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산 개발 붐, 초원을 떠나는 몽골 유목민
우리는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 교외를 돌아다니며, 10여 년 전부터 이곳에 정착해 사는 40만~50만 명의 시골 사람 중 몇몇과 인터뷰했다. 이들은 몽골이 전환점, 아니 대격변기에 접어들었다고 말한다. 2000년 초반부터 몽골 인구의 15%(280만 명)가 수도로 유입됐다. 프랑스의 2.5배 크기인 이 나라는 결코 이런 이농을 겪은 적이 없다. 1990년대의 산업발전과 도시개발 권장, 그리고 급작스러운 시장경제로의 전환이 지난 2500년간 아시아 내륙의 가혹한 기후 속에서 영속되던 유목생활에 종지부를 찍게 할 정도다.
몽골인의 3분의 1만이 아직 유목생활을 한다. 1980년에는 유목생활 인구가 80%에 달했다. 거대한 초원의 한적한 곳에서 보던 게르(Guer)나 유르트(Yurt, 몽골·시베리아 유목민들의 전통 텐트)는 관광객을 위해 조성하는 풍경으로 전락할 것이다.(1) 몽골인들은 유르트를 울란바토르로 옮겨왔다. 울란바토르 주민의 60%가 게르촌에 산다. 하지만 점차 소형 임시 건물의 주택이 게르를 대체하고 있다. 연간 7개월을 고비사막 광산 채굴장에서 일한다는 울란바토르 남동부 샤르하드 지역의 50대 부얌바트가 설명한다.(2) "게르 관리는 엄청 힘들다. 여름에는 게르에 씌운 펠트 덮개를 걷어내고 환기하기 위해 게르 밑 부분을 말아 올렸다가, 겨울에는 다시 그것을 원위치시켜야 한다. (중략) 우리는 이 땅과 이 집을 같이 사들였다." 광활한 국토에 흩어져 있는 광산 채굴장을 떠도는 이 사내는 울란바토르에서 아내와 함께 산다. 석탄·구리·금·우라늄의 막대한 매장량과 혹 있을지도 모르는 희토류가 투자자를 끌어들이며 몽골에는 엄청난 광산 붐이 일고 있다.
게르촌이 도시와 시골 간 경계선을 형성한다. 도시의 가장 외곽 지대에 이주자들이 몰려들며, 갓 태어난 양이나 말 울음소리가 들린다. 앙클로(Enclos·농경지에 울타리를 둘러쳐서 타인의 출입을 통제한 토지) 내부는 거의 관리되지 않고 있다. 대신 상징적인 가치를 부여한 통로인 앙클로의 대문이 유난히 눈길을 끈다. 대문과 대문을 둘러싼 조각 기둥이 파란색과 녹색 전통 문양으로 장식되어 있다.
몽골인들의 모토는 '평생 유랑하기', '한곳에 정착하지 않기'이다. 하지만 초원이나 사막으로 다시 떠날 계획이 있는 주민은 거의 없다. 이들은 기껏해야 서양인을 혹하게 만들었던 대공간(초원과 사막)에 대한 향수만 있는 듯하다. 마치 현대성이 힘든 유목생활에 영원히 종지부를 찍게 한 것처럼, 몽골인들은 일반적으로 미화된 유목생활에 대한 낭만이 전혀 없다.
도시로, 광산으로 이어지는 노마드 행렬
이민자 대부분은 최근 몇십 년 사이에 울란바토르에 도착했다. 울란바토르는, 1924년 몽골 인민공화국 선포 때 채택한 몽골어 이름 '붉은 영웅'을 1991년 이 나라에 들이닥친 자본주의 분위기에 맞춰 친근한 영국식으로 개명한 것이다. 2000~2003년의 끔찍한 재해, 견디기 힘든 겨울 혹한 때 이민자들이 울란바토르로 몰려들었다. 대여섯 번에 걸친 혹한이 닥쳤다. 툭하면 영하 50℃로 뚝 떨어지는 기온이 문제가 아니라, 눈이 해빙과 결빙을 반복하며 눈 속에 파묻힌 가축의 꼴을 찾는 게 점점 어려워진데다 목장은 이듬해 가축 떼에게 먹일 물량 확보가 힘들어졌다.
