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위기 앞에 무너지는 슬로베니아

2013-03-12     장아르노 데랑

다수당을 내준 총리가 사임을 거부하자, 노조와 격분한 시민들의 시위가 거리와 인터넷에서 확산되고 있다. 평소 아주 조용한 슬로베니아에 화염병 터지는 소리가 울려퍼지고 있다. 긴축 조치란 미명하에 단행된 슬로베니아의 고유 사회모델 파괴가 화약고에 불을 댕겼다.

슬로베니아의 수도 류블랴나 거리에서 시민 수만 명이 시위를 하고 있다. 침착, 온건함, 높은 삶의 질로 명성이 자자한 인구 200만 명의 슬로베니아공화국은 이번 겨울의 시위만큼 강력한 시위를 경험한 적이 없다. 지난해 1월 집권한 보수당 정부의 긴축 조치가 시행되지 못하고 있다. 정치권에 분노한 시민들의 지지를 받는 노조가 여전히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위대의 많은 사람들은 슬로베니아가 2004년에 가입한 유럽연합(EU)을 규탄하며, 1991년에 탈퇴한 옛 유고슬라비아연방 국기를 흔들어댄다.

슬로베니아가 위기에 처한 것일까? 지난해 말부터 야네즈 얀샤가 주도하는 보수당 내각이 더 이상 다수당이 아니기 때문에 정치적 위기에 처한 것은 맞다. 하지만 슬로베니아의 경제위기는 정부 당국의 주장처럼 심각한 수준일까?

정부는 1년 전부터 슬로베니아가 파멸 위기에 처했다, 은행 부문이 엄청난 적자를 기록하고 있다, 공공재정이 바닥났다는 등 파국적인 담론들을 쏟아내고 있다. 하지만 그 어떤 지표도 이러한 경종을 확인해주진 않는다. 류블랴나대학의 경제학 교수 두산 코바치는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슬로베니아의 공공부채는 국내총생산(GDP)의 44%를 초과하지 않는 데 비해, 유로존 국가의 공공부채는 평균적으로 GDP의 87%를 초과한다. 실업률도 노동인력의 8%에 채 미치지 못한다. 연간 인플레이션은 3% 미만이다. 정부의 예산 적자만 GDP의 6%대로 대폭 상승했다. 난 우리가 유럽의 평균치 이상의 성과를 내고 있다고 믿는다."

코바치가 덧붙여 말한다. "경제위기가 우리 복지 모델을 문제 삼는 구실로 쓰이고 있다. 유럽연합(EU)에 가입한 이후, 슬로베니아 정치 시스템의 안정성과 경제의 역동성은 종종 유럽의 본보기로 소개됐다." 옛 유고슬라비아의 붕괴와 관련된 전쟁의 소용돌이를 피했던(1) 이 작은 공화국은, 2008년 EU 신생 회원국 중 처음으로 EU 의장직을 맡았다. 진지함과 살맛 나는 국가로 정평이 난 슬로베니아는 항상 최고를 추구했다. 유고연방 시절에도, 슬로베니아는 이미 다른 연방 공화국들의 본보기였다. 시기의 대상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모든 유고연방 공화국 중 가장 번성한 국가였기 때문이다. 슬로베니아는 오스트리아·이탈리아와 국경을 이룬 입지, 가공산업의 특성화, 국제시장 개방을 통해 수익을 극대화할 줄 알았다.

EU 가입 협상 때, 류블랴나는 많은 예외 조항을 얻어내기 위해 특정 핵심 경제 분야의 자유경쟁에 대한 전면 개방을 거부하며 버텼다. 예컨대 슬로베니아는 2개의 거대 은행, 노바류블란스카방카(NLB)와 노바크레디트나방카마리보르(NKBM)가 지배하던 자국의 금융 부문 대부분을 지켜낸 중동부 유럽의 유일한 국가였다. 하지만 슬로베니아 당국이 악착같이 금융 부문을 지켜낸 것은 자유주의 모델에 대한 저항 의지의 발로라기보다는 사방에서 포위된 약소국가 고유의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슬로베니아의 소수민족 이탈리아계 출신 기자인 스테파노 루사는 다음의 말을 상기시킨다. "슬로베니아에서 외국인 재산권 획득에 대한 의회 토론은 일부 의원들이 신성한 조국을 헐값에 팔 수 없다고 거절하면서 사이코 드라마로 변질됐다."

