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러리가 남기고 떠난 한국 정부의 과제
코리아연구원 공동기획
역대 미 국무장관들이 통상 처음 방문하는 곳은 전통적 동맹국인 서유럽이나 분쟁지역인 중동이었다. 그러나 오바마 정부의 제일 큰 소명은 경제위기 극복이고 이를 위해 가장 중요한 협력자는 일본과 중국일 수 밖에 없다. 한국을 찾은 것은 물론 동맹국이기도하지만 주로 북한 문제를 상의하기 위한 것이 주목적이었다.
의제를 선택할 줄 아는 힐러리의 노련미
물론 한·미간에 다른 주요 의제들도 있다. 먼저 한국도 세계 13위의 경제력을 갖고 있으므로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협력이 필요하다. 특히 부시 행정부가 한·미 FTA를 체결하여 비준을 남겨두고 있는 상황에서 오바마는 재협상 계획을 줄곧 피력해왔다. 그럼에도 힐러리는 이번 방문에서 이 문제를 거론하지 않았다. 아마도, 이는 FTA문제는 국무부가 아니라 무역대표부(USTR)가 주무부처이고, 또 다른 관련부서인 상무부엔 아직 장관이 공석인 것도 작용했을 것이다.
오바마 행정부가 현재 주력하는 또 다른 사업은 이라크에서의 명예로운 철수와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진정한 반테러전 수행이다. 따라서 미국은 한국이 동맹국으로서 전투병을 파견해 줄 것을 계속 탐색하여왔다. 그러나 이 문제도 원론적으로만 거론되었다. 우리 정부가 일본과 조율하여 아프가니스탄 재건을 위한 민간지원을 확대하기로 선제적인 조치를 취했으므로 힐러리 장관은 이에 사의를 표하는 한편 전투병 파견을 요청했느냐는 질문에는 답변하지 않고 지나갔다. 이는 사실상 어떤 형태로든 요청했지만 이를 공개하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고 판단한 듯한 모습이다. 어쨌든 이 문제에 대해 미국은 초조할 필요가 없다. 한국이 전투병 파견 요청을 계속 거절하면 주한미군의 일부를 그쪽으로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새로 출범한 행정부의 국무장관으로서 힐러리는 한·미 우호관계 및 대북정책 공조 입장 확인이라는 현실적인 목표를 정하고 이에 집중하면서 여타 문제는 원론만 제시하는 노련한 외교관의 모습을 보였다.
한국정부는 바라는 것을 얻었는가?
힐러리를 맞은 우리 정부에게는 남다른 고민이 있었을 것이다. 먼저 한·미 두 정상이 모두 자유 민주주의를 신봉하지만 경제관에 있어서는 보수와 진보로 갈리고 대북 전략관에서도 상당한 격차가 있다. 사실 한·미 정부 간 대북정책이 일치하지 않는다면 아이러니이다. 왜냐하면 두 정부 모두 실용주의적인 대북정책을 펼친다고 천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 정부로서는 현실적으로 그 차이가 크기 때문에 우려감이 들었을 것이다. 양국 간 현안인 FTA나 파병문제는 전술한대로 거론하지 않고 넘어갔다. 우리 정부는 조속한 시일내에 한·미 정상회담을 개최하고자 노력했지만 그 영광은 이미 2월 24일 백악관에서 미·일 정상회담을 가진 아소 다로 일본총리에게 돌아갔다. 한미 정상은 오는 4월초 런던에서 개최되는 G20 정상회담에서 만날 수 있길 기대한다는 입장을 밝혔을 정도다. 또한 두 나라의 장관은 한·미동맹을 미래지향적인 21세기 전략동맹으로 심화·발전시키기로 합의하였다.
우리 정부가 주력한 점은 남북 당국간 관계 단절로 한국이 남·북·미 3각관계에서 '통미봉남'의 구도에 빠지고 있다는 비판을 불식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힐러리 장관은 한·미외교장관 공동기자회견에서 "북한은 한국과 대화를 거부하고 한국을 비난함으로써 미국과 다른 형태의 관계를 얻을 수 없고, "한국 국민과 지도자들이 북한의 도발적인 언행에 침착하게 대응한 것을 높이 평가한다"고 밝혀 우리 정부를 안심시켰다.
또 다른 우려는 미국의 국방·정보기관들이 작년말부터 북한의 핵보유를 기정사실로 인정하면서 우선 핵 불능화 및 확산 방지에 전념할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는 점이다. 한·미간에 북한 핵문제에 대처하는 목표가 다르다는 것은 심각한 우려사항이었다. 이에 대해 한·미 외교장관이 "양국은 여하한 경우에도 북한의 핵보유를 용인할 수 없으며 양국간 긴밀한 공조를 기반으로 6자회담을 통해 완전하고 검증 가능한 북한 핵폐기를 추진해야 할 것임을 재확인"함으로써 우려를 불식시키고자 했다.
그렇다면 우리 정부는 과연 얻고자 한 것을 얻은 것인가?