프랑스 국립 동양언어및문화연구소(INALCO)의 교수이자 몽골 전문가인 자크 르그랑은 다음과 같은 문제를 거론한다. "2000년대 초반의 많은 유목민은, 사회주의가 들어선 이후 2~3세대를 거쳐 도시에서 산 신세대 가축사육자들이었다. 1991년 사회주의 붕괴 이후 경제가 일순간 거의 무너지고, 공장이 문을 닫고, 무역이 마비되자 이들은 시골로 내려갔다. 하지만 이들은 유목 능력을 상실했다. 국가도 더 이상 어쩔 도리가 없었다." 사실 유목민 삶의 방식은 한 해 동안 가축 떼를 몰고 갈 최적의 자연환경이 조성된 방목지 4곳 정도는 잘 숙지해야 한다. 이들은 사회생활에도 완벽하게 통합해야 한다. 풀이 귀해지면 자신들의 방목지 너머로 가축 떼를 몰고 가기 위해 다른 가족과 타협해야 하기 때문이다.
르그랑은 전례 없는 이농에 대한 다른 이유도 열거한다. 첫째, 목축업의 시장경제 편입이 목동들을 교통 중심지로 집결시켰다. 둘째, 농업 부문과 외국 기업, 특히 캐시미어 관련 산업을 벌이기 위해 야심차게 진출했던 이탈리아 기업들의 붕괴 이후 사람들이 상업지구로 몰려들었다. 셋째, 기업 차원에서 밀어붙인 캐시미어 산업이 큰 문제를 야기했다. 양들이 풀 뿌리까지 뽑아 먹었기 때문이다. 르그랑은 "이런 요인이 복합적으로 유목생활의 근간을 뒤흔들었다. 즉 국민이 각지로 흩어져 가축 떼를 먹이기에 충분한 방목지를 돌아다니며 한곳에 머무는 방식을 가로막았다"고 말했다.
스트라스부르대학의 민속학자 가엘 라카즈는 이외에도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고 말한다. "20년 동안 삶의 모든 부분에 영향을 미친 일련의 개혁들이 사회보조금을 줄이고, 기업·의료보험·교육·토지 등도 민영화시켰다. 실업자가 속출하며 중산층이 무너지고, 빈부의 양극화가 심화됐다. 몽골 사회가 눈에 띄게 변했다. 특히 자본 시스템이 현격하게 변했다."(3) 또한 도시 주변의 토지를 주거 용도로 무상 배분하는 정책이 이농을 부추겼다. 2002년 의회는 외국 기업에 대한 광산 개방법을 더욱 수월하게 통과시키기 위해, 각 가정에 700㎡까지 토지소유권을 부여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2008년부터 이 법안은 개인으로까지 확장 적용되고 있다. 몇십 유로 주고 (땅) 등기만 하면 되지만 행정 처리가 까다롭다. 도심과 좀더 가까운 곳에 정착하기 원하거나 (산사태나 홍수의) 위험이 있는 장소에 게르를 치고 싶지 않으면 다른 사람의 하샤(Khashaa·앙클로)를 매입할 수 있다. 그럴 경우 상당한 투자비가 들어간다. 평균 연봉이 2383유로인데, 땅값이5천~5만 유로에 달하기 때문이다.(4)
온통 골드러시에 빠진 나라
2002년 토지법은 오랜 소련 치하에서 벗어난 신흥민주주의, 즉 2012년 6월 총선에서 새로 당선된 많은 의원이 도입한 강력한 경제민족주의를 공고히 하는 차원에서 취한 일련의 보상 조치다. 실제로 신의 선물인 광산 분배 문제가 선거 캠페인의 핫이슈였다. 결국 민주당은 전 공산당을 계승한 몽골인민당(MPP)을 상대로 총선에서 승리했다. 하지만 절대 다수당이 되지 못한 민주당은 외국 기업의 광산 프로젝트 참여 문제를 국회에 상정하기 위해 군소 정당들과 연합할 수밖에 없었다.
광산산업에서 얻은 이익의 재분배와 부패 스캔들이(2012년 8월, 남바린 엥흐바야르 전 대통령은 4년형을 언도받았다) 난무한 가운데 (광산 프로젝트) 정책이 주도되고 있다. 이런 기저에는 자본주의 신앙에 대한 불안이 깃들어 있다. 정체성 상실에 대한 불안감과 중국과 러시아 두 이웃 강대국을 견제하기 위해 몽골은 먼 강대국들과 임시동맹을 맺었다(상자 기사 참고).
