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사)관의 재정립을 제언한다

Corée

2013-03-12     주대환

근래에 한국의 진보 진영에 대해 내외에서 여러 가지 반성과 비판이 나온다. 필자는 진작부터 한국의 진보가 '후진국형 진보'에 머물러 있다고 비판해왔다. '후진국형 진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식민지 종속국 시절의 민족주의를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식민지 종속국에서는 자립경제와 외세에 의존하지 않는 자주적 민주국가의 확립이 시급한 과제가 된다. 그래서 모든 종류의 진보사상을 가진 지식인과 청년들은 하나같이 '민족민주운동'에 동참하는 것이다. 사회민주주의 같은 중도좌파는 말할 것도 없고 공산주의, 심지어 무정부주의자도 마찬가지다. 예컨대 공산주의운동에는 이미 1930년대부터 식민지 종속국에서는 민족해방 투쟁을 먼저 전개하라는 교리가 확립돼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지금까지 공산주의운동은 사실상 민족주의운동이었고, 독립운동과 민족해방 투쟁에서 주도권을 쥐는 데 몰두해왔다.

평등 가치는 대한민국 역사 속에 있다

그러면 이미 세계 굴지의 산업국가이며, 민주화도 이뤄 명실상부한 선진국 반열에 올라선 한국에서 진보는 왜 여전히 민족민주운동 시절의 습관을 버리지 못하는가? 그것은 한국에서 자본주의 발전이 너무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그에 따라 민주화도 너무(?) 빨리 진행돼, 그런 사태가 일어나기 전에 청년이던 사람들이 아직 팔팔한 장년이라는 데 문제가 있다. 비근한 예를 들면 1954년, 한국전쟁이 끝난 다음해에 태어난 필자는 가난한 나라 대한민국의 1950년대에 유년기를 보냈지만 아직 한국 나이로 육십에 지나지 않는다. 요즘처럼 고령화가 진행된다면 필자의 동년배 대다수는 앞으로 20년이나 한국 사회에 상당한 발언권을 가진 세대로 남을 것이다. 이들의 관념 속에 진보·보수의 대립 구도는 여전히 이미 청년기에 형성된 그것이다. 그들에게, 특히 그들 가운데 진보 진영에 속한 이들에게 현재의, 그리고 앞으로의 대한민국은 상당히 낯선 것이다. 그들이 현재와 미래에서 계속 '진보 인사'로 살기 위해서는 한정된 의미의 '사상혁명'이 필요한지 모르겠다. 그 사상혁명의 핵심에는 바로 대한민국관(大韓民國觀) 또는 대한민국사관(大韓民國史觀)의 혁신이 있다.

미래는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미래의 씨앗은 과거 속에 있다. 고대 중국 사람들이 자주 요순시대를 말한 것은 하늘에 떠 있는 환상이 아니라 땅에 근거를 가진 미래를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요순시대는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며칠 전 취임사에서 230여 년 전의 미국독립선언서를 인용해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됐다'는 자명한 진리가 여전히 우리를 인도하는 별"이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중산층의 나라'라는 건국 이래 미국의 정체성을 상기했다. 그래서 <워싱턴포스트>는 "오바마는 이번 연설에서 미국의 기원과 현재 당면한 현안들을 직접 연결하면서 미국의 미래에 대한 대담한 진보적 청사진을 제시했다"고 평했다.

주나라의 예와 악은 원래 존재하기도 했지만, 공자에 의해 재발견됐다. 우리가 말하는 어떤 위대한 가치라도 원래 대한민국 속에 유전자로서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것을 만들어낼 수는 없다. 우리가 '평등'을 말하려면 평등이 이미 대한민국의 역사에 존재했음을 증명해야 한다. 미래는 과거의 회귀이고 미래는 과거에 근거를 가지고 있다. 희망은 현실에서 근거를 가져야만 관념의 유희로부터 벗어난다. 마찬가지로 선지자들이 솔로몬과 다윗의 나라를 말한 것은 희년(禧年)의 율법이 지켜지는 미래를 말하기 위해서였다. 대한민국의 건국은 희년의 율법이 지켜진 인류 역사에서 희귀한 사건이었다.

