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론과 가미카제, 거울 속 이미지

-무인정찰기에 관한 철학적 고찰

2013-04-09     그레구아르 샤마유

'미국 대통령이 자국민을 암살할 수 있을까?' 2011년 9월, 미국 태생의 예멘 알케에다 지도자 안와르 알올라키는 무인항공기를 통한 사살을 문제 삼으며 이같은 질문을 던졌다. 서양의 지도자들은 전쟁의 규칙을 완전히 뒤흔든 무인항공기 사용에는 별 거부감을 드러내지 않는 반면, 자살테러를 야만의 극치로 여긴다.

"내가 보기엔, 로봇이 자살테러 공격의 해법이다." -바트 에버렛(1)

철학자 발터 베냐민은 1930년대 중반에 이미 무기 전문가들이 상상했던 무인항공기, 즉 전파공학을 이용한 원격조종 비행기에 대해 성찰했다. 이는 그가 '제2차 기술'이라고 부르는 현대 산업의 특징인 전쟁 기술과 선사시대의 전쟁 예술인 '제1차 기술'의 차이를 구분하는 데 도움이 됐다. 그는 두 기술의 차이를 열등감이나 후진성의 차이라기보다는 '경향의 차이'로 봤다. "제1차 기술은 사람을 최대한 많이 가담시키고, 제2차 기술은 사람을 최대한 적게 가담시킨다. 우리가 감히 제1차 기술의 공적이라 칭할 수 있는 게 인간의 희생이라면, 제2차 기술의 공적은 전파를 통한 무인항공기의 원격조종을 예고한 일일 것이다."(2)

한쪽은 '희생 기술'이고, 다른 한쪽은 '게임 기술'이다. 한쪽은 '전면 투입'이고, 다른 한쪽은 '전면 무(無)투입'이다. 한쪽은 목숨을 건 실전이고, 다른 한쪽은 기계적 제스처의 무한한 재현성이다. "제1차 기술의 좌우명은 (돌이킬 수 없는 실수이거나 길이 남을 생명의 희생인) '단 한 번에'이다. 제2차 기술의 좌우명은 (자신의 경험을 끊임없이 변화시키며 실수를 고쳐나가는 게 목적인) '한 번은 아무것도 아니다'이다."(3) 가미카제 혹은 자살테러 행위자 쪽은 단 한 번의 폭발로 자신을 희생시키는 반면, 무인항공기 쪽은 마치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미사일을 반복적으로 발사한다.

가미카제는 전투 조종사의 몸과 무기(비행기)의 혼연일체를 요하는 반면, 무인항공기는 둘의 전면적인 분리를 보장한다. 가미카제는 내 몸이 무기이고, 무인항공기는 내 몸이 빠진 무기이다. 전자는 행위자의 죽음을 요하지만, 후자는 행위자의 죽음을 절대적으로 배제한다. 가미카제는 사망이 확실시되는 존재고, 무인항공기의 조종사는 사망이 불가능한 존재다. 이런 의미에서 이들은 죽음에 노출되는 스펙트럼에서 상반된 두 축을 상징한다. 두 축 사이엔 죽음을 불사한 전통적인 전투병들이 있다.

우리가 말하는 '자살폭탄 테러'의 반의어는 무엇일까? 자신의 생명을 절대로 노출시키지 않고 폭발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자들을 지칭하는 표현은 없다. 이들은 사람을 죽이기 위해 자신이 죽을 필요만 없는 게 아니라, 사람을 죽이면서도 절대로 죽임을 당할 수 없는 자들이다.

가미카제와 무인항공기의 진화 도식과 달리, 베냐민은 사실 이를 깨는 주장을 한다. 희생 무기와 자기방어 무기인 가미카제와 무인항공기가 선형적 연대기를 따르는 방식, 즉 선사시대의 역사처럼 한쪽이 다른 쪽을 축출하는 방식으로 서로를 계승한 게 아니라고 주장한다. 반대로 이 둘은 서로 동반자처럼 등장해, 상반된 두 전술처럼 역사적으로 대칭을 이뤘다.

자살테러와 유령테러

1930년대 중반, 미국 무선 전기회사(RCA)의 엔지니어 블라디미르 즈보리킨은 일본군에 관한 한 기사를 읽고 화들짝 놀랐다. 그는 기사를 통해 일본인들이 항공기 자살테러를 위한 조종사 편대 양성을 시도한 것을 알게 됐다. 뜻밖의 비극이 진주만에 닥치기 오래전부터, 즈보리킨은 가미카제의 위협이 미칠 엄청난 파장을 감지했다. "물론 이같은 방식의 효율성이 아직 검증되지 않았지만, 만약 이런 군사 심리 훈련이 가능하다면 이 '무기'(가미카제)는 가장 무서운 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 방식을 미국에 도입하기 힘들기 때문에, 이 문제를 타개하려면 우리의 기술 우위에 의존해야 한다."(4) 우리는 당시 이미 미국에 공중어뢰에 사용할 수 있는 '무선 조종 비행기' 시제품을 납품했다. 하지만 문제는 이 무선 조종기가 장님이었다. "이 기기가 기기를 조종하는 기지국의 시야에서 벗어나는 순간 그 효용성을 상실했다. 일본인들은 당연히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았다." 이들의 해답은 가미카제였다. 왜냐하면 죽을 각오를 한 눈 달린 조종사들이 목표 지점까지 무기(공중어뢰)를 조종해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RCA에서도 텔레비전 발명의 선구자 중 한 명인 즈보리킨 또한 그 해답을 찾았다. "자살테러 조종사가 거두는 정도의 성과를 내려면 어뢰에 전자센서의 눈을 갖춘 무선 조종기를 장착하는 방식을 도입하면 된다."(5) 그러면 기기 조종자가 목표물을 끝까지 볼 수 있어, 무기를 눈으로 보면서 타격 지점까지 조종해서 갈 수 있게 된다.