광산 부문은 차기 정부의 최우선 과제가 됐다. 1960년대 사회당 정부는 유목생활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국가 경제를 다양화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정부는 러시아 모스코바에서 초청한 전문가들과 함께 광산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현재 몽골 전체가 골드러시에 빠져 있는 듯하다. 유목생활은 1950년 이후 프랑스 농업이 겪은 것과 유사한 운명을 겪을 수도 있다.
광산 붐이 모든 것, 이를테면 정치적 기능, 경제와 사회적 균형, 이제 환경과 연관된 지하자원에의존하는 지역 발전 등을 뒤흔들어놓을 수도 있다.(5) 환경운동가 체체게 문크바야르는 항변한다. "우리가 모든 것을 거부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국가는 수년 동안 에르데네트 구리 광산 개발로만 먹고살았다. 우리는 왜 다른 광산을 조금씩 개발하지 않는 것일까? 그게 우리가 이룬 (국토의) 균형을 깨지 않는 최선책인데 말이다."
2010년 환경보호를 위해 광산 탐사 및 생산에 대한 새로운 인·허가를 유예하는 법률이 공식적으로 도입됐다. 이 법률로 인해 3천 개의 인·허가가 취소됐다. 이 법률이 2012년 이후에도 지속될지 불확실한 가운데, 아직 4천 개의 광산 개발 허가권이 유효하다. 거대 광맥, 특히 고비사막에 위치한 오유톨고이(청록색 언덕) 구리 광산이나 타반톨고이 광산 바로 옆에 있는 석탄 광산을 개발하기 위해 외국 기업을 초청했다. 한편 프랑스 공기업 아레바는 곧 인내와 비용이 많이 드는 우라늄 광산 탐사 작업을 착수할 계획이다.
이런 사업을 해서 몽골 정치 지도자들은 국가를 현대화시키고, 국가의 주요 문제도 해결하려 한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인구의 15%가 절대빈곤에 허덕이고 있다. 2010년 신문에서는 6.4%의 경제성장률 운동을 외쳤는데, 2011년 17.3%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 2012년엔 외국인 직접투자(IDE)의 변수에 따라 경제성장률 지표가 다소 떨어져 11.8%에 머물렀다. 한편 영국과 오스트레일리아가 합작한 거대 광산회사 리오 틴토의 오유톨고이 광산 가동은 2013년 몽골의 국내총생산(GDP)을 30% 이상 끌어올릴 것이다. 하지만 그 돈(광산에서 얻은 이익)을 어떤 방식으로 국민에게 배분할 것인지 의문이다. 때론 정치 지도자들조차 같은 의문을 갖는다. 그러나 외국 비정부기구(NGO) 몽골지부의 몽골인 소장은 말한다. "정치인들은 단지 어려울 때만 득표를 위해 포퓰리즘과 민족주의의 위험한 밧줄타기를 한다."
도심에만 존재하는 정주형 주택
1991년 이후, 민주주의 체제는 사실상 중앙집권 형태를 촉진시켰다. 라카즈가 설명한다.(6) "몽골 수도는 사회주의 정부 때만 해도 이농의 최적지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다른 대도시에서 유사한 서비스와 도시의 편안함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현재는 행정, 복지, 교육, 수준 높은 의료서비스 등이 울란바토르에 집중되어 있다. 광산산업의 성장은 기간시설을 급속히 확장시키고, 군소도시의 인구 통계학적 변화를 가져왔다. 해당 도시 대부분은 광산 프로젝트 덕분에 기간시설, 일자리 창출, 직업 훈련 개발에(7) 대대적인 투자가 가능한 고비사막 지역에 위치한다." 예를 들면 몽골 남부, 고비사막에 위치한 다란자드가드 마을의 주민은 2009년 1만7천 명에서 2011년 3만 명으로 증가했다.
하지만 광산 일자리 덕분에 사람들이 지방으로 이주하면서 문제가 생기고 있다. 한 서양 광산 회사 중역이 전한다. "광산 인부들은 노동 회전 시스템에 따라 고용주가 내준 비행기를 타고 울란바토르에 있는 가족에게 가서 2주일 정도 휴식을 취한 뒤, 광산 채굴장으로 다시 돌아가 3~4주 동안 일할 수도 있다." 광산은 전국 각지, 특히 몽골 남부나 중국 국경 근처에 흩어져 있다. 이런 연유로 국민을 전 국토에 재배치하는 데 꼭 필요한 기간시설 건설이 복잡하고 비용도 많이 들어간다.