힐러리의 외교술에 밀린 한국의 전략
힐러리 장관이 방한 직전 자카르타발 서울행 기내에서 미 국무장관으로서는 이례적으로 북한의 권력 승계문제를 거론한 것에서부터 해답을 찾아보자. 작년 여름 김정일 위원장의 건강이상설이 끊임없이 나도는 가운데 미국 행정부는 북한의 발표를 기다리자는 등 매우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는 점에서 미 국무장관의 이러한 발언은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특히 국무부가 이날 정례 브리핑을 통해 북한 문제에서 가장 예민한 사안인 후계 문제와 이후 정세에 대한 발언이 힐러리 장관의 사견이 아닌 국무부의 공식입장이라고 밝혔기 때문에 그의 발언은 곰곰이 음미해볼 가치가 있다.
힐러리는 후계문제를 둘러싼 내부 권력투쟁이 진행되고 지도체제가 변화하는 과정에서 북한이 강경한 태도를 보일 가능성이 있는 탓에 인접 국가간 긴장이 고조될 수 있을 것으로 걱정하고 있다. 그는 또한 북한 지도부의 변화가 핵무기 해체와 관련한 논의의 진전을 더디게 하고 있으며, 권력 교체가 평화적으로 진행되더라도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더욱 도발적인 행동을 할 수 있어 북한 핵 문제에 대한 전략을 신속히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일본은 납치자 문제 해결을 북일관계 개선의 선결과제로 제시하고, 이명박 정부는 북핵문제 해결보다는 북한의 버릇 고치기에 열중하느라 남북관계가 단절된 것을 방치하는 중이다. 양국 정부는 오바마 정부가 북한과 조속히 그리고 적극적으로 협상하려는데 우려를 전달하였다. 따라서 힐러리는 국무부의 사전 검토와 내부 조율을 거쳐 북한 지도부 교체 과정에서의 혼란과 대외 도발 가능성 그리고 북한 핵문제를 신속히 해결해야 할 필요성을 지적하고, 한국 정부에 대안 전략을 밝히라고 촉구한 것이다. 우리 정부가 북한 관리를 포함한 한반도 평화를 구축할 적절한 다른 대안을 갖고 있지 않았던 것으로 파악된다. 결국 힐러리 장관은 대북문제에 대해 한국 정부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결과는 양국 외무장관 기자회견에서 힐러리의 발언으로 드러났다. 그는 북한 문제를 다루는 고위급으로 자신뿐 아니라 오바마 대통령에게도 보고할 스티븐 보즈워스 전주한대사를 대북특사로 임명했다고 밝혔다. 그는 "가장 시급한 것은 핵시설의 불능화를 이루는 것이고 완전하고 검증가능한 방식으로 합의를 이행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미 우호, 대북 공조' 원론만 제시한 '노련함' 과시
남한 대북정책 지지? '통미봉남'억제 명시적 언급없어
정부 대북관계 전환 필요… '중층적 국가안보 확립'해야
앞에 언급된 내용을 종합해본다면 결국 '통미봉남'의 구도는 한국 정부가 북한과의 관계를 재개하지 않는 한 점점 더 모습을 갖추어가고 있는 것이다. 힐러리 장관의 발언은 북한의 '통미봉남' 의도에 쐐기를 박고 한국의 대북정책을 지지한 것이라 해석되고 있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외교적인 수사였지, '통미봉남'의 구도 형성을 막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은 아닌 셈이다. 그의 말은 남북관계의 진전이 없다면 북·미간 대화나 협상도 안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한국이 북한과의 대화를 적극적으로 추구하지 않지만 한·미의 공동이익은 북핵 불능화를 완료하고 핵의 확산을 막겠다는 의미다. 힐러리 장관은 노련한 정치인으로서 한국 정부가 듣고 싶은 말을 해주면서도 결국 '통미봉남' 구도 형성 쪽으로 한걸음 더 내디딘 것이다. '통미봉남'은 우리가 한반도 안보정세 변화에 우리의 국익을 제대로 반영시키지 못하면서도 비용은 과다하게 지불하는 상황을 의미한다. 미국으로서는 북한과의 자유로운 협상을 벌여 타결이 되면 우리에게 대부분의 비용을 부담시킬 수 있는 구도를 마다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현재 경제위기극복과 중동문제 해결에 전념하고 있는 오바마 정부로서는 우선 핵 물질 추가 생산 방지 및 비확산 확보로 북한과 타협하여 시간을 번 뒤, 궁극적인 북핵 폐기는 추후 과제로 넘길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이럴 경우, 우리는 상당 기간 동안 북한의 전략적 위협을 감수해야한다. 즉 향후 우리 정부가 북한의 궁극적인 핵 폐기를 위해 적극적이고 전향적인 주도권을 행사해나가지 못한다면 오바마 행정부는 북핵 폐기를 궁극적 목표로 공언하면서도 실제로는 핵 물질 추가 생산 방지 및 핵 확산 억지에 전념할 가능성이 있다.