조종사는 적의 항공 방어선 밖으로 피신하고, 비행기 동체 속엔 조종사의 전자 망막만 있다. 즈보리킨은 훗날 텔레비전과 원격조종 항공기의 결합 원리와 함께, 스마트 폭탄과 무장 무인항공기가 될 공식도 알아낸다.

즈보리킨의 이론이 중요한 것은 그의 초기 이론 공식 중 하나가 반(反)가미카제인 무인항공기의 효시가 됐기 때문이다. 특히 논리적인 부문, 즉 무인항공기에 대한 정의 부문뿐만 아니라 전술적 계획에서 그랬다. 요컨대 무인항공기는 가미카제의 '해독제'이자 '쌍둥이 별'이다. 무인항공기와 가미카제는 '목표 지점까지 폭탄을 조종한다'는, 같은 문제를 해결하는 데 실용성을 고려해 상반된 선택을 한다. 일본인들이 희생정신의 우위를 통해 실현시키려 한 것을 미국인들은 장비 기술의 우위를 통해 달성하려 했다. 전자는 심리적 훈련으로 목적을 달성하고, 후자는 순전히 기술적 절차로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다. 무인항공기의 개념이 그 기원을 삶과 죽음의 윤리적·기술적 경제 속에 두고, 기술의 힘이 청구 불가능한 희생 형태(가미카제)의 뒤를 이었다. 그래서 한쪽엔 대의를 위해 희생할 준비가 된 용감무쌍한 전사들이 있고, 다른 한쪽엔 유령의 무기만 있게 될 것이다.

현재 우리는 가미카제와 원격조종의 대립, 즉 '자살테러'와 '유령테러'를 목도한다. 이같은 극한 대립은 우선 경제적 대립이다. 이것은 자본과 기술을 지닌 사람들과 싸울 무기라곤 몸밖에 없는 사람들을 대립시킨다. 그럼에도 양쪽의 장비와 전술은 윤리 시스템, 한쪽의 영웅적인 희생 윤리와 다른 쪽의 자기 목숨 방어 윤리에 잘 들어맞는다.

무인항공기와 가미카제는 도덕적 감수성의 상반된 두 동기를 대변하듯 맞서고 있다. 거울 속에서 대면하는 두 기풍은 서로의 이면이자 악몽이다. 적어도 겉으로 드러나는 이들 사이의 차이에서 쟁점은 자신과 타인의 죽음, 자신의 희생이나 자기 목숨 방어, 위험과 용기, 취약성과 파괴성과 관련된 개념에 있다. 죽음과 관련된 정치적·정서적 양쪽의 경제, 즉 죽이는 쪽과 죽음에 노출되는 쪽으로 나뉜다.

<워싱턴포스트>의 칼럼니스트 리처드 코언은 이에 대한 소견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탈레반 전사들은 단지 목숨만 초개처럼 여기는 게 아니라, 자신의 목숨을 자살테러에 바친다. 미국의 가미카제는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6) 그는 덧붙여 말한다. "미국의 가미카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자살테러범 행위자에게 열광하지 않는다. 이들의 자녀가 텔레비전 카메라 앞에서 으스대는 동안, 다른 아이들이 한 가장의 죽음에 질투를 느끼게 하진 않는다. 그것이 우리를 당혹스럽게 한다. 그것이 우리를 소름 끼치게 한다. 정말이지 혐오스럽다. 어쩌면 우리가 생명을 너무 소중하게 여기는 것일 수도 있다."(7)

따라서 전투에서 죽을 준비가 돼 있고, 죽음으로써 추앙받던 게 '당혹스럽고 소름 끼치고 혐오스러운 것'이 됐다. 그 자리에서 철거된 전쟁 희생자의 옛 우상은 전리품이 되어 도덕적 공포의 절정, 최악의 상징물로 전락됐다. 희생을 몰이해하고 비천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희생이 죽음을 경시하는 것과 연관돼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채, 즉각적으로 희생을 생명 경시로 받아들인다. 따라서 사람들이 생명에 대한 애정 윤리를 제안하고, 무인항공기는 분명 이 제안에 대한 완성의 표현이다.

