앞잡이'라는 비난을 받은 이른바 '사드리스트'(4) 프롤레타리아 운동을 멀리함으로써 단순한 계급 간 대립을 더 악화시켰다. 쿠르드족에 대해서는 원래부터 동맹자라고 생각해 분쟁 지역에서 그들의 자율화를 강화하고 야심을 키워주었다.

이라크인들은 부분적으로 미국인들이 만들어 남겨놓고 간 그들 자신의 이미지에 여전히 매여 있다. 실제 가장 공공연하게 드러나는 자기정체성은 흔히 과장돼 있다. 모든 이슬람 교도는 모발 스타일(짧거나 긴 턱수염, 있거나 없는 콧수염, 박박 밀거나 그렇지 않은 머리털)로 자신이 어느 종파에 속해 있는지 분명히 보여준다. 군인과 경찰은 그들의 '파트너'로부터 외모에 대한 관심을 물려받았고, 이 사실은 특히 반드시 발목에 차는 무릎보호대에 의해 이라크식으로 표현된다. 바그다드의 대부분 거리에서는 정체성을 알리는 수많은 표지('순교자들'의 초상화, 깃발, 벽의 낙서)들이 자랑스럽게 내걸리는데, 이것들은 지금은 똑같아진 종교공동체의 색깔을 분명하게 나타낸다. 국가적 상징이 더 특정주의적 상징에 가려 보이지 않는 나라에서는 국가기관이 불행히도 이런 현상에서 예외가 되지 못한다. 그리하여 시아파의 단기들이 수도인 바그다드에 있는 대부분의 검문 바리케이드 위에서 나부낀다.

고정관념만 강화하는 정체성 주장들

사람들이 하는 말에는 2003년 이전만 해도 이라크 사회에 존재했으나 공적 공간에선 표출되지 않던 종파주의가 외향화한 흔적이 배어 있다. 상대 종파에 대한 편견이 이제는 공개적으로 표현된다. 옛날에는 사람들이 동포애에 관한 얘기를 예의를 갖춰 끝도 없이 계속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우연히 만나 얘기를 나누게 된 어떤 사람은 겨우 몇 분도 지나지 않아 가면을 벗어던지더니 바아시스트들과 알카에다 멤버, 잠입한 비밀요원들이 모여 이라크 서부 지역에서 시위를 벌이는 거라고 비난하는가 하면 "각 시대는 그 시대의 인간을 가지고 있으며, 이제는 우리 시아파가 지배해야 하는 시대다"라고 선언한다.

야당의 깃발과 노래라고 해서 그와 다른 건 아니다. 그것들은 초기에 구체제와 지하드 문화, 종파의 복수 정신과 연관된 지시 대상들을 동원했기 때문이다. 흔히 이 목록은 신앙고백보다는 아무런 동기도 없는 도발에 가깝지만, 그거야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이쪽의 정체성 표지나 저쪽의 정체성 표지나 모두 그들 각자의 고정관념을 확인하고 강화할 뿐인데 말이다.

그렇기는 해도 에피날 판화들로 가득 찬 공공 공간에는 이라크 사람들의 정체성이 얽혀 있다는 사실을 환기시키는 것이 엄청나게 많다. 매일 밤 모여 이따금 종파적인 대화를 나누는 젊은이들이 그 경우다. 수니파와 시아파, 쿠르드족으로 구성된 이들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2006년 폭력 사태 때 시아파들만 모여 사는 동네로 몸을 피해야만 했던 한 사진작가는 그 어느 때보다 더 무신론자로 남아 있다. 한 시아파 의사는 같은 신앙을 가진 어떤 민병대원에게 당해야만 했던 고난에 대해 이야기하며, 그의 수니파 동료는 알카에다가 통제하는 간선도로를 이용했다가 겪은 위험을 상기한다. 어느 경우에는 사회계급의 논리가 종교공동체의 반응을 완전히 넘어서며, 서로 다른 종파에 속하는 남녀의 결혼 관례가 아직까지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주문에 가까운 말과 실제적 관례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의 화신이라고 할 수 있는 극단적 수니파 사업가 한 사람은 시위가 극도로 종파적이고 폭력적이어야 한다고 촉구하지만, 텔레비전 뉴스 시간에 그것을 지켜보는 수고는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지속적인 우의는 흥미로운 상호 접근을 가능케 한다. 알말리키를 지지하는 온건파 이슬람 교도가 된 한 지식인은 공산당 본부로 옛 동지들을 찾아가서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럽게 기도를 올릴 것이다.