떠나고, 돌아오고, 다시 떠나는 것은 철저한 실용주의를 방증하는 몽골 유목민의 삶의 형태였다. 인류학자 그레고리 데라플라스가 지적한다. "게르에 대해 감상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는 것이 몽골인이 되는 방식이다. 몽골인들은 시간의 요구, 즉 하루를 창조하는 방식에 적응하는 천부적인 유연성을 보여준다. 이들은 이것을 가리켜 몽골화, 이른바 몽골클로(Mongolchloh)라 말한다." 21세기 초반에도 여전히 이농을 고수해야 할까? 마치 정착생활이 한순간 머물다 떠나는 것을 뜻하는 것처럼.
사회당 정부 이후, 그러니까 10년 전부터 울란바토르는 아주 이상한 수도가 됐다. 풍경화가 레아 오마주는 말한다.(8) 울란바토르 건물의 상당 부분은 천(게르)으로 지어졌다. "마치 적응과 변화 환경에 맞는 도시 건설의 필요성에 의해 지어진 하이브리드 방식의 도시 같다." 투울 강가 계곡 언덕에서 내려다본 울란바토르 주거 밀집 지역의 유르트 돔들이 신기한 흰 반점처럼 보였다. 그리고 파란색, 녹색, 빨간색의 중국산 양철 지붕이 덮인 작은 직사각형 집들이 보였다. 하샤에 위치한 게르와 집은 사각형으로 자른 땅에 지어져 있고, 그 주위에는 송판과 수지가 많이 든 통나무를 거칠게 잘라 만든 울타리를 쳤다. 그리고 그 위에다 얼기설기 쇳조각(침대 머리맡 강판, 가스레인지 덮개 등)을 얹어놨다.
학교에 입학하는 손자 셋을 데리고 몽골 북부 흡스굴 지역에서 최근 울란바토르에 도착한 한 할머니가 말한다. "우리는 부자가 아니다. 우리 재산은 게르 두 채가 전부다." 이런 불확실한 시대엔 학교 졸업장이 또 다른 소중한 재산이다. 이 가족은 가파른 경사면에 위치한 하샤에 게르를 설치했다. 울타리 공사가 끝나자, 사슬에 묶인 개가 앙클로를 지키며 벌써부터 짖어댄다. 대략 16㎡의 게르 공간에 자동차 타이어를 포개어 놓아 흙을 차단한 다음, 테라스로 활용했다.
게르촌 현상은 새로운 게 아니다. 스테판 파세가 프랑스 은행가 알베르 칸으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아 '지구의 기록' 프로젝트를 수행한 적이 있다. 그가 몽골 여행 때(1912~13) 찍은 사진에는 간단 지역에 쳐 있던 울타리들을 보여준다. 간단지구는 불교 사찰 주변에 형성되어 있다. 사진촬영 장소인 이 지역은 몽골 도시화의 근원지이다. 현재까지 수도승 가족들은 이 지역에 거주한다. 울란바토르의 전 이름은 '우르가'였으며, 1706년 우르가는 '이흐후레'(큰 캠프)로 바뀌었다. 이흐후레 자체가 1778년까지 정기적으로 이동하는 유목도시였던 셈이다.
튼튼한 건물은 도심에만 존재한다. 중심가의 거대한 건물과 보기 흉한 벽돌 건물은 몽골이 소련의 속국으로 전락했을 때 지어진 것이다. 그 중심가 역시 변했다. 사회주의 시절 건물 1층은 1990년대 초반 점포로 개조됐다. 모든 것(소시지, 빵, 생활필수품, 세제 등)을 구할 수 있는 구멍가게, 그리스식 원통형 기둥에 장식 문이 달린 미용실, 곰팡이 냄새가 나는 작은 카페, 선술집, 옷가게 등. 거리는 다채로운 배너들로 꽉 차 있고, 교차로는 소형 상점과 행인에게 전화 서비스를 제공하는 판매점에 점령당했다. 도심에서 조금만 외곽으로 나가면 차고, 아틀리에, 창고 등으로 쓰는 컨테이너들이 쌓여 있다.
몇 년 전부터 최첨단 현대식 건물이 마치 수도 도시화의 역사 속에서 새로운 기억의 층이 솟아나듯 올라가고 있다. 이런 완전 통유리 건물들은 과두정부에 의해 지어지고 있다. 주로 사회주의 시대의 지도층 출신인 신흥부자들은 적절한 시간, 적절한 장소에서 전도유망한 광산개발권이나(9) 경제 수익성이 높은 부문에 손을 대고 있다.