경제발전의 발원지는 토지개혁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중국의 공산화)과 북한의 농지개혁 압력하에서 미군정이 토지개혁의 불가피성을 인정하고 이를 건국의 주역들에게 건의(혹은 지시)했다. 그리고 토지개혁은 독립운동 시절부터 대부분의 좌우 독립운동가들의 합의 사항이기도 했다. 이승만은 토지개혁을 방해하는 한민당을 누르기 위해 조봉암을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 등용했다. 일찍이 자본가로 변신한 한민당의 리더 김성수는 지주 출신이지만 토지개혁의 불가피성이라는 대세를 인지하고 이를 방조했다. 그리하여 평년작 기준으로 한 해 소출의 3할(이전의 소작료에 비하면 휠씬 낮다)을 5년에 걸쳐 지가로 상환하는 조건으로 농지를 분배하니 어떤 농민도 지가 상환 부담 때문에 자기에게 분배된 농지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 결과, 전강수 교수에 따르면, 1960년까지 토지 소유의 평등지수는 대한민국이 세계 제일이었다. 일본과 대만이 근접했지만 한국이 가장 평등했고, 아르헨티나·브라질 등 중남미의 대다수 나라들과 필리핀은 매우 불평등했다. 1960년 이후 40년 동안의 경제성장률은 거의 정확하게 1960년의 토지 소유 평등지수와 정비례했다.

이런 연구에 힘입어 필자는 2008년 <한국 사회와 좌파의 재정립>이라는 책에서 "토지개혁으로 조그만 땅뙈기를 갖게 된 수많은 자영 농민들의 자발적 중노동과 창의력이, 그 말릴 수 없는 교육열이 오늘날 대한민국의 자본주의 경제발전의 기적을 만든 에너지의 원천"이라고 주장했다. 경제적 평등에 더해 사회·문화적 평등까지 이뤄졌으니 그 대가는 엄청났다. 그것은 인구의 10분의 1이 사망하고 수백만 명이 고향을 잃고 이산가족이 되는 동족상잔의 대학살 전쟁이었다.

이 전쟁이 끝날 때쯤에는 전 국민이 양반이 되었다. 아니 서로 반상(班常)을 물을 처지가 아니었고 살아남은 것을 천만다행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조선 말기에 이미 양반이 많이 늘고, 식민지 시기를 거치면서 반상의 구별이 희미해진 위에, 농지개혁과 한국전쟁은 시골 구석의 상민은 물론이고 천민까지 다 양반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전 국민이 양반인 나라

1950년대에는 전쟁으로 불탄 모든 가문의 족보들이 새롭게 편집되고 기왕이면 왕족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이 많아서 전주 이씨의 수가 가장 많이 불어났다는 이야기도 있다. 물론 박씨나 김씨도 신라 또는 가야의 왕족이다. 그렇다면 국민의 절반은 왕족(왕후(王侯)의 후손), 절반은 귀족(장상(將相)의 후예)인 나라가 탄생한 것이다. 중인, 상민, 노비, 백정의 후손은 아무도 없다.

대한민국의 건국이라는 사건을 누구의 눈으로 바라볼 것인가? 새롭게 양반이 된 노비의 후손이나 대대로 소작농이었다가 마침내 자영농으로서 새 나라의 국민이 된 사람의 눈으로 바라보면 대한민국의 건국은 기적이다. 홍길동의 눈으로 바라보면 홍길동의 꿈은 마침내 이루어지고, 대한민국은 바로 '율도국'이 아닌가? (소외된 독립운동가 후손의 눈으로 바라보면 친일파와 기회주의자들이 득세한 나라이지만 말이다.)

흔히 산업화·민주화가 대한민국의 기적이라고 하지만 사실 더 큰 기적은 평등한 자영농의 나라 대한민국의 탄생이었다. 대한민국은 아무도 기획·의도하지 않고 오로지 역사의 간지(奸智)가 만든, 세계사의 격동과 제2차 세계대전의 부산물에 불과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기적이다.

중국과 북한의 공산화가 결정적 압력으로 작용해 예방 혁명으로서 토지개혁을 미군정이 서둘렀다. 하지만 중국이나 북한에서 농민에게 분배된 토지는 곧 집단농장으로 바뀌어, 중국은 덩샤오핑의 개혁에 이르기까지 수천만 명이 굶어 죽고, 북한은 오늘날까지 만성적 식량 부족에 시달리는 것과는 참으로 아이러니한 대비가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토지개혁은 30년의 시차가 나는 1979년 덩샤오핑의 개혁과 비교해야 할 사건이다.

