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제프 라칭거 추기경의 십자군 전쟁

교황 베네딕토 16세

2013-03-12     모리스 르무안

베네딕토 16세의 사임을 두고, "용기와 위엄을 보이며 교황직을 떠나는 교황이야말로 현대화에 걸맞는다"는 어조가 단연 지배적이다. 그러나 전직 추기경인 요제프 라칭거(베네딕토 16세의 본명)가 남긴 흔적은 시대에 역행하는 모습일 뿐이다.

1960년대 남미대륙 내 진보주의 가톨릭 세력의 대표적 인물로 꼽히는 에우데르 페소아 카마라 브라질 헤시피 대주교는 1960년대 분위기에 대해 유명한 말을 남겼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나눠주면 나보고 성인이라 하더군요. 그런데 이들이 왜 가난하느냐고 그 이유를 물으면 졸지에 공산당으로 취급당하더군요." 가난, 문맹, 소외 속에 남겨진 수천만 명의 사람들을 보며 많은 기독교인과 교계 내 일부 성직자들은 극단적 성향을 띠게 되었다. 요한 23세가 교황으로 있을 때 내건 현대화(Aggiornamento), 특히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65) 이후 1967년 3월 반포된 '민족들의 발전' 회칙은 브라질 출신 진보주의 성직자들에게 로마 교황청의 격려가 된 셈이다.

교리심판관 출신의 '이념 수장'

교황 바오로 6세 주재 아래, 1968년 8월 26일부터 9월 6일까지 콜롬비아 메데인에서 개최된 제2차 남미 주교단회의 첫 회의석상에서 페루 출신의 젊은 신학자 구스타보 구티에레스는 '발전에 관한 신학'이라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이 견해는 진척을 보였고, 최종 보고서는 남미대륙이 '신식민주의', '금전적 이익만 앞세우는 국제적 제국주의', '내적 식민주의'의 희생양임을 인정하면서, '대담하고, 뿌리까지 혁신적인 긴급한 변혁'의 필요성을 인정했다.(1) 이런 사상의 표명은 '해방신학'의 탄생을 알리는 것이었다. 해방신학의 주축이 되는 사상은 복음을 전하는 동시에 개개인의 죄악 이외에 집단적이고 구조적인 죄악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다. 즉, 사회·경제 개발에 따라 셀 수 없이 많은 '형제·자매들'이 죽음과 가난, 고통에 처하게 된다는 것이다. 일단의 성직자들이 농촌 지역과 극빈 지역, 저소득층 지역에서 활동을 펴면서, 정치적으로 빈곤층 편에 서게 되었다.

반면, 통상 무뚝뚝하기 그지없는 보수주의 주교들의 표정은 한층 더 어두워졌다. 진보 성향을 거부하는 움직임은 세 나라에서 두드러졌다. 군부체제하의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그리고 콜롬비아이다. 특히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고위 성직자들은 이 새로운 신조에 전혀 동조하지 않았다. 따라서 콜롬비아 메데인 주교단회의에서 빼앗긴 고지를 재정복하려는 시도에 콜롬비아 출신 알폰소 로페스 트루히요가 앞장선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1972년 11월 남미대륙 주교단회의 사무총장직에 임명되면서 보고타 보좌주교인 그의 역할은 한층 커졌고, 이후 1983년까지 주교단 회장직을 역임했다. 1973년부터 남미 주교단은 교회 내 '마르크스주의의 침투'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해방신학자들이 마르크스주의 이론 중 그들이 보기에 합당하다고 판단되는 부분만 받아들였다고 재차 강조했음에도 말이다. 예를 들어 역사의 주체로서 민족 개념, 일부 사회·경제적 분석 요소, 지배 이념의 기능, 사회 분쟁의 현실(2) 말이다. 몬시뇰(고위 성직자를 일컫는 명예 칭호) 트루히요는 그럼에도 해방신학자들을 쓰러뜨리려 애썼고, 곧 바티칸 교황청이라는 든든한 지원군을 얻게 된다.

바오로 6세 서거 후, 폴란드 출신의 카롤 유제프 보이티와가 1978년 10월 16일 요한 바오로 2세로 교황에 선출되었고, 멕시코 푸에블라에서 개최된 제3차 남미대륙 주교단회의를 주재했다. 당시 남미대륙은 4개국을 제외한 모든 국가가 군부체제하에 있었다. 주교들이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에 대한 입장을 확고히 한 반면, 새로운 교황은 남미 교회가 처해 있던 긴장된 상황을 두고 어떠한 태도도 표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요한 바오로 2세는 독재체제를 비판하는 태도를 삼갔다. 동구권 국가에서 겪은 개인적 경험으로 인해 철저하게 반공산주의자인 요한 바오로 2세는 사태를 지나치게 단순화해 해석했고, 1981년 개인적 친분을 쌓은 독일 신학자를 교황청으로 불러들인다. 그가 바로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이다. 그는 옛 검사성(Inquisition)을 계승한 교황청 신앙교리성(Congregatio pro Doctrina Fidei)의 장관이 된다.