많은 슬로베니아계 소수민족이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에 여전히 거주하고 있는 상황이라, 슬로베니아는 두 인접 국가가 민족통일(2)에 대한 꿈을 꾸지 않을까 하는 의심에 이들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다. 또 슬로베니아는 피란만(灣)으로 인해 오랫동안 분쟁을 겪은 크로아티아와도 복잡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영해 경계선 때문에 양국 사이에 분쟁이 일고 있다. 37km에 이르는 슬로베니아 쪽 해안선이 이탈리아와 크로아티아 영해 사이에 낀 아드리아해(海) 깊숙이 박혀 있기 때문이다.(3)

코바치는 "유럽인들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슬로베니아는 대부분의 공공서비스를 지켜냈다"고 말한다. 실제로 슬로베니아는 여전히 세계 최고의 보건 시스템을 갖춘 나라이며, 교육도 박사과정까지 모두 무료다. 얀샤가 공공지출에 대한 대폭적인 감축을 예고하며 문제 삼는 게 바로 이런 '슬로베니아 모델'이다. 이미 많은 국가들이 그랬듯, 경제위기는 슬로베니아에도 '충격요법'을 적용할 빌미가 되고 있다.

누구를 위한 충격요법인가

정부는 은행들이 부동산 투기 거품 붕괴에 휘말릴까 염려하고 있다. 은행들은 2000년대 전국이 건설 현장으로 뒤덮였을 때, 건설 붐을 적극 지원했다. 정부는 주요 은행의 불량 채권을 매입하기 위해 40억 유로를 투자해 특별기관, 이른바 배드뱅크(Bad Bank) 창설을 결정했다. 참고로 국가가 이 채권의 주주다. 불량 채권의 총규모는 GDP의 18%에 상응하는 65억 유로에 달했다. 이 계획(배드뱅크 창설)이 금융 부문 민영화의 서막이라 생각한 야당과 노조들은 이에 반대했다. 애당초 이 계획을 도입한 시장경제의 신봉자인 재무부 장관 야네즈 수스테르시치는 지난 1월 23일 내각을 사퇴했다. 왜냐하면 다양한 성향의 정치인들이 뭉쳐 위태롭던 얀샤가 이끄는 여당이 해체됐기 때문이다.

여당은 총리가 이끄는 슬로베니아민주당(SDS)과 그레고르 비란트가 이끄는 자유당, 속칭 시민명부자유당(DL), 그리고 신슬로베니아극보수당(기독민중당·NSI-KLS)을 합병한 것이었다. 2011년 12월 4일 총선 때, 류블랴나 시장 조란 얀코비치가 선거 몇 주 전에 창당한 슬로베니아포지티브당(Slovénie Positive)이 놀랍게도 선거에서 1위를 차지했다. 슬로베니아의 모든 우파 구성원은 성향 차이를 극복하고 다수 여당을 만들기 위해 연합할 수밖에 없었다.

세르비아 출신이지만 슬로베니아가 독립한 이후, 슬로베니아 국민이 된 얀코비치는 전형적인 정치인은 아니다. 이 사업가는 슬로베니아와 발칸반도의 거대 유통 그룹 메카토르를 오랫동안 경영했다. 2006년 그는 류블랴나 시장에 당선되며 대중을 놀라게 했다. 그는 여러 번에 걸쳐 용기 있는 입장 표명, 예를 들면 슬로베니아 사회에 팽배한 인종차별 희생자들인 집시 공동체 편을 들며 유명세를 탔다. 하지만 그의 좌파 정착은 불확실하다. 주간지 <믈라디나>의 편집장 그레가 레포브시는 "얀코비치는 자신의 이권을 옹호하기 위해 정치권 입문을 선택한 과두정치인일 뿐이다"라고 주장한다.

얀샤 지지자들은 슬로베니아포지티브당 창당이 유고슬라비아 연방 시대의 옛 정치 지도자이자 슬로베니아가 독립할 당시의 초대 대통령 밀란 쿠찬을 비롯한 몇몇 좌파 인사들에 의해 주도됐다고 주장한다. 얀샤는 오랫동안 자신을 유고슬라비아 시대의 직접적 산물인 '시스템', 즉 슬로베니아를 여전히 장악하고 있는 시스템의 반대자로 소개하려 했다. 그는 특히 슬로베니아 독립 때부터 2004년까지 정권을 잡은 중도좌파 정부와 전통적으로 연관된 옛 공기업 수장들에게 의지하고 있다. 슬로베니아의 공기업 수장들은 공기업의 민영화가 EU 가입 이후 대대적으로 이뤄지면서 민영화 지연으로 인한 수혜를 톡톡히 봤다.