10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정신없이 이어진 대한민국의 건국과 토지개혁, 그리고 한국전쟁은 역설적으로 세계사에서 가장 완벽한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었다. 정치와 경제, 그리고 사회문화 혁명까지 숨 가쁘게 이어진 것이다. 대한민국 건국은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가장 큰 사건이다. 위대한 나라가 탄생했다. 그러나 그 탄생 과정은 부끄럽고 참담해 차마 말할 수 없다. 그래서 대한민국의 탄생은 사생아의 탄생에 비유할 수 있다. 하지만 사생아라고 해서 좋은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공자도 사생아였다.

개인도 그러하지만 나라의 경우에도 생년월일, 사주팔자가 중요하다. 대한민국은 세계사의 진보적 민주주의 시대에 탄생했다. 반파쇼 연합전선의 승리로 끝난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시점에 태어났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래서 세계 최첨단의 바이마르헌법을 참고하고 임시정부의 건국강령과 중화민주공화국의 헌법 등을 참고해 진보적 내용의 헌법을 만들고, 보통선거권이나 여성의 참정권은 당연한 것으로 주어졌지만 실은 세계사에서 그리 늦은 편이 아니다.

인류의 위대한 발명품이라고 할 수 있는 삼권분립과 다당제, 인간에 대한 불신(不信)에 기초해 서로를 견제하게 한 정치제도를 채택하고 거기다 언론의 자유까지 확보하니, 말인즉 이승만 독재라고는 했지만 그것이 조선노동당 일당독재 위에 위치한 김일성 독재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하루도 조용할 날 없이 시끄러워 '난장판'이라는 인상을 주었지만 일사불란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급속히 활력을 잃어가는 것과는 달랐으며, 국부(國父)라고 일컫는 이승만의 독재를 하루아침에 무너뜨린 4·19 혁명도 가능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국부의 손자에게 권력이 승계돼 3대 세습까지 이뤄진 북한을 바라보면 새삼 4·19 혁명의 깊은 의미를 느낄 수 있다.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한 신익희와 조봉암은 배신자였다. 신익희는 1946년에, 조봉암은 1945년에 각각 임정계(한독당)와 공산당에서 이탈해 이승만(및 한민당)과 손잡고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했다. 그분들이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참여한 것은 목숨과 명예를 건 모험적인 대결단이었다. 나중에 뒤늦게 국회의원 선거에 참여한 사람들조차 그들의 결단을 선각자의 행동이라 인정하지 않고 두고두고 신익희와 조봉암을 변절자, 배신자라고 비난했다. 신익희는 한독당의 배신자, 조봉암은 공산당의 배신자였다. 이승만과 친일파가 세우는 단독정부 수립에 참여하다니, 그것은 명백한 배신이었다. 그래서 오늘의 우리도 단독정부 수립에 참여한 노선과 단독정부 수립에 참여하지 않은 노선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해 지지하지 않을 수 없다.

신익희와 조봉암의 제헌국회의원 선거 참여, 대한민국 건국 참여는 옳았는가, 틀렸는가? 한독당과 공산당의 눈으로 역사를 바라볼 것인가, 신익희와 조봉암의 눈으로 역사를 바라볼 것인가?

지금까지 올드레프트는 '민족주의=후진국형' 진보 사관으로, 한독당과 공산당의 시선으로 건국 전후사를 보았다. 반면 뉴레프트는 '민주주의=선진국형' 진보 사관으로, 해공(海公·신익희)과 죽산(竹山·조봉암)의 시선으로 대한민국 역사를 본다.

그리고 분명하게 인정해야 한다. 김구 중심의 역사 서술은 허무주의다. 김구·장준하 중심의 역사는 이승만·박정희 중심 역사의 허전한 부분을 메우는 장식에 지나지 않는다. 대한민국 국민은 오랫동안 현실에서는 이승만의 통치를 받아들이면서 정신적으로 부족한 부분을 김구로 메우는 이중생활을 해왔다. 체 게바라의 사진을 붙여놓고 카스트로의 통치를 받는 쿠바 사람들의 이중생활과 비슷한 것이 아닌가?

김구에게는 독자적이고 현실적인 노선과 비전이 없다. 그래서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한 신익희·조봉암 중심의 역사 서술을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독립운동사와 분리해 건국 이후의 대한민국 역사를 서술할 수밖에 없다. 주나라의 역사를 쓰면서 백이(伯夷)·숙제(叔齊)를 주인공으로 할 수는 없다.