요컨대 수많은 요인이 나타나 극도로 과장된 정체성을 제거할 수 있는 것이다. 이같은 조정이 더욱 강력하게 표현되려면 어느 정도의 시간과 안정, 이완이 필요하다. '암울한 나날들'이나 '종파적 사건들'의 유령은, 즉 완곡어법을 통해 몰아내려고 하는 은밀한 폭력의 유령은 여전히 이 도시 위를 떠돌아다니고 있다. 친숙하고 안심되고 '보강된' 장소들과 이제는 돌아가기 두려운 불안한 구역의 지도가 각자의 마음속에 새겨진다.

지금은 조용한 어느 동네의 주민들은 더 이상 거기 오지도 않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역시 진정된 다른 지역에 그들의 두려움을 투영하는 바람에 자기 동네가 위험한 장소로 널리 알려졌다는 사실에 놀라워한다. 이같은 차이와 몰이해는 정치적 수준에서도 발견된다. 왜냐하면 반대편 진영에 속한 지방으로 이동하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차이와 몰이해는 타인에 대한 두려움과 정체성의 심리적 긴장, 그리고 공동체 이익의 보호 목록을 결집하는 정치게임의 수단이자 동기다.

이라크인들은 실제적인 정상화가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다리면서 정상적인 것을 만들어나가고 있으며, 지나치게 섬세한 정치체제와 급작스럽게 변화하는 사회, 조직을 상실한 도시, 수많은 약탈 형태에 의해 복잡해진 경제의 미로에서 놀랄 만큼 방향을 잘 잡고 있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주택이 비정상적 체제 안에서 세 종류의 전원으로 전기를 공급받고 있다. 우선 정부의 회로가 있어서 하루에 서너 시간씩 전기를 사용하고, 두 번째는 그 구역의 개인 발전기가 있으며, 마지막으로 자주 일어나는 고장에 대비하기 위한 소형 모터가 있다. 검문소에서의 부패(때로는 그 최종 목표가 다름 아닌 돈의 강탈에 불과하다)는 이 풍경 속으로 들어왔다.

파열과 몰상식에 익숙해진 이라크에서 이 나라 특유의 어휘집은 새로운 것을 설명하고 부조리한 것을 누그러뜨리는 데 필요한 모든 단어(예를 들어 번역이 불가능한 기본어 '하와심'(Hawasim)이 있는데, 2003년 사담의 선전 활동에서 유래한 이 단어는 원래 '결정적 특성'의 개념을 표현했으나 이후 주변의 무질서로 가능해진 수많은 불법행위를 묘사한다)로 인해 계속 풍부해지고 있다. 유머 역시 이 어휘집의 일부다. 이같은 창의성에도 불구하고 이라크인들이 어느 때보다 더욱 애착을 보이는 오래된 지표들은 여전히 저항한다. 잘하는 제과점 주소는 바뀌지 않았고, 유명한 카페는 유행을 타지 않는다는 사실이 증명됐다. 마스구프식 생선구이의 전통은 강박에 가까워졌다.

"사담은 혼자 해먹었지만, 지금은 해먹는 자가 너무 많다"

보는 사람을 더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은, 상황을 변화시키려고 하기보다 그것에 적응하는 정치계급의 태도다. 새로운 체제는 꼭 옛 체제의 옷으로 슬그머니 갈아입은 것처럼 보였다. 책임자들은 그들이 끝장내려고 했던 시대가 끝나자마자 바로 다음날에 전임자들의 호화 주택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불법으로 점유하고 있다. 바그다드에서는 지난 10년 동안 시청 건물과 공항 도로, 몇 개의 자동차 고가도로를 제외하고는 지상 시설물이 거의 건설되지 않았다. 사거리에서 근무하는 경찰들을 보호한다고 알려진 스탠드에는 '시청의 선물'이라는 표지판이 붙었는데, 후세인 같은 인물의 후한 인심을 상기시키는 논리가 적용된 것이었다. 공공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봉급은 여전히 충분치 않아서 그들이 합법적이든 아니든 추가 수입을 찾도록 부추긴다. 심각한 수준의 부패는 일단 용서되지만, 문서화됐다가 필요할 때 압력을 가하는 수단으로 이용된다. 출세제일주의와 족벌주의, 무능력이 국가기관들을 부패시키고 있다.