현장 경력이라고는 뮌헨에서 보낸 1년간의 보좌신부직이 전부던 그는 새롭게 '이념적 수장'으로 떠오르며, 1983년 신앙교리성에 합류한 몬시뇰 트루히요의 든든한 지지자가 된다. 냉전 시기 니카라과가 일종의 '폴란드 모델'을 따르게 되자, 가톨릭 교계에는 마르크스주의만큼이나 가톨릭 색채가 짙은 산디니스타 정권에 대해 전면적인 저항 바람이 분다. 교황청과 미국 레이건 정권 사이에는 중미 지역의 '공산주의 위협'에 맞선 투쟁을 위한 비공식 협력관계가 형성되었다.

1983년 바티칸에서 개최된 회의에서 라칭거는 "해방신학에 관한 분석 결과, 교회의 성성에 대한 근본적 위험이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3)며 해방신학을 맹렬하게 규탄했다. 또 "해방신학이 현존하는 어떤 이단에도 속하지 않기 때문에, 그 극단적인 성격이 종종 과소평가되었다"라고 비난했다. 그는 "해방신학이 세계를 계급 간 투쟁에 따라 해석하며, (중략) 따라서 '민중'이 '계급'에 반하는 개념으로 인식되고, 억압 세력이라 규정되는 모든 제도에 대치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1984년 9월 3일자 신앙교리성 첫 회람은 신랄한 표현으로 남미의 좌파 성향 성직자들을 비난했다.

그보다 앞서 라칭거는 페루 주교단에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신부의 저작에 대해 10가지 논점이 담긴 문서를 보낸 후, 구티에레스 신부의 저작물을 수정하도록 강요했다. 마치 갈릴레이가 종교재판소에서 겪은 절차에 견줄 만하다. 1985년 3월에는 브라질의 프란시스코회 소속 레오나르도 보프 신부의 저작물인 <교회, 카리스마, 권력>에 불똥이 튀었다. 보프 신부는 자신이 이끌던 출판사에서 퇴출되었고, 공식적인 입장 표명이나 교육 활동이 금지되었다. 군부체제하 20년간 지속된 검열에서 벗어난 브라질에서 이런 처벌을 내리자 그는 분개했다.(4)

해방신학을 불신한 교황

이 일방적인 결정들로 인해 비판이 쏟아지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성난 불길을 수습하려 했다. 동시에 '철갑 추기경 라칭거'는 이 불길에 통째로 기름을 부어버렸다. 1986년 4월 9일 브라질 주교단에 보내는 서한에서 요한 바오로 2세는 문제의 신학이 '시기 적절할 뿐 아니라, 유용하고 꼭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심지어 지배 이념인 자유자본주의를 비난하기까지 했다. 그래도 로마 교황청은 어떤 유산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로 메데인회의의 산물들을 파괴했고, 요한 바오로 2세와 라칭거 추기경은 가톨릭교 내 보수주의의 자리를 굳혔다. 주교직에 보수파들을 임명했고, 오푸스데이회(Opus Dei)(5) 출신들을 중용했다. 또한 그리스도 군단(Legion of Christ), 성령 쇄신운동(Charismatic Movement) 같은 보수 성향 교단들의 세력 확장을 조장했다.

지나치게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는 신부들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 브라질의 에바리스토 아른스 추기경 교구와 같은 일부 교구가 교묘하게 잘려나갔다. 1985년 로마 교황청에서 직접 파견된 몬시뇰 호세 카르도소는 정년을 맞은 카마라의 후임으로 오기가 무섭게 교구 성직자 및 세속활동가 팀과 등을 졌다.

교황청이 니카라과 내 산디니스타 정부에 동참하는 신부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던진 반면, 아르헨티나의 독재군부와 손잡은 신부들에게는 달랐다. 수차례 남미대륙을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칠레에서 피노체트 부부에게 성찬식을 행한 일은 오랫동안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히지 않을 것이다. 독재자 피노체트가 실각하고 1998년 11월 런던에 억류되었을 때, 칠레의 호르헤 메디나 추기경이 피노체트가 석방되어 즉시 산티아고로 귀국할 수 있도록 '은밀한 협상'을 벌인 것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교황청에서도 라칭거 추기경과 트루히요 추기경이 이 협상을 지지했음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한편 제2회 바티칸 공의회 접근 방식을 실천하려던 140명의 신학자들은 불행하게도 요한 바오로 2세의 교황청에서 처벌을 받았다.

베네딕토 16세가 되어 2009년 12월 5일 브라질 교구장들을 만난 자리에서, 보수파 교리의 신학자이자 원동력이던 베네딕토 16세는 해방신학에 대해 여전히 비난을 쏟아냈다. "반란, 분열, 불화, 모욕과 무질서로 대변되는 해방신학의 가시적 영향은 여전히 잔존하고 있으며, 교구 내 크나큰 활력 손실 및 큰 고통을 야기하고 있다"(6)라고 말했듯 말이다. 성부는 될 수 있어도, 회개와 용서에는 야박할 수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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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리스 르무안 Maurice Lemoine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자

번역 / 김윤형

(1) 남미 주교단회의, ‘현재 진행 중인 남미대륙 변혁 속의 교회’, 메데인 주교회의 결론, 기독교출판부(Editions du Cerf), 파리, 1992.
(2) 에튀드, 파리, n°3851-21, 1996년 7·8월호.
(3) 남미통신(DIAL), D 930, 파리,1984년 4월 19일.
(4) 1992년 7월 레오나르도 보프 신부는 속세로 환원을 요청한다.
(5) 창시자 몬시뇰 에스크리바 데 발라게르는 일련의 비난 속에 1992년 시복되었다.
(6) 바티칸 통신, 로마, 2009년 12월 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