결론적으로 힐러리 장관의 방한으로 한·미 정부간 대북정책에서 엇박자가 날 가능성은 크지 않음이 확인되었다. 우리 정부가 미 행정부의 정책을 따라가는 구도가 형성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가 남북관계를 재개하지 않는 이상 우리의 전략적 이해관계가 향후 한반도 안보 정세에 반영될 지의 여부는 미국의 선처에 의존하게 된 것이다.
한국정부 전략적 난관 벗어나려면
주민들을 굶기고 인권을 경시하면서 정권 유지에만 전념하는 북한 독재정권을 상대해야하는 우리 정부에게 많은 고충이 있다는 점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경제력 뿐 아니라 군사력으로도 우리가 북한을 압도하고 있지는 못한 현실과 수도권이 북한의 장사정포 수백문의 사정권 내에 위치한 점을 고려하고, 멀지않은 장래에 결국 우리가 통일을 달성할 대상이 북한이므로 독일의 사례에서 보듯 통일 후 치러야할 엄청난 후유증을 미리미리 줄여나가야 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북한을 대화로 이끌어 경협을 증진함으로써 북한을 철저하게 관리해 가야 한다. 북한과의 체제 경쟁은 이미 우리의 승리로 끝났다는 자신감을 바탕으로 북한과의 기 싸움을 지양하고, 처절하게 체제 유지에 전념하고 있는 북한 정권에게 일탈된 모험주의 전술을 구사할 빌미나 명분을 주지 않는 치밀한 대북정책을 펼쳐야 한다.
남북관계가 단절된 것을 방치함으로써 정부가 북한문제 관리를 미국의 선처에 상당히 의존하게 된 것은 결과적으로 한국 외교를 자승자박하고 외교 협상력을 약화시켰으며 '통미봉남'의 구조를 자초한 것이다. 따라서 정부가 이러한 전략적 난관을 벗어나려면 결국 남북관계를 정상화하는 것이 최상책이다. '북한 버릇고치기'를 넘어 모험주의 대외전략을 펼치는 북한의 행태를 협상과 외교로 제어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이번에 대북 특사로 내정된 보즈워스 대사의 말은 음미할 가치가 있다. 철저한 대북 협상론자인 그는 그간 북핵 합의에 대한 비판에 관해 "대부분의 외교는 소위 '악행에 대한 보상'이다. 최악의 행동을 가장 저렴한 방법으로 막아낼 수 있다면 그게 바로 외교"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특히 북한이 핵의 최종적 포기를 결심하도록 유도하기 위해서는 미국보다 우리가 먼저 "북한이 핵 포기를 결심한다면 상호위협감소 원칙에 의거하여 주한미군을 포함한 한반도내 재래식 군사력의 균형을 유지하는 조치를 포함한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에 적극적으로 협력할 용의를 가지고 있다"고 북한에 제안하는 정도의 전략적 유연성을 보여야 할 것이다.
아울러 우리의 유일한 동맹국인 미국이 현 시대 유일의 초강대국인 것은 우리의 막강한 자산이므로 미국과의 우호관계를 계속 발전시켜 가야 한다. 단, 지난번 민주당 정권인 클린턴 정부에서도 '두개의 한국정책'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미국이 한반도에서 남북한 모두와 좋은 관계를 가지면서 이이제이(以夷制夷)를 한다는 의혹이었다. 동맹관계를 중시하는 공화당 정권에서는 이런 의혹을 가질 필요가 크지 않지만, 자유주의적 국제주의를 지향하는 민주당 오바마 정부는 일단 한·미동맹보다 미·일동맹을 더 중시하고 있고, 전략적 경쟁자인 중국과도 지역 질서의 장래를 포함한 전략적 협력을 강화할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특히 오바마 정부는 '균형' 개념을 국제 전략에서 중시하고 있어 남북한에 대한 균형정책을 검토할 가능성도 있다. 또한 북한이 미국에게 "핵 보유를 인정해주면 우리가 이스라엘처럼 미국의 친구가 되어 중국을 전략적으로 견제해주겠다"고 제안했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북한이 미국과 우호관계를 맺고 싶어 한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 우리 역시 대미 일변도 정책을 펼치는 것이 최선은 아니라는 점을 재인식해야 한다.
즉 우리 정부는 한·미동맹을 대외관계의 주축으로 계속 유지해가야 하지만, 적절한 자주 국방력을 갖추어가는 동시에 한·미동맹이 중국과의 우호관계를 저해하지 않도록 적극적인 외교를 펼치고, 일본, 중국, 러시아와도 쌍무적인 안보 협력을 진전시켜가는 한편 동북아 다자안보 협력 체제를 구축하여 우리의 국가 안보가 중층적으로 보장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 파리1대학 정치학 박사. 한·미관계, 한·러관계, 북핵 등 한반도문제 전문가이며, 주요 저서로 <미국의 미사일방어체제와 한국의 대응>(2004,세종연구소)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