바그다드 도심에 있는 공화궁(미국 점령군이 신경통치료센터로 개조하면서 '환경보호구역'이 된)은 새로운 질서가 가질 수 있는 최악의 모습을 보여준다. 거대한 안전구역이라고 할 수 있는 이 공화궁은 독점적 정치의 장이자 특권의 공간이며, 사회의 나머지 부분에서 분리되기 위해 가능한 일을 하는 세계다.

온갖 종류의 방문자 카드가 발달해 새로운 지도층과 위계화된 사회적 지위의 범위가 정해졌다. 환경보호구역을 통과하는 카라다∼만수르 간선도로가 폐쇄되는 바람에 일반인들은 가까운 길을 두고 멀리 돌아가야만 한다. 이 도로를 다시 개통시키려면 재정비가 필요하고 그건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만, 문제는 다른 데 있다. 환경보호구역은 그 누구에 대해서도 설명하려 들지 않는 계급의 신성한 특권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많은 이라크인들에게 구체제의 견딜 수 없는 현실이었던 것을 상기시킨다. 이라크인들은 옛날에 쓰던 문구들을 다시 끄집어내서 비난을 퍼붓는다. 비교하는 것은 터부가 아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결코 뒤로 물러나지 않을 사람들도 그건 마찬가지다. '이제는 우리 차례다'라고 주장했던 그 사람도 이들 중 한 명이다. "후세인은 저 혼자 해처먹었다. 문제는 지금은 권력을 차지한 자들의 수가 많고 그들의 허기가 충족될 줄 모른다는 사실이다."

결국 고통스런 문제 하나가 제기된다. "이라크가 또다시 지난 10년간 고통을 겪은 게 결국은 다 헛수고였단 말인가?" 물론 궁지에서 벗어나려면 체제가 몰락해야만 했다. 그리고 카드 재분배의 한 형태가 도입됐다. 장교들이 살던 야르무크 구역은 버려진 반면, 옛날에는 초라했던 하이알자와데인 구역에는 어린아이들을 위한 공원과 심지어 테니스장(믿을 수 없는 일이다!)까지 세워졌다. 하지만 공 몇 개 주고받기 위해 혹은 국가기관에 자리 몇 개 마련하려고 얼마나 큰 대가를 치렀단 말인가! 이민이나 개인적 부의 축적은 여전히 집단적 야망을 정의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는 사회의 유일한 전망으로 남아 있다. 그 현재가 너무 오랫동안 계속되는 일련의 급격한 변화 속에 포함되는 이 나라에서 새로운 지도층은 이 상황을 만든 장본인이라기보다는 그것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구체제에 향수를 느끼는 사람들의 기억력은 점점 더 떨어진다. 예를 들어 그들은 사담 후세인의 타락한 아들인 우다이 사담이 이라크 사람들이 자주 찾는 휴양지에서 몰이꾼을 고용해 명문가 출신 여성들을 성폭행했지만,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않는다. 적극적으로 나서서 이 사건을 처리해야 했지만, 사담 후세인과 그의 측근들은 그럴 수단도 의지도 없었다.

아직은 모든 것에 기대를 걸어야만 한다. 모든 것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라크는 여전히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최소한 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물론 부패로 인해 전혀 안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이 나라에는 석유가 풍부하다. 국가기관들이 충복과 친구, 사촌들의 배 불리는 것을 그만두고 다시금 역량을 갖춘다면 두뇌 유출의 흐름은 언젠가 바뀔 수 있다. 이제 이라크는 과도적 상태로 지속되는 불확실한 정치체제로 인한 새로운 난관에서 벗어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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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테르 하를링 Peter Harling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특파원. 학자. 1998년에서 2004년까지 바그다드에서 살았다.

번역 / 이재형 전문번역가. 한국외국어대 불문학 박사과정 수료. 역서로 <간디와 마틴 루서 킹에게서 배우는 비폭력> <프로이트 평전> 등이 있다.