지난 1월 초반 총리와 얀코비치가 수년간 소득신고를 누락했다는 부패방지위원회의 보고서가 발간된 이후, 슬로베니아 정치권의 도덕성 회복을 약속한 DL 소속 의원들은 내각을 사퇴했다. 얀샤는 핀란드 전차부대를 통해 무기거래를 성사시키고 대가성 리베이트를 수뢰했다는 혐의도 받고 있다.(4) 피고인이 법정에 불출석한 가운데, 수개월 전부터 이 사건에 대한 재판이 류블랴나 법정에서 진행되고 있다. 3년간 이 사건을 추적한 2명의 기자, 블라즈 즈가가와 즈젠코 체피치는 얀샤가 슬로베니아 독립정부 초대 내각의 국방부 장관 재임 시절 국제 무기 밀거래에 연루됐다고 보도했다. 이 밀거래 덕분에 1990년대 두 교전국,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국제 무기 금지(5)를 우회해 무기를 구입할 수 있었다.

얀샤가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그가 슬로베니아의 역사를 다시 쓰라며 전권을 준 NSI-KLS당의 민족주의자들뿐이다. 그래서 그의 내각 각료들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슬로베니아의 대독 협력 민병대, 이른바 '도모브란치'(Domobranci) 기념행사에 참가했다. 지난해 6월 25일 열린 독립 축제는 정치적 격론장이 됐다. 정부는 처음으로 제2차 세계대전 지지자들의 상징인 도모브란치에 대한 축제 참여를 금지했다. 정부가 국가(슬로베니아연방공화국) 해방을 위한 반(反)파시스트 위원회(SUBNOR)와 1991년에 창건된 독립국가 사이에 맺은 대부분의 합의를 폐기 처분한 것이다.(6)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제도의 운명

철학자 스트라인 다르코는 말한다. "SDS는 자신들의 주장처럼 중도우파가 아니라, 급진반공산주의와 슬로베니아 정체성에 대한 전통적 비전을 중시하는 극우당이다. 얀샤가 25년 전부터 정치 무대에서 이 당의 선봉장 역할을 하고 있다.

얀샤 1기 정부(2004~2008)는 이미 사회모델에 대한 심각한 문제를 제기하며 노조의 심한 반발을 산 적이 있다. 그래서 "이번에 얀샤가 부패 혐의로 재판을 받는 중임에도 작정하고 정책을 힘으로 밀어붙이고 있다"며 다르코는 분개한다. 하지만 지난해 가을부터 전국을 강타하고 있는 반부패 시민혁명과 노조 시위로 이런 정치 공작은 저지할 수 있을 것이다.

시위의 단초를 제공한 것은 슬로베니아 제2의 도시인 마리보르였다. 이 도시의 시장 프란츠 캉글러는 과속에 대한 벌금 징수 시스템을 민영화하고 도로에 과속 단속 카메라를 설치했다. 사소한 이 사건이 시위의 기폭제가 돼, 지난해 12월 6일 논란이 된 시장은 사임했다.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됐다. 그러나 현재 다수당을 빼앗긴 총리가 "조기 대선이 슬로베니아 이미지에 타격을 줄 것"(7)이라며 여전히 사임을 거부하고 있다.

스테파노 루사는 상황을 이렇게 요약한다. "슬로베니아인들은 복지에 익숙하다. 1945년 이후 처음으로, 이들은 겁을 낸다. 이들은 삶의 여건이 악화되고 자식은 자신보다 못한 삶을 살게 될 것이라 말한다. 얀샤는 이같은 공포를 틈타 자신의 모델을 가동하려 한다. 그의 주요 논지는 슬로베니아가 그리스처럼 주권을 상실하고 신탁통치를 받게 된다는 위협이다." 그러나 최근 일어난 시위는 적어도 다른 시나리오에 대한 여지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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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아르노 데랑 Jean-Arnault Dérens 저서로 최근 로렌 게슬랭과 함께 쓴 <쿠르드인들의 나라 여행>(Cartouche·파리·2010)이 있다.

번역 / 조은섭 chosub@ilemonde.com

(1) 1992년 6월 27일∼7월 7일 슬로베니아에서는 10일간의 짧은 전쟁이 발발했다.
(2) 이탈리아의 슬로베니아계 소수민족은 오랜 기간 이탈리아와 유고슬라비아 간 분쟁 지역인 프리울과 트리에스테에 주로 거주하고 있다. 오스트리아의 슬로베니아계 소수민족은 주로 오스트리아 극우당의 영지인 카린티아에 거주하고 있다.
(3) 2009년 9월 양국 간 협정으로 중재위원회가 창설됐다.
(4) 2008년 핀란드 TV의 추적 보도로 사건이 세상에 알려졌다.
(5) ‘옛 유고슬라비아 전쟁에서의 무기 밀매’, http://balkans.courriers.info, 2012년 1월 12일.
(6) ‘슬로베니아의 민족·민속 축제와 이데올로기 투쟁’, http://balkans.courriers.info, 2012년 6월 29일.
(7) 슬로베니아 헌법은 야당에 총리에 대한 불신임 투표를 허락지 않기 때문에, 약간의 술수를 쓰면 소수당 정부는 꽤 오랫동안 정권을 유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