신익희·조봉암 중심의 역사 서술은, 대한민국 건국의 주역들인 이승만·김성수·신익희·조봉암 중에서 김성수가 친일 경력 등의 이유로 전면에 나서지 않았기도 하고, 일찍 사거하면서 결국 신익희와 조봉암이 이승만의 정치적 경쟁자로 등장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신익희와 조봉암은 처음 옛 동지들과 결별했을 때는 거의 혈혈단신이었으나 시대를 앞서간 결단으로 대중의 지지를 받아 결국에는 1955년께, 즉 해방 뒤 10년 만에 이승만의 강력한 경쟁자로 부상한 것이다. 이 또한 격동의 시기에 일어난 드라마틱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신익희의 한강 유세장에 모여든 30만 인파(당시 서울시민 150만 명), 민주당의 지지 거부에도 불구하고 쏟아진 조봉암 지지 표는 드라마의 극적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더 분명하게 극적 대비를 보여주는 두 사람은 죽산과 벽초(碧初) 홍명희다. 좌익인 조봉암은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해 농림부 장관이 되고, 우익인 홍명희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에 참여해 부수상이 되었다. 모든 현실의 선택은 불편하다. 판단하고 선택해야 할 시점에 우물쭈물하다가 나중에 불평이나 늘어놓고 남 탓이나 하는 사람들과 그분들은 달랐다.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에서 어느 편을 선택할 것인가? 누가 무어라고 해도 나름의 기준으로 분명한 선택을 해서 자신의 길을 간 사람은 조봉암과 홍명희였다. 한 사람은 민주주의의 잣대, 다른 한 사람은 민족주의의 잣대로 판단했다. 그들은 소설 <광장>의 주인공 이명준과 달리 현실을 살아간 사람이었고, 무엇보다 대중과 함께한 정치인이었다. 그들은 결코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을 것이며, 언젠가는 각기 나름대로 역사의 평가를 받을 것이다. 물론 지금 우리가 보기에는 조봉암의 선택이 옳았다.

평등은 대한민국의 유전자

다시 이야기를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독립운동의 역사와 건국의 역사는 사실(史實)로서 단절됐고, 그러므로 어쩔 수 없이 구별돼야 한다. 한독당과 공산당 중심의 역사는 신익희·조봉암 중심의 역사 서술과 크게 다르다. 그것은 '올드레프트'(후진국형 진보)의 민족주의 사관과 '뉴레프트'(선진국형 진보)의 민주주의 사관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뉴레프트 대한민국(사)관으로 보면 평등은 대한민국의 본질이고 유전자다. 보수 진영에서 강조하는 자유만큼이나 중요하고 당당한 유전자다. 평등하지 않으면 대한민국이 아니다. 한국인 특유의 평등주의는 사회·경제적 뿌리가 없는 문화적 현상이 아니다.

한국인의 유별난 평등주의는 건국 당시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 만큼 '평등한 나라'로 출발했던 대한민국의 현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 평등한 사회 현실이 먼저이지 평등주의 의식이 먼저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역사와 사회 현실에서 근거를 찾아서 평등을 주장하고, 이를 통해 자유를 주장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양대 흐름으로 분별·정립해야 한다. 이렇게 사상과 정치가 양립하면 선진국형 진보와 보수로 거듭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후진국 시절 우리는 반미친북 민족주의를 '진보'라 하고 친미반공을 '보수'라고 했다. 이런 대립 구도는 2030세대에게는 지극히 낯선 것이다. 그들은 이미 선진국에서 태어난 선진국 사람들이고, 우리 같은 후진국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양극화가 급속히 진행돼 중산층이 붕괴하고 청년 실업이 그들의 목을 조여오는 등 발전한 자본주의 나라들의 사회문제가 터져나오는, 곧 계급사회로 진입할 것 같은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런데 후진국 사람들이 감히 선진국 사람을 가르치려 하니 대화가 잘 안 되는 것이다. 그들의 정서와 고민은 다른 데 있고, 그들의 정서는 후진국 사람들과 많이 다르다. 그들은 집안에서 부모와도 대화가 되지 않고 '이상한 소리'를 하는 486 정치인들에게도 정서적 거리감을 느끼고 대안으로 안철수를 발견한 것이 아닐까?

문제는 글로벌 스탠더드의 진보와 보수, 사회·경제 정책의 차이로 구별되고 대립하고 타협하는 좌우가 필요하고 가능한 지점까지 한국 사회가 발전하고 한국 자본주의가 발전했다는 사실이고, 후진국의 아이로 태어난 우리 5060세대는 이제 선진국 사람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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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대환 사회민주주의연대 공동대표.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정책협력위원, 청년연합 36.5 자문위원. 전 민주노동당 정책위의장(2004). 저서로 <대한민국을 사색하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