(1) 아랍족과 쿠르드족을 포함해 여러 종파의 주민들이 사는 구역은 바그다드 정부와 자율적인 이라크령 쿠르디스탄 지방정부가 벌일 수도 있는 잠재적 갈등의 대상이다. 갈등은 키르쿠크의 지위와 문제되는 영토의 땅속에 묻힌 석유자원에서 비롯된다.
(2) ‘이라크 시아파 교도들의 외모에서 나타나는 통일성’,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6년 9월호.
(3) 페테르 하를링, ‘이라크 분쟁의 역학’, <크리티크 앵테르나시오날>, 파리, n°34, pp.29∼43, 2007년 1월.
(4) 사드리즘은 1990년대에 시아파 체제가 방치한 빈민층의 대표자 노릇을 했던 민중주의적 종교지도자 모하마드 사데크 알사드르를 중심으로 형성된 경향이다. 그는 체제에 용기 있게 맞서다가 1999년 살해됐다. 아들 마크타다가 그의 뒤를 이으려고 2003년부터 애쓰고 있다.


CNN, 멀고 먼 전선

1991년 2월 이냐시오 라모네는 이른바 'CNN 시스템'을 둘러싼 환상을 분석한다. 그는 기자들이 전선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직접 수집한 정보도 없이 분쟁 상황을 보도한다고 비판한다.

걸프전에서 검열 관행은 이제 공공연한 규칙이 되었다. 프랑스군은 1944년의 행정명령을 근거로 기자들에게 '전장 접근'을 금지했다. 프랑스 보도 채널 편집장들은 전장 촬영은 군사영화언론학교(ECPA) 촬영기사가 맡고 방송을 타기 전 제르마노스 장군이 이끄는 군사공보국(Sirpa)에 심의를 받도록 하는 내용에 합의했다.

미국의 펜타곤이 기자들에게 부과한 규칙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미국 기자들은 "이런 제한 조처들은 현대 전쟁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강요된 검열 정책에 해당한다"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이런 조처가 취해진 것은 역사적으로 처음은 아니다. 그러나 펜타곤이 공개적으로 그런 조처를 취한 것은 처음이다.

이 때문에 각각 수십 명의 특파원을 현장에 파견한 방송사들은 전장의 이미지를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미국의 4대 방송사 <ABC> <CBS> <NBC> <CNN>은 총 100여 명의 특파원을 보냈고, 경비로 일주일에 거의 500만 달러를 쏟아부었다). 그리하여 걸프전은 눈에 보이지 않는 전쟁이 되어버렸고, 동방에서 벌어지는 격렬한 사건들을 바라보는 것에 익숙해 있던 시청자는 적잖이 실망했다. 전쟁 개시 뒤 이틀간 '연속 방송'을 내보내던 방송사들은 생방송으로 보여줄 흥미로운 장면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틈만 나면 특파원들에게 전화를 걸어댔다. 그러나 특파원들은 현재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파악하기 위해 <CNN> 방송을 지켜보고 있다고 고백할 정도로 정보가 부족했다. 시청자는 이런 장면을 지겨워하기 시작했고, 기자들에 대한 신뢰는 땅에 떨어졌다.

일부 방송인들이 그토록 칭송해 마지않는 <CNN> 모델은 환상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CNN> 기자들은 현장에 있으면서도 무게가 수십kg에 달하는 전자장비들로 가득한 스튜디오나 호텔방에 웅크리고 있다보니 직접 발로 뛰며 정보를 수집하기보다는 그저 한 명의 목격자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워털루 전투에 대해 파브리스(스탕달의 소설 <파르마의 수도원> 주인공)가 한 말을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무언가를 알기 위해서는 현장에 있다는 것만으로 부족하다." <CNN> 리포터 존 홀리먼(버니 쇼와 그 유명한 피터 아네트와 한 팀이었다)은 지난 1월 17일 바그다드 공습 개시를 최초로 알림으로써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그는 전화로 호텔방 창문을 통해 바라보는 광경을 전했다. 그러나 누가 공습을 하는지, 무슨 무기를 사용했는지, 어느 목표를 겨냥했는지, 이라크 쪽은 어떻게 반격했는지에 대해서는 별말이 없었다. 그 순간 바그다드에 사는 아무개에게 전화 연결을 했어도 얻을 수 있는 수준 이상의 정보는 없었다. 한마디로 그에겐 아무런 정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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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냐시오 라모네 Ignacio Lamonet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전 편집인(1990~2008).

번역 / 정기헌 guyheony@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