정부는 언젠가는 게르촌이 사라질 것이라 믿고 싶거나, 믿게 하고 싶을 것이다. 건축사 올리비에 부셰롱은 단언한다.(10) "몽골 당국이 원한 게 이같은 도시 건설 방법은 아니었다. 즉, 언제든 떠날 채비가 되어 있거나 적어도 경제 중심지에 좀더 가까운 곳으로 잠깐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반(半)유목민 생활을 통해 형성되는 도시를 원한 게 아니다. 물론 다른 빈민가와 비교해 울란바토르는 공간이 부족하지 않다. 2000년 게르촌의 인구밀도는 헥타르당 32.2명인 데 비해 기타 계획도시의 인구밀도는 헥타르당 55.6명에 달한다. 또 다른 차이점은 울란바토르 주민은 자신의 땅에 집을 짓고 살기 때문에(11) 땅에 대한 불안감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민이나 지도층들은 게르촌의 존재를 수치스럽게 여긴다.
빈곤, 실업, 가난, 알코올중독, 치안 불안이 울란바토르를 지배하고 있다. 이웃 간에는 거의 모르고 지낸다. 건물 개조와 도시화가 골칫거리다. 우물, 식수를 파는 거리 판매점은 하샤에서 수백m 떨어져 있다. 거리는 온통 매일같이 물 긷는 어린애들이 끄는 손수레의 춤 무대가 된다. 겨울엔 수천 개의 게르에서 석탄을 때기 때문에 공기가 탁해 숨을 쉴 수 없다. 가구마다 5t의 석탄을 소비한다. 동네에는 부업으로 하는 가게 말고는 시장이나 슈퍼마켓도 없다. 물론 버스도 없다. 게르촌은 아비규환이다. 협곡에 버린 쓰레기, 침수 위험이 있는 땅에 지은 집, 소방도로의 부재 등.
거듭 수정한 역대 정권들이 세운 2020년 마스터플랜은 게르촌의 존재를 체념하고 감수하는 것처럼 보인다. 울란바토르시 기획부 담당 쿠렐바타르는 게르촌 주민들이 떠나지 않을 것임을 인정하며 털어놓는다. "그래서 우리는 세 구역을 형성할 예정이다. 하지만 각기 다른 방식으로 구역을 구축한다는 전략을 짰다. 구역 중앙에는 대형 건물을 짓고, 그 주변에 소형 건물을, 그리고 주택은 그 외곽에다 지을 계획이다." 토지소유권이 잘 보호되어 있는 국가의 무모한 도전이다. 새로운 계획의 과제 중 하나는 토지 강제 수용권을 확대하는 것이다. 어떤 개인이 자신의 하샤를 매도하지 않겠다고 버티는 바람에, 다리 하나 완공하는 데 6년이 걸렸다.
하샤에 거주하는 한, 두 가구가 입주할 수 있는 크기에 턱없이 비싸지 않은 아파트라면 게르촌 주민들은 기꺼이 입주할 것이다. 하지만 몽골 정부와 울란바토르시는 시장경제의 메커니즘을 써서 이 신도시민들의 이주를 부추기고 있다. 빈곤과 불안 때문에 이 메커니즘이 울란바토르에서 힘을 발휘할지 의문이다. 임시 게르촌이 앞으로도 수십 년 동안 지속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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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레지 장테 Régis Genté
번역 / 조은섭 chosub@ilemonde.com
(1) Galsan Tschinag, ‘회색 대초원의 나라’,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4년 8월호.
(2) 전통적으로 몽골인은 성이 없다.
(3) Gaélle Lacaze, ‘울란바토로의 오염과 탈사회주의, 위기에 처한 붉은 영웅’, <사회과학 잡지>, 47호, 파리, pp.120~129, 2012.
(4) ‘The Mongolian real estate Report’, MAD Investment Solutions, Oulan Bator, 2012.
(5) 유목민의 선조들은 정령의 심기를 건드린다며 땅을 파지 못하게 했다. www.religion.info.
(6) Gaélle Lacaze, <위기에 처한 붉은 영웅>, op. cit.
(7) <The Mongolian real estate Report>, op. cit.
(8) ‘대초원이 도시화될 때: 변칙적인 도시 울란바토르’, 프랑스 릴 그랑제콜 건축 조형학과의 개인 논문, 2010년 7월.