겉멋이 잔뜩 든 미국은 생명을 너무 소중하게 여기는 나머지 간혹 생명을 과도하게 보호한다. 만약 자기 자신에 대한 배려가 이기심의 발로라 의심 사지만 않는다면 과도한 사랑은 용납될 수 있다. 왜냐하면 미국이 정말 소중히 여기는 것은 보편적인 생명이 아니라 미국인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누가 진짜 겁쟁이인가?

이스라엘 가자지구의 (군사) 정신 건강 프로그램 담당 소장 에야드 엘사자르는 인터뷰 기자가 '팔레스타인들은 인명뿐만 아니라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들의 목숨조차 초개처럼 여긴다는 게 사실인가?'라고 묻자, 이렇게 반문했다. "만약 당신이 적의 인간성을 믿지 않는다면 어떻게 당신 스스로의 인간성을 믿을 수 있겠는가?"(8)

목숨을 앗아갈 위험에 노출되지 않고 사람을 죽이든, 희생자와 운명을 같이하며 사람을 죽이든, 둘 다 공포를 공포로 맞서는 것인데 어떤 면에서 전자가 후자보다 덜 끔찍하다는 말인가? 어떤 면에서 아무런 위험 없이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무기가 그 반대보다 덜 혐오스럽단 말인가? 자클린 로즈는 다음과 같은 사실에 놀란다. "서양의 지도자들은 하늘에서 클러스터 폭탄을 투하하는 것을 덜 혐오스럽게 간주할 뿐만 아니라 도덕적 우위로 간주한다." 그녀는 "희생자와 함께 목숨을 바치는 명분이 목숨을 지키며 사람을 죽이는 일보다 훨씬 큰 범죄로 간주돼야 한다는 게 왠지 꺼림칙하다"고 말한다.(9) 이어 그녀는 인류학자 휴 거스터슨의 말을 인용했다. "전쟁터를 누비고 다닌 인류학자는 중동의 많은 사람들이 리처드 코언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무인항공기를 자살테러처럼 느낀다고 지적했다. 대부분의 중동 사람들은 무인항공기를 겁쟁이로 간주한다. 왜냐하면 무인항공기 조종사가 미국 네바다주에 위치한 에어컨이 설치된 누에고치 속 안전지대에 머물며 중동에서 사람들을 죽이고 있기 때문에, 그 자신은 자기가 공격하는 사람들로부터 절대로 죽임을 당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10)

미국 홉킨스대학의 인류학 교수 탈랄 아사드는 "서양 사회에서 자살테러가 공포를 자아내는 것은 자살테러 행위자가 자신의 행위를 통해 응당 치러야 할 대가 메커니즘을 원천봉쇄하기 때문"이란 가설을 제기한다. 테러 행위자가 희생자와 함께 목숨을 같이하고, 저지른 행위 속에 범죄와 징벌을 한데 응고시키며, 자신의 처벌만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법부의 기본 소임인 형사재판마저 작동 불능으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란 것이다. 그는 영원히 자신의 죗값을 치를 수 없게 된다.

무인항공기를 통해 죽음을 조종하겠다는 생각 또한 자살테러와 유사한 면이 분명 있다. 거스터슨은 말한다. "무인항공기 조종사 또한 거울에 비친 자살테러의 이미지란 점에서, 그가 비록 반대의 노선을 걷고 있지만 그 역시 우리가 생각하는 전통적인 전투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11)

-이 기사는 4월 24일 <Fabrique>에서 출간 예정인 샤마유의 저서 <무인항공기 이론>에서 발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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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레구아르 샤마유 Grégoire Chamayou 철학자, 프랑스국립과학원(CNRS) 연구원

번역 / 조은섭 chosub@hanmail.net 파리7대학 불문학 박사로 알리앙스 프랑세즈에서 강의 중. 역서로 <착각>(2004) 등이 있다.

(1) Cité par Peter W. Singer, <Wired For War: The Robotics Revolution and Conflict in the 21st Century>, Penguin, New York, 2009.
(2) 발터 베냐민, <기계를 도입한 재생산 시대의 예술 작품>, Ecrits français, Gallimard, Paris, 1991.
(3) Ibid.
(4) Vladimir K. Zworykin, <Flying Torpedo with an Electric Eye>, 1934. Dans Arthur F. Van Dyck, Robert S. Burnap, Edward T. Dickey et George M.K. Baker (sous la dir. de), Television, vol. IV, RCA, Princeton, 1947.
(5) Ibid.
(6) Richard Cohen, <Obama needs more than personality to win in Afghanistan>, The Washington Post, 2009년 10월 6일.
(7) Richard Cohen, <Is the Afghanistan surge worth the lives that will be lost?>, The Washington Post, 2009년 12월 8일.
(8) <Suicide bombers, dignity, despair and the need for hope. Inteview with Eyad El Sarraj>, Journal of Palestine Studies, vol.31, n°4, été 2002. Cité par Jacqueline Rose, <Deadly embrace>, The London Review of Books, vol.26, n°21, 2004년 11월 4일.
(9) Jacqueline Rose, ibid.
(10) Hugh Gusterson, <An American suicide bomber ?>, Bulletin of the Atomic Scientists, 2010년 1월 20일, www.thebulletin.org.
(11) Ibid.