(9) ‘Mongolia, do oligarchs see politics as a growth opportunity?’, 2012년 9월 27일, www.eurasianet.org.
(10) Olivier Boucheron, ‘펠트로 된 도시’, 잡지 <공동지역>, 12호, 낭트, 2009년 10월.
(11) Olivier Boucheron & Léa Hommage, ‘국가와 울라바토르 게르촌의 장래’, 포스트 소련 국가들에 대한 고찰, 프랑스 국립 동양언어및문화연구소(INALCO), 파리, 2011년 5월 25일.
반중국 감정
2012년 여름, 몽골 전통 나담(Naadam) 축제 전날 몽골 전역에 몽골 국기가 휘날렸다. 그러나 곧 일부 언론은 그 국기들이 '중국산'이라며 국가의 상징을 훼손했다고 주장했다. 그게 진실이든 아니든 간에 이같은 규탄은 사회적 파문을 일으켰다. 또 깊은 불신의 대상인 이웃 강대국, 중국에 대한 몽골의 경제 의존도에 대해 말도 많다.
몽골 수출의 70%, 석탄 같은 광산 생산물의 대부분이 중화제국으로 수출되고 있다. 반면 중국 인력은 광산 채굴 붐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미 중국 인부 6천 명이 오유톨고이 광산에서 일하고 있다. 이는 영국과 오스트레일리아의 합작인 거대 광산회사 리오 틴토가 관리하는 드넓은 구리 광산 인력의 40%에 해당한다.
프랑크 빌레는 몽골인이 중국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박사 논문을 썼다. 이 인류학자는 논문에서 대만에서 제작돼 1990년 초반 유럽에서 판매된 지구본- 몽골을 마치 중국의 한 지방으로 표기한- 사건을 거론하며 설명한다. 몽골인들은 "국경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고 여긴다. 이들은 중국이 몽골의 독립을 진심으로 수락한 적이 없다는 고정관념을 갖고 있다." 많은 몽골인은 몽골 국민의 씨를 말리기 위한 중국의 전략이 존재한다고 확신한다. 독극물이 든 음식물 판매, 중국 남성들이 몽골 여성들과 잠자리를 갖도록 유도하기 위한 비밀 계획, 터널을 뚫어 몽골 광산자원을 빼돌리기 등.
빌레는 이런 환상이 "사실 중국과 소련의 갈등기인 1960~70년대에 시작됐다"고 말한다. 이런 정치적 이데올로기 경쟁은 1962년 중국 베이징과 러시아 모스코바 간 외교 단절로 이어졌다. 비록 칭기즈칸과 다른 몽골의 통치자들은 13세기부터 중화제국의 전 영토 혹은 일부를 점령했지만, 중국은 단 한 번도 몽골을 침공한 적이 없다. 만리장성은 몽골을 방어하기 위한 산물이다. 만주(청나라) 지배(1644~1911년) 때, 몽골인들은 식민지 트라우마를 경험했다. 비록 만주가 문화나 언어적으론 몽골과 연관 있었지만, 이전엔 만주인 대부분이 중국 민족인 한족에 동화돼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지정학, 보안, 광산 개발 인·허가와 관련된 울란바토르의 핵심 정치전략은 잠재적인 중국의 제국주의 야망을 저지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2012년 봄, 광산을 포함한 세 부문에서 외국 기업의 투자 규칙에 대한 개정 법률이 통과됐다. 이 조처들은 몽골 의회가 일부 광산 채굴장을 점령하려는 중국 공기업들을 겨냥해 취해진 것들이다. 게다가 이 기업들은 베이징의 정치적 지렛대 역할을 한다는 의심도 사고 있다.
한편 철도사업 부문에서도 철길을 남부 광산 지역까지 연장할 계획이지만, 바로 코앞에 있는 중국과 하는 것이 아니라 러시아와 할 계획이다. 울란바토르는 2002년 중국이 달라이 라마의 몽골 방문에 대한 보복 차원에서 에를리안(중국과 몽골 간 국경 지역) 국경을 폐쇄한 것을 기억하고 있다.
좀더 크게 보면, 소련의 옛 위성국가(몽골)가 두 인접 국가인 중국과 러시아를 '세 번째 이웃 국가'의 전략, 즉 미국과 유럽 혹은 한국과의 관계를 통해 견제하려는 셈이다. 또 몽골은 서양이 광산 산업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갈수 있도록, 중국 국경 지대에 위치한 가장 중요한 광산을 서양 대기